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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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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4일 12시 18분 등록
"부지런히 사랑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스캇 펙 저 | 열음사(써드아이)


1. 책이 내게로 왔다.(감상)

책이 최초로 나의 손에 쥐어진 순간, 내 시선은 세련된 하드카버 위에 깨알같이 새겨진 아래 글귀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인생이란,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가지 않은 길'이 아닙니다. 당신이 막다른 골목에 서 있을 때 혹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라도, 바로 그 순간,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 석가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고해(苦海)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문제와 고통에 마주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에 직면했을 때 ‘다른 길로 갈걸. 왜 이 길로 왔을까?’라고 한탄하고 회피하는 것이 올바른 삶은 아니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음을 깨닫고 고통을 감내할 때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저자 스캇펙은 힘주어 말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고통은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며, 한국 가요사의 획을 긋는 노래 가사처럼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까닭이다.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방법은 즐거운 일은 나중에 하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며, 진실에 충실해야 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고통을 먼저 겪으면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다가오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활을 통해 진실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균형잡기를 통해서 우리는 융통성을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는 훈련을 요구한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신선하다.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 자기 자신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사랑으로 규정한 것은, 그 동안 사랑은 자기 희생이며 감정적이라는 편견에 대한 교정이다. 사랑은 부지런한 자만이 성취할 수 있으며 행동하는 만큼만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에 빠지는’ 감정이기 보다는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충만하게 채워나갈 수 있으며 정신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무의식에 대한 견해는 독특하기까지 하다. 무의식에 대한 지배적인 생각은 ‘비뚤어진 자아, 정신질환의 소산’ 이라는 프로이트 식 해석이다. 무의식이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우리의 의식이 그것에 대항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무의식은 지식의 보고이며 ‘무의식의 지혜’라는 칼 융의 주장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무의식을 하느님이라고 까지 표현한다.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은 보이지 않는 힘, 잘 모르는 불가사의의 영역을 신으로 규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게으름을 불성실이라는 윤리적 잣대를 넘어 악으로 표현한 것은 독특함을 넘어서 아이러니하다. 게으름은 정신적인 성숙의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므로 사랑과 반대말이다. 게으름은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한 엔트로피다. 게으름은 원죄라는 씻을 수 없는 태생적인 악마로 치부된다. 과연 게으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역겨움인가?

마지막 장의 은총에 관한 이야기는 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선뜻 잘 이해가 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우리가 은총을 선택함과 동시에 은총에 의해 선택된다고 하는 모순 때문이다. 은총은 부처의 해탈의 비유를 통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부처는 애써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해탈이 그에게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가 해탈을 얻기 전 적어도 십육 년간이나 그것을 찾아 헤매었으며 십육 년간이나 그것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해탈이 그에게로 왔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그는 해탈을 찾아 헤매야만 했으면서 또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은총은 신에 의한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더해질 때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소득 중의 하나는 직접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원칙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부관계와 아이 키우기에 관련된 지혜의 말이 떠오른다. 핵심단어는 ‘독립성’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서로가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상대방과 함께 살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말이지만 결혼생활을 할수록 실감이 가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만을 기대한다면 끊임없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독립적인 성장을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에 대한 사랑은 관심과 애정을 갖되 분별 있는 사랑을 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아이의 독립성을 길러주려 애써야 한다는 말에 퍽 공감이 간다.

책 곳곳에 제시되는 저자의 일상적 경험, 즉 상담 심리 사례를 통해 훈련, 사랑, 종교, 은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일견 예전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비슷하게 느껴지나, 프롬은 사랑의 사회적인 측면, 스캇펙은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무엇보다 책 전반에 흐르는 것은 스캇펙의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이다. 이 점이 은총을 거부하는 나를 끝까지 잡아 끄는 힘이었다.


2. 역지사지(易之思之)-내가 저자라면

* 저자 소개 : 스캇펙
하버드 대학(B.A.)과 캐이스 웨스턴 리저브(M.D.)에서 수학했다.
심리상담자로서 미 행정부의 요직을 맡기도 했던 그는 현재 미 코네티컷 주 뉴 밀퍼트에서 정신과 의사로 개업해 있으면서 밀퍼트 종합병원 정신건강 치료센터의 책임자로 있다.
주요저서로는 사람, 전통적 가치, 그리고 영적 성장에 관한 새로운 심리학을 전개하여 현대인들의 영적 방황에 길잡이를 제시한 『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led)』,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사랑과 구원의 문제를 깊이 탐색한 장편소설『창가의 침대(A Bed by the Window)』,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악과의 투쟁을 다룬 『People of the Lie』, 크리스찬적 세계의 여러 차원에 관한 책『What Return Can I Make?』,공동체와 평화의 문제에 천착한 『The Different Drum』등이 있다.


