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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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칭기스 칸과 세계사
몽골 부족의 계산으로 본 범의 해인 1206년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알타이 산맥까지 몽골 부족을 통일한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의 원류에서 초원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전무후무한 몽골민족을 통치할 칸을 선출할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테무진은 현대의 서유럽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단일한 몽골민족의 땅으로 만들었으며, 약 100만 명의 유목 부족민을 다스렸고 1,500만에서 2,000만 마리의 가축을 거느린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는(몽골어의 chin이라는 의미) 칭기스 칸으로 선출되었다.
칭키스 칸이 몽골부족을 통일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원인들 중 가장 큰 하나는 사람의 재능을 친족 중심의 혈통에 따라 평가한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평가하고 그들을 중용한 데 있었다. 젤메, 수베데이, 등이 칭기스 칸이 초원의 어린 시절부터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이면서 몽골의 중요한 전쟁이나 원정에서 칭기스 칸을 대신해서 책임지고 수행하였다. 친족 이외의 모든 사람은 적이라는 당시의 초원의 관행에 비교할 때 칭기스 칸의 인사 전략은 말 그대로 혁명이었고 이는 당시 많은 하층 몽고 전사들의 호응을 얻어 몽골을 통일하는 기초가 되었고, 이 방식은 제국을 건설하는 60년 동안 장군들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칭기스 칸 역시 장군을 벌하거나 장군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을 정도로 충성심과 복종을 이끌어 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군사 조직의 개편이다. 몽고 전사들을 아르반(10호)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를 편성하여 분대원들끼리 서로 형제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친족 집단이나 부족과 관계없이 그들은 형제처럼 함께 살고 싸워야 했다. 맏형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가족처럼 몽골 아르반에서도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분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분대원들이 의견을 모아 다른 사람에게 이 자리를 맡길 수도 있었다. 분대 열이 모여, 즉 100명이 모여 자군(백호)이라고 부르는 중대를 이루었고, 중대 열이 모이면 밍긴(천호)이라고 불리는 연대를 이루었고 밍간이 열 모이면 투멘(만호)이라는 사단을 이루었다. 칭기스 칸은 이러한 십진법에 따른 군사 조직을 만듦으로써,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가 지중해 동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적, 상업적, 예술적, 지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었듯이 몽골족도 거의 똑같은 개혁을 통해 아시아 내륙의 초원지대에서 아테네보다 훨씬 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모든 유목민 부족이 단결하고 칭기스 칸이 통치자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자, 몽골인은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막막해했던 것 같다. 칭기스 칸은 오랜 세월 동안 몽골 내부 부족들과의 경쟁에서 그들이 사라지자 그의 커다란 집단은 목적을 상실했다. 칭기스 칸은 새로운 적을 찾는 것 같았지만, 특별히 눈에 뛰는 부족은 없었다. 장남 주치가 정벌한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인들에게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면서 칭키스 칸은 위구르의 농업문명의 부와 초원지대의 궁핍의 극명한 대조를 실감하였다. 칭키스 칸은 대군을 호령했지만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했다. 반면 남쪽 고비 사막 너머에는 비단길을 따라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물자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칭키스 칸은 이런 물자 흐름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자신의 군대를 다른 군대와 맞붙여 그의 통치하에 있는 민족의 부를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다. 궁극적으로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권력은 군사적인 힘과 함께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 확고한 통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식한 칭키스 칸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을 전쟁으로 보았다. 전쟁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일치하였다. 초원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물자가 나오는 곳의 봉신이 되어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는데 칭기스 칸은 봉신이 되기 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약탈을 결정하게 된다. 결국 이것이 1211년부터 1261년 동안의 50년 몽골 세계대전이 시작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다.
칭기스 칸의 지도하에 세계를 정벌한 몽골인은 비단길을 통제하고 그 교역을 확대함으로써 사상 유래없는 동양과 서양의 잉태를 촉진시켰다. 다소 길지만 칭기스 칸과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란 인용을 들어보자.
[몽골인은 과학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 주었다.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던 그는 성, 요새, 도시, 성벽의 건설은 우습게 보았지만, 다리는 역사상 그 어느 통치자보다 많이 놓았을 것이다. 군대와 물자를 더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내와 강을 수백 개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세계의 문을 열어 물자만이 아니라 사상과 지식도 흐르게 했다. 몽골인은 독일의 광부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고, 중국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데려갔다. 이런 이동에는 기념비적인 것도 있었고 사소한 것도 있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퍼뜨렸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식했으며, 국수, 카드, 차를 중국에서 서구로 가져갔다. 그들은 파리의 금속세공 장인을 데려와 몽골의 건조한 초원지대에 분수를 만들게 했고, 영국의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했으며, 지문을 찍는 중국의 관행을 페르시아에도 옮겨놓았다. 중국에서는 기독교 교회 건립, 페르시아에서는 절과 탑 건립, 러시아에서는 ‘쿠란’을 가르치는 이슬람 신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다. 몽골인은 정복자로서 지구를 휩쓸었지만, 문화의 전달자 역할에서도 달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칭기스 칸의 제국을 물려받은 몽골인은 생산품과 상품을 이동시키고 그것을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생산품과 전례 없는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일을 과감하게 추진해나갔다. 중국, 페르시아, 유럽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중국의 화약과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시킨 뒤 유럽의 종주조 기술을 응용하자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과학기술 혁신품인 대포가 탄생했다. 권총에서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근대 무기의 발전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각의 물품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몽골인이 과학기술을 골라서 조합하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발군의 합성물이 탄생했다.
