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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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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2일 21시 21분 등록
낯선 곳에서의 아침

1. 나에게 다가온 의미

낯선 곳에서의 아침이 다시 다가온 느낌이 가슴 아프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저런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도 살았고 저렇게도 살았던 현실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었고,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시작된 자기 혁명의 출발점이었다. 바로 하루는 일상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변화는 일상이 시작되는 하루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만 했다. 벌써 5년도 더 된 내용들인데도 다시 봐도 새롭기만 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다가왔다.

나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시간의 법칙]을, ‘낯선 곳에서의 아침’에서는 [미래의 법칙]을 찾아냈다. 미래의 법칙은 바로 이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미래는 미지의 것이며, 적어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말 그런가? 어떤 근거로 그렇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단순히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특정한 사건은 지금 시작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의식’이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거꾸로 흐르고 있는 초광속의 입자인 ‘타키온’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미래나 다른 사람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단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스크린에 아직 투사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미래의 우리에게 나타날 일들은 아직 우리가 감지하고 있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나 만들어져 있는 미래의 일이 지금 나의 잘못된 또는 나태한 행동으로 인하여 잘못 된다고 생각해보면 미래의 나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만간 이것과 시간의 법칙에 대한 논문형식의 글을 한 편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예는 신역이 고되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일한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식은 밥 한 덩어리와 불편한 잠자리뿐이다.”

난 이것을 경험했다. 20대 후반 현장생활을 할 당시 나는 하루 8시간의 노동 이외에 일주일에 평균 3번 정도의 잔업, 한 달 평균 2번의 특근을 해야만 했다. 하기 싫어도 반강제로 일을 시키는 분위기에다 그래야 월급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세금 떼면 65만원 정도였다. 기본급이 35만원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달린 살림방 월세가 12만원이었고 약 20만 원정도 저축하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여유돈은 아무리 쳐다봐도 없었다. 일이 힘들면 술을 먹게 되는데 술값이 없어 서글픈 적도 많았다. 큰 애를 태어날 때 병원비를 아끼려고 도립의료원을 택했고 출산비가 부족해 아는 이에게 30만원을 빌려야만 했다. 대의명분도 좋지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대궐 같은 집에서 고깃국에 쌀밥을 먹는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대의명제는 인정할 수 없었다. 3년이 지난 후 미련 없이 벗어났다. 더 어렵게 살더라도 더 나은 생활을 꿈꾸면서 살자. 어떻게 보면 나에게 변화라는 말이 실천된 최초의 선택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매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럼 매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고통이 아닌가? 매일 출근해서 상사에게 눈도장 찍어야 하고, 결재서류 가지고 갔다가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느냐고 잔소리 듣고, 퇴근시간 눈치보다 회식자리 질질 끌려가고,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온갖 아양 떨면서 불러야 하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녘이 서글픈 당신은 다시는 월급쟁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는 않는가?
말쑥한 옷차림에 출근해서 기분 좋은 인사 멘트로 직원들의 아침을 밝게 만들고, 어제 입찰을 땄다는 지사의 보고메일에 거래처 사장의 점심에스코트를 받는 꿈을 꾸는 당신이 이렇게 하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가?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면 마음이 바쁘면 안 된다.”

