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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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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14일 21시 29분 등록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3 (한비야 지음, 금토,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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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1997년 1월부터 1998년 5월까지 1년 5개월간이었다. 그동안 인도차이나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 5개국과 남부 아시아의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 3개국 그리고 중국, 티베트, 몽골을 돌아보았다. 이 중에서 인도차이나와 남부 아시아를 3권에, 중국과 티베트, 몽골을 4권에 싣기로 한다.

우연한 기회로 책을 쓰게 되면서부터 나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 여행에는 나만의 노력과 시간과 돈 이외에도 다른 커다란 힘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작게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이며, 크게는 달라진 사회 분위기와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내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는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내가 누린 기회와 혜택을 반드시 남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책쓰기’라는 나눔의 수단을 찾게 된 것이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은 ‘만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풍습, 생김새와 생각들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사람들, 여행이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바로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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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세기 유목민, 배낭족의 사랑과 이별

지금 지구에는 또 하나의 종족이 생겨나고 있다. 21세기판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 배낭족이다. 배낭 하나에 살림살이 모두를 넣고, 쉬지 않고 지구를 누비고 다니며 세상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사람들. 이들의 신분은 다양하다. 학생일 수도 있고, 학교를 휴학했거나 졸업한 사람, 직장에서 휴가를 얻은 사람일 수도 있다. 직장이 없거나 직장을 그만둔 사람도 있으며 군대를 막 제대했거나 아예 여행이 직업인 사람도 있다. 연령층도 다양하다. 물론 20대가 주류를 이루지만 엄마 아빠를 따라다니는 어린아이, 일흔 살이 넘은 노인도 있다. 혼자 다니는 사람, 여자친구끼리나 남자친구끼리, 애인이나 부부가 함께 다니는 커플도 있다. 아버지와 딸, 엄마와 아들, 삼촌과 조카, 심지어는 전가족이 몰려다니기도 한다. 온갖 조합이 가능하다. 돈이 많든 적든, 어느 나라 문화에서 왔든 이들은 인생의 한 부분을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한다는 공통점에서 같은 족속이다.

2. 라이 따이한의 훌륭한 어머니, 베트남 딥 아줌마

나를 제대로 알고 사랑해야만 비로소 다른 이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세계가 좁아질수록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코스모폴리탄, 사해동포주의자라고 외치고 다녀도 남의 나라 국경을 건널 때는 반드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급한 여권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를 아는 일은 ‘지구촌’ 시대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마땅한 명분도 없이, 부탁받지도 않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32만여 명의 군인과 4만여 명의 근로자들이 월남으로 갔다. 그리고 남의 나라 전쟁에 말려들어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들과 맞서 ‘용감히’ 싸웠다.
우리들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바쳐가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미국과 혈맹의 약속을 지켰다는 신의와 그것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는 전쟁특수 몇 억 달러가 전부가 아니던가. 그리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면서도 너무나 야비하고 치사하게 버리고 온,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한국인 2세 라이 따이한[來大韓]. 정말로 한국 아버지가 다시 오리라고 기대하며 질곡의 삶을 살아온 불행한 인생들을 남겨놓았으니 이제 그 역사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3. ‘세계 7대 불가사의’ 앙코르 와트의 나라

나는 킬링필드의 깊은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프놈펜 여정을 잠시 뒤로 하고 앙코르에 먼저 가기로 했다. 앙코르(크메르어로 ‘수도’라는 뜻)는 그야말로 캄보디아의 심벌이며 최대의 돈줄이다. 앙코르 와트는 힌두교신인 비시뉴를 위해 만든 신전인데, 이것을 건설한 수르야바르만 2세를 비롯한 그 시절의 왕들은 자기가 죽은 후에는 자신들이 모시던 신과 동일하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나는 아무래도 혓바닥에서 조미료가 따로 나오는 모양이다. 세계 각국의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이 있으니 말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잘 웃는다. 아니, 크메르인들은 잘 웃는다. 아이고 어른이고 눈만 마주치면 그냥 웃는다. 내전과 혼란한 정치,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지 신기하고 부럽다 못해 고맙기까지 하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개방적이고 긍정적이며 낙관적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킬링 필드와 같이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쟁의 피해를 입어야 했는지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4. 태국 해상 밀입국 실패, 공항에서 웃다