몽골인은 정치, 경제, 지성의 면에서도 헌신적인 태도로 꾸준하게 국제주의적 열정을 과시했다.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려 했을 뿐 아니라, 자유무역, 단일한 국제법, 모든 언어에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알파벳에 기초한 세계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칭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지폐를 도입했고, 문맹을 없앨 목적으로 모든 아동에게 보편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초등학교를 세우려 했다. 정확한 만세력을 만들었으며, 이전 어느 때보다 광범위한 지도 수집을 후원했다. 몽골인은 상인들이 육로로 제국에 오도록 권했으며, 상업과 외교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땅과 바다를 가로질러 멀리 아프리카까지 탐사대를 보냈다.
몽골인니 손을 댄 나라의 주민은 대개 처음에는 미지의 야만적인 부족과의 파괴와 정복 때문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 유례없는 문화교류, 교역확대, 생활수준 개선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유럽에서 몽골인은 대륙의 기사들을 학살했지만, 이 지역이 중국이나 무슬림 국가들과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빈곤한 것에 실망했기 때문에 구태여 도시를 정복하려 하지도, 나라를 약탈하거나 제국에 편입시키려 하지도 았고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결국 유럽은 고통은 제일 적게 겪었으면서도, 베네치아의 폴로 가문 같은 상인들이나 몽골 칸과 유럽의 교황이나 왕 사이에 교환한 사절을 통한 접촉의 이익은 모두 누릴 수 있었다. 새로운 과학기술, 지식, 상업적 부는 르네상스를 낳았으며, 유럽은 이 시기의 자신의 이전 문화 일부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점은 동양으로부터 인쇄술, 화기, 나침반, 주판 등 과학기술을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
2. 쿠빌라이 칸과 원 왕조
칭기스 칸 사후 4대 대칸이 된 손자 뭉케 칸은 동생 훌레구에게는 중동의 땅과 사람들을 정복하게 하고, 또 다른 동생 쿠빌라이에게는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남부를 합병하게 한다. 훌레구는 중동을 점령하고 그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와 이라크를 아우르는 ‘일칸국’을 세우는 기틀을 만들었지만, 쿠빌라이는 싸움보다는 잔치를 즐기고 뚱뚱한 몸에 통풍마저 생기는 등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송나라 정벌이 늦어지자 뭉케 칸 스스로 송나라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1258년 뭉케 칸이 군대를 이끌고 황허를 건넌지 일 년이 안되어 시베리아 접경에서부터 습하고 따뜻한 남부에 이르는 땅을 장악하고 2차년도에 송나라를 향해 진격하는 도중 이질(여러 설이 있으나 이질로 인한 사망설이 가장 정확한 듯하다)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고 제국은 그 상태에서 응결되고 만다.
새로운 대칸을 선출해야 하는 시점에 중동의 훌레구나 러시아의 주치의 후손인 황금오르도는 이미 통제하고 있는 영토를 놓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몽골에서 대칸의 칭호에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음으로써 쿠빌라이는 또 다른 형제인 아릭 부케와의 대칸 경쟁에서 승리하여 확실한 대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는 세계 최대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할아버지 칭기스 칸이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중국을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 몽골제국은 칭기스 칸의 황금 가족의 후손들인 쿠빌라이의 원왕조(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 주치의 후손들인 킵착 칸국(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 훌레구의 일 칸국(아프카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는 땅), 우구데이의 손자 카이두의 모굴리스탄(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에서 아프카니스탄에 이르는 지역) 으로 4분되었다.
이제 몽골제국의 정통성은 다스리는 인구의 숫자에서나 영토라는 면에서는 재화財貨라는 부분에서나 가장 강한 사람이 갖게 되는 대칸의 칭호를 갖게 된 원 왕조의 쿠빌라이 칸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집안 누구보다도 예리한 전략적 재능을 갖추었으며, 쓸 만한 구상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그는 이런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토를 관리했으며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수도를 건설하고,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고, 중국식 왕조를 창건하고,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중국인보다,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는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 사상 최초로 현대의 통일 중국과 유사한 땅과 조직 체계, 민족주의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쿠빌라이 칸의 최대 업적은 관료 조직 즉, 공무원의 개념을 정확하게 도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제국의 유지에 필요한 첫 번째가 강한 군대이고 두 번째는 훌륭한 선전 그리고 세 번째가 좋은 행정과 정책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실제 이를 제국의 운영에 적용하였다. 이제 그의 업적을 그려봄으로써 확인해 보자.
그는 먼저 새로 정복한 영토의 한족과 우호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무사宣撫使를 설치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의 법과 양립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전을 중심으로 민간 행정을 짜나갔다. 지주에게 소유권을 보장하고, 세금을 낮추고, 도로와 통신을 개선했다.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법을 완화했다. 중법죄의 숫자는 233개에서 135개로 거의 반으로 줄였다. 쿠빌라이 칸의 치세 30년 동안 처형된 범죄자는 2500명 이하였다. 평균 사형 건수로 보자면 현대의 중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의 사형건수보다 훨씬 적다.
