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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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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8일 14시 40분 등록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수유+너머'란?
서울 종로구 원남동, 종묘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어선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유쾌한 학문과 생활의 공동체이다. 자본주의 문명 한 가운데 떠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사시사철 다방면의 분야에 걸쳐 지식의 라이브가 펼쳐지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종합세미나를 ‘케포이필리아’라고 부른다. 라틴어를 조합해 만든 말인데, ‘우정의 정원’이라는 뜻이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만든 공부모임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절제의 쾌락’을 가르친 이 진지한 철학자의 정원에는 노예들, 매춘부들, 가난뱅이들이 무시로 들락거렸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차별도, 노소의 차별도, 학벌의 차별도 없다. 학구열만 있으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누구나 서로에게 스승이고 제자이고 친구다.

수유+너머’는 국문학자 고미숙씨의 1인 연구실 ‘수유연구실’과 사회학자 이진경씨 중심의 ‘연구공간 너머’가 결합하며 시작됐다. 두 모임은 2000년 하나의 이름으로 합치면서 단순한 연구공동체를 넘어선 생활공동체를 본격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지식 코뮌이다. 강사들의 강좌 과정은 강사들은 6개월~1년 동안 세미나와 발표를 통해 공부한 내용을 검증받은 뒤 강좌를 통해 연구 성과를 발표한다. 여러 차례 검증을 거치면서 준비하는 연구실의 강좌는 수강생들에게는 새로운 관점과 내용을 제안하고, 주변 연구자들에게는 학술적 자극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박사에서부터 주부에 이르기까지 학계의 ‘외인부대’ 60여명이 소속돼 있는 연구공간 ‘수유+ 너머’는 열린 연구를 통해 대학과 학맥이라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다양한 형태의 학제연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책에서 캐낸 글맥 >
* 루쉰은 <청년과 지도자>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청년들이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을 찾아 무엇 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 할 것인가!”

* 지적 조로증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한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의 여부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용계, 이탁오, 맑스와 엥겔스, 들뢰즈나 가타리, 푸코, 박지원 등 많은 사상가들이 그러했다. 그에 비하면 ‘조로증’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우리 시대의 지적 풍토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뭔가 새로운 배치를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이르자마자 이니 지난 것 혹은 낡은 것들을 수성하기 위해 급급하는 이 증상은 스스로 노인이 됨과 동시에 다른 후학들을 어린아이로 치부하여 그저 고분고분하기만을 요구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 기쁨 없는 지식
근대 이후 분과화된 학문체계는 현실정합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대학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중심에는 ‘지식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음울한 진단이 자리하고 있다. 심포지엄은 오직 근엄하고 지루한 학술대회여야 하고, 삶의 기쁨은 다른 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고질적인 이분법은 그 괴리감의 단적인 표현일 뿐이다. 분과학문은 단지 전공간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 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우리 시대 전문성의 실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한 분야를 심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심화가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면서 현실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 불모성에 불과할 뿐이다. 생명은 에너지의 흐름이고, 앎 또한 그러하다. 흐름을 차단하여 경계를 긋는 데 골몰하면서 대체 무슨 심화와 확충이 가능할 것인가? 주어진 코드와 습속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지만 않는다면, 시선의 광활함은 자연스럽게 심연에 대한 열정을 불러온다.

* 지식의 횡단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드는 지식의 횡단이란 쉼 없이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거기에서는 원로의 권위나 노년의 안식 따위는 필요 없다. 가슴 벅찬 열정과 끈질긴 지구력만이 요구될 뿐. 물론 그 세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이전에 메고 다니던 뗏목을 내려놓아야 한다. 치열하게 접속하되 때가 되면 가차 없이 내려놓고 떠나는 것. 횡단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우리는 노마디즘을 사랑할 뿐. 그것을 이념적 지주로 떠받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노마디즘의 용법을 몸으로, 삶으로 익히고 싶다. 길은 어차피 우리 스스로가 직접 열어야 하는 것이므로. 어느 시인이 말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앎의 기쁨
앎의 기쁨을 만끽하자는 것.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앎이 기쁨이라는 전제는 잊혀진지 오래되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앎이란 그저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는 것, 고통을 감내하면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식인의 특권도 그런 전제에서 도출되는 것이리라. 지식의 본래 속성이 기쁨이라면 기득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 자체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데 무슨 대가가 또 필요하단 말인가.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천으로서의 지식, 그것은 원초적 본능이다.