난 바쁘게 살아왔다. 지난 10년 간 언제나 바빴다. 이런 일이 있었다. 급식사업을 하던 중이었는데 거래하던 회사의 식당으로 출근하던 직원의 차가 커브를 돌다가 어느 도랑으로 잘못 들어가 빠져 버렸다. 문제는 풀과 잔나무가 무성해 다른 차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한참 후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전화해서 사고가 났음을 알렸다. 난 보험회사에만 연락하고 내 일이 바빠 잊어먹고 말았다. 1시간이 지났을 무렵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거래처 회사 직원에게 부탁했다. 사고가 난지 2시간이 넘어서야 그 직원은 구출될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너무 바빠 찾아가지 못했다. 난 그 일이 내게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비즈니스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직원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만에 하나 그 이가 나의 비인도적인 처사로 상상할 수 없는 사고라도 났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아내가 그랬다면 그런데도 그냥 그럴 수 있었을까?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식당을 할 무렵인데 잔치가 있어 직원이 손님들을 모시러 갔다. 가다가 깜빡 존 직원의 실수로 전봇대를 들이받고 차량이 전복되고 전파한 사건이 발생했다. 마침 지나가던 지인이 차량을 보고 나에게 연락을 해 왔고 119에 연락할 수 있었지만 그 날도 일에 바쁜 나는 병원에는 밤늦게 서야 갈 수 있었다. 폐차를 해야 했고 근 2개월을 입원해야 하는 대형사고 인데도 나는 일에 바빠 내 직원의 아픔을 돌볼 수 없었다.
눈앞의 작은 이익만을 쫒다가 큰 이익을 놓쳐 버렸다.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이익은 내 직원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인데도 눈앞의 돈 몇 푼에 그들을 외면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업의 실패였다.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바빠지면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오고 가기도 한다. “푼돈 버는 사람들이 바쁘다.”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아쉽게도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겠다. 스승의 책은 언제나 힘들고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매일 자신을 들여다보라. 당신이 왜 변화를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라. 슬픔이 있다면 적어라. 또 기쁨이 있다면 그것도 놓치지 마라. 바라지 않는 것을 해야만 한다면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아라. 후회가 있고 통한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원망이 있고 억울한 것이 또한 인생이다. 그러나 도움이 있고 정이 있고 애정이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늘 자신이 유일무이한 삶을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마음이 깨어 있는 한, 그리고 처음과 같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당신은 저항에 굴복할 수 없다. 욕망이 흐르는 대로 마음의 길을 따라 껍데기를 벗고 그렇게 가라.”


2. 인용과 해석

[12~15] 서문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라
일상은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변화는 일상 속에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 나의 하루가 만들어지는 세상, 세상을 만나는 나의 움직임, 이 움직임을 추동하는 마음,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욕망, 그렇게 사는 세상, 그래서 살만한 하루, 시간은 순환한다. 그러므로 욕망이 선택한 하루가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는 억제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하루가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는 후회하지 않아야 하는 하루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개편하지 않고는 일상적 삶을 바꿀 수 없다. 물리적 현실을 개편하지 못하는 정신은 허망한 꿈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혁명은 하루 속에서 자신이 지배하는 시간을 넓혀 가는 것이다. 하루의 10%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하루 속에서 잃어버린 2시간을 찾아내어 자신에게 돌려주자.
-> 건강한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 2시간의 자기를 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자기혁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히딩크도 말했다. 그라운드를 지배하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 그라운드의 지배는 90분을 끊임없이 뛸 수 있는 강인한 체력에서 출발한다. 그는 축구전문가의 대부분이 전술을 익혀야 한다고 떠들어대도, 월드컵 첫 경기 1주일 전까지도 체력강화에 주력했다. 그리고 그 해 우리는 월드컵 4강에 올랐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꿈은 하루를 꿈에 투자한 시간만큼만 이루어진다.

1장 - 변화란 무엇인가

[19] 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변화한다.
->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에는 무슨 철학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실용적인 변화를 원하고 있는데 웬 살아 있음을 논하고 그것이 변화한다니 삼단논법인가, 아니면 변증법을 말하자는 것인가 싶어 참 어렵구나 싶었다. 그러기를 한 동안 지나다 보니 그게 그것 같았다. 정신이 죽어 있으면 마음이 변화할 수 없는 이치와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냥 그런 거구나 하고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외부의 다른 환경이 만들어 주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내부의 의지보다 바깥의 영향에 의해서 움직일 때가 훨씬 많다. 이것을 죽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남이 만들어 주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1] 삶은 언제나 그들을 헉헉거리게 만들고, 쉬는 시간은 늘 짧다. 바쁜 하루하루가 쌓여 40이 되고 50이 된다. 늘 바쁜 일만 하며 평생을 산다. 중요한 일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고, 소중한 사람과 보낼 시간은 언제나 모자란다.
->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왜 이렇게 사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밀려든다. 벌써 마흔이 훌쩍 넘어 버린 나이에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무얼 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것 같은 세월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내게 소중한 일과 바쁜 일중에서 난 무엇을 먼저 했던가? 바로 이 시점, 우연히 발길이 닿아 가 보게 된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그러나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있다면 다시 출발해보고 싶은데. 언제나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변화도우미. 그런 역할이고 싶다. 최초의 우연이 희망의 끈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역할.

