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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1일 13시 58분 등록
* 진리란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착각이다. -니체-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책에서 캐낸 글맥 >
*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 곧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야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단지 인접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유럽문화의 호적수였고 유럽인의 마음 속 깊이 반복되어 나타난 타인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동양은 유럽이 스스로를 동양과 대조가 되는 이미지, 관념, 성격, 경험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문화적으로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갖는 언설(discourse- 직관적인 표현이 아닌 개념작용과 논리적 판단을 거친 질서 있는 표현)로서 표현하고 표상한다.

* 나의 관심은 오리엔탈리즘과 실제의 동양이 일치하느냐 않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 그 자체의 구조에서 하나의 일관성 내지 논리성을 갖고 있는가와, 나아가 동양에 관한 관념 곧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는 동양에 관한 여러 관념을 문제로 삼는다.

* 중요한 일은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에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연구에서, 어떻게 하면 타인을 억압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입장에 서서 상이한 문화나 상이한 민족을 연구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것이리라. 나의 희망은 문화적 지배의 가공할 만한 구조를 분명히 밝히고 나아가 특히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구조를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의 위험성과 유혹에 관하여 분명히 인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1부 오리엔탈리즘의 범위
1장 동양인에 대한 인식
*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오리엔탈리즘이 식민지 지배라는 사실을 추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에 앞서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었다고 하는 차원을 간과하게 된다.

* 이 책의 목적의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을 문화적인 힘의 행사의 한 형태로써 설명하고, 분석하며, 고찰하고자 하는 점에 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서양에 관한 한, 동양과 동양에 속하는 일체의 것이 바로 서양에 열등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서양의 연구에 의해 교정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가정되었다는 것만큼은 처음부터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엽에 밸푸어와 크로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오리엔탈리즘의 전통이 이미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 곧 서양이 지구 위의 지극히 광대한 부분을 문자 그대로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일정한 인식에 의해 강화되었고, 동시에 그 인식을 강화하도록 작용했다.

2장 상상의 지리와 그 표상(동양의 동양화)
* 누구든지 간에 오리엔탈리즘과 대칭적인 위치에 옥시덴탈리즘이라는 분야를 상상할 수는 없으리라.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의 경우에만 지리상의 한 분야가 학문적인 전문분야로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계시적인 사실이다.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은 선택성의 증대가 아니라 영역의 확대라고 하는 점에 있다.

* 이슬람이 공포와 황폐, 악마적인 것, 가증스러운 야만인의 무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된 것도 결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이었다. 이슬람에 관한 지속적인 통념이란, 유럽에 대하여 이슬람이 상징한 엄청나게 위험한 힘을 필연적으로 왜소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외래물의 길들임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특별히 문제로 삼거나 비난해야 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로서 한정된 수의 어휘와 이미지가 강요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미지의 기능은 이슬람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기독교도를 위하여 그것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양은 확대된 넓은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폐쇄된 영역 곧 유럽에 부속된 연극무대로서 외관을 나타낸다.

*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적인 것이라고 인정되는 문제, 대상, 특질, 지역을 다룬 경우의 하나의 습관에 불과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자신이 말하고 생각하는 대상을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 지시하고 명명하며 고정시킨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단어와 문장이 현실성을 확보하고, 또는 더욱 단순하게 그것이 현실 그 자체라고 인정하게 된다. 수사학적으로 본 경우 오리엔탈리즘은 완전히 해부학적이고 열거적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어휘를 사용한다는 것은 동양적인 사물을 개별화하고 다루기 쉬운 작은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은 편집광의 한 형태로 예컨대 통상의 역사적 지식과는 다른 별종의 지식이다.

3장 사업(Project)
* 근대의 동양인이 노쇠하고 정치적으로 무능하다고 하는 사실에 직면한 유럽의 오리엔탈리스트는 현대 동양의 ‘개량을 촉진하기’위하여 상실된 과거의 고전적 동양의 위대함을 일부분이나마 회복시키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자기를 위해서만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는 수천 개의 사실과 가공품(artifacts)이었다.