전체적으로 쿠빌라이의 법과 처벌 체계는 송나라의 체계보다 일관적이었고 상당히 온건하고 온정적이었다. 가는 가능한 곳에서는 신체적 벌금을 도입했으며, 잘못을 뉘우치는 범죄자들은 사면해주는 절차도 만들었다. 실례로 1291년 몽골 법전은 고문에 대해 “먼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추측해야 하며, 무턱대고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또한 범죄자에 대해 이마에 자자刺字하는 행위를 두 번째 범죄에 대해서는 팔 윗부분에 그리고 세 번째일 경우에는 목부분에 허용했으며 이마에는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죄명을 몸에 쓰는 것보다도 범죄자의 집 앞에 세운 판에 적어 동네 사람들이 범죄자를 감사하게 하였다. 또 가석방 제도도 만들어 자유를 얻은 죄수가 한 달에 두 번씩 지역 관헌에게 신고를 하고 행동을 평가받게 했다. 보조적인 법집행기구에 들어가 자신의 지식이나 범죄를 이용해 다른 범죄자를 잡는 데 협조하는 것도 죄수를 석방하는 한 가지 요소가 되도록 하였다. 몽골당국은 분쟁 해결을 위해 범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다룬 책의 인쇄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형법의 영역에서 몽골은 관헌이 범죄 현장을 방문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보고하는 최소한의 절차를 세워놓았다. 이러한 몽골의 법 체계는 물론 법 집행의 수준을 높였지만, 교육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법을 알고 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몽골의 최우선적 정책과도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수의 몽골인이 중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은 오랜 공부와 시험 과정을 통해 선발된 전통적인 관료에게 행정을 맡기는 낡은 체제를 지속시키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외국인 특히 무슬림의 행정지원을 받았다. 형제의 영토 페르시아에서 ‘도시의 법과 관습’에 쓸모가 있는 그런 사람들을 대량 수입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하나의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여 늘 중국인과 외국인을 다양하게 섞어놓았다. 그리하여 몽골은 각 관청에 중국 북부, 중국 남부, 외국인 등 3대 집단(각각 한인, 남인, 색목인이라 불렀다)의 인종비율을 유지하였다. 할아버지 칭기스 칸이 그러했듯이 쿠빌라이도 늘 요리사, 문지기, 서기, 통역 등 밑바닥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승진시키는 일이 많아서 하층에 있는 사람들의 몽골 지배자에 대한 의존과 충성이 강해져서 피지배자들과 연결된 끈은 희미해져 갔다. 과거의 행정제도는 보수를 받지 않는 학자 겸 관리들에 의존하여 이들은 일을 해주거나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사람들한테서 돈을 강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상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직에는 보수를 주는 직원을 고용했다. 이들의 보수는 몽골 영토 전역에서 표준화되었으며, 다만 생활비 차이를 고려하여 지역마다 약간 다르게 지급했다. 합의를 전제로 한 회의체와 보수를 지급하는 공무원 제도를 만들려는 노력은 중국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몽골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지만, 그후 20세기에 이르러 공화국 창건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지방 회의체, 토론, 보수를 받는 행정가, 시민 참여 정부 등의 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쿠빌라이 칸은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하였다. 지폐가 사용되는 곳에서는 신용이 확대되면서 재정적인 재난이 닥칠 위험도 늘어났다. 몽골 법에는 파산 신고 조항이 있었는데, 이것은 특히 신용의 확대와 관련하여 시장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획된 중요한 혁신 조치였다. 그러나 상인이나 거래처가 부채를 고의로 지불하지 않는 일을 막기 위해 두 번까지만 허용했다. 세 번째부터는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몽골은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한 방법으로 문맹 퇴치를 장려하고 농민의 자식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이 교육할 수 있는 공립학교를 만들었다. 몽골왕조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전국에 공립학교가 2만 166개가 세워졌다. 정부가 보통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공교육 책임을 떠맡은 것은 거의 5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기 때문에 몽골의 업적은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
몽골이 관장하는 새 나라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문명의 약 5배 크기의 규모였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덧없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는 단기적 전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륙문명의 충성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20년에 걸쳐 장기적인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수도와 관리들을 정복하면서 최고 수준에 이른 중국 문명을 만났음을 깨닫고 오랫동안 이들의 업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제국을 개혁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쿠빌라이 칸은 일본 학자 오카다 히데히로가 썼듯이, “몽골 제국이 중국인들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유산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다.”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처럼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나갔다.
3. 주식회사 몽골
몽골의 상업적 영향은 그들의 군대보다 훨씬 멀리까지 퍼져갔으며,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몽골 제골이 ‘몽골 회사’로 바뀌었다. 13세기 내내 그리고 14세기 초에 몽골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 내지 50km마다 자리잡고 있는 대피소에 물자를 쟁여두었다. 역참은 운송용 동물만이 아니라 상인이 험한 지형을 헤쳐나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인까지 제공했다. 몽골 당국은 이 교역로를 통한 무역로를 통한 무역을 장려하여 여권과 신용카드의 기능을 합친 초보적인 유형의 신분증(파이자)을 나누어 주었다. 파이자를 가진 사람은 제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보호를 받고, 편의수단과 교통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지방세나 관세도 면제받았다.
몽골이 교역로를 확장하고 유지했던 것은 그들이 상업이나 교통을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기원은 칭기스 칸이 공식적으로 정해놓은 몽골 부족의 분배, 즉 쿠비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병사뿐만 아니라 고아와 과부까지 전리품의 적당한 몫을 챙길 권리가 있었듯이, 황금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제국의 각 지역의 부에서 자기 몫을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몽골인이 아닌 행정관들이 보수를 받았던 반면 몽골의 고위직 관리는 자기몫의 물자를 받았다. 그러면 그것을 시장에서 팔거나 돈으로 바꾸어 다른 상품을 구했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제국의 통치자로서 형제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중국에 비단 노동자 2만 5000가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훌레구는 또 티벳트 골짜기도 몇 개 소유하고 있었으며, 초원지대 북부의 모피와 매에서도 자기 몫을 챙겼다. 물론 고향 몽골에도 그에게 할당된 목초지, 말, 사람이 있었다. 몽골 지배 가족의 각 지파는 점성술사, 의사, 직조공, 광부, 곡예사까지 적당하게 나누어 가졌다. 쿠빌라이는 페르시아와 이라크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낙타, 말, 양, 염소떼도 소유했다. 성직자 부대가 제국전역을 돌아다니며 한 곳에서는 물자를 확인하고 다른 곳에서는 셈을 확인했다. 페르시아의 몽골인은 중국의 친족에게 향료, 강철, 진주, 보석, 직물을 공급했고, 중국의 몽고 왕실은 페르시아에 도자기와 의약품을 보냈다.