이 책은 그가 기독교 신자가 되기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전반의 기조에 깔려 있는 것은 종교이다. 3장은 ‘종교’이며 4장은 ‘은총’에 관한 내용으로 도식적으로 살펴보면 종교와 비종교 부문이 절반씩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신자가 되기 이전부터 정신분석과 종교의 결합과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모습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3장의 ‘종교’는 ‘마르시아’와 ‘데오도르’ 라는 두 인물의 대조적인 사례를 통해 진정한 종교적인 태도에 대해 논한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거나, 반대로 교리적인 태도는 정신질환임을 암시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나,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며 비종교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어정쩡한 스탠스는 자칫하면 종교인, 비종교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나 같으면 ‘종교’, ‘은총’보다는 ‘행복’, ‘진리’ 등의 범용적인 언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에 별도로 기독교 관련 책으로 내면 될 것이다.

글 내용 중에서 몇 가지 이견이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저자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루 생활에서 괴로운 일을 먼저하고 즐거움을 나중에 갖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순전히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을 먼저 먹을 것인지, 아니면 맛없는 것을 먹을 것인지에 대한 테스트처럼 취향의 문제 아닌가? 참고 견디면 즐거운 일이 배가 된다는 논리이지만 어찌 매번 누구에게나 고통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게으름이 죄라는 저자의 흑백논리식 주장은 왜 사람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노자의 무위자연은 무엇이란 말인가에 대한 질문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키케로는 말했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란 언젠가 한번쯤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글의 전개 방식은 다소 보수적이며 개인적인 관점에 치중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의 총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가정을 넘어서는 사회적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게으름은 악이라는(즉 노동이 미덕) 주장에서는 청교도정신을 떠올린다. 가정생활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한 모습은 미국 공화당의 정책기조를 연상하게 한다. 현대 기독교는 개인과 가정의 행복만을 강조하며 사회적 책임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한 축으로 기울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끝으로 한 가지 언급하자면,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남은 길을 가야 할 지에 대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많으나 ‘어떻게’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다소 성이 차지 않는다.


3. 책에서 끌어다 쓰기(인용)

[제 1부 훈련]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석가는 四海 가운데서 삶을 가장 큰 苦海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苦海)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P16)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대로 “고통은 가르침을 준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환영하며, 더 나아가서는 문제가 주는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P18)

“노이로제(신경증)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 칼 융 (P18)

* 고통을 감내하고 성장하는 방법
1.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
2.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
3. 진실에 헌신하는 것
4. 균형을 맞추는 일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짜되,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P22)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즐거운 일들을 나중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줄려면, 부모 자신이 자기 훈련이 잘된 역할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P32)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문제들은 직면해서 해결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 것이며, 영원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의 장애물이 되고 만다. (P39)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P53)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때, 그 책임을 다른 어떤 개인이나 조직 등에 준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나치즘과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P58)

현재의 편안함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들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 불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며, 현재의 진실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불편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P69)

진실에 충실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로 이는 계속적이고 끊임없이 엄중한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 방식을 통해서만 세상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세상을 알려면 우리는 세상을 잘 살펴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상을 살펴보고 있는 자신을 살펴야만 한다. (P71)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 자신을 성찰해 보는 능력이 바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P72)

또한 진실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생활이란 자진해서 다가오는 변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활을 말한다. (P72)

나는 가끔 정신치료를 가리켜 ‘진실게임’ 혹은 ‘정직게임’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일 중에서도 특히 거짓말과 대결하도록 환자들을 도와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가 들어온 거짓말과, 또 우리가 자신에게 해온 그런 거짓말이 서로 엉키기 때문이다. 이런 원인은 오로지 정직한 분위기에서만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치료자가 제일 근본적으로 해야 할 것은 환자들과의 관계를 솔직하고 진실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P81)

까만 거짓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얀 거짓말은 우리가 말하는 그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빼 버린 말이다. (P82)

그러면 진실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어떤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가? 첫째로 결코 거짓말하지 말 것이고, 둘째로 진실을 숨기는 행위가 항상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상당히 의미있는 도덕적인 결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아니라면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 셋째로 진실을 숨기는 결정은 개인적인 필요에 토대를 두어서는 안 된다. 즉 권력, 호감, 혹은 도전으로부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넷째로, 진실을 숨기는 결정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내려야 한다. 다섯째로, 다른 사람한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능력은 오직 진정한 사랑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여섯째, 다른 사람의 필요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 사람이 자기의 영적 성장을 위해 진실을 유용하게 쓸 능력이 있느냐에 대한 평가이다. 끝으로 다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때 대체로 우리는 과대평가보다는 과소평가하기가 쉽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P87)

