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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16일 11시 44분 등록
미즈코공양과 회사공양탑 (정진홍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삶은 즐거워야 한다. 그러나 늘 그럴 수는 없다. 삶은 그래서 견디기 힘든 짐이 된다. 아득한 때도 그랬으며 지금도 그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다. 물론 오랜 역사를 거쳐 인간의 경험이 빚고 지어낸 슬기가 삶을 훨씬 더 삶답게 마련한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문명이란 그렇게 이루어진 틀이고 문화란 그러한 모든 것을 얼 속에 담은 삶자체이다. 따라서 적어도 ‘역사의 발전’을 우리가 증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삶의 무게가 역사의 흐름을 따라 훨씬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준거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기에 갖는 불안에서 근원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두렵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 죽음이 짙은 그늘로 내 삶을 덮을 때, 가치와 의미가 혼란스럽게 나를 지배할 때, 우리는 그러하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이루는 조건이며,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겪어야 할 항존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정도의 차이라든가 질적인 다름이라든가 하는 설명으로 그 근원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은 역사의 발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야 옳다.

종교의 출현을 이러한 맥락에서 찾아보려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가피하게 두렵고 우울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의 모색이 종교의 기원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종교란 그 모색이 도달한 해답이다. 그리고 그 해답을 삶의 규범으로 삼아 살아갈 때 인간은 두려움과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답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류의 종교사는 그것이 삶의 일상을 넘어서는 어떤 실체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인식하는 그 실재를 초월‧신성‧신비‧완전 등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개념들을 통한 종교의 서술에 꽤 익숙하다. 이를테면 신이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면서 또한 내용이고 우리의 삶을 통어(統御)하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하는 설명이 그것이다.

일본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오랜 역사를 통하여 상당한 문화를 교류했고 공유했다. 그것은 두 나라가 좋은 이웃일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가까움에서 비롯한 마찰과 갈등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일본에 의해 고통을 당하기도 했으며, 마치 빨아도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얼룩처럼 일본을 우리의 의식 속에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일본은 우리에게 업(業)이고 원죄(原罪)일런지도 모르며 또한 끝내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낯섦으로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종교문화에 대한 몇가지 인상적인 소묘를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낯섦의 극복을 지향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없는데 일본에는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더 정확하다. 그것이 그들의 종교문화의 특성일 수 있을 것이고, 그 낯섦이 바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내용, 다시 말하면 서술하고 이해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 낯익게 해야 하는 과제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세 가지 주제를 설정해 보았다. 미즈코공양(水子供養)과 회사공양탑(會社供養塔), 일본종교의 이문화진출이 그것인데, 앞의 두 주제는 우리에게 없는 낯섦 때문에 선택한 것이며, 세 번째 주제는 그 사실보다도 ‘이문화진출(異文化進出)’이라고 하는 표현이 담고 있는 낯섦 때문이다.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미즈코공양(水子供養)

미즈코는 일반적으로 유산(流産)된 태아(胎兒)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미즈코공양이란 죽은 태아를 위한 제의를 뜻한다. 모든 불교사원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불교사원에서 그 광경을 볼 수 있다. 불상의 크기는 다양하지만 크기에 따라 분리‧정리되어 있는 것이라든가 그 상(像)이 한결같이 앙증스럽고 귀여운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러한 광경이 특별히 눈에 뜨이는 것은 그 작은 상을 치장한 것과 그 앞에 놓여있는 공물(供物)때문이다.

절은 그 상들을 정성스레 보살핀다. 그 일을 그들은 미즈코령에 대한 공양이라고 말한다. 가족들은 그 미즈코의 생일, 곧 그 죽음의 날에 그곳을 찾는다. 그러나 그러한 날이 아니어도 좋다. 즐겁고 슬프고 외롭고 행복한 날이어도 좋다. 아무 때라도 상관이 없다. 미즈코공양을 한 사람들에게는 미즈코령이 깃든 그 상이 그대로 자신들의 삶을 이룬다. 이러한 미즈코공양은 1970년대부터 하나의 붐을 이루면서 점차 상업화‧산업화하는데 이르렀다.