4장 위기
* 어떤 현실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고자 의도하며, 지금 내가 서술한 것과 유사한 상황에서 생긴 텍스트는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때문에 텍스트는 현실적 성공이 보증하는 이상으로 큰 위신을 갖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현실도 ‘창조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 동양을 단순히 텍스츄얼하게만 이해하고, 정식화하고, 또는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동양에서 그러한 모든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틀림없이 행해졌고, 이러한 ‘터무니 없는’ 전환에 오리엔탈리즘은 크게 관여했다는 것이다. 동양화된 동양을 낳은 것으로서는 정치상의 주인-노예관계 외에 달리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하면, 하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본질이 고찰되고 있는 모든 존재의 뺏을 수 없는 공통의 기반을 구성한다. 이 본질은 역사적임과 동시에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이다. 비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이 연구의 객체인 존재를 그 존재가 가지며 뺏을 수도 없고 진화발전하지도 않는 특수성의 내부에 고정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유형학(typology)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현실의 특수성에 근거하고 있으나, 역사로부터 분리되며 따라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연구주체는 유형학을 통해 초월적인 별종의 존재를 만들어 내고 정상 인간이란 고대 그리스 이래 유럽의 인간을 칭하게 된다.

* 오리엔탈리즘의 두 가지 특징
1)유럽에 대한 동양의 언어학적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자의식을 형성
2)동양은 언제나 동일하고, 불변화고, 획일적이며, 근본적으로 특수한 객체라고 하는 견해에 결코 변경을 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 주제를 구분하고, 다시 그것을 구분하고, 재구분하고자 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 오리엔탈리스트의 동양은 있는 그대로의 동양이 아니라 ‘동양화된 동양’이다.

* 어떤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다른 문화, 민족 또는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그 정수를 뽑아 버리고, 박탈하는 결과로서 생기는 한계이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은 이 한계를 넘어서 더욱 더 나아갔다. 그것은 동양을 단지 서양을 위한 구경거리로서 볼 뿐만 아니라, 서양에 대해 시간적, 공간적으로 고정된 그대로의 존재로 보았다. 서양은 동양의 행동의 모든 측면에 관하여 관찰자이고 재판관이며 배심원이다. 20세기의 역사가 동양의 내부에서 동양의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하는 점을 오리엔탈리스트는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제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1장 재설정된 경계선, 재정의된 문제, 세속화된 종교
* 어떤 문화도 유기적이며 내적인 일관성을 가지며 하나의 정신, 영혼, 풍토 또는 민족이념에 의해 통합되어 있는 것이므로, 외부인이 그것을 통찰하고자 한다면, 역사적 공감이라고 하는 행위에 의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나폴레옹과 모차르트의 경우는 그 유명한 보기이다.

2장 실베스트르 드 사시와 에르네스트 르낭: 합리주의적 인류학과 문헌학의 실험실
*사시는 근대의 동양이 무질서하고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회복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취급했는데, 바로 그 점에 계보적인 차원의 독창성이 있다. 사시는 아랍을 동양 속에 배치했으나 본래 동양 그 자체는 근대적인 학문의 총람 속에 배치되었다. 그에 의해 라틴학, 그리스학과 같이 백화점의 진열장에 진열될 수 있었으며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아버지였다. 르낭은 동양을 더욱더 근대적인 비교연구와 결부시켰는데, 그 속에서는 문헌학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분야의 하나였다. 사시가 오리엔탈리즘의 분야와 구조를 발족시키고 활성화시켰다면 르낭은 이를 문헌학과 지적 문화에 적응시켰기 때문에 오리엔탈리즘은 지적인 영속성과 더욱 광범한 시야를 확보하게 되었다.

