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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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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9일 08시 58분 등록
사람 풍경 (김형경 지음, 아침바다, 2004)

김형경..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세월」,「피리새는 피리가 없다」,「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성에」등의 장편소설과「단종은 키가 작다」,「푸른 나무의 기억」등의 창작집을 출간했다.

<작가의 말>

책을 쓰는 동안 비전문가로서 배타적 전문 영역을 침해하는 듯한 ‘마음’이 있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서로 잘 소통되지 않고, 각 학문 분야 내에도 여러 학파들이 존재하면서 서로 다른 이론을 주장한다고 알고 있다. 비전문가로서 편리한 점은 그들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음’에 드는 대로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점,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감사드린다.

<무의식>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우리 삶의 중요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비밀 한 가지는 우리 대부분이 세 살까지 형성된 인성을 중심으로, 여섯 살까지 배운 관계 맺기 방식을 토대로 하여 살아간다는 점이다.

분석 치료에서 ‘무의식을 의식 속에 통합한다’는 말을 상담심리학에서는 성인 아이, 내재 과거아라 불리는 바로 그 ‘내면의 아기를 성인이 된 자신이 보살피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이 문제가 되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겪는 대표적인 어려움 중에서 성을 포함한 사랑의 문제, 돈을 포함한 현실적 삶을 관리하는 능력, 생을 활기 있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놀이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 사실 그것은 생의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핵심인 문제일 것이다.

<사랑> 모든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

생의 모든 문제가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 중 가장 중요하고 모든 문제의 핵심이 되는 사랑은 아기 때 엄마와 나누는 최초의 사랑이다. 아기에게 엄마는 최초로 경험하는 안락함, 즐거움, 쾌락, 행복감의 근원이다. 엄마와의 안락한 공생 체험은 사랑의 원형으로 자리잡아 성인이 된 후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짓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와 나누는 애착 경험은 그 사람의 정신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된다. 우리는 흔히 인간 정신을 연금술에 비유하는데 그때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연금술사는 엄마라는 존재다.
아기는 99% 엄마가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가 사랑에서 비롯되는 이유는 기대했던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의 감정과 관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노, 우울, 불안, 공포, 중독, 질투, 시기심……. 그 치명적인 감정들을 뒤집어보면 ‘사랑의 부재’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 폭주족들, 거식증이나 폭식증 환자들의 진정한 욕망도 사랑해달라는 외침이다. 도박, 알코올, 마약, 일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의 진정한 욕망도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다.

사랑만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인간 정신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한다. 정신분석은 사랑 앞에서 좌절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일이라 한다.

<대상 선택> 타인을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과정

사랑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 전문 용어로는 ‘대상 선택’이라고 하며, 그 내용에서는 의존적 대상 선택과 자기애적 대상 선택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의존적 대상 선택이란 말 그대로 의존할 대상을 사랑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아기가 엄마에게 그토록 애착을 품는 이유는 엄마가 먹을 것을 주고, 보살펴주고, 정서적으로 교류하며, 생존에 필요한 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사랑의 속성이 의존이듯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사람을 알아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애적 대상 선택의 특징은 우선 자기 이미지와 닮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 타인을 사랑할 때도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사랑한다. 자기 이미지가 미화되고 부풀려져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도 실제보다 이상화시켜 흠모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은 상대방의 참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관계가 지속되면서 이상화된 이미지가 깨어지면 그 모든 잘못이 상대방에게 있는 듯한 실망감을 안게 되고, 사랑도 종말을 고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모든 사랑이 의존적 대상 선택이나 자기애적 대상 선택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사랑에는 그보다 더 미묘하고 자각하지 못하는 많은 기준이 있고 그것은 더 힘이 세고 즉각적이고 운명적이다.