[23] 인생이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는 것이다. 하나의 길을 선택하면, 다른 길은 가보지 못하는 여정으로 남는다. 한 길을 가며, 다른 길의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선택은 다른 것을 버리는 것이다.
-> 눈물이 난다. 구구절절이 심장을 찌르는 이 단어들 앞에 선 나는 어떤 길을 선택했던가. 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속에서 전부를 위한 전부를 선택했던 지난날이 아쉬워서인가 후회스러워 그런 것인가. 다 잘하면서 살 수는 없다. 난 이건희나 정몽구가 아니다. 난 그저 나일 뿐이다. 작은 일에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그저 보통사람일 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를 밀어 넣는 것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사정없이 던져버려야 한다. 그나마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몇 사람이라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26]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의 에너지 수준은 우리가 수치심에 싸여 있을 때라고 한다.
-> 재수에 실패하고 복학은 하기 싫고 그래서 군대가 가려고 하였다. 그 해 여름 나는 형과 함께 시골에서 농사를 도왔다. 형은 제대 후 복학해서 학생운동권의 열성분자가 되었고 광주와 관련된 행사 도중 잡혀 집에서 반 연금 상태에 있었다. 아버지랑 두 아들이 들에서 일하고 있는데 동네 아주머니께서 지나가면서 한 말씀 하셨다. 삼부자가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네. 우리 동네에서 아들들이 다 대학에 진학한 집이 거의 없는 때여서 아마 그 아주머니는 부러워서 그랬던 것 같았다. 속이 탈대로 타신 아버지께서 나중에 이렇게 한탄하는 것을 들었다. 농사 잘 지으면 뭐하노. 자식농사도 제대로 못 지었는데... 그 당시 나는 수치스러웠다. 내가 잘 되지 못한 것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서 죽고 싶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군에 입대하는 것 밖에 없었다.

[26] 수치심처럼 다른 사람의 삶에까지 치명적인 보복을 주는 수준보다는 낫지만, 본인에게 치명적이고 주위 사람에게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는 에너지 수준이 ‘무기력’이다.
-> 마흔이 되던 해 첫 두 달 동안 나는 혼자서 절망에 빠져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진 것이다. 벌써 마흔이네, 어떡하지,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겁부터 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식당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사업아이템을 찾았다.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기를 수백 번도 더 했다. 담배도 엄청나게 피웠다. 살이 빠졌다. 집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본다. 직원들도 눈치만 보고 좀 나가서 술도 먹고 쉬라고 한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다. 자포자기가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희망이 없는 상태로 자신을 몰아간 그 해 두 달을 난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봄이 오면서 나도 일어났다. 천안에 오던 1992년, 내 나이 스물 여덟 그 때 곤로 하나, 비키니 옷장 하나로 살지 않았던가, 무엇을 더 바라랴 하고 털고 일어났다. 왜 그랬고 어떻게 다시 일어났는지 잘 모르지만 그 해 그 두 달은 악몽이었다. 이 두 달이 내게 준 선물은 무기력과 당뇨라는 병뿐이었다.