3장 동양체류와 동양에 관한 학문: 어휘서술과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것
*초기의 동양애호가중 상당수는 유럽인으로서의 지성과 정신의 습관에 건전한 착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동양을 환영했다. 동양은 그 범신론, 정신성, 안정성, 항구성, 원시성 등등으로 인하여 과대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대평가의 다음에는 예외 없이 그 반동이 초래되었다. 동양은 갑자기 슬프게도 비인간적인, 반민주주의적인, 후진적인, 야만적인 등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방적인 시계추의 운동은 그것과 똑같은 반대방향의 반동을 초래했다. 오리엔탈리즘은 이 두 가지의 대립 곧 불평등성에 근거한 보상과 수정으로부터 성장하여 왔다.

* 근본적으로 생명력이 결핍된 아시아를 재생시킨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순순한 낭만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마르크스를 포함한 오리엔탈리스트는 인간을 광범위한 집합의 견지에서 파악하고 또 추상적인 일반개념으로서 인식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인간을 논의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고, 그것을 논의할 능력도 갖지 못했다.

4장 순례자와 순례, 영국인과 프랑스인
* 동양인은 정복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서양인에 의한 동양정복이 정복이 아니라 해방이라고 하는 논리에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하는 샤또 브리앙을 만날 수 있다.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의 정신을 연구하는 경우 네르발과 플로벨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되어, 또 그것에 의존하면서도 나아 독립을 유지한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동양적인 소재에 끊임없이 조탁을 가하여, 그것을 스스로의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프로젝트의 특수구조 속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흡수했다.


제3부 오늘의 오리엔탈리즘
1장 잠재적인 오리엔탈리즘과 명백한 오리엔탈리즘
*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분야는 누적적이고 집합적인 본질을 가지며, 그 본질은 전통적인 학문, 공적 제도, 특정 작품과 결부될 때에 특히 효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에 대하여 표면상 적합하다는 여러 가지의 요청, 관점,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서 규칙화된 작품, 비전, 연구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 속에 나타나는 동양은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근대에 와서 서양의 제국지배 영역 속에 동양을 집어넣는 일련의 총체적인 힘의 조합에 의해 틀이 잡힌 표상의 체계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어떤 시대에도 서양에 내재해온 동양에 관한 실증적인 교의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 동양과 동양인이란 발전, 변화, 인간적 운동의 가능성 그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다. 외부에 알려지고 궁극적으로 고정화되어, 또는 비생산적인 특질을 갖는 동양과 동양인이란, 곧 바람직하지 못한 불변성과 동일시된다. 동양이 찬양되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양의 예지’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유래하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실재가 동양의 실재적 부재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고 하는 점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개방성, 수용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양을 지배하고자 하는 구조적인 권력지향이 갖는 내부적이고 반복적인 논리적 일관성에 의해 그 존재를 보증 받았다.
2장 양식, 전문지식, 비전: 오리엔탈리즘의 세속성
* 오리엔탈리스트나 ‘백인(양자는 보통 호환되는 용어이다.)’에 의한 모든 발언은 백인과 유색인종, 서양인과 동양인을 구분하는, 극복하기 어려운 거리감을 전달했다. 나아가 각각의 발언 배후에는 ‘동양인-유색인종을, 서양인-백색인종의 관찰대상’이라고 하는 지위에 고정시켰고, 결코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았다고 하는 경험, 학문, 교육의 전통이 울려 퍼져 있었다.

* 전파는 언제나 다양성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나, 그 다양성은 언제나 하향하고 후퇴하여 억제되고 압축되며 ‘근원적인’ 일반성의 극단으로 향한다. 현대 동양의 원주민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행동은, 모두 다 일단 발로된 뒤에 그 기원으로서 극단점에 되돌려 보내지고, 그 과정에서 극단점도 강화된다. 이러한 종류의 ‘되돌려 보내짐’이야말로 바로 오리엔탈리즘의 규율-훈련인 것이다.


3장 현대 영국-프랑스의 오리엔탈리즘, 그 극성기
* 어떤 학자도 자기연구의 장으로서 국가나 학문적인 전통으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에 저항할 수 없다.