<분노> 대상 상실의 감정, 혹은 돌아오지 않은 사랑

모든 분노는 사랑의 뒷면이어서 애착을 품은 대상을 잃었을 때나, 애착의 감정을 박탈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돌아오지 않은 사랑’이고 전문 용어로는 ‘대상 상실의 감정’이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에 억압된 분노를 가지고 있다. 아기 때 엄마에게 표출되지 못한 분노뿐 아니라 성장하면서 그 감정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속 분노를 내면으로 억눌러 감춘다. 그렇게 억압된 분노는 어떤 식이로든 간접적으로 표출되면서 그 사람의 삶을 공격한다.
의존성‧자기 희생‧속임수‧자기 파괴적 행동도 억압된 분노와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분노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표출되어 친밀한 관계를 그르치고 생을 퇴행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제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었다. ‘화를 잘 낸다’ 함은 분노를 느낄 때 그 감정의 근원을 빨리 알아차리고, 화가 났다는 사실을 적대감 없이 상대에게 표현하고, 그런 다음, 그 감정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분노는 누구의 탓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의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분노의 본질에 대해 간결하고 명쾌한 정의가 하나 있다.
“5분 이상 화가 난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다.”
화를 잘 낸다 함은 어떠한 분노도 5분 안에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울> 정신의 착오, 혹은 마음의 요술 부리기

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사랑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감정이 분노라면, 그것들의 연장선상에서 세 번째로 주의 깊게 돌봐야 하는 감정은 우울증이라고 한다.
외부로 표출되지 못한 감정들이 내면으로 돌려져 자기 파괴, 우울증, 자살 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까 우울증은 돌아오지 않은 사랑,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슬픔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울증은 너무나 흔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에는 거의 정신의 감기쯤으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우울증의 근원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우울증에 대해 밝혀진 것이란 그것이 자살에 이르는 위험한 증상이며,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해결책이 없으며, 암‧비만과 함께 21세기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꼽힌다는 점이다.

이제 나는 우울증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이런 상황 중 하나다. 일주일 이상 운동을 하지 않았거나, 너무 오래 사람을 만나지 않은 채 틀어박혀 있었거나, 심하게 추위에 노출되거나 햇빛을 적게 쬐었을 경우이다. 우울증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20분 정도만 걷거나 달리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라앉고, 40분 정도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 시간쯤 지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오른다. 이렇게 사소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깨닫는 데, 이처럼 손쉬운 대처법을 터득하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게 가끔 약오른다.

<불안> 사랑하는 대상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불안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깊다. 생각해보면, 양서류에서 진화해 처음 뭍에 발을 내디딘 인류의 조상이 가장 압도적으로 느낀 감정은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불안감은 생을 위협하는 자연적,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추측되는 원인 중 한 가지는 유아기에 엄마의 사랑이 일관되게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과 분노를 번갈아가며 내밀거나,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주는데 내면적으로는 질투나 분노를 투사하거나, 조건을 내세워 사랑을 주었다 뺏었다 하면 그것을 받는 아기의 마음에 불안이 자리 잡는다고 한다.

나는 늘 “생이 안정되면……”이라고 꿈꾸어왔다. 생이 안정되면 그것을 베이스캠프 삼아 멀리 여행을 떠나고, 한두 해쯤 노동 없는 무위한 나날을 보내면서 다급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긴 휴가를 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빡빡한 노동의 나날 속에서 그런 꿈을 꿀 때 삶이 안정된다는 뜻은 전세 계약 기간에 따라 바뀌지 않는 주소, 노동 없이도 한두 해쯤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은행 잔고, 이제는 삶의 조타륜을 명백히 내 손안에 쥐고 있다는 확신 등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꿈과 비슷한 삶의 조건에 다가갔음에도 마음속에는 그토록 꿈꾸어온 ‘안정’이 오지 않았다.

정지된 여행의 일상 속에서 문득 우울증이 오고, 바로 그 ‘멈춤’이 우울증의 원인이었음을 알았을 때 깨달았을 것이다. 생이란 본디부터 그렇게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고 소란스럽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본래 그런 삶을 유독 불안정하게 느꼈던 것은 내면의 불안감 때문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정상적인 삶조차 불안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공포> 분노가 가면을 쓰고 다른 대상에게 옮겨진 것