[27] 무기력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낮은 에너지 수준에 속하는 것이 ‘슬픔’이다.
-> 큰 애가 막 돌을 지났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노동현장에서의 생활이 힘들어 천안을 떠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 현장에 같이 투신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포기하고 살기 위해 천안을 떠나는 중이었다. 나도 떠나고 싶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아내와 큰 애를 데리고 화장터 같기도 하고 공동묘지 같기도 한 천안의 외곽 어디엔가에서 한 나절을 같이 이야기 하였다. 앞으로 뭐하고 살까? 취직이라도 해야 할텐데 배운 것은 없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용접하는 기술 밖에 없는데 공장에 가기는 싫고, 돈이라도 있어야 장사라도 할 수 있으련만 그것도 마땅치 않고,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께 손들고 항복하기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서울로 가자니 무서워서 못 가겠고... 결국 눌러 앉기로 했다. 아내가 장사를 해 보자고 했다. 조그만 아파트를 전세주고 받은 돈 1,500만원으로 시작한 것이 이유식 장사였다. ‘슬픔’의 에너지에 적합한 예는 아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어설픈 첫 결정이었다.

[27] ‘두려움’은 슬픔보다 더 광범위한 일반적 현상이고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이다.
-> 바람처럼 우연히 찾아간 ‘내 꿈의 첫 페이지’, 마흔이 준 무기력은 치유되지 못했다. 무엇을 해도 자신이 없었고 힘이 나질 않았다. 다행이 그 전처럼 희망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것 하나 내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렇지만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간 곳이 그곳이었다. 난 조급했고 간절했다. 절실했었고 날 구원해 줄 무엇인가를 원했다. 이 시기 교회에도 갔었고 성당에도 몇 번 찾아 간적이 있었다.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적을 얻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내가 찾은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숙제였다. 난 치열하게 숙제에 매달렸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여러 오답들도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29] 노예는 신역이 고되다. 하루 종일 쉴새없이 일한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식은 밥 한 덩어리와 불편한 잠자리뿐이다.
-> 난 이것을 경험했다. 20대 후반 현장생활을 할 당시 나는 하루 8시간의 노동 이외에 일주일에 평균 3번 정도의 잔업, 한 달 평균 2번의 특근을 해야만 했다. 하기 싫어도 반강제로 일을 시키는 분위기에다 그래야 월급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세금 떼면 65만원 정도였다. 기본급이 35만원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달린 살림방 월세가 12만원이었고 약 20만원 정도 저축하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여유돈은 아무리 쳐다봐도 없었다. 일이 힘들면 술을 먹게 되는데 술값이 없어 서글픈 적도 많았다. 큰 애를 태어날 때 병원비를 아끼려고 도립의료원을 택했고 출산비가 부족해 아는 이에게 30만원을 빌려야만 했다. 대의명분도 좋지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대궐 같은 집에서 고깃국에 쌀밥을 먹는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대의명제는 인정할 수 없었다. 3년이 지난 후 미련 없이 벗어났다. 더 어렵게 살더라도 더 나은 생활을 꿈꾸면서 살자. 어떻게 보면 나에게 변화라는 말이 실천된 최초의 선택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30]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 가장 기초적인 상태는 ‘욕망’의 에너지 수준이다. 그리고 광범위한 동기이다.
-> 나를 위해 살고 싶다는 욕망을 실천에 옮긴 이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숨어있는 재주들에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한 달 가량 아내랑 이유식 시장조사를 하였다. 일종의 선식가게였던 셈이다. 조금의 빛을 보태 가게를 오픈하였다. 아내는 가게를 지키고 나는 배달이 있는 오후를 빼고는 하루 종일 일을 해서 가게와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다. 새벽에는 우유배달, 아침엔 유치원 등교차량 운행, 점심엔 회사 아주머니 출퇴근차량운행, 밤 늦게는 학원생 통근차량 운행, 심지어는 신문배달까지 한 적도 있다. 1년 후에는 가게를 하나 더 내게 되니 몸은 더 바빴다. 몸은 고달팠지만 삶은 행복했다. 많은 수입은 아니었지만 공장 생활보다 몇 배 많은 수입이 되었고 우리 식구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운동에 대한 의무는 잊었다. 아니 잊고 살았다. 난 더 이상 운동으로 인한 내 삶의 일부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살 것이다 그렇게 결심했다. 나의 허물과 이기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나의 이기적 욕망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것이 나쁜 것인가? 돈·명예·권력에 대한 욕망이 인생의 원동력이라고 한다. 이것만큼 강력하고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인 힘은 없다고 한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던 한 시절이었고, 욕망에 충실히 따른 결과였다.