*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물의 참된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또는 모든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표상이기 때문에 먼저 표상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이어서 그가 속하는 문화, 제도 및 정치적 환경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표상이란 그것이 ‘표상’이기 때문에 비로소 ‘진리’이외의 실로 많은 사항에 결합되어 있고, 서로 얽혀 있으며, 묻혀 있고, 짜여져 있다. ‘진리’란 그 자체로 하나의 표상이다. 이러한 것의 방법론적인 귀결로서 우리들은 표상을 단순히 내재적인 공통의 주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공통의 역사, 전통, 언설의 세계에 의해서도 규정된, 어떤 공통의 활동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럽문화 속에서 제시하는 동양의 여러 포상은 일관성을 갖춘 시스템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동양적인 본질의 잘못된 표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통상 포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특정의 역사적, 지적, 경제적인 배경 속에서 어떤 경향에 따라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상이란 목적을 갖는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효력을 발휘하거나 또는 다수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표상이란 형성(formation)된 것이면서 롤랑 바르트가 모든 언어작용에 대하여 언급한 것처럼 ‘변형된 것(deformation)'이다.

4장 최근의 전개
1. 대중의 이미지와 사회과학적인 여러 표상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아랍인이 호색한이거나 피에 굶주린 악한을 연상시킨다. 곧 아랍인은 성욕과다의 변태자이고, 부정한 음모에 능란하며, 본질적으로 사디스트이고, 믿을 수가 없는 하등인간으로서 나타난다.

2. 문화관계 정책
*오리엔탈리즘의 중심적인 도그마
①합리적으로 발전해온, 인도적이고 우월한 서양과 탈선적이고 정체되어 있으며 열등한 동양의 사이에 절대적이고 체계적인 상위가 있다.
②‘고전적’ 동양문명을 표상하는 여러 문헌에 근거한 추상개념이, 현대 동양의 여러 현실로부터 직접 나오는 증거보다도 언제나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③동양은 영원히 획일적이고 자기를 정의할 수 없다.
④동양은 본질적으로 두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 또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사고 방식이다.

3. 단순한 이슬람
*와이즈만과 유럽의 반셈주의가 갖는 공통점은, 셈족의 경우 서양인이 갖는 바람직한 성질을 태어나면서부터 결여하고 있다고 하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야에 있다.

*오리엔탈리스트는 ‘쓰는’ 인간이고, 동양인이란 ‘쓰이는’ 인간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리엔탈리스트가 동양인에 대하여 부과한, 더욱 암묵리의 더욱 강력한 구별이다. 동양인에게 할당된 역할은 소극성이고, 오리엔탈리스트에게 할당된 역할은 관찰하고 연구하는 능력이다.

4. 동양인 동양인 동양인
*지금까지 내가 논의해 온 것은 ‘동양’ 그 자체가 하나의 구성된 실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어떤 지리적 공간에 고유한 종교, 문화, 민족적 본질에 근거하여 정의하고자 하는 토착의, 근본적으로 ‘상이한’ 원주민이 살고 있는 지리적 공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역시 지극히 논의의 여지가 있는 관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은 노골적인 인종 차별주의, 종이처럼 얇은 지적 도구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의 번영을 과시하고 있다. 오늘날 아랍 세계는 미국의 지적, 정치적, 문화적인 위성국가가 되고 있다. 나아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동양에는 동양연구를 위한 조직이 극히 조심성 있는 것조차 거의 없다는 점이다.

* 아랍인이 자신의 모습을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아랍’으로서 인식한다고 하는 역설은 내가 언급해온 것의 가장 단순한 결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양의 시장경제와 소비지향으로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도록 교육된 지식인계급이 산출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서양의 주된 조류라고 판단하는 것에 종속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리엔탈리즘을 대신하는 다른 선택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시도한 것은 인간경험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적합한 일련의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 여전히 설득적인 사고유형으로 앞으로도 계속 존속하리라는 명백한 예상에도 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언제까지나 과거와 같이 지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그대로 통용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기대이다.