공포심은 불안처럼 낯설고 위험한 환경에서 느끼는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인류의 유전자 속에 불안감과 함께 가장 선명히 기록된 감정이 공포심일 것이다. 적의 위험, 부족한 먹거리, 위험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먼저 불안과 공포의 감정이 발달되어야 했을 것이다. 공포는 대체로 불안과 함께 이야기되며 더러 중복되기도 한다. 불안이 막연하고 비이성적인 위험과 관련된 반면 공포는 구체적이고 대상이 있는 위험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

내 공포심의 성분 중에 남성의 잠재적 폭력성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좀 충격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성들이 자기 가정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가부장제를 어깨에 메고 얼마나 분투하는지, 날마다 얼마나 고된 노동과 굴욕감을 참아내는지……그런 것들을 많이 보았다. 남편에게 떼쓰고 요구하기만 하는 철없는 아내들이 한심하게 여겨질 만큼 남성과 동일시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가끔은 남성들이 그토록 힘들게 일하는 이유가 다만 개인적인 성취욕이나 가장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들 내면에 있는 비이성적인 경쟁심이나 공격성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때는 그 비이성적인 경쟁심이나 공격성 또한 가여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면에 있는 남성에 대한 공포심은 너무나 선명했다.

이제는 예전에 비해 겁이 많이 없어졌다. 공포심의 근원이 유아기에 만들어진 환상이며, 실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며, 유전자 속에 깃들인 본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유익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공포의 근원인 억압된 분노가 해소되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내면에 억압된 분노를 인식하고, 그것을 꺼내서 직면하고, 천천히 해소시키는 긴 기간이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의존>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

아기는 성장하면서 점차 엄마에게서 분리, 개별화되어 나오는데 그 시기에 엄마를 대신할 대용물을 필요로 한다. 전문가들은 그것을 중간 대상이라고 부른다. 유아기 때는 엄마를 대신하는 특별한 담요에 애착을 보이거나 인형이나 장난감에 집착한다. 의존성이 선택하는 중간 대상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술이나 담배에 의존하거나, 쇼핑 행위나 사이비 종교에 몰입하는 것, 자주 만신을 찾아가 앞날을 묻는 것 역시 의존성의 발현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끝에서 피면담자가 느끼는 감정에 ‘고립무원의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무한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의존성이 극복되는 지점, 우리가 진정으로 독립할 때 맞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황인숙 시인의 시집 <자명한 산책>에 실린 첫 번째 시는 ‘강’이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중독> 의존성이 심화 극단화된 상태

중독은 의존성이 가장 심화, 극단화된 형태라고 한다. 대상에 대한 의존이 너무 심해 그것이 없이는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없고 일상생활이 유지되지 않을 때, 그것을 중독이라고 한다. 중독의 심리적 근원에도 유년의 결핍이 있다. 애착의 대상이던 엄마를 잃은 아기, 엄마를 생존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할 수 없었던 아기, 엄마와 정서적인 교류와 공감을 나누지 못한 아기가 나중에 커서 중독에 취약한 정신을 갖게 되기 쉽다고 한다.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중독 대상은 무수히 많아져 성과 사랑뿐 아니라 술‧담배‧음식‧쇼핑‧도박‧관계‧속도감 등으로 다양해졌다고 한다. 요즈음 새롭게 등장한 대표적인 중독 대상은 인터넷이 아닐까 싶다. 중독 대상은 흔히 미화되고 숭배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당사자가 환상 속에 만들어둔 ‘이상적이고 좋은 엄마’의 대용이기 때문이다.

중독을 치유하는 일은 정신의 지층을 재배열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라 한다. 영화나 소설에서 알코올 클리닉이나 금연학교에 대해 다룬 내용을 보면 그 과정이 거의 자기 파괴의 지옥에 가깝다. 그것이 힘든 진짜 이유는 심리적인 해체가 선행되어야 하며, 절대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내면으로 들어가 유아기의 고통과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쉽지 않을 때 전문가들은 차선책으로 부정적 중독을 긍정적 중독으로 바꿀 것을 권한다. 알코올 중독은 운동 중독으로, 흡연 중독은 독서 중독으로.

<질투>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

우리는 보통 질투와 시기심을 구분 없이 뒤섞어 쓰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감정이다. 질투심은 기본적으로 삼각관계에서 발생하는 세 사람 사이의 감정이고 시기심은 두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질투심은 자신과 관계있는 특정인을 향해 느끼는 감정이며, 시기심은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나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도 발생하는 감정이다.