국경 경비군들이 사공의 따귀를 마구 때리고 구둣발로 차고 하더니 멱살을 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려고 한다. 우리는 그야말로 순전히 호기심으로 한번 경험해 보자고 시도한 것이고, 나 혼자 정한 육로이동이라는 여행원칙 때문에 불법으로 국경을 넘으려던 것이었는데 저 불쌍한 보트맨이 우리 때문에 그의 전재산인 보트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피가 솟구쳤다. 내가 얼굴을 붉히며 사납게 소리를 지르자 군인들이 흠칫 놀라며 잠깐 보트맨의 멱살을 느슨하게 잡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보트맨의 팔을 홱 낚아채서는 황급히 이민국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해서 태국 국경을 바다로 밀입국하려는 기도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5. 라오스에 가면 물벼락을 맞으세요

저경비 배낭여행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의견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어디는 어때서 좋고, 또 어디는 어때서 싫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나라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평가가 나온다. 그런데 라오스에 대해서만은 예외적이다.
물가도 싸고, 국수도 맛있고, 사람도 좋고, 마을과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정글 깡촌이라는 라오스는 의심할 바 없이 오지여행가의 천국이다.

‘피마이(새로운 해)’
라오스에서는 물의 축제를 이렇게 부른다. 전국적으로 일주일 이상 계속되는 이 축제에는 식구들과 가까운 친척, 친구뿐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지난해의 묵은 것들을 씻어버리고 새해를 깨끗이 맞자는 뜻으로 물벼락을 안긴다.
라오스는 오래 전부터 ‘란 쌍’이라고 불리웠는데 이건 ‘백만 마리 코끼리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이곳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라오’라고 부르는데 이 나라를 지배했던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식으로 ‘스'라는 어미를 붙여 ’라오스‘가 되었다고 한다. 공식 국가명은 ’라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며 사회주의 국가이다.

6. 아편지대 ‘골든 트라이앵글’밀림 깊숙이

방 안에는 쑥 타는 냄새와 설탕 타는 냄새가 섞인 듯한 달착지근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곳 남자들은 깡마르고 얼굴이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새까만데 그게 아마 아편 때문인가 보다.
여기는 값싸고 질좋은 아편을 얻기에 적당한 땅이다. 라오스 북부 산악지방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다음으로 많은 양의 아편을 생산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전세계가 마약과의 전쟁이다 무엇이다 떠들고 있어도 이곳 산간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언제나 그래왔듯이 붉은 양귀비꽃이 피고, 그 꽃이 지면서 양귀비의 눈물이라는 하얀 아편액을 남긴다. 그들은 이 꽃이 남겨준 열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여기 누워 있는 아저씨들처럼 몽롱한 환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7. 황금의 나라, 눈물 속의 미얀마

놀라운 것은 할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면서 밥을 제외한 모든 음식에 화학조미료를 한 숟가락씩 푹푹 넣는 거다. 처음에는 소금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가 자진해서 발음도 정확하게 ‘아지노모토’라고 가르쳐 주신다. 미얀마 북부의 밀림 속 깡촌 마을에서, 이렇게 나이 드신 옛날 할머니가 음식마다 꼭 넣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화학조미료라니!
어디 일본의 ‘아지노모토’뿐이겠는가? 20세기 문명의 상징처럼 군림하는 ‘코카콜라’는 또 어떻고. 아프리카나 남미를 여행할 때 영양부족으로 아이들이 비틀어져 있는데도 엄마가 콜라를 사서 아이와 같이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없어도 되는 물건을 마치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물건처럼 팔고 있으니 얼마나 무섭고 냉혈한 마케팅인가.

미얀마 최대의 불교성지인 쉐다곤 파고다. 사원의 외벽은 몽땅 역대 왕과 불교신자들이 기증한 금판으로 덮여 있다. 금뿐만 아니라 보석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 불탑의 꼭대기 부분은 5천여 개의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 등 2천여 개의 각종 보석으로 되어 있단다. 금과 보석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원 내에 수십 개 되는 각 절마다 시주함에는 직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루로 담아가야 할 정도로 돈이 넘친다.
그러나 산골의 아이는 단돈 1달러의 등록금이 없어서 우는데 사원에는 이렇게 재물이 넘쳐나고 있다니, 어딘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것 아닌가.