왜 미즈코공양이 시작되었고, 그 의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데 대한 논의는 아주 분분하다.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것은 미즈코공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1987년에 발표된 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미즈코공양을 하는 이유로 72.1%가 ‘공양을 하지 않으면 뒷탈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응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응답을 종합한 내용에 의하면 미즈코공양은 단순하게 ‘태어나지 못한 생명에 대한 위로’이거나 ‘상실을 보상받기 위한 제스추어’이거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윤리적 감성의 의례화’가 아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미처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아가에 대한 사랑’은 더더구나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미즈코에게 어떤 일들을 기원하고 있다. 그 기원의 내용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건강이고 그 다음으로 불행의 소멸, 집안의 무사 추구, 자녀의 행복 등이 뒤따르고 있다.

우리의 경우 무당들의 신들림의 현상 속에서 그들에게 다가와 모셔지는 신이나 영은 언제나 한맺힌 삶을 살았던 ‘살아있었던 존재’들이다. 그 몸주가 조상일 경우도 그러하고 피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일 경우도 그러하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몸주일 수 없다. 그러나 미즈코공양의 경우에는 ‘태어나지 않은 존재’,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몸주가 된다. 그 신을 내 삶을 통어하는 힘의 실체로 수용한다. 그것은 현대의 일본 종교문화가 낳은 새로운 신이다.

뒷탈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함을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신들려 풀어 나가려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일본의 역사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우리가 경험하는 한, 과거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 의식 속에는 구조적으로 과거에 대한 참회가 요청될 수 있는 여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지 미래를 향해 신들려 있기 때문이다. 조상숭배와 대칭되는 ‘후손숭배’는 일본의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본다면 충분히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우리와 다르다.

그 미래는 미즈코공양의 현상이 지닌 구조에 의하면, 사뭇 가능성으로 가득하게 전개되는 그러한 지평이 아니다. 꿈과 희망이 구체화되는 찬란한 공간이 아니다. 그 달려감은 창조적이라기보다 쫓기듯 앞으로 밀려 나아가면서 부닥치는 미래에서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뒷탈이 두려운 도주인 것이다. 미즈코공양의 현상에 근거하는 한, 일본인의 미래와 우리의 미래는 같은 색깔을 지니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일본의 그러한 다름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2. 회사공양탑(會社供養塔)

우리는 흔히 일본의 ‘가업(家業)의 전승’을 부럽게 이야기 한다. 이러한 전통은 메이지(明治) 이후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확립이 남겨놓은 유산이다. 전승은 경험의 축적을 의미한다. 일본의 경우, 가업의 완성은 조상의 묘를 일구는 것으로 그 극에 이른다. 적어도 근세의 묘지문화를 준거로 할 때 일본의 경우 가업과 가산(家産)의 계승단위인 이에(家)의 완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일본의 현대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에의 붕괴, 또는 탈이에화(脫家化)로 묘사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가업의 전승을 확인할 수 있고 가묘의 현존을 만날 수 있다. 새로운 묘의 출현은 새로운 이에의 출현과 다르지 않다. 그 새로운 이에는 혈연을 형성원리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전의 이에와 다르다.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인간관계의 그물이 혈연, 지연, 학연에서 혈연을 대체한 사연(社緣)에 의하여 재구성된 것이 일본사회의 현대적 변모라는 관찰은 결코 무의미한 지적이 아니다. 그러나 회사묘의 건립이 전통적인 이에를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회사묘의 의미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근대화와 접목된 당시의 전통사회는 에도시대(江戶時代)의 한(藩: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일본의 대기업이 서구적인 것을 모형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근대적 변형이라고 하는 설명은 이미 낯선 주장이 아니다. 그 주장에 의하면 기업이라고 하는 조직의 경영에 필요한 자질, 예를 들면 책임감, 지도력, 전략적 사고능력, 타협성 등은 무사(武士)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가신단(家臣團)을 구성하는 료슈(領主), 가로(家老), 반시(藩士)의 구조는 사장, 중역, 회사원의 구조와 동일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회사에의 귀속감에서 우러나는 희생적 성실성과 한에 대한 충성이 다를 까닭이 없다.