질투심은 연인을 두고 연적 사이에 느끼는 감정, 부모의 사랑을 두고 형제 사이에 느끼는 감정, 남편을 두고 시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들이다. 질투심의 심리적 배경에는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헌신조차 믿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이 연인의 사랑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지조차 의심할 때, 그 자신감 없는 마음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질투라고 한다.

질투는 사랑의 뒷면처럼 인식되어 사랑을 확인하는 도구로도 활용되고, 연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질투는 상대를 살해할 수도 있을 만큼 파괴적인 감정이다. 전문가들은 질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가치 있다는 느낌, 자신이 소중하다는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질투심을 극복하는 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상대방의 노력이라고 한다.

<시기심> 타인이 가진 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

질투심이 세 사람 사이의 감정이며 그 심리적 배경이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이라면, 시기심은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며 그 심리적 배경은 ‘상대방이 가진 것이 내게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시기심은 자신과 무관한 사람, 일면식도 없는 사람,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도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시기심이 가장 소극적으로 표출될 때는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과 칭찬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강도가 조금 더 심해지면 제삼자에 대한 헐뜯기, 헛소문, 집단 따돌림, 쇼핑 중독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보다 더 격렬해지면 소매치기나 강도처럼 남이 가진 것을 빼앗는 형태로 나타나고 가장 불행한 형태는 자기보다 많이 가진 자를 살해하는 일이다.

시기당하는 사람은 자칫 죄책감을 느끼기 쉽고, 시기심을 피해 관계를 철수하게 되고, 자신이 가진 선을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때 시기당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은 시기받는 고통을 인정하는 것, 그럼에도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 것, 자신이 가진 선을 끝까지 믿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귀족에게 요구되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 제도화된 기부 문화 같은 것은 시기당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생존 방식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유독 팽배한 반기업 정서는 부의 사회 환원에 인색한 재벌들에 대해 서민들이 갖는 시기심일 것이다.

<투사> 내면의 부정적인 면을 타인에게 옮겨놓기

투사란 ‘스스로 수용할 수 없는 욕망, 생각, 느낌을 주체의 바깥, 즉 다른 주체에게로 옮겨놓는 방어기제’라 한다. 다른 대상에게 옮겨놓을 때 그것이 표출되는 방식은 대체로 혐오, 경멸, 비난, 분노의 방식이다.

지역감정, 인종차별주의, 마녀사냥 등은 대표적인 투사 방어기제라고 한다. 투사 방어기제가 발동되는 이유는 자신의 선하고 정당하고 우월한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면의 부정적인 생각, 욕구, 충동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된다. 외면당한 그 추악하고 열등하고 비열한 측면들은 억압, 억제, 차단, 부정 등의 방법을 통해 의식에서 떨어져나가고, 그런 다음 무의식이 되어 다른 대상에게 투사되는 것이다.
“모든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남에게 보이는 관심을 반만 줄여도 생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는 관심’이란 대체로 방어의식이거나 시기심이거나 의존성이거나 투사의 감정 중 하나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리> 세상을 반으로 축소시키는 태도

‘분리’, ‘이타주의’ 이외에도 방금 먹은 나쁜 생각을 취소하는 반대 행동인 ‘취소’, 마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반동형성’도 세상에 ‘좋은/나쁜’ 두 가지 가치가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 방어의식이다. 그런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들이 입는 피해는 세상을 반으로 축소시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서도 반만 이해하고, 정신 에너지도 반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재능조차 반쯤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회피> 자기 자신과 삶으로부터의 도피

위험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상황,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회피라고 한다. 회피와 비슷한 방어기제로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두는 해리, 보호해야 하는 자기를 안전한 곳에 옮겨놓는 전치, 위험한 대상을 보다 안전한 형상으로 변화시켜 간직하는 상징화, 위험한 대상을 객관화시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지식화와 객관화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듯, 생의 반대말은 죽음이나 퇴행이 아니라 ‘방어의식’이 아닐까 싶다. 방어의식은 사람을 영원히 자기 삶의 바깥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동일시> 타인을 받아들여 나의 일부로 만들기

동일시는 한 개인이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정신의 일부로 만드는 내재화의 한 방법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동일시를 투사적 동일시, 병적 동일시, 공격자와의 동일시 등으로 분류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닮아버리는 아들, 히틀러 밑에서 전쟁을 수행했던 많은 이들이 바로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 것이라 한다.