8. 비운의 방글라데시, 그 처절한 인간 참상

방글라데시에서의 가난이란 버스 타는 대신 걸어가고, 밥 대신 수제비를 먹는 그런 상대적인 가난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처절하고 절대적인 가난이다.
땀 흘리며 전력질주하고 있는 앙상한 릭샤꾼들에게 건전한 노동의 정직함과 신성함이 물씬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게 뼈가 으스러지게 일해보았자 팔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자야 한다니. 이 사회구조의 불공평성에 진저리가 처진다. 그러나 내가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에 더 몸서리가 난다.
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가슴도 터질 것 같다. 이 날씨, 이 복잡함, 이 현란함, 이 냄새, 이 가난, 이 불공평, 그리고 이 무력함. 눈에 보이고, 코로 맡아지고, 피부로 느껴지고,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소화해 낼 능력이 지금 내게는 없다.

알고보니 나는 스스로 에너지를 내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태양의 열을 받아 충전되는 태양열 전지였던 것이다. 내가 메가톤급 폭탄이 되는 것은 태양열을 충분히 받았을 때인데, 그 태양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이 바로 내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9. 인도에 가면 인생이 보인다

인도는 정말 이상한 나라다. 가보기 전에는 한없이 거대하고 신비해 보이지만 막상 가보면 밉고 정 떨어진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부터 또다시 그립고 신비스럽게 보이는 나라다.
카스트 제도에서 신음하며 사회최하층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 그 비참함, 대를 잇는 구걸 행각,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뻔한 거짓말. 그래도 다녀간 사람들 백이면 백 사람 모두 좋았다고, 꼭 다시 가고 싶다고, 아예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하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나 역시 여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인도를 사랑한다. 내게 해외 여행지 딱 한 군데만 추천해 달라고 하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인도를 권한다.

나에게 인도를 한 마디로 말해 보라면 ‘아주 못생긴 어머니’라고 하겠다. 겉만 보면 모든 추악함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인도가 우리를 키워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를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빠짐없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는 내면의 모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지저분함, 느림, 거짓말, 빈곤, 억압, 모순. 이런 불결한 옷을 입고 인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곧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죽을 때까지 부여안고 가야 할 것은 또 무엇인가.’
그렇기 때문에 겉모습의 인도에서는 아주 나쁜 경험을 얻게 되고, 속마음의 인도에서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라나시를 바라나시답게 만든다는 강가로 나가본다. 경건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있는 힌두교 신자들, 나뭇잎에 작은 초를 놓아 꽃잎과 함께 띄우는 사람들, 엽서를 사라고 막무가내로 조르는 아이들, 부스럼이 온몸을 덮고 있는 개들, 자기 배를 타라고 잡아끄는 사공들. 한 쪽에선 빨래를 해서 말리고, 한쪽에서는 시체를 물에 담그고, 한쪽에서는 시체 태운 가루를 떠내려보내고, 다른 한쪽에선 그 물을 마신다.
이곳에 오면 겉으로 드러나는 분주함과 무질서와 함께 보이지 않는 고요함과 질서가 느껴진다. 긴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염원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10. 현대판 실크로드,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꿈길’

혼자 여행을 다니면 빠지기 쉬운 아주 나쁜 버릇이 바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식의 인간관계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하고야 얼마든지 즐겁게 지내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의견충돌이 생기면 양보하거나 참으려 하기보다 저 사람과 더 이상 안 다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더 쉽게 든다.
참으로 유치한 생각이고 무서운 생각이다.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하고만 지낼 것이며, 좋아하는 사람들 틈 속에서만 살 수 있겠는가. 어떻게 자기 스타일이 아니거나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인간관계 밖으로 생각하며 살겠는가.
그것이 혈연이든, 지연이든, 학연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인연으로 만난 관계든 참을성 없고 이해와 양보와 절충이 없는 관계는 이미 시작부터 죽은 관계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나는 지난 10여 년간 이런저런 이유로 나라 밖에 살면서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어릴 때 배운 동요를 느리게 부르기만 하면 한 소절도 못 가서 목이 메는 것이다. 혼자서 부르다 보면 나중에는 꼭 울고 만다. 여기 별이 쏟아지는 파키스탄의 북쪽 끝 마을에서도 이 동요의 끝을 잇지 못한다. 가을을 타고 있나 보다.

카슈가르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끝이자 나에게는 인도차이나와 남부 아시아 여행의 종착지다. 동시에 또 다른 여행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세계여행의 마지막 부분인 중국, 티베트, 몽골 여행의 시작이고, 작게는 중국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다.
길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가. 이제 죽음의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 길을 따라간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사막, 앞서 간 사람들의 해골을 이정표삼아 간다는 길. 그 낯선 길에는 무슨 일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설렌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4 (한비야 지음, 금토,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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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시리즈의 마지막인 이번 4권은 1997년 9월부터 98년 5월까지 아홉 달 동안 중국, 티베트, 몽골을 여행한 이야기다.