[36] 참된 내면의 잠재력을 통해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에너지 수준은 ‘용기’의 단계이다. 이 수준에 이르면 인생은 흥미롭고 도전적이며 자극적인 것이 된다. ··· 성장이 목표가 된다. 새로운 것을 습득하려 하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부여함으로써 항상 새롭게 되려 한다. 이 수준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나 두려움을 볼 수 있고 인정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장애물을 만나면 오히려 자극을 받는다. 세상으로부터 받아 자신이 흡수하고 소모한 에너지만큼 자신의 활력을 통해 세상으로 되돌려 보낸다. 그들은 성취를 통해 고무받고, 더 놓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한다.
-> 누구나 도달하고 싶은 에너지 수준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아직 이 단계까지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이 ‘용기’의 에너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아마 호킨스의 계량화 수치에 따른 나의 에너지 수준은 120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몇 년이 지나면 나도 이 ‘용기’라는 것에 대해서 몇 줄 정도의 경험담을 적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40] 자기혁명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다. 혁명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삶 자체이다. 삶은 일상이다. 좋은 삶은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일상을 통해 자기 삶을 살면서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빛이 되어 살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일상적 삶’이야말로 자기혁명이 추구하는 비전이다.
-> 행복한 일상적 삶에 대한 각자의 의미가 다를 것이다.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봉사하는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업하는 것이 행복하거나, 기계를 만지거나 컴퓨터 관계된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거나 하는 등 행복한 일상적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바탕은 있다. 일상의 다양한 삶을 살면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나만 편하고 잘 살면 그것으로 다 된다는 속물주의가 아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남에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3] 무엇이 되어 살다가도 좋다. 그러나 무엇이 되든 가장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자신이 선택한 색깔에 가장 고운 점 하나 더 하고 가는 것은 멋진 일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다.

[45]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조차 만들어 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저항에 지기 때문이다. 변화는 저항과의 싸움이다.
-> 매일의 작은 유혹들이 나를 변화의 입구에서 발목을 잡는다. 나의 경험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체중감량이다. 마라톤을 시작했고 완주도 2번이나 했다. 매일 운동 한다. 지금도 매일 한다. 그런데도 줄어들지 않는다. 작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저녁을 잘 먹는다. 고기를 먹을 때도 있지만 어떤 식사든 맛있게 먹는다. 그러다 보면 오바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자기 전 과일이나 군것질을 한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후회하는 일상의 작은 유혹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탓이다. 아내는 그나마 운동이라도 하니 그 정도지 안하면 걱정된다고 놀린다. 내게는 이 작은 군것질의 유혹이 저항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과일 한 조각, 과자 하나가 체중감량이라는 의지를 무참하게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저항은 이렇게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붙어 있다.

[49~54] 변화에 저항하는 원인들
첫째, 사람들은 변화가 가지고 올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두려워한다.
-> 변화가 가져다 줄 막연한 이익보다 현재 내가 가지고 향유하는 즐거움(우리는 이것을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 더 많을 경우 변화를 싫어할 수 있다. 변화는 고통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작가가 되려면 글을 쓰기 이전에 많이 읽고 느껴야 한다. 많이 읽고 사색하는 아픔이 있어야 가능하다. 새벽에 일어나서 외국어를 배우거나 운동을 하는 것은 꿀맛 같은 새벽잠을 희생해야 가능하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여유 있는 아침독서를 원한다면 30분 이른 잠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는 현재의 달콤한 즐거움을 동반하지 못한다.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수련하게 하면서도 지금보다 더 나쁜 것처럼 보이는 중간평가를 받게 할지도 모른다. 두려워마라. 변화는 나와의 투쟁의 역사다. 믿고 인내해라. 그래서 혁명은 언제나 피를 원한다고 하지 않던가? 만일 당신의 변화가 실패하면 변화가 소용돌이 친 자리에는 허무와 자책이 남긴 찌꺼기가 더욱 무성하고 번창하게 될 것이다.