* 거리의 열정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존재방식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욕망, 라이브에 대한 열정, 가족관계 및 사회적 코드를 뛰어넘는 우정의 연대 등등. 나도 그들처럼 거리의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돌을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공연하기 위하여, 앎의 향연을 펼치기 위하여.

* 실패에 대하여
하나의 유형과 척도를 고집하기 때문에 결과가 거기에 맞지 않으면 좌절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실험을 계속 이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다양한 척도를 적용하게 되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실패하지 않는 비결이 하나 더 있다. 잘 안된 경우는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름하여 쾌망(快忘)!

*중구삭금(衆口鑠金) : 뭇사람들의 입은 쇠도 녹이는 법!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자꾸 입으로 떠들어대라.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 물론 조건이 하나 있다. 마음을 최대한 비워야 한다. 팅 빈 마음으로 치열하게 열망할 것! 세상에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길이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오직 모를뿐! 오질 갈뿐!

* 인생역전
지식인들의 경우 자의식이 강해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한번씩 하는 세미나를 해서는 절대 의기투합할 수 없다. 그런 정도의 만남으로는 생동감 있는 ‘집합적 생산’이 불가능하다. 모름지기 일상이 뒤섞여야 명실상부한 배움이 가능하다. 연구실에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사람의 활동을 변용하는 물리적 상호작용이 쉼 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만큼 물질적 순환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사는 건 바보다. 타인의 능력과 제대로 접속하면 내가 지닌 능력의 몇 십 배의 능력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인생역전이 별건가. 하루하루의 삶이, 삶의 결이 달라지면 그게 바로 인생역전이다. 공동체는 명분이 무엇이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쳇말로 다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공동체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 유물론자의 사랑법 1
새로운 삶이란 과거의 것을 포기 혹은 희생하고 그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도 혁명도, 더 나아가 구도까지도 모두 자신의 생명에의 호소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모조리 낡은 관념의 자장 속에 포획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재고 또 재야한다. 그래서 진정 자신의 신체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기쁜 능동촉발’.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곧 혁명이 되는 출발지점이다.
기쁨만을 위해 행동할 때 비극적인 자기도취나 추상적 신비화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본성의 울림, 생의 기쁨... 이것 이외에 사랑의 목적이 달리 무엇이 있을까? 사랑이 연민과 희생의 틀을 벗어나 이 법칙에 충실할 때에야 비로소 대상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유물론자의 사랑법 2
외부를 향한 감염력이 없다면, 다른 대상들을 촉발할 수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랑은 근원적으로 코뮌주의를 지향한다. 오늘날, 사랑은 존재를 뭔가 고유하고 사적인 것 속에 가두는 모든 시도의 파괴로서,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방식 속에서 제기된다. 나는 사랑은 고유하고 사적인 것을 공동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근본적 열쇠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라고 할 때 코뮌주의란 “ 우리가 미래에 도달해야 할 어떤 장소나 상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종식시켜 나가는 살아 있는 노동의 현실적 힘이며 바로 지금, 우리 시대에 내재하고 있는 울림”이 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구별되고, 지도자와 추종자가 구획되는 한 그것은 아직 코뮌이 아니다. 그러한 선들이 서로 교차할 때, 그리하여 누구나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조직은 ‘코뮌적’ 신체가 된다. 중앙통제식, 통일된 이념, 일사불란한 시스템을 갖춘 조직이 아닌 이질성의 공존, 다중심주의, 밴드식 결합, 우발성이 범람하는 집단... 이것이 아우토노미아(autonomia) 운동의 특이성이다.

