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신재동
  • 조회 수 248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5년 9월 3일 01시 08분 등록
◎ 인용

[서장] 저 높고 아득한 산

사실 추사 사후 150년 간 그의 전기가 나오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전공자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과 예술의 어느 한 측면에서만 추사를 논해왔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p. 22)

이 점은 우리의 학문, 특히 인문학의 큰 병통이었다. 그 동안 우리 인문학자들은 선현들의 인간상 자체에 대한 고려를 이상할 정도로 배제해왔다. 비근한 예로 퇴계, 율곡, 다산 같은 분의 사상을 말할 때도 그들의 인생은 빼어버린 채 그들이 남긴 글만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논의하곤 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들이 이룩한 학자상은 오라로 전달되지도 않았고 또 그 학문적 실체를 규명하는 데도 실패하곤 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한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고뇌와 수련과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이고 초년,중년,노년의 경햐잉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예술가의 인생 역정을 배제하고 그의 예술을 논하다 보면 상투적인 '천재성의 발로'라는 말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결코 한 예술가를 올바로 평가하고 기리는 길이 될 수 없다.
(p. 23)


[제3장 학예의 연찬] – 진흥왕 순수비와 무장사비를 찾아서

그뿐만 아니라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구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읍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p. 104)

어느 시대에나 민노행 같은 당대의 기인, 고사, 일사, 이인이 있었다.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오는 정희량이나 원주에 계시던 무위당 장일순 같은 분이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이다. 이분들은 세상의 흐름을 밝게 읽고 있으나 세상이 자신을 받아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감추며 올바른 글, 올바른 사람을 만나면 잠시 자신의 모습을 비치곤 사라졌다. 이런 은일자들은 메마른 세상에 한 줌의 소금 같은 분이다.
(p. 141)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는 애당초 남북(南北)이나 귀천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누구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전집 권1, 인재설)


완당은 이 말을 중인 신분의 제자들에게 자주 하며 열심히 노력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인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세 가지 꼽고 있는데 이것은 꼭 오늘의 우리 현실에도 맞는 얘기였다.
첫째는 주석이나 외우는 폐쇠적인 교육방식, 둘째는 과거시험이라는 입시교육, 셋째는 견문의 부족이라 말했다.
(p. 170)

완당은 이처럼 당시 사람들이 어격하게 따졌던 제도적 질서, 불교의 천시와 배척 같은 사회적 통념을 훌쩍 뛰어넘어 행동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완당의 강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당시 보수적인 양반들은 완당의 이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완당은 남이 꺼리는 바를 스스럼없이 했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잘 했다"고 비방하기도 했던 것이다.
(p. 171)

완당의 장년과 중년 글은 이처럼 화려하고 장쾌하며 대단히 자신만만하고 현학적이다. 그래서 그를 무척 싫어하는 적이 자연히 생기곤 했다. 이처럼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데 질시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고 배기겠는가.
(p. 174)


[제4장 출세와 가화] – 운와몽중, 황청경해, 예당금석파안록

황초령비를 그 고장 사람들이 계곡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파묻었다는 얘기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로, 이를 간혹 시골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무지의 상징으로 말하곤 한다. 그러나 옛날 양반관료들은 못된 데가 있어서 유명한 금석문이 있는 동네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나무하러 가는 사람을 붙잡아 탁본해 오라니 힘없고 죄없는 백성이 어찌할 것인가.
외금강 삼일포에는 단서암이라고 해서 인라 화랑들이 이름을 새겨 놓고 주사를 먹여 붉은 색이 나는 글씨가 있었다. 그래서 금강산 유람온 선비들이 그 탁본을 갖고 싶어하여 걸핏하면 밭일 하는 백성을 붙잡아다 탁본을 시키니 이 역시 삼일포 동네사람들이 박살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깨진 황초령비에는 봉건사회 신분제도의 모순이 역사적 상처러 그와 같이 남아 있는 셈이다.
(p. 255)


[제5장 완당바람] – 해외묵연, 원표필결후, 예림갑을록

완당이 이와 같이 동시대 중국의 예술사조와 그 대표적 예술가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학문적.예술적 정보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는 도록이 있는 것도 전시회가 열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알 수 있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이 점을 혹자는 완당이 중국을 사모함이 커서 그랬다며 완당을 사대주의.모화주의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사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국제적 시각의 확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사실 정보력은 그 자체가 힘이다. 완당의 정보력은 자신이 알 고 있는 어느 한 채널을 통해 얻은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p. 284)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 세한도를 그리며

<세한도>소장자의 이동과정을 보면 우리는 명화의 소장처 변동과정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미술사적 내용을 이루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면 안 되는가를 ‘실사구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절감케 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구나, 세한도 같은 삶이여!
(p. 408)


[제7장 제주도 유배시절(하)] – 수선화를 노래하며

청조의 학문이 수입된 이후 박제가, 신위 같은 사람이 일으키지 못한 서법의 혁신을 완당은 어떻게 대담한 시도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앞 사람들에 비하여 완당은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에서 배태된 것이니 곧 서학(書學)의 길을 터득해 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 창의력이 합해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험준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그의 서체는 험난했던 그의 생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조정에 들어가서 높은 지위를 지키며 부귀와 안일 속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냈다면 글씨의 변화가 생겼다 할지라도 꼭 이런 형태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청명 김호석의 해석)
(p. 465)

많이 썼을 거에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그 실려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제주 유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 (동주 이용희의 해석)
(p. 466)


[제10장 과천시절] –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나는 여기서 완당의 열정과 관용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본다. 완당은 기질적으로 대단히 열정적인 분이었다. 그의 왕성한 지식욕과 창작열은 그런 기질이 가장 긍정적으로 아름답고도 위대하게 나타난 부분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박학한 지식과 그 양이 얼마였는지를 알 수 없는 서예작품이 이런 열정의 소산이다.
(p. 710)

그러나 완당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열정과 관용은 선택이 아니라 불 같을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는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이제 과천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p. 711)


◎ 소감

연구원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손에 잡지 않았을 책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어디 이 책뿐일까만...

뜨거운 한여름에 읽기에 다소 지루 했는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화인열전에 이어 저자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고전문화에 대한 애정과 그에 대한 학구열이 절절히 배어 나온다. 무엇인가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내가 가장 부러워 하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책을 읽으면서 완당에 대한 관심보다는 '유홍준'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크게 발현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굴 한번 접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어찌보면 나와는 크게 상관 없이 보이는 사람에게 옛 작품을 매개로 그토록 애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이 나같은 사람에게는 약간 신기해 보이기도 한다.

책을 읽고 나서 완당이 그토록 대단한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니 길을 걷다가 서예 작품이라도 눈에 띄면 예전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것을 글도 눈길 한번이라도 주게 되니 책이란 것이 참 묘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생을 간략하게나마 들여다보니 책을 다 읽을 무렵에는 뭔지 모를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저 책으로 들여다본 인생인데 조금 과장해 말하면 희미하게 나마 완당의 삶이 압축되어 전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억울하게 행해진 유배생활이 결과적으로 보다 원숙한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니 사람의 일대기라는 것이 정말 오묘한 것인가 보다.
그저 순간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것이 순리인 듯 싶다.

마지막으로 책에서는 완당의 친구, 제자 등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당연한 얘기지만 완당이 이룩한 업적에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단히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자시의 관심사를 가지고 한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IP *.111.251.12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