둘째, 변화는 습관의 일부를 깨뜨림으로써 불균형을 가져온다.
-> 새해 벽두 많은 다짐들을 한다. 하루 2시간 나를 위해 투자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고 보자. 그러자면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시간대를 찾아내야 한다. 새벽, 아니면 밤늦은 시간. 다 좋다. 어쨌던 그 2시간을 위해 당신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친구나 직장동료들과의 술자리도 피해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서는 늦어도 10시나 11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당근 과식도 피해야 한다. 맛있는 저녁과 술, 혹은 노래방이나 나이트 가는 것도 절제해야 한다. 화려한 밤무대 생활을 단절해야 한다. 어떤 시간대를 선택하던 익숙해진 매일의 생활습관 중 일부를 공격하여 잊혀진 과거로 만들어야 한다. 마치 기름진 음식은 술과 어울리고 술은 담배 맛을 좋게 만들어 금연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과감한 단절과 뚝 떼어진 습관을 짓밟고 나서야 변화는 성공할 수 있다. 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 습관들을 깨트리지 않고서는 변화가 지속될 수 없다. 하루 이틀은 가능할지 모른다. 사흘째 조그만 핑계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피할 수 없는 거래처와의 저녁 술자리가 오늘만 이해해 주자고 속삭일 수 있다. 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라. 대신 예전의 단절되었던 습관은 자연스레 다시 찾아올 것이다. 처음 일주일만 실천해 보라. 그리고 다시 보름 그렇게 한 달이 지날 때 쯤 당신은 그 변화가 주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니 세상에 한 달도 못하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 않냐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데 한 달도 버티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명심하라! 저항은 변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저항이 없음은 변화가 실천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저항은 변화가 근본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찾아온다.

셋째, 변화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이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내가 왜 변해야 할 수밖에 없으며 어떻게 변하는 가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변한 후의 모습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변화 속으로 떠나가지 못한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믿음이 없으면 저항은 당연한 것이다. 나와의 대화 속에 침잠하라. 과연 변화는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가? 과연 내게는 그렇게 다가오는가? 나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2005년 1월 내 꿈의 첫페이지 프로그램에 참석한 나는 절실했었다. 지금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나의 미래는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의 간절한 마음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마음이 지금까지 변화에 대한 확신을 가져왔다.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나를 설득한 것이다. 변화가 가져다 줄 가치와 혜택에 대한 믿음, 지금의 힘듬과 고통이 주는 불확실한 안타까움이 내일의 행복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선행해보자. 믿어야 보일 것이다.

[58] 우리는 오직 하루 속에서 인생을 산다. 하루하루가 모여 평생이 된다.
-> 나에게 하루는 일상이다. 하루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던 적극적인 삶의 흔적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하여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시간들이다. 그런 하루들이 모여 나의 인생을 구성한다. 힘들고 어렵고 그냥 하루 제끼고 싶은 날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산 하루의 끝에 일기를 쓰면 뿌듯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그런 나날이다. 내겐 그런 하루들이 모여 평생이 된다.

2장 - 역사 속의 개혁과 혁명

[67]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은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죄를 짓는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진 것도 없이 일상에 매인다.

[78] ‘소승은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습니다. 비록 권문세족의 참언이나 방해가 있더라도 저를 믿어 주셔야 합니다.’ 신돈이 공민왕에게 한 말이다.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다.’ 이것은 공민왕이 국사 신돈에게 한 말이다.

[81] 조선조의 건국과 함께 기득권층이었던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목숨 역시 잃고 말았다. 그들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개혁에 반대했던가?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의무 역시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밟고 서 있는 사람들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이 죽어가고 잇는 것을 외면했다. 그들이 죽으면 자신들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기득권자들은 언제나 그렇다 불리한 개혁에 찬성하지 않는다. 아직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버팅 수 있을 때까지 개혁에 저항한다. 그들이 포기할 때는 이미 늦는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다음이기 때문이다.