‘균형잡기’란 우리에게 융통성을 주는 훈련이다. 성공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모든 활동 분야에서 비상한 융통성이 요구된다. 그 한가지 예로, 화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화내는 것은 인간이라는 유기체 안에서 자신의 생존을 돕기 위해 키워진 본능적인 감정이다. (P89)

나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고통보다 균형을 잃은 것이 궁극적으로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배웠다. (P92)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므로,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과정에 장애가 생기면, 그 우울증은 비정상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 결과로 우울증은 오래 계속된다. (P97)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세네카는 2천 년 전에 말했고, 에리히 프롬은 “더욱이 흥미를 돋우어 주는 것은, 생을 통해서 인간은 죽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라 했다. (P104)


[제 2부 사랑]

* 사랑의 정의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P113)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도 없다.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도 없다. 또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녀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도록 훈련시킬 수도 없다. (P114)

사랑의 본성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 나가다 보면 자기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남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해질 것이다. (P115)

다시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아 영역을 폭포처럼 쏟아 붓고, 거기에 따라 고립된 자아 영역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과 더불어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게 되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상황을 무아지경으로 경험하게 된다. 나와 사랑하는 그 사람은 하나다. 고독은 더 이상 없다라고.
어떤 경우에 사랑에 빠지는 행동은 일종의 퇴행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우리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와 하나가 되었던 기억과 같은 것이다. (P121)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의지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도 아니다. (P123)

내가 부부들 문제를 상담하면서 갖게 된 확고한 결론은, 개방적인 결혼생활이야말로 유일한 성숙하고 건전한 결혼생활로서 정신건강을 파괴하지도 않으며, 배우자들 각각의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P130)

요약하면, 사랑에 빠져 성행위를 할 때 수반되는 자아 영역의 일시적인 붕괴는 다른 사람과 함께 참사랑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시발점이다. 뿐만 아니라 참사랑을 지속적으로 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신비롭고 지속적인 황홀감을 약간 맛보여 주기도 한다. 혹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참사랑을 향한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며 그것은 사랑의 크고 신비로운 전체 구도의 일부분일 뿐이다. (P136-137)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상대방과 함께 살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P138)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 희생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것이다. 다시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 나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보다는 확대시키고,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P164)

“사랑은 행동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P170)

현대의 모든 정신 분석 도구를 다 이용해서 의지를 분석할 때, 의지가 강하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행한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의지 있는 행동을 할 때 나타나는 긴장은 의식을 명백히 지탱하려는 노력이며, 그것은 또한 집중적인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노력이다. –롤로 메이 (P172)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P172)

“위대한 지혜는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 (P180)

사랑이란 부지런한 자만이 성취할 수 있으며, 사랑하지 않음은 곧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같다. (P187)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한 태도로 사랑의 힘을 구사하는 방법일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예는 사랑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다. (P218)

나는 환자들에게 감정은 그들의 노예이며 자기 절제 훈련은 노예를 소유하는 기술과 같다고 말해 준다. (P227)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는 나 자신을 확대하고 있으며, 나 자신을 확대할 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커진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다시 채우는 것이다. (P232)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를 전적으로 나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지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그 개성을 격려해준다. 다른 사람의 독립성을 인지 못하는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P234)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 또는 상실의 위험에 직면하면서까지 독립성을 길러 주려 애쓰는 것이다. (P245)


[제 3부 성장과 종교]

비록 부정확하고 제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이해(세계관)를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종료를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268)

하느님의 성격에 관한 우리의 첫째 견해는 바로 우리의 부모의 성격을 투사한 것이며 또는 부모들의 성격을 혼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P276)

생동적이며, 우리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P281)

과학은 회의의 종교이다. (P283)

회의하기 이전의 하느님은 회의를 거친 후의 하느님과 전혀 다르다. (P329)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그날 그날의 사건들을 기적의 증거로, 동시에 과학적인 조화를 유지하면서 들여다보아야만 할 것이다. (P339)


[제 4부 은총]

자기 부모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환자는 드물다. (P348)

‘자유연상’은 우리들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이 세계에 대한 극적인 통찰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P359)

무의식이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의식이 그것에 저항하기 때문인 것 같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은 정신질환을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의식이라는 악마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바로 칼 융인데,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일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는 이것을 ‘무의식의 지혜’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 경험을 보아도 정신질환이 무의식의 소산이 아니라고 하는 융의 견해가 옳다고 확신한다. 정신질환은 오히려 의식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거나 의식과 무의식의 부조화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P362)

실수는 모든 억압된 감정을 드러내 준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실수는 우리가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P365)