* 일상의 혁명
자본이란 욕망의 홈 파인 공간을 따라 흐르면서 그 홈을 더더욱 깊게 파이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 시간을 이기지 못하면 혁명은 없다. 혁명은 일상을 극복할 때 온다. 일상 안에서 축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일상을 축제화하지 못한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바리케이드 안에서 하는 혁명이 며칠 가겠나.... 시간을 극복하는 것, 시간과 싸워 이기는 게 혁명 아닌가. 사랑도 그렇지 않나.

* 머묾과 떠남이 새털처럼 가벼울 것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 줄 것이 있다. 배경이 무엇이건, 학문적 수준이 어떠하건 상관없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무엇인가 줄 것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10년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주어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이 되려면 좋은 것들이 흐르게 하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받아서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며 인디언 주술사인 베어하트는 말 했다. 그렇다. 줄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더 이상 받을 게 없을 만큼 풍족한 사람도 없다. 탈주란 그저 가벼워지는 것. 붓다는 2,500년 전 탁발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가는 새처럼 가라!”

* 유목
“떠남과 머묾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어디서든 변이할 수 있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를 위해 현재와 미래를 사로잡는 고착된 인연의 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 끈을 풀어서 새로운 삶의 자원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유목은 다른 삶의 영토를 찾아, 다른 삶 자체를 찾아, 다른 사유, 다른 가치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고, 그에 필요한 한 어디로든 샐 수 있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조차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탈영토화하는 삶 그 자체다.” - 이진경, <철학의 외부> 중에서 -

*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흔적은 말 그대로 흔적이다. 다른 종류의 활동을 가로막는 흔적, 공간을 외부와 차단해버리는 흔적, 흐름을 매끄럽게 만드는 활동은 흔적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다. 변이 혹은 배치의 변환이라고 하지. 코뮌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공간이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야 외부를 향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움과 열림은 같은 표현이라 해도 좋다. 그리고 비어 있음의 표현이 바로 청결이다. 청결해야만 열림, 곧 변이가 가능하다.

* 코뮌의 생명력
코뮌의 생명은 외부와의 소통능력이다. 코뮌이 실패하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조적이라는 데 있다. 이는 자신의 내적 경계를 고정시킨다는 뜻인데, 개인이든 집단이든 경계가 명료해지는 만큼 활동 에너지가 위축되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흔히 공동체라면 이념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진지한 집단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진지함은 공동체의 치명적 약점이다. 그런 공동체들은 내적으로는 상하위계가 작동하게 되는 한편, 외적으로는 안팎의 경계가 뚜렷해짐으로써 결국에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코뮌이 살아 움직이려면 유머러스 해야 된다. 웃음이야말로 일상의 축제를 만들어내는 기초이자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음의 경계를 푸는 것, 즉 무거운 감정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 안팎의 구별이 두터운 이들, 진지한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굳게 확신하는 이들, 인정욕망에 익숙한 이들은 이 유머의 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어렵다.

* 코뮌의 가장 큰 적
남을 괴롭히는 자들은 진정으로 약자다. 새로운 삶을 구성한다는 것은 내면의 기저를 바꾸는 것, 곧 영적훈련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다. 명상의 출발은 ‘정확히 보는 것’이다. 자의식의 뿌리를 볼 수 있으면 그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자의식! 그것은 코뮌의 가장 큰 적이다. 자의식과 내면은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강철갑옷’이다. 자의식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탈주라든가 배치, 탈영토화 같은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는 것, 비워야만 외부와 접속할 수 있는 출구가 더욱 풍부해진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비운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내면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외부의 역동적 흐름 속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진다는 뜻이다.

* 우정의 교육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이는 양명좌파의 대가 이탁오의 말이다. 높은 교탁과 교단, 선생과 학생의 구별이 확연하게 나뉘는 교실은 근대적 계몽주의의 공간적 투사이다. 독창성이나 창발성 등의 구호를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궁극적으로 스승이 구획해놓은 일정한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구획과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 휴머니즘의 외부 - 생명과 기계
근대적 지식의 중심은 오직 인간이다. 지식이란 오직 인간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동물원의 탄생과 함께 인간은 동물에 대한 완벽한 지배를 선언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서구와 동양, 백인과 원주민 사이의 관계 등을 해부하는 정도로 근대성의 지반을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지배와 예속, 오만과 편견을 작동시키는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 없이 ‘근대 외부’에 대한 사유란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역시 휴머니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기계(machine)’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이유도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기계란 어떤 대상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용법이 달라지는 모든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도, 동물도, 공간도, 시간도 모두 기계의 일종일 뿐이다.