여행을 통해서 얻은 최대의 수확은 다름 아닌 대자아로서의 나와 우리의 위치를 깨달은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의 딸이자 한국의 딸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딸,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딸이라는 그 놀라운 자각 말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세계라는 조각그림의 한 조각으로서 각자의 색깔과 모양은 다르지만 서로 합쳐 한 그림으로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생명과 존재가 드러나는 지구촌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전에는 무심히 보아넘기던 국제뉴스를 이제는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면 내가 무슨 도움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제 나는 서서히 세계시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즈음에 와서는 지구촌이라는 말도 너무 넓게 느껴지며 세계가 한지붕 안에 있는 안방, 건넌방처럼 얽히고 설켜 긴밀하게 연결된 것처럼 가깝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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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늑대 우는 몽골 벌판, 여인 3대 천막집

유학생이 내게 신신당부한 말이 있다. 자기 나라를 몽고(蒙古)라 부르지 말고, 반드시 몽골, 혹은 몽골리아로 불러달라는 것이다. 어리석고 낡았다는 뜻의 몽고는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를 무시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했다.

몽골이 여름에는 얼마나 더 멋있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조금만 올라가도 호수가 보이고, 침엽수림이 보이고, 강이 보인다. 아기자기한 벌판이라고 할까.
바람은 여전히 차고 맵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몽골은 365일 중 맑은 날이 260일이 넘는 ‘파란 하늘의 나라’라더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저기 토끼가 달려간다, 무슨 새가 보인다, 친구네 양떼들이 저기 있다는 둥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를 가리키지만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우스갯말로 몽골 사람들의 시력은 7.0이라니까 1.5인 내 시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모양이다.

2. 황량하므로 더 황홀한 고비사막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이제 너무나 좁아져서 한쪽에서 그릇된 일을 하면 단박에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중국 양쯔강이 범람한 원인과 결과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억의 이재민을 낸 홍수의 원인은 다름 아닌 일본으로 수출한 나무젓가락이었다. 그것을 만드느라 무리하게 나무를 배어낸 것이 홍수의 큰 원인이 된 것이다. 그 홍수는 또한 한국의 밥상에 올라오는 생선 값을 뛰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범람한 물이 한꺼번에 황해로 몰리는 바람에 바닷물의 염도가 낮아져 고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본의 나무젓가락과 양쯔강의 홍수와 한국 밥상의 생선 값. 이제 전세계는 이와 같이 환경적으로 하나로 얽혀있는 것이다.

3. 내 피에 흐르는 유목민의 방랑기

만약 전생이 있다면, 여러 생 중 적어도 한 번은 이 드넓은 벌판을 말타고 질주하는 몽골족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한 곳에 눌러앉아 논밭을 가꾸는 정착민이 아니라,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곳으로 달려 나가야 하는 기마민의 기질이 다분하니 말이다. 그리고 내 핏속을 흐르고 있는, 늘 자유롭고 싶어 하는 정신적인 방랑기 역시 이곳을 고향으로 두었던 전생의 잔재가 아닐까.

4. 아, 실크로드! 길 없는 길을 따라서

세계 오지를 다니다 보면 정말 딱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지사제와 포도당 가루가 없어 설사병으로 죽은 아이도 보았고, 안약이나 안연고만 있었더라도 장님이 되지 않았을 아이도 만났다. 어렸을 때 고열을 내며 앓다가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는 예쁘장한 처녀아이도 있었다. 그때 해열제랑 소염제만 있었더라도 그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게 아닌가.
정말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세계일주 여행만 할 것이 아니라 약간의 의학상식과 유용한 약품을 가지고 다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럴 때마다 의사나 간호사들이 너무나 부럽다. 그들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작은 조치로도 사람 목숨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5. 배꽃 하얗게 피고 지는 타클라마칸 사막

나는 한 달 반에 걸쳐 카슈가르에서 시안에 이르는 중국의 실크로드를 한 번 걸어 보았다. 한꺼번에 쭉 다니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크로드의 서쪽 끝인 로마에서 시작하여 터키,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을 거치는 초원길도 가보았고 이란, 파키스탄을 거치는 서역남로 길도 거쳐왔으니 1만여 킬로미터,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전체를 한 번 답사한 것이 되었다.
옛날 실크로드를 타고 온 서역 상인들은 향료, 악기, 유리 등을 가져와서 비단, 금, 도자기와 바꾸어 갔다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얻어가는 것일까.
이 비단길을 따라서.