*어떤 것이 있든지 간에 동양을 무한히 동양화한다는 목표만은 회피되어야 한다. 그 결과 지식은 필연적으로 세련되고, 학자의 독단은 감소될 것이다. ‘동양’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학자나 비평가, 지식인 그리고 인류는 인종적인, 민족적인, 국민적인 구별 이상으로 인간사회를 진보시킨다고 하는 공통의 기도를 보다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자신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지구 위의 한 지역에 대하여 확고한 적대자의 입장을 취하여야 했기 때문에, 인간경험과 일체화할 수 없고, 인간경험을 인간경험으로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감상! 그리고 내가 저자라면 >
난 정신과 의사이다. 나는 때때로 입원을 원하지 않는 환자를 강제로 입원시킨다. 나는 퇴원을 요구하는 환자들에게 나의 잣대(정신의학적 기준이라고 강조하지만)를 들이대며 퇴원이 불가함을 주장한다. 나는 그들의 정신상태에 대한 심판관이다. 나는 정상이고 그들은 비정상이다. 때로는 병동 내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신체적 자유를 구속하기도 하고 강제로 투약하기도 한다. 난 가끔 생각해본다. 그 막대한 권한을 누가 나에게 주었는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무엇인가? 참고로 동성애는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명백한 정신질환이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모호할 수도 있지만 그나마 암수나 동식물의 구분 등 눈에 보이는 것을 구분 짓고 대별시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작업이다. 하지만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동양과 서양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개념화하고 구분 짓는 작업은 분명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쉽고 익숙하게 구분을 짓는 것을 즐긴다. 더 큰 문제는 그구분 속에서 내가 속한 집단이나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상대적인 우위가치를 부여하는 점이다. 남들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해서도 고정되고 단편적인 규정에 얽매이고 만다. 내성적인 성향이 더 강하지만 외향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고 어느 한쪽의 성향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선택해서 표현한다. 동양은 정신적이라 하고 서양은 물질적이라고 쉽게 이야기한다. 정말 그럴까? 동양은 관계 지향적이고 서양은 개인적이라고 규정짓는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정의내리는 이런 구분에 담겨있는 비교우위적인 태도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계를 개념화하고 구분 짓는 일들을 과연 멈출 수 있을까? 아니, 멈출 필요가 있을까? 보편주의의 원칙만을 내세워서 개별적인 차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까?

사이드는 푸코의 이론에 영향 받아 ‘지식과 권력과의 관계’라는 렌즈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을 문헌적으로 탐색해 들어간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란 다름 아닌 서양의 동양에 대한 이념적 지배방식임을 정해진 수순에 따라 서두르지 않고 보여준다. 그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분석적이다. 어린 나이에 조국을 떠나서인지 그는 마치 제 3자인 것처럼 냉철하게 이야기하지 오리엔탈리스트에 대한 분노와 같은 감정은 거의 묻어나지 않는다. 그런 차분함이 한편으로는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가장 잘 풀어나갈 수 있는 현실적 힘을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대안으로 ‘옥시덴탈리즘’이나 ‘원리주의’등의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문화상대주의자로서, 세계주의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줄곧 확인할 수 있었다.

사이드의 궁극적 관심이 ‘타인을 억압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다른 종류의 문화와 민족을 연구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다는 번역자의 언급에 절대 공감을 한다. 그는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이 타문화나 타인종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모든 것이 전부 폭력이나 억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타자를 억압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옹호의 입장에 서서 타문화나 다른 인종을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부분에 대한 자신의 원론적 입장만을 언급할 뿐 더 상세한 진술은 없다.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태어나서 나와 너(세상)를 구분하지 못한다. 신체의 발달이 이루어지며 감각적으로 나와 너를 구분하게 되고 점차 정신적으로도 나라는 존재가 독립된 실체임을 알아나간다. 이때 나를 제외한 ‘외부세계’의 존재는 정신적 발달의 필수적 조건이다. 하지만 아이가 ‘나’라는 감각을 충분히 느낄 수 없게 부모가 너무 과도하게 밀착되어 있다면 아이에게 ‘나(자기)’라는 느낌은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다. ‘나’가 아닌 ‘부모의 자녀로서의 나’가 되는 것이다. 이는 자라면서 계속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사람은 자신 안에 내면화된 타인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진실하고 개인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발달 자체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존재가 내면 깊숙이 침범당한 아이는 그 심리적 관계를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자기발달 없이 외부세계에 순응하여 ‘애 늙은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극단적인 방식들로 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에 얻게 되는 상처가 너무나 크다. ‘나’라는 존재감이 확실해진다면 ‘부모의 자녀’라는 역할도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의 구분이 필요한 것처럼 집단과 다른 집단의 구분도 필요하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의 구분은 필요하다.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오리엔탈리즘을 떠나서라도 그 구분의 모호함 때문에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대별자체가 피해갈 수 없는 일일뿐더러 발전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그러한 구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분에 따라 가치를 부여하고 우열을 가리는 작업에 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그들의 정치경제적 배경 하에서 그러한 작업들을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해왔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서양이 ‘동양’을 창조한 것이고 자신들의 가치에 따라 계몽이라는 미명으로 동양을 ‘서양화’시켜왔다. 그리고 동양은 불행하게도 그러한 작업에 자신을 해체당하고 그들이 씌워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가면을 착용하고 살아왔다.