[85]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의 성공은 기득권자들이 양보와 보상을 통해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 없이는 가진 자들 역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의 삶과 꿈을 되찾아 주지 못하고는 가진 자들의 기반 역시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 변화 역시 나의 기득권을 양보하고 습관의 일부를 단절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88] 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실패한 개혁이다. 이때 혁명은 가진 자에게 모든 것을 요구한다.

[89]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은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보다 더 절박하다. 그러나 상실의 두려움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탐욕은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는 스스로를 죽이는 독약과 같다.

[91] 불필요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빼앗긴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는다. 그들은 그토록 삶을 내리누르는 물질적인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삶조차 빼앗기고 만다.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95] 깨어 있는 사회는 깨어 있는 개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법정 스님의 글은 조용하지만 힘이 있다. 그분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감동은 글 속에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오는 것이다. ··· 어떤 분야에 깨어 있는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되면, 나는 많은 위로를 받는다. 정신이 죽으면 인간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96] 훌륭한 사회는 훌륭한 개인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자기 안에 자기를 움직이는 원칙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개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회는 훌륭한 사회이다. 지켜야 할 때와 바꿔야 할 때를 알고 있는 사회는 현명한 사회이다.

현명하다는 것은 실천적 개념이다. 실천의 어려움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포기된 기득권은 사회의 활력을 되찾아 주기 위한 투자로 활용될 것이다. 돈은 한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과 같다. 위에서 한번 the아 버렸다면 밑에서 다시 퍼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린 사회에서는 사업 역시 죽는다.

꿈이 없는 사회의 일상은 춥고 어둡다. 미래를 믿지 않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기다림과 자제도 없다. 참고 기다림 없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사회란 어디에도 없다.

3장 - 떠나라, 낯선 곳으로

[102] 실제로 본질적인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어린 왕자]에는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볼 것을 그렇게 애써 설득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어느 잡지에서 정옥자 서울대 교수의 공부방법을 본 것이 기억난다.
 '반일독서半日讀書 반일정사半日靜思'
하루의 반은 독서를 하고 나머지 반은 조용히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미 축척된 지식과 정보는 책 속에 있으므로 독서로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책만 읽으면 기존의 지식과 상식의 틀에서 헤어나기 힘들므로 조용히 생각하고 익힐 시간이 필요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창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사색할 여유가 필요한가 보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104] 세상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욕망에 솔직해져야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욕망에 평생을 걸어야 한다. 선택은 다른 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 지난 1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아 헤매 다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일들을 해봤다. 그 중에서 내가 편하게 여기고 나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내게 아주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짧은 생활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같은 조직에 속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조직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 일들과 사람들을 위해 하루를 온전히 바칠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나의 즐거움을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어 낸다면 나는 평생 이 일에 매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달랑 월급 몇 푼에 식구들의 끼니와 좋은 집 한 채를 갖기 위해 내 시간을 파는 것은 이해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인생을 사는 것이며 스스로를 노예적 삶속으로 밀어내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다 하더라도 조금씩 하루 2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그 2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뭘 잘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라. 행복한지를 물어 보라. 정말 2시간으로 내가 행복해지고 있는가를 되물어 보라. 조그마한 2시간의 씨앗은 스스로 키운 훌륭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있을 것이다.

[107] 고통이 절망이 되지 않는 이유는 미래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 미래를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강한 신뢰나 증거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강력한 역할 모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면 좋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가 문제다.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나의 경우는 변화에 대한 간절함으로 대체해 왔다. 그러다가 아주 좋은 역할 모델을 찾아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미래의 내가 될 역할 모델을 찾고 그 혹은 그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리고 그 또는 그것이 나의 멘토까지 겸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확신으로 다가오게 된다.