대칸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지파들 사이에 정치적 불화가 생겼음에도 경제적, 상업적 체제는 쉬지않고 가동되었다. 간헐적인 싸움 때문에 잠깐 정지되거나 우회되는 일이 생겼을뿐이다. 때로는 전쟁의 와중에도 양편은 싸움을 하면서도 분배물자의 교환을 허용했다. 우구데이 칸의 손자로서 초원지대 중앙을 통제하던 카이두는 종종 사촌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카이두 역시 중국의 난징 주변에 장인과 농부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마 그 댓가였겠지만, 그는 쿠빌라이가 초원지대 부족들로부터 자기 몫의 말이나 물자를 가져가는 것을 허용했다. 몽골제국의 행정구역은 중국, 모글리스탄, 페르시아, 러시아 등 크게 넷으로 나뉘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 요구는 줄지 않았다. 정치적 분열 때문에 오히려 과거의 분배제도를 보존할 필요가 강해졌다. 한 칸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몫을 공급하지 않으면 상대편에서도 자신의 영토에 있는 그 칸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서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분쟁을 넘어섰던 셈이다.
몽골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지역으로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일부 봉신들, 특히 중국 남부의 봉신들에게 외국 항구로 이주하여 교역기지를 설치하도록 장려했다. 몽골 왕조의 통치기간 전체에 걸쳐 수천 명의 중국인이 고향을 떠나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반도,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의 해안에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했다. 그들은 주로 운송과 교역 일을 했으며 상인으로서 항구로 통하는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직종으로도 파고들었다. 또한 남부의 무슬림 국가들을 통과하는 긴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유럽 시장에 도달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제국 가장자리 흑해 해안에 고역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장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역기지를 육지와 바다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해적과 강도를 쫒아냈다. 1340년 발간된 상업 안내서에 따르면 “몽골 카타이(중국을 말함)에 이르는 길은 낮이나 밤이나 완벽하게 안전하다.”가 강조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페르시아와 이라크의 제조업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새로운 교역로들이 개방되자 중국 제조업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 몽골의 중국 정복은 중동 군사원정만큼 파괴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 물품이 중동 시장들로 유입되는 동시에 무슬림과 인도의 과학기술이 중국으로 광범위하게 이전되도록 밀어붙였다. 몽골의 황금 가족 구성원들의 몫의 분배를 통해 유라시아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많은 부분을 통제했지만, 이런 물자의 운송과 판매는 상인 계급에게 의존했다. 몽골인은 전사에서 주주로 변신했지만, 스스로 상인이 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중국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통귀족은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불명예스럽고, 더럽고, 종종 부도덕하다고 멸시했다. 권력이나 신앙을 독점한 자들이 낮추어 보는 육체노동 직업과 같은 급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장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칭기스 칸 시대 이후 몽골인은 한 곳에서는 흔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물품이 다른 곳에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여겨져 잘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3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은 확대되어 가는 몽골의 교역망 어딘가에서 팔릴 만한 새로운 상품 또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오래된 상품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염료나 종이나 약에서부터 파스타치오나 폭죽이나 독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이 거래될 수 있었다. 마치 몽골 관리들은 어디에 사는 누구가 구매자가 될 것인지를 찾아주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몽골 작업장들은 세계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여 도자기나 비단 등 전통적인 중국 수공업품만이 아니라 특수한 시장을 노리는 완전히 새로운 물품도 생산했다. 예를 들어 상아로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을 깍아 유럽에 수출하기도 했다. 몽골이 무역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지방 생산품을 장악하고 이를 위한 국제시장을 찾아내자 새로운 직물이 다양하게 유통되었다.
4. 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페스트, 상업체제의 붕괴, 반란 이후 몽골 제국은 무장해제 되었지만, 칭기스 칸의제국은 세계사 최후의 대형 부족 제국이었다. 그는 유목 부족과 문명세계 사이의 만년 전쟁, 즉 사냥꾼 겸 목자와 농부 사이의 오랜 투쟁의 상속자였다. 이후 역사는 계속되는 유목문화와 도시 문화의 충돌에서 정주 문명을 선택하였고 그들은 끊임없이 유목 민족의 넓은 땅을 침식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칭기스 칸은 상업, 교통, 대형 세속국가로 이루어진 근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기동성 있는 전문적인 전쟁 기술, 세계화된 교역, 국제적인 세속법을 통한 통치라는 면에서 그는 철저하게 근대적인 인물이었다. 상대를 없애려는 유목민과 농부의 투쟁에서 시작된 일은 결국 몽골 방식의 문화 융합으로 끝을 맺었다.
역사에서 위대한 역할을 한 인물은 식물 표본처럼 책 속에 깔끔하게 끼워서 보관해둘 수가 없다. 그런 인물의 행동은 기차가 오고 가는 것처럼 구체적인 시간표에 따라 설명할 수 없다. 학자들은 정확하게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정하기도 하지만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 특히 갑자기 폭발한 사건들은 오랜 준비 과정을 거치며 또 일단 시작되면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 영향은 사건이 시야에서 희미해진 뒤에도 오랫동안 남는다. 종소리가 멈춘 뒤에도 간질거리는 진동은 계속 느낄 수 있듯이, 칭기스 칸은 오래 전에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행동은 우리 시대에까지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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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칭기스 칸과 세계사
몽골 부족의 계산으로 본 범의 해인 1206년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알타이 산맥까지 몽골 부족을 통일한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의 원류에서 초원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전무후무한 몽골민족을 통치할 칸을 선출할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테무진은 현대의 서유럽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단일한 몽골민족의 땅으로 만들었으며, 약 100만 명의 유목 부족민을 다스렸고 1,500만에서 2,000만 마리의 가축을 거느린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는(몽골어의 chin이라는 의미) 칭기스 칸으로 선출되었다.