결국 현대 일본사회의 ‘샐러리 맨’은 가장 고전적인 일본적 의미에서의 전사(戰士)이며, 회사공양탑은 바로 그러한 기업전사의 묘인 것이다. 물론 메이지 이후에 무사는 시소쿠(士族)가 되면서 하나의 계층으로써의 현존을 상실했다. 그러나 새롭게 대두한 ‘샐러리 맨’은 하나의 층을 형성하면서 그 무사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붓코샤의 묘라고 하는 사실이다. 재직 중 순직한 자만 그 영원한 안식의 자리에 잠들 수 있다. 따라서 전몰장병의 묘와 다르지 않다. 다만 임원(役員)만이 은퇴 후에 그곳에 갈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천수를 누리는 군인들은 그곳에 묻히지 못한다. 그러나 장성들은 언제 어떻게 죽더라도 그곳에서 영민한다. 회사공양탑은 철저하게 군인묘지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회사공양탑은 회사를 위한 희생을 영광스러운 삶의 종국으로 승인하는 자의식을 고양하는 신성한 상징이다. 그곳에 안치되는 것은 이에의 완성이자 삶자체의 완성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은 두렵고 우울한 삶을 견디어 내도록 하는 꿈의 실체이고 희망의 실현이다. 회사는 단순한 무사의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공동체(神聖共同體)이다. 그 안에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은 시성(諡聖)의 영광을 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카노산에 있는 회사공양탑 중에서 거의 20개가 넘는 경우 그 옆에는 아주 낯선 석물(石物)들이 세워져 있다. 우체통 투입구처럼 작은 구명이 있는 그 돌로 된 통에는 ‘교메이시슈(명함을 받는 곳)’라고 쓰여 있다. 회사공양탑을 참배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자기의 명함을 넣으며, 회사는 정기적으로 이를 수거해 일일이 고맙다는 답서를 보낸다. 영적 존재 또는 새로운 신, 곧 회사신과의 만남은 이처럼 자유롭고 현대적이다. ‘회사종교’라고 명명해야 적합할 이러한 현상은 창업주의 신격화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일본인들이 흔히 일컫는 ‘하이테크 사회’라는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하이테크가 그러한 영적인 구조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일본의 기업인은 잘 훈련된 전사(戰士), 스스로 즐겨 희생물이 될 수 있는 신도, 그러한 제물을 자기 종교의 번영을 위해 바치는 사제(司祭),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이루어진 신성공동체의 신(神)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이웃과 살고 있다.

3. 일본종교의 이문화진출(異文化進出)

사실상 어느 종교도, 적어도 그것을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종교개념의 범주에서 살펴본다면 두렵고 우울한 삶에 대한 해답을 자처하지 않는 경우란 없다. 따라서 그 종교의 현존은 삶의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기여할 수 있을 만큼의 이른바 진리성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결국 모든 종교는 만약 진리라는 것을 준거로 말한다면 한결같이 참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의 확산이나 전승을 결정하지는 않으며, 어느 종교는 그러한 자기확산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는가 하면 어느 종교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 종교의 상황적 적합성의 능력’이 그 원인의 하나임을 증명해준다.

종교도 상품이다. 즉, 소비시장에 진열된 상품과 다르지 않다. 고객이 없으면 종교는 삶의 현장에서 사라진다. 역사는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종교가 없어서 신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도가 없어서 종교가 사라지는 것이다. 종교유적의 거대한 폐허가 이를 실증한다. 현대인은 고객으로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자신의 종교를 선택하고 교체하고 포기하고 때로는 무관심하다. 이때 고객이 상품을 선택하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적합성이다.

전통종교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일본종교는 없다. 그들이 가꾸어 꽃피웠다는 불교의 원산지는 일본이 아니다. 유교적 관행의 전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한자문화권이 공유하고 있는 전통이라고 해도 좋은 그러한 것이다. 일본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신도(神道)’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적인, 너무나 일본적인’ 것이다. 국가신도의 출현을 계기로 그 종교는 스스로 일본의 울 안에 자기를 유폐시켰다. 그렇다면 국제사회라는 세계 문화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일본제 종교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논리가 무의미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종교는 일본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해외진출에서 성공적이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본종교의 포교나 선교로 표현하지 않는다. 각 종교의 교단적 용어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들은 이러한 해외확장을 ‘이문화진출’이라고 부른다. 고객을 향해 달려가는 상인의 의식이 종교문화의 현대적 감성 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 주종을 이루는 상품은 그들 스스로 일컫는 신종교(新宗敎)들이며 이를 위해 선택한 진출원칙은 다름 아닌 적합성이다.