[120] 일반적으로 미래는 미지의 것이며, 적어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말 그런가? 어떤 근거로 그렇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단순히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특정한 사건은 지금 시작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나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시간의 법칙]을, ‘낯선 곳에서의 아침’에서는 [미래의 법칙]을 찾아냈다. 미래의 법칙은 바로 이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의식’이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거꾸로 흐르고 있는 초광속의 입자인 ‘타키온’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미래나 다른 사람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단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스크린에 아직 투사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미래의 우리에게 나타날 일들은 아직 우리가 감지하고 있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나 만들어져 있는 미래의 일이 지금 나의 잘못된 또는 나태한 행동으로 인하여 잘못 된다고 생각해보면 미래의 나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만간 이것과 시간의 법칙에 대한 논문형식의 글을 한 편 준비해야겠다.

[139] 좋은 하루를 자주 만들어 가질수록 인생도 그만큼 길고 풍요로워진다.
-> 높은 분들과의 식사, 멋진 술집에서의 하룻밤, 넓고 푸른 그린위에서의 나이스 샷, 연애인들처럼 화려한 옷차림이 멋진 하루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류의 하루는 잠자리에 드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 소박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저녁식사,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의 만남, 한여름 밤의 독서, 덕수궁 돌담을 혼자 거닐며 고통스러워 한 사색, 부모님과 함께 한 등산에서 더 좋은 하루를 느낄 수 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로 이어지는 중복된 하루가 우리 앞에 지속될 때 가장 손쉽게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좋은 하루란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을 말한다. 가벼운 일탈조차 용서하지 말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해야 할 어제보다 나아지는 하루의 수련은 필요한 것이다.

[154]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면 마음이 바쁘면 안 된다.
-> 난 바쁘게 살아왔다. 지난 10년 간 언제나 바빴다. 이런 일이 있었다. 급식사업을 하던 중이었는데 거래하던 회사의 식당으로 출근하던 직원의 차가 커브를 돌다가 어느 도랑으로 잘못 들어가 빠져 버렸다. 문제는 풀과 잔나무가 무성해 다른 차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한참 후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전화해서 사고가 났음을 알렸다. 난 보험회사에만 연락하고 내 일이 바빠 잊어먹고 말았다. 1시간이 지났을 무렵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거래처 회사 직원에게 부탁했다. 사고가 난지 2시간이 넘어서야 그 직원은 구출될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너무 바빠 찾아가지 못했다. 난 그 일이 내게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비즈니스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직원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만에 하나 그 이가 나의 비인도적인 처사로 상상할 수 없는 사고라도 났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아내가 그랬다면 그런데도 그냥 그럴 수 있었을까?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식당을 할 무렵인데 잔치가 있어 직원이 손님들을 모시러 갔다. 가다가 깜빡 존 직원의 실수로 전봇대를 들이받고 차량이 전복되고 전파한 사건이 발생했다. 마침 지나가던 지인이 차량을 보고 나에게 연락을 해 왔고 119에 연락할 수 있었지만 그 날도 일에 바쁜 나는 병원에는 밤늦게 서야 갈 수 있었다. 폐차를 해야 했고 근 2개월을 입원해야 하는 대형사고 인데도 나는 일에 바빠 내 직원의 아픔을 돌볼 수 없었다.
눈앞의 작은 이익만을 쫒다가 큰 이익을 놓쳐 버렸다.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이익은 내 직원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인데도 눈앞의 돈 몇 푼에 그들을 외면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업의 실패였다.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바빠지면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오고 가기도 한다. “푼돈 버는 사람들이 바쁘다.”

4장 - 자기혁명을 위한 다섯 가지 방법

[187] 당신에게 다른 대안이 없을 때 당신에게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다.
-> 엔디 모칸은 불타는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 내리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바다로 뛰어 내리는 것만이 ‘확실한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변화는 선택하는 것이다.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은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놀이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여야 한다. 난 그렇게 살기 싫어. 남들처럼 적당히 놀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살래. 그러니까 적당한 변화만 하면 돼.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적당한 휴식과 휴전에 만족하거나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자신과 싸우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아닌가?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되기 전에 변하자. 절박한 심정으로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 보자. 변화가 절대절명의 생존의 문제로 인식할수록 당신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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