칭키스 칸이 몽골부족을 통일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원인들 중 가장 큰 하나는 사람의 재능을 친족 중심의 혈통에 따라 평가한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평가하고 그들을 중용한 데 있었다. 젤메, 수베데이, 등이 칭기스 칸이 초원의 어린 시절부터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이면서 몽골의 중요한 전쟁이나 원정에서 칭기스 칸을 대신해서 책임지고 수행하였다. 친족 이외의 모든 사람은 적이라는 당시의 초원의 관행에 비교할 때 칭기스 칸의 인사 전략은 말 그대로 혁명이었고 이는 당시 많은 하층 몽고 전사들의 호응을 얻어 몽골을 통일하는 기초가 되었고, 이 방식은 제국을 건설하는 60년 동안 장군들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칭기스 칸 역시 장군을 벌하거나 장군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을 정도로 충성심과 복종을 이끌어 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군사 조직의 개편이다. 몽고 전사들을 아르반(10호)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를 편성하여 분대원들끼리 서로 형제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친족 집단이나 부족과 관계없이 그들은 형제처럼 함께 살고 싸워야 했다. 맏형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가족처럼 몽골 아르반에서도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분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분대원들이 의견을 모아 다른 사람에게 이 자리를 맡길 수도 있었다. 분대 열이 모여, 즉 100명이 모여 자군(백호)이라고 부르는 중대를 이루었고, 중대 열이 모이면 밍긴(천호)이라고 불리는 연대를 이루었고 밍간이 열 모이면 투멘(만호)이라는 사단을 이루었다. 칭기스 칸은 이러한 십진법에 따른 군사 조직을 만듦으로써,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가 지중해 동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적, 상업적, 예술적, 지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었듯이 몽골족도 거의 똑같은 개혁을 통해 아시아 내륙의 초원지대에서 아테네보다 훨씬 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모든 유목민 부족이 단결하고 칭기스 칸이 통치자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자, 몽골인은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막막해했던 것 같다. 칭기스 칸은 오랜 세월 동안 몽골 내부 부족들과의 경쟁에서 그들이 사라지자 그의 커다란 집단은 목적을 상실했다. 칭기스 칸은 새로운 적을 찾는 것 같았지만, 특별히 눈에 뛰는 부족은 없었다. 장남 주치가 정벌한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인들에게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면서 칭키스 칸은 위구르의 농업문명의 부와 초원지대의 궁핍의 극명한 대조를 실감하였다. 칭키스 칸은 대군을 호령했지만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했다. 반면 남쪽 고비 사막 너머에는 비단길을 따라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물자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칭키스 칸은 이런 물자 흐름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자신의 군대를 다른 군대와 맞붙여 그의 통치하에 있는 민족의 부를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다. 궁극적으로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권력은 군사적인 힘과 함께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 확고한 통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식한 칭키스 칸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을 전쟁으로 보았다. 전쟁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일치하였다. 초원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물자가 나오는 곳의 봉신이 되어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는데 칭기스 칸은 봉신이 되기 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약탈을 결정하게 된다. 결국 이것이 1211년부터 1261년 동안의 50년 몽골 세계대전이 시작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다.
칭기스 칸의 지도하에 세계를 정벌한 몽골인은 비단길을 통제하고 그 교역을 확대함으로써 사상 유래없는 동양과 서양의 잉태를 촉진시켰다. 다소 길지만 칭기스 칸과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란 인용을 들어보자.
[몽골인은 과학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 주었다.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던 그는 성, 요새, 도시, 성벽의 건설은 우습게 보았지만, 다리는 역사상 그 어느 통치자보다 많이 놓았을 것이다. 군대와 물자를 더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내와 강을 수백 개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세계의 문을 열어 물자만이 아니라 사상과 지식도 흐르게 했다. 몽골인은 독일의 광부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고, 중국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데려갔다. 이런 이동에는 기념비적인 것도 있었고 사소한 것도 있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퍼뜨렸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식했으며, 국수, 카드, 차를 중국에서 서구로 가져갔다. 그들은 파리의 금속세공 장인을 데려와 몽골의 건조한 초원지대에 분수를 만들게 했고, 영국의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했으며, 지문을 찍는 중국의 관행을 페르시아에도 옮겨놓았다. 중국에서는 기독교 교회 건립, 페르시아에서는 절과 탑 건립, 러시아에서는 ‘쿠란’을 가르치는 이슬람 신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다. 몽골인은 정복자로서 지구를 휩쓸었지만, 문화의 전달자 역할에서도 달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칭기스 칸의 제국을 물려받은 몽골인은 생산품과 상품을 이동시키고 그것을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생산품과 전례 없는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일을 과감하게 추진해나갔다. 중국, 페르시아, 유럽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중국의 화약과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시킨 뒤 유럽의 종주조 기술을 응용하자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과학기술 혁신품인 대포가 탄생했다. 권총에서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근대 무기의 발전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각의 물품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몽골인이 과학기술을 골라서 조합하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발군의 합성물이 탄생했다.