일본 신종교의 이문화진출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진출 권역은 북미와 남미에 흩어져 있던 일본계 공동체(Ethnic Group)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종교의 이문화진출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비일본인을 일본종교의 다수로 확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진출영역은 가히 전세계적이다.

이문화진출의 성패를 좌우하는 우선적인 조건은 해당문화의 일본에 대한 태도와 반응, 그리고 그 시기이다. 진출과 수용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지만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진출을 위한 전략이다. 그 전략의 종교적 함축은 자기종교에 대한 헌신, 상대방에 대한 애정, 적극적인 실천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적인 사항들보다 더 구체적인 전략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관하여 일본의 종교학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성을 그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 성공적인 진출을 이룬 종교들은 한결같이 단순명쾌한 주술적인 실천을 강조한다. 합장하고 독경하고 명상하고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앉는 일 등이 주요한 신앙실천의 요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이질감을 일으킬 수 있는 복합적이고 전통지향적인 특성은 말끔히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단순한 실천을 통하여 문화적 상대주의의 벽을 극복하고, 언어적 차원에서 야기할 수 있는 의미의 분절이나 균열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단순한 실천만으로도 신비적인 경험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둘째, 실제적인 생활윤리를 강조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은 전통적인 종교들이 제도적 권위에 대한 충성을 신앙의 완성으로 설명하는 허점을 보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봉헌의 요청이 아니라 필요의 충족을 시도하는 것이다. 부부간의 문제, 자녀와 부모와의 문제, 노동의 의미와 책임에 대한 문제, 시민사회의 복지문제 등을 다루면서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비롯하는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살펴, 구체적이고 자상한 행동모형을 제시함으로써 삶의 멍에를 가볍게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렇다고 해서 위와 같은 사실들이 종교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특성인 언어적 전달의 기능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종교나 풍부한 설명의 논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진출을 이룬 종교들은 한결같이 그 설명의 논리를 이를테면 ‘문화적 교양인의 수준’에서 펴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사실을 가르쳐 지적(知的) 동의를 유도하기보다는 모두 익히 경험하고 있는 바를 정교한 언어적 담론에 담아 ‘대신 발언해 주는’ 개념과 논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문화적 흔적을 지울 수 없는 경우에도 그 이질성을 오히려 상징성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넷째,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고 하는 종교다원현상에 대하여 개방적이다. 물론 각 종교에 따라 그 정도와 양태는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교다원현상에 대한 적극적‧긍정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몇몇 종교들은 개종과 배교(背敎)의 개념을 현실적으로 무시한다. 그러한 태도는 구체적으로 당해문화권의 지배종교에 대한 존중으로 나타나는데 소오카학회의 경우는 이러한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조차 이해하는 전통 속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종교가 한국에서 행하고 있는 확장원칙은 미국에서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즉, 미국에서는 개종을 요청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에 유념하면서 우리의 포교나 선교의 양상을 살피면 일본 종교문화의 현상과 우리의 경우가 어떻게 다른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종교문화가 함축하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은 카리스마이다. 카리스마는 절대적인 귀속을 요청하면서 절대적인 안정을 보장하며, 그러한 종교문화가 쉽게 많은 사람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권위에의 의존은 인성(人性)의 본래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독선과 배타, 연민과 저주를 수반하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확산은 이기적 나르시시즘에서 머물고 만다. 때문에 종교라는 상품의 진출을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상대적으로 일본에 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지금까지 일본 종교문화에 대한 몇 가지 인상적인 소묘를 시도해 보았다. 이러한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부분을 전체화하는 오류와 자의적인 해석의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묘는 사실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는 우선 이러한 소묘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한 것이다.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비교를 위한 최선의 준거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열을 전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간의 다름을 확인하여 우리다움을 밝히려는 ‘다름과의 만남’인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일본과 더불어 사는 일이다. 그 이웃과의 관계가 창조적인 지평에서 새로워질 수 있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해야 할 우리와 일본의 운명적인 과제이다. 어느 수준에서 중단해도 좋을 그러한 과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종교문화는 그러한 과제의 수행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일에 대한 경고, 그리고 그 과제는 언제나 실현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 (교수 10인이 풀어 본) 한국과 일본 방정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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