<콤플렉스> 다양하고 풍성한 인격의 근원

콤플렉스는 융의 분석심리학에 등장하는 용어인데 개인의 내면에 억압된 잠재 관념들을 칭한다고 한다. 억압된 관념이 무의식화되어 자아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그 복합적 상태를 콤플렉스라 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무의식이 드러나는 지름길인 셈이다.

“콤플렉스는 부정적으로 발전할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이다. 정신생활에 필요한 요소로서 극복하거나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것을 끌어안고 사랑해야 한다. 콤플렉스를 사랑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수치스러워하고 숨기려 했던 그것이 의식 안으로 통합되는 순간, 좀더 다양하고 풍성한 인격이 나오게 된다. 콤플렉스가 내 것이 되면서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애> 퇴행과 성장으로 난 두 갈래 길

정신분석을 받은 이후 나 역시 외면하고 억압했던 내면의 것들을 꺼내보았다.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부정적 감정들, 분노‧불안‧공포‧의존성‧시기심‧질투‧모든 종류의 방어의식이 고스란히 나의 내면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추악하고 천박한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일은 충격이었고, 그것들을 내 것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에는 아주 많은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더 힘들었다.

인류는 인간만이 특별하고 위대하다는 나르시시즘을 깨며 발전해왔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의 발견이 그럴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불안, 시기심과 함께 인간을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대표적 감정이라고 한다.

<자기 존중> 행복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느낌

내가 평생토록 힘들게 이겨내야 했던 감정은 나 자신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무가치하다’는 느낌이었다. 정신분석을 받은 후에야 그것이 나의 객관적인 실체와 다르며 유아기에 만들어진 착각임을 알았지만 그 전까지는 명백한 심리적 진실이었다. 때로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력감이 지나쳐 숨이 막힐 때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부탁했다.
“무엇이든 내게 힘이 될 만한 말을 한마디만 해줘.”
그러면 친구는 “너는 글을 잘 쓰잖아”라거나, “너 예뻐”같은 낯간지러운 빈말을 해주곤 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말을 긍정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은 그런 말이 숨통을 틔워주곤 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심리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 사이에는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건강한 사랑, 정당한 보상을 약속하는 사랑, 자기를 존중하는 사랑을 하라는 뜻일 것이다. 짝사랑이나 스토커처럼 응답 없는 대상을 향해 사랑을 호소하기, 보상 없는 사랑을 일방적으로 보내기, 사랑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하기 등은 전형적으로 자기 존중감이 약한 자의 사랑법일 것이다. 그런 태도는 자신을 병들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랑도 파괴한다.

<몸 사랑> 몸이 곧 정신이고, 육체가 곧 정체성이다

옛 선사들은 몸에 병이 들어오면 마음을 활짝 열어 병을 내보냈다고 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에 병이 들어올 때 몸을 보살피는 것이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햇빛 속을 오래 걷고, 슬픔이 밀려오면 한증막에 가서 땀을 빼고, 무력감이 찾아오면 야산을 뛰어오른다. 내게 한 가지 이분법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나눌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과 운동하지 않는 사람.

<에로스> 생의 에너지이자 예술의 지향점

정신분석을 받을 때 면담자는 내게 ‘야하고 뻔뻔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말이 성적 도덕적 억압의 뒷면이며 동시에 내 생의 모든 열쇠가 들어있는 지점이라는 사실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야하고 뻔뻔해져야 한다는 명제를 삶의 당위적 목표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뻔뻔하게> 유아적 환상 없이 세상 읽기

엄마의 정서적 보살핌이 결핍된 아이에게 ‘좋은 엄마’의 환상이 생기고, 성장하면서 그 환상은 어딘가에 부자 아빠가 있을 거라는 식의 현실 부정으로 변형된다고 한다. 사춘기가 되면 좋은 보호자가 나타나줄 거라는 환상을 담은 ‘키다리 아저씨’같은 하이틴 소설에 매혹된다. 그런 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현실의 삶을 수용하지 못한 채 어딘가 다른 곳에 다른 삶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생은 다른 곳에’를 꿈꾸며 이상주의자나 예술가나 몽상가가 될지도 모른다.