6. 리틀 티베트, 고원의 욕심 없는 삶

우리는 이미 해발 3,000미터의 고도를 넘고 있다. 멀리 야트막한 언덕을 보면서 고개를 넘으면 또 끝없이 펼쳐지는 하얀 눈밭. 바람이 몹시 부는 벌판에 야크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까. 이렇게 척박한 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고에 자연은 합당한 보상을 주고는 있는 걸까.

랑무스는 두말하면 잔소리인 티베트족의 마을이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까매지면서 까마귀 떼가 날아든다. 산중턱쯤에 가죽과 뼈만 남은 양이 굴러 있다. 까마귀 떼가 이렇게 양 한 마리를 먹어치우는 데는 불과 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단다.

7. 리지앙 산수는 백리 동양화

중국에서 이렇게 맑은 강물을 본 적이 없다. 배가 상류로 올라갈수록 강폭이 넓어지는데, 봉우리들이 물에 비쳐 마치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 한쪽에 그림을 그리고 접어놓은 것 같은 풍경이 몇 시간이고 계속된다.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다. 그리고 나는 그 동양화 속으로 배를 타고 가는 중이다. 넋이 빠지는 것 같다. ‘이강산수백리화랑(璃江山水百里畵廊)’이라더니, 말 그대로 백리까지 이어진 그림을 보는 듯 하다.

8. 소수 민족의 땅 윈난성, 따사로운 별천지

세상의 이치는 참 묘하면서도 단순하다. 못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싶어 안달이고, 잘 사는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챙겨 가지려고 혈안이다. 그러니 정말 부자는 누구일까. 가진 것이 얼마든 그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 세상에 나눌 게 전혀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물질이든, 애정 어린 관심이든 간에.
나도 부자로 살고 싶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눠주며 사는.

9. 다리, 평화로운 마을의 정겨운 친구들

다리의 나날은 정말 느긋하다. 늦잠 자고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차 마시면서 책 보거나 글 쓰거나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저녁에는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다리 요구르트와 납작한 찰떡에 매운 된장을 넣어 구운 찹쌀떡을 먹는다.
외국인 거리의 카페에 있는 서가를 둘러보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다. 다리는 많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오는 곳이라 그들이 읽고서 팔거나, 그냥 주거나, 바꾼 책이 제법 풍부한 목록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유명한 관광지치고는 작은 규모의 마을이라 정이 갈 뿐만 아니라 다른 관광지처럼 ‘관광객 따로, 현지인 따로’가 아닌 ‘다 함께 짬뽕’으로 잘 섞여 지내는 독특한 배낭족 문화가 있다.

10. 전설 속의 티베트, 사라져가는 신의 나라

윈난성 중띠엔에서 1월 13일에 출발하여 라싸에 21일에 도착했으니 ‘세계의 지붕’으로 오는데 무려 9일이 걸린 셈이다.
시내를 잠깐 돌아다니면서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라싸에 오면 타임머신을 타고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일 것이라고 상상했었는데 그것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딱 붙어서고 말았다. 숨이 턱 막혔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서 강렬하게 다가서는 눈부시도록 하얀 건물 때문이다. 포탈라 궁. 라싸를, 아니, 티베트 전체를 압도하고도 남을 듯하다.

11.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서양인들 중에는 조장(鳥葬) 장면을 낱낱이 찍어가면서 조장은 야만행위이니 그런 만행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항의가 망명정부에 빗발쳤다고 한다. 이런 항의는 무식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서양 사람들의 되어먹지 못한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다.
이 장례법에는 인간도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 세상 윤회의 한 고리가 되어야 하고, 죽은 몸조차 자연에 보시(布施)해야 한다는 불교적 사고방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깊은 뜻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의 지혜의 산물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화장할 나무가 없고, 땅이 얼어 있어 매장도 할 수 없는 티베트의 자연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장례법은 무엇이겠는가. 그로부터 발생한 조장의 문화적 의미와 기능은 이해하려고도 않고 자신들의 잣대로 우월을 따지는 서구인들의 오만방자함이라니. 한마디로 역겨울 뿐이다.