바로 이 ‘깨닫는다’는 말은 ‘다시 안다’는 뜻이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새삼스러이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때로는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 우리 내부에 이미 모든 지식과 지혜가 갖추어져 있어 그것을 새삼스러이 발견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개념은 교육이라는 단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교육 education은 라틴어 educare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글자 그대로라면 ‘밖으로 드러내다’ 혹은 ‘앞으로 이끌다’의 뜻이다. 즉 우리가 누구를 교육한다고 할 때, 말 그대로라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뭔가 새로운 것을 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의 세계로 옮겨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은 모든 지식의 창고였던 것이다. (P369)

기억 현상에 관련된 유전자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과학 실험에서 밝혀진 바로는 유전자가 지식을 유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식이 핵산 코드 형태로 세포 속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지식을 과학적으로 저장할 수 있다는 개념은 인간에게 유용한 여러 지식들이 어떻게 해서 조그만 두뇌 속에 저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P371)

웹스터 사전에서는 초능력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귀중한 것을 뜻밖에 찾아내는 재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P376)

자아의 확대라고 정의될 수 있는 사랑은 바로 진화다. 그것도 진행중인 진화이다.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진화의 힘은 인간의 사랑으로 인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애라고 하는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P391)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P394)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영혼의 성숙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게으름의 본성에 관해 보다 시야를 넓게 가지고 살펴보아야겠다. 게으름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P396)

그러므로 원죄는 존재한다. 그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실재하는 현실이다…..게으름은 우리를 끌어내리고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P399)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P399)

정말 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열러 보이는 것이 귀찮아서 회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닫고 지낸다. 그들은 자신의 게으름을 유지하고 병든 자아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능력이 닿는 한 모든 행동을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행동하다 보면 그들은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게 된다. (P406)

엔트로피가 사악한 폭력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가 되며 인간에게 내재한 악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사회적 권력이라는 것이다. (P407)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인 것이다. (P410)

어떤 상황의 본질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의 동기, 행위의 결과 및 연원 등에 관하여 완전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에게만 기대할 수 있었던 수준의 깨달음을 직접 얻는 셈이다. 우리의 의식적 자아는 하느님의 정신과 결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계의 영적 성장과 위대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고 겸손하다. 그들의 바로 이런 깨달음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비범한 지혜는 무의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P418)

증후군과 질병은 동일한 현상이 아니다. 질병은 증후군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생겨난다. 증후군은 병이 아니라 치료의 단서이다. 원하지 않아도 증후군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것이 은총의 한 양상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무의식이 전해 주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을 점검하며 재정비할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메시지 말이다. (P427)

은총은 우리의 의식 세계 바깥에 있는 강력한 힘으로서 무의식이라고 하는 대리자를 통해 작용할 뿐만 아니라 부모님말고도 사랑을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용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온다. (P436)

“부름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받은 자는 적다”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은총에로 불려가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에 귀기울인다.”라고 해석하고 싶다. (P436)

은총이 인간의 진화라고 하는 사다리로 우리를 밀어 올리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인 것처럼 엔트로피는 우리로 하여금 그 힘에 저항하여 지금의 편안한 자리에 그냥 머무르게 하거나 훨씬 적은 힘이 요구되는 사다리의 아랫단으로 내려가도록 부추긴다. (P437)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부지런하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P441)

우리가 은총을 선택함과 동시에 은총에 의해 선택된다고 하는 역설은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초능력은 ‘가치있거나 호감이 가는 일이나 사물을 일부러 애쓰지 않고도 찾아내는 재능’이라 정의될 수 있다. 부처는 애써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해탈이 그에게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가 해탈을 얻기 전 적어도 십육 년간이나 그것을 찾아 헤매었으며 십육 년간이나 그것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해탈이 그에게로 왔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그는 해탈을 찾아 헤매야만 했으면서 또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P447)

우리 자신과 의식적 의지를 넘어서 우리의 성장과 진보를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느낌을 뒤집어 엎을 수 있다.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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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기원
2005.09.22 12:19:39 *.190.172.104
귀하고 좋은책 고맙습니다. 길(道)에 관심이 많습니다. 잘 걷고 잘 다녀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될 수있겠지요. 오병곤선생님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며 신의 행운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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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
2005.09.23 16:01:30 *.107.125.103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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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란
2005.09.29 21:53:05 *.235.41.14
이리 정리를 해 주셨네요. 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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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10.04 12:22:03 *.248.117.3
윗분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훈련'과 '사랑'에 관한 부분은 좋은 내용이 많아 음미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사랑하며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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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2005.10.04 20:02:28 *.118.67.80
몇 주전 사놓고도 읽어 보지 못했는데...
이 달이 가기전에 꼭 읽어야겠습니다.
갈수록 글의 내공이 쌓이는 걸 느낍니다.
조만간 좋은 결실이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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