몽골인은 정치, 경제, 지성의 면에서도 헌신적인 태도로 꾸준하게 국제주의적 열정을 과시했다.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려 했을 뿐 아니라, 자유무역, 단일한 국제법, 모든 언어에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알파벳에 기초한 세계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칭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지폐를 도입했고, 문맹을 없앨 목적으로 모든 아동에게 보편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초등학교를 세우려 했다. 정확한 만세력을 만들었으며, 이전 어느 때보다 광범위한 지도 수집을 후원했다. 몽골인은 상인들이 육로로 제국에 오도록 권했으며, 상업과 외교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땅과 바다를 가로질러 멀리 아프리카까지 탐사대를 보냈다.
몽골인니 손을 댄 나라의 주민은 대개 처음에는 미지의 야만적인 부족과의 파괴와 정복 때문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 유례없는 문화교류, 교역확대, 생활수준 개선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유럽에서 몽골인은 대륙의 기사들을 학살했지만, 이 지역이 중국이나 무슬림 국가들과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빈곤한 것에 실망했기 때문에 구태여 도시를 정복하려 하지도, 나라를 약탈하거나 제국에 편입시키려 하지도 았고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결국 유럽은 고통은 제일 적게 겪었으면서도, 베네치아의 폴로 가문 같은 상인들이나 몽골 칸과 유럽의 교황이나 왕 사이에 교환한 사절을 통한 접촉의 이익은 모두 누릴 수 있었다. 새로운 과학기술, 지식, 상업적 부는 르네상스를 낳았으며, 유럽은 이 시기의 자신의 이전 문화 일부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점은 동양으로부터 인쇄술, 화기, 나침반, 주판 등 과학기술을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
2. 쿠빌라이 칸과 원 왕조
칭기스 칸 사후 4대 대칸이 된 손자 뭉케 칸은 동생 훌레구에게는 중동의 땅과 사람들을 정복하게 하고, 또 다른 동생 쿠빌라이에게는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남부를 합병하게 한다. 훌레구는 중동을 점령하고 그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와 이라크를 아우르는 ‘일칸국’을 세우는 기틀을 만들었지만, 쿠빌라이는 싸움보다는 잔치를 즐기고 뚱뚱한 몸에 통풍마저 생기는 등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송나라 정벌이 늦어지자 뭉케 칸 스스로 송나라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1258년 뭉케 칸이 군대를 이끌고 황허를 건넌지 일 년이 안되어 시베리아 접경에서부터 습하고 따뜻한 남부에 이르는 땅을 장악하고 2차년도에 송나라를 향해 진격하는 도중 이질(여러 설이 있으나 이질로 인한 사망설이 가장 정확한 듯하다)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고 제국은 그 상태에서 응결되고 만다.
새로운 대칸을 선출해야 하는 시점에 중동의 훌레구나 러시아의 주치의 후손인 황금오르도는 이미 통제하고 있는 영토를 놓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몽골에서 대칸의 칭호에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음으로써 쿠빌라이는 또 다른 형제인 아릭 부케와의 대칸 경쟁에서 승리하여 확실한 대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는 세계 최대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할아버지 칭기스 칸이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중국을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 몽골제국은 칭기스 칸의 황금 가족의 후손들인 쿠빌라이의 원왕조(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 주치의 후손들인 킵착 칸국(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 훌레구의 일 칸국(아프카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는 땅), 우구데이의 손자 카이두의 모굴리스탄(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에서 아프카니스탄에 이르는 지역) 으로 4분되었다.
이제 몽골제국의 정통성은 다스리는 인구의 숫자에서나 영토라는 면에서는 재화財貨라는 부분에서나 가장 강한 사람이 갖게 되는 대칸의 칭호를 갖게 된 원 왕조의 쿠빌라이 칸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집안 누구보다도 예리한 전략적 재능을 갖추었으며, 쓸 만한 구상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그는 이런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토를 관리했으며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수도를 건설하고,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고, 중국식 왕조를 창건하고,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중국인보다,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는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 사상 최초로 현대의 통일 중국과 유사한 땅과 조직 체계, 민족주의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쿠빌라이 칸의 최대 업적은 관료 조직 즉, 공무원의 개념을 정확하게 도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제국의 유지에 필요한 첫 번째가 강한 군대이고 두 번째는 훌륭한 선전 그리고 세 번째가 좋은 행정과 정책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실제 이를 제국의 운영에 적용하였다. 이제 그의 업적을 그려봄으로써 확인해 보자.
그는 먼저 새로 정복한 영토의 한족과 우호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무사宣撫使를 설치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의 법과 양립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전을 중심으로 민간 행정을 짜나갔다. 지주에게 소유권을 보장하고, 세금을 낮추고, 도로와 통신을 개선했다.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법을 완화했다. 중법죄의 숫자는 233개에서 135개로 거의 반으로 줄였다. 쿠빌라이 칸의 치세 30년 동안 처형된 범죄자는 2500명 이하였다. 평균 사형 건수로 보자면 현대의 중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의 사형건수보다 훨씬 적다.