지난 역사 속에 동양은 그러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맨얼굴을 확인해나가는 투쟁을 해왔다. 하지만 스스로 벗어 버리지 못한 경우도 있고 이미 자신의 피부처럼 달라붙어 떼어 낼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또 서양에서 착용감이 좋은 더 멋진 가면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새 것으로 바꿔서 쓰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스스로의 작업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신중해야 한다.

‘탈서구화(탈식민화)를 통한 동양의 정체성 확보’라는 원칙은 지난 역사 속에서 또 다른 편향과 위험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회교원리주의, 근본주의, 자민족 제일주의 등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IMF 위기극복, 월드컵 거리응원 등을 통해 우리는 민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단일 언어, 단일 민족, 좁은 국토 속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의 역기능이 가장 잘 나타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있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식 사회주의의 경우는 그 역사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예가 아닐까 싶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종 차별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역사가 오천년 역사를 뛰어넘어 1만년 역사이며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우리 민족이 발흥시켰다는 주장도 그 맥락에 닿아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형성해 나가야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민족주의의 폐해도 걷어 내야하는 작업을 병행해야만 진정한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의식인지도 모른다. ‘주의’라는 것 안에는 절대우위의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야할 세계화는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된 미국식 세계화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맹목적인 ‘신토불이’ 식의 민족중심주의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건강한 민족의식으로 주체성을 회복하고 다문화주의에 입각한 수평적 연대에 기초하여 열린 마음으로 세계에 나아가는 자세가 어느때 보다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와 문화 전반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위세를 절대 경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내가 민족주의의 폐해를 걱정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오리엔탈리즘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부분은 학문적 접근 보다는 일반인을 위해 접근하는 친절한 태도가 아쉬웠다. 학문적 성과보다는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이 중요하다면 좀 더 쉽게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았다. 책의 분량도 충분히 압축하여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왜 인용을 했는지도 모르는 부분이 보이고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많은 것을 바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민지 종주국의 문헌을 위주로 고찰하여 서양의 이념적 침탈을 상세하게 보여준 것도 좋지만 그러한 오리엔탈리즘의 침탈로 인해 이슬람이 자신을 어떻게 왜곡하여 바라보고 있는지를 문학이나 문화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소개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컸다.

번역하신 분에게도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 작업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번역이 영 와닿지 않는다. ‘언설’과 같은 생소한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정확한 저자의 뜻을 전달시키고자 함이겠지만 너무 직역을 해서 문맥을 파악하기가 매끄럽지 않았다. 저자의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다소간의 의역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재미가 없어 책을 읽는 일이 힘들었지만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본 좋은 경험이었다.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민족주의는 어떻게 될까? 더 강해질까? 아니면 더 약화되어질까? 당분간은 더 강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잘 통합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이 이어지다보니 ‘민족이 중요한가?’라는 의문까지 이어진다.

제일 중요한 가치는 어떤 이념보다도 ‘사람’ 자체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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