라싸를 떠나는 날 포탈라 궁에 다시 가보았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포탈라 궁, 그 앞에는 중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파란색과 빨간색은 태극기의 문양에서처럼 언제나 보기 좋은 조화를 이루지만, 티베트의 푸른 하늘 아래, 그것도 6백만 장족의 마음의 고향인 포탈라 궁 앞에서 펄럭이는 그 깃발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섬뜩하고도 아프게 한다. 저 붉은 깃발이 마치 파란 하늘의 심장을 뚫고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보였다.
하늘이여, 부디 티베트를 자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12. 울어도 넘지 못한 국경, 두만강 3미터 반

한국의 통일전망대보다 훨씬 북한이 가깝게 보인다는 두만강 가의 투먼에서는 정말 강 건너가 빤히 내다보인다. 그곳이 북한의 남양시란다. 같은 민족인 우리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다른 나라에서는 한 줄기 철도로 이어져 있다.
아버지 고향은 함경남도 정평이다. 아버지가 가족사진 한 장 없이 월남하셔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그리고 아주 미인이라는 고모 얼굴을 모른다. 그곳은 한씨 집성촌이라 마을 사람 모두가 친인척으로 끈적하게 뒤섞여 살다가 열여덟 살에 아버지 혼자 남쪽으로 내려오셨으니 홀로 뚝 떨어져 사시면서 얼마나 허전하셨을까. 내가 이렇게 다니다가도 돌아가 쉴 가족과 집이 있다는 생각만 하면 힘이 솟고 든든한데, 아버지는 일점 혈육도 없는 남한에서 무슨 때마다, 무슨 명절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북한이 바로 코앞인 곳에 오니 나도 모르게 강 건너에 대고 손나팔을 만들어 목청껏 부르게 된다.
할머니이이이이,
할아버지이이이,
고모오오오오오,
한남희 셋째딸 왔어요오오오.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쏟아진다. 마구 쏟아진다. 그 눈물에 더 서러워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엉 소리를 내어 울어버렸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똑같은 질문을 수천, 수만 번 받았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이요.”
“북한이요, 남한이요?”
나는 이 질문에 남한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한국의 어린 아들 딸들이 세계여행을 할 때는 이런 대답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통일한국이요.”
그날을 기다린다. 아주 간절하게.


***


9월 첫 주에 생수단식을 하면서 읽었다. 몸과 마음이 예민했기에 더 따뜻하게 읽혔고, 군데군데 눈물도 흘렸고, 충분한 대리만족도 경험했다. 이제라도 다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멋진 사람의 고마운 글이었다.
인도차이나, 남부 아시아, 몽골, 중국, 티베트..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 만이 아니었다. 같은 아시아에 속하는 여러 나라들을 책을 통해 돌아보면서 그들을 떠올려 보았다. 왜 그리도 무관심했을까.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

자기와의 만남이라는 여행을 통해 ‘바람의 딸’이 배운 것은 많았다. 우선, 이 세상에 늦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목표가 확실하다면 남들과 상관없이 그 길을 가면 된다고, 늦게 시작한 것을 두려워말고 하다 중단할 것을 두려워하라고.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 그래야 행복하다고. 하고 싶은 일은 목숨을 걸고 하라고.
어디 그것뿐일까만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여행을 좋아하는 ‘바람의 딸’은 7년간의 세계 오지 여행 뒤에도 여행을 계속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걸었고, 1년 간 중국을 '견문'하기도 했다. 다시 5년 간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을 '월드비전'이라는 국제 구호단체의 구성원 자격으로 누볐다. 그리고 그것을 또 책(「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푸른숲)으로 썼다. 이기거나 지거나, 먹거나 먹히거나 하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또 가진 것을 나누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읽어봐야겠다.

‘바람(wind)의 딸’이 아닌 ‘바람(hope)의 딸’이 된 한비야. 그녀가 꿈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지도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남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늘 잊지 않는 마음이다.
- 한비야, 「중국 견문록」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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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2005.09.14 08:57:25 *.217.147.199
이책 재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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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맨
2005.09.14 12:24:30 *.39.225.82
님은 책을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독후감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게 저의 욕심 입니다.
'책쓰기'에 뛰어난 감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지구를 세바퀴 반이나 돌아서 조금 숨이 차네요.
좋은 여행을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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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5.09.14 17:54:48 *.226.27.248
강산이 변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걸 감안하더라도 재밌게 읽었어요..
무지 부러웠죠..^^

그리고, 통찰맨님..
네..책 많이 읽을께요..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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