전체적으로 쿠빌라이의 법과 처벌 체계는 송나라의 체계보다 일관적이었고 상당히 온건하고 온정적이었다. 가는 가능한 곳에서는 신체적 벌금을 도입했으며, 잘못을 뉘우치는 범죄자들은 사면해주는 절차도 만들었다. 실례로 1291년 몽골 법전은 고문에 대해 “먼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추측해야 하며, 무턱대고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또한 범죄자에 대해 이마에 자자刺字하는 행위를 두 번째 범죄에 대해서는 팔 윗부분에 그리고 세 번째일 경우에는 목부분에 허용했으며 이마에는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죄명을 몸에 쓰는 것보다도 범죄자의 집 앞에 세운 판에 적어 동네 사람들이 범죄자를 감사하게 하였다. 또 가석방 제도도 만들어 자유를 얻은 죄수가 한 달에 두 번씩 지역 관헌에게 신고를 하고 행동을 평가받게 했다. 보조적인 법집행기구에 들어가 자신의 지식이나 범죄를 이용해 다른 범죄자를 잡는 데 협조하는 것도 죄수를 석방하는 한 가지 요소가 되도록 하였다. 몽골당국은 분쟁 해결을 위해 범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다룬 책의 인쇄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형법의 영역에서 몽골은 관헌이 범죄 현장을 방문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보고하는 최소한의 절차를 세워놓았다. 이러한 몽골의 법 체계는 물론 법 집행의 수준을 높였지만, 교육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법을 알고 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몽골의 최우선적 정책과도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수의 몽골인이 중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은 오랜 공부와 시험 과정을 통해 선발된 전통적인 관료에게 행정을 맡기는 낡은 체제를 지속시키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외국인 특히 무슬림의 행정지원을 받았다. 형제의 영토 페르시아에서 ‘도시의 법과 관습’에 쓸모가 있는 그런 사람들을 대량 수입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하나의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여 늘 중국인과 외국인을 다양하게 섞어놓았다. 그리하여 몽골은 각 관청에 중국 북부, 중국 남부, 외국인 등 3대 집단(각각 한인, 남인, 색목인이라 불렀다)의 인종비율을 유지하였다. 할아버지 칭기스 칸이 그러했듯이 쿠빌라이도 늘 요리사, 문지기, 서기, 통역 등 밑바닥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승진시키는 일이 많아서 하층에 있는 사람들의 몽골 지배자에 대한 의존과 충성이 강해져서 피지배자들과 연결된 끈은 희미해져 갔다. 과거의 행정제도는 보수를 받지 않는 학자 겸 관리들에 의존하여 이들은 일을 해주거나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사람들한테서 돈을 강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상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직에는 보수를 주는 직원을 고용했다. 이들의 보수는 몽골 영토 전역에서 표준화되었으며, 다만 생활비 차이를 고려하여 지역마다 약간 다르게 지급했다. 합의를 전제로 한 회의체와 보수를 지급하는 공무원 제도를 만들려는 노력은 중국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몽골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지만, 그후 20세기에 이르러 공화국 창건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지방 회의체, 토론, 보수를 받는 행정가, 시민 참여 정부 등의 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쿠빌라이 칸은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하였다. 지폐가 사용되는 곳에서는 신용이 확대되면서 재정적인 재난이 닥칠 위험도 늘어났다. 몽골 법에는 파산 신고 조항이 있었는데, 이것은 특히 신용의 확대와 관련하여 시장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획된 중요한 혁신 조치였다. 그러나 상인이나 거래처가 부채를 고의로 지불하지 않는 일을 막기 위해 두 번까지만 허용했다. 세 번째부터는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몽골은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한 방법으로 문맹 퇴치를 장려하고 농민의 자식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이 교육할 수 있는 공립학교를 만들었다. 몽골왕조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전국에 공립학교가 2만 166개가 세워졌다. 정부가 보통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공교육 책임을 떠맡은 것은 거의 5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기 때문에 몽골의 업적은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
몽골이 관장하는 새 나라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문명의 약 5배 크기의 규모였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덧없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는 단기적 전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륙문명의 충성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20년에 걸쳐 장기적인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수도와 관리들을 정복하면서 최고 수준에 이른 중국 문명을 만났음을 깨닫고 오랫동안 이들의 업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제국을 개혁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쿠빌라이 칸은 일본 학자 오카다 히데히로가 썼듯이, “몽골 제국이 중국인들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유산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다.”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처럼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나갔다.
3. 주식회사 몽골
몽골의 상업적 영향은 그들의 군대보다 훨씬 멀리까지 퍼져갔으며,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몽골 제골이 ‘몽골 회사’로 바뀌었다. 13세기 내내 그리고 14세기 초에 몽골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 내지 50km마다 자리잡고 있는 대피소에 물자를 쟁여두었다. 역참은 운송용 동물만이 아니라 상인이 험한 지형을 헤쳐나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인까지 제공했다. 몽골 당국은 이 교역로를 통한 무역로를 통한 무역을 장려하여 여권과 신용카드의 기능을 합친 초보적인 유형의 신분증(파이자)을 나누어 주었다. 파이자를 가진 사람은 제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보호를 받고, 편의수단과 교통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지방세나 관세도 면제받았다.
몽골이 교역로를 확장하고 유지했던 것은 그들이 상업이나 교통을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기원은 칭기스 칸이 공식적으로 정해놓은 몽골 부족의 분배, 즉 쿠비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병사뿐만 아니라 고아와 과부까지 전리품의 적당한 몫을 챙길 권리가 있었듯이, 황금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제국의 각 지역의 부에서 자기 몫을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몽골인이 아닌 행정관들이 보수를 받았던 반면 몽골의 고위직 관리는 자기몫의 물자를 받았다. 그러면 그것을 시장에서 팔거나 돈으로 바꾸어 다른 상품을 구했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제국의 통치자로서 형제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중국에 비단 노동자 2만 5000가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훌레구는 또 티벳트 골짜기도 몇 개 소유하고 있었으며, 초원지대 북부의 모피와 매에서도 자기 몫을 챙겼다. 물론 고향 몽골에도 그에게 할당된 목초지, 말, 사람이 있었다. 몽골 지배 가족의 각 지파는 점성술사, 의사, 직조공, 광부, 곡예사까지 적당하게 나누어 가졌다. 쿠빌라이는 페르시아와 이라크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낙타, 말, 양, 염소떼도 소유했다. 성직자 부대가 제국전역을 돌아다니며 한 곳에서는 물자를 확인하고 다른 곳에서는 셈을 확인했다. 페르시아의 몽골인은 중국의 친족에게 향료, 강철, 진주, 보석, 직물을 공급했고, 중국의 몽고 왕실은 페르시아에 도자기와 의약품을 보냈다.