* 장점과 단점
장점과 단점의 구별도 무의미하다. 장점이 순식간에 걸림돌이 되는가 하면, 단점 때문에 난관을 극복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장단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특성이 장점이나 단점으로 작용하는 인연조건 혹은 배치가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각자의 개성과 활동들이 서로 매끄럽게 소통하는 집합적 배치를 구성할 것인가. 코뮌의 강밀도는 바로 여기에서 결정된다.

* 사파티스타 : 멕시코 민족해방군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봉기한 그들은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라는 ‘무아의 코뮌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건 최초의 혁명가 집단이다. 국가의 건설이 아니라 오직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일어선 게릴라들.

* 달라이 라마
아무리 거대한 것이라 해도 안팎의 경계가 있는 한 우주와 소통할 수 없다고. 뒤집어서 말하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안팎이 사라지면 우주적 삶을 다툴 수 있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수장임에도 슬로건은 ‘티베트의 독립’이 아니라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의 행복’이다.

* 풍요로운 자발적 빈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 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 되는가.

<소감 >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에너지가 전달되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그 에너지가 공동체를 향한 생산적 에너지일 때 그 파장은 더 크게 다가온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었다. 연결감, 지적 본능의 꿈틀거림, 뒹굴고 싶다는 느낌, 부러움 등 여러 가지 감정이 피어난다. 일상의 축제를 만들어가는 실천적 지식(인)의 허브! 고 미숙. 그녀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게도 그런 소망이 피어남을 감출 수 없다.

나는 어떤 인연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알코올 중독 환자들과 인연이 많다. 잦은 재발을 지켜보며 내가 먼저 회복의 희망을 버리고 그 곁을 떠난 적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 연은 지속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궁금한 것은 누구는 중독에서 회복하고 누구는 그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1년 전부터는 그 고민을 좀더 생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깊고 빠른 변화’를 실천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그러다가 본 한권의 책이 있었다. 아빈저 연구소에서 나온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책이었다. 경영관련 서적에서 인지적 왜곡과 대인관계의 갈등 해결을 이렇게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그래서 책의 저자라고 언급된 ‘아빈저 연구소’의 소개란을 유심히 보았다. 경영, 철학, 교육, 심리 등 여러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인 학술협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식의 횡단이 왜 중요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변화’라는 주제로 다학제간의 연구모임을 만들고 싶은 소망을 가졌다.

변화경영 연구소에 들어온 것도 그런 욕구와 관련이 있다. 변화하는 목표와 방향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든 변화의 원리는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고 지식의 횡단을 통해서 그 핵심과 방법을 확장시키고 싶었다. <수유+너머>에 대한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그동안 관심이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곳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삶과 내 삶이 동떨어질 수 없음을 느꼈다. 인류의 의식을 확장시켜 나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나 역시 <수유+너머>와 같은 시공간에서 지내고 싶다. 내 자신의 속성상 ‘허브’역할을 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허브와 시공간을 만드는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오늘도 알코올 중독 환자들을 대하며 진정한 회복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회복이란 술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기, 관계, 인격, 사랑을 되찾는 것임을 부르짖는다. 그렇지만 정작 나의 상처 치유는 어떠하였던가! 매번 나는 무리에서 이탈하여 캄캄한 동굴을 찾아가 내 상처를 핥아 왔다. 그 습성을 여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습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자기대면을 멈출 수 없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IP *.231.169.35

Comentario 1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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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09.29 09:57:35 *.248.117.3
이 책 리스트에 넣어 놓고 대기중이었는데..
요한님 서평을 읽고 나니 꼭 주문해야겠군요.
<수유+너머>에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학교다닐때 이진경님의 그 어려운 '사회구성체이론'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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