대칸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지파들 사이에 정치적 불화가 생겼음에도 경제적, 상업적 체제는 쉬지않고 가동되었다. 간헐적인 싸움 때문에 잠깐 정지되거나 우회되는 일이 생겼을뿐이다. 때로는 전쟁의 와중에도 양편은 싸움을 하면서도 분배물자의 교환을 허용했다. 우구데이 칸의 손자로서 초원지대 중앙을 통제하던 카이두는 종종 사촌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카이두 역시 중국의 난징 주변에 장인과 농부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마 그 댓가였겠지만, 그는 쿠빌라이가 초원지대 부족들로부터 자기 몫의 말이나 물자를 가져가는 것을 허용했다. 몽골제국의 행정구역은 중국, 모글리스탄, 페르시아, 러시아 등 크게 넷으로 나뉘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 요구는 줄지 않았다. 정치적 분열 때문에 오히려 과거의 분배제도를 보존할 필요가 강해졌다. 한 칸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몫을 공급하지 않으면 상대편에서도 자신의 영토에 있는 그 칸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서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분쟁을 넘어섰던 셈이다.
몽골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지역으로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일부 봉신들, 특히 중국 남부의 봉신들에게 외국 항구로 이주하여 교역기지를 설치하도록 장려했다. 몽골 왕조의 통치기간 전체에 걸쳐 수천 명의 중국인이 고향을 떠나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반도,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의 해안에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했다. 그들은 주로 운송과 교역 일을 했으며 상인으로서 항구로 통하는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직종으로도 파고들었다. 또한 남부의 무슬림 국가들을 통과하는 긴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유럽 시장에 도달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제국 가장자리 흑해 해안에 고역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장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역기지를 육지와 바다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해적과 강도를 쫒아냈다. 1340년 발간된 상업 안내서에 따르면 “몽골 카타이(중국을 말함)에 이르는 길은 낮이나 밤이나 완벽하게 안전하다.”가 강조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페르시아와 이라크의 제조업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새로운 교역로들이 개방되자 중국 제조업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 몽골의 중국 정복은 중동 군사원정만큼 파괴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 물품이 중동 시장들로 유입되는 동시에 무슬림과 인도의 과학기술이 중국으로 광범위하게 이전되도록 밀어붙였다. 몽골의 황금 가족 구성원들의 몫의 분배를 통해 유라시아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많은 부분을 통제했지만, 이런 물자의 운송과 판매는 상인 계급에게 의존했다. 몽골인은 전사에서 주주로 변신했지만, 스스로 상인이 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중국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통귀족은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불명예스럽고, 더럽고, 종종 부도덕하다고 멸시했다. 권력이나 신앙을 독점한 자들이 낮추어 보는 육체노동 직업과 같은 급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장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칭기스 칸 시대 이후 몽골인은 한 곳에서는 흔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물품이 다른 곳에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여겨져 잘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3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은 확대되어 가는 몽골의 교역망 어딘가에서 팔릴 만한 새로운 상품 또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오래된 상품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염료나 종이나 약에서부터 파스타치오나 폭죽이나 독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이 거래될 수 있었다. 마치 몽골 관리들은 어디에 사는 누구가 구매자가 될 것인지를 찾아주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몽골 작업장들은 세계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여 도자기나 비단 등 전통적인 중국 수공업품만이 아니라 특수한 시장을 노리는 완전히 새로운 물품도 생산했다. 예를 들어 상아로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을 깍아 유럽에 수출하기도 했다. 몽골이 무역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지방 생산품을 장악하고 이를 위한 국제시장을 찾아내자 새로운 직물이 다양하게 유통되었다.
4. 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페스트, 상업체제의 붕괴, 반란 이후 몽골 제국은 무장해제 되었지만, 칭기스 칸의제국은 세계사 최후의 대형 부족 제국이었다. 그는 유목 부족과 문명세계 사이의 만년 전쟁, 즉 사냥꾼 겸 목자와 농부 사이의 오랜 투쟁의 상속자였다. 이후 역사는 계속되는 유목문화와 도시 문화의 충돌에서 정주 문명을 선택하였고 그들은 끊임없이 유목 민족의 넓은 땅을 침식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칭기스 칸은 상업, 교통, 대형 세속국가로 이루어진 근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기동성 있는 전문적인 전쟁 기술, 세계화된 교역, 국제적인 세속법을 통한 통치라는 면에서 그는 철저하게 근대적인 인물이었다. 상대를 없애려는 유목민과 농부의 투쟁에서 시작된 일은 결국 몽골 방식의 문화 융합으로 끝을 맺었다.
역사에서 위대한 역할을 한 인물은 식물 표본처럼 책 속에 깔끔하게 끼워서 보관해둘 수가 없다. 그런 인물의 행동은 기차가 오고 가는 것처럼 구체적인 시간표에 따라 설명할 수 없다. 학자들은 정확하게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정하기도 하지만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 특히 갑자기 폭발한 사건들은 오랜 준비 과정을 거치며 또 일단 시작되면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 영향은 사건이 시야에서 희미해진 뒤에도 오랫동안 남는다. 종소리가 멈춘 뒤에도 간질거리는 진동은 계속 느낄 수 있듯이, 칭기스 칸은 오래 전에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행동은 우리 시대에까지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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