‘뻔뻔하게’를 더 깊이 이해하고 난 후 내가 오래도록 반복해온 생의 서투름의 근본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아적 환상에서 비롯된 온정주의적 세상 인식이 문제였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틀이 잘못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도 오류가 잦았을 것이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다고 서운해 할 때 그 ‘내 맘’이 바로 잘못된 환상 위에 서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친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지켜보기

타인에게 과잉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사기치는 사람. 심리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사람은 후자이다. 그런 이들은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받고 싶은 보호와 관심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올 호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호의를 베풀어놓고 상대가 그것에 대해 보답하는지를 지켜보는 무서운 속성이 있다고 한다. 오른손이 한 일에 대해 왼손이 보답받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베푼 친절에도 틀림없이 그런 속성이 있었을 것이다.

<인정과 지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놀라운 힘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인정과 지지이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이고 우리가 가끔 무너지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지지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지나칠 경우 ‘인정 중독’이 된다. 인정 중독인 사람들은 인정받는 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인정받기 위해 일 중독자가 되고, 그럼에도 늘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불안해한다.

인정 중독이 되는 이유는 유아기에 칭찬과 격려에 인색한 부모, 지지해줄 줄 모르는 냉담한 부모, 감질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는 부모의 양육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런 이들은 외부에서 오는 인정과 지지를 기대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내면에서 인정과 지지를 기대하는 아기를 돌보고 격려해야 한다고 한다.

지지는 판단하는 마음 없이 타인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 충고하고자 하는 마음을 누른 채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지지의 태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있으면 타인의 칭찬에 그토록 들뜨거나, 외부의 비판에 그토록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자기 중심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 타인에 이르는 가장 선한 길

인간 심리와 행위의 배면에 대해 어설프게 이해하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한동안 그런 고민을 했다. 친절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필요한 행동일 뿐이고, 칭찬은 소극적 시기심이거나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방어의식이고, 연민이란 타인을 가엾게 여기는 우월감의 표현이며, 선행이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적 보험상품일 뿐이며……. 그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대체 타인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관계 맺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고민 끝에 만난 단어가 공감이었다.

“자기 마음에 고요히 머물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도 잠시 머물 수 있다.”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위대하고 힘겨운 긍정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모두 그러하다는 자각과, 그 자각을 바탕으로 하는 공감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용기> 절망 속에서도 전진할 수 있는 능력

사실 내 여행의 본질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회피 방어기제에 더 가까웠다. 어리석음을 닮은 단순함, 현실 감각이 결여된 무모함, 둔감함에 더 가까워 보이는 초연함…… 그런 요소도 깃들어 있었다. 그 여행을 일상 속에서 추진시킨 힘이 있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롤로 메이의 <창조와 용기>라는 책을 읽다가 용기를 ‘절망 속에서도 전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해둔 구절을 만났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처음으로, 그렇다면 내게도 용기가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두려움을 참으며 낯선 여행지를 걸어나갈 때, 좌절감을 안은 채 어떤 일을 해낼 때 온몸에 힘이 들어가도록 애쓰던 그 느낌이 바로 용기였구나 싶었다.

<변화> 세상을 보는 시각과 삶의 방식 수정하기

평생에 걸쳐 꿈꾸어온 “삶이 안정되면……”이라는 욕망은 내 불안감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생의 구체성을 만지고 싶다”는 욕망은 우울증의 한 증상일 뿐이었고, “생은 아름답지만 일상은 참 너절하다”는 생각은 일상의 안락함을 누리지 못했던 유아기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나르시시즘의 껍질을 들춰보았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언급된 모든 감정들을 내면에서 낱낱이 직면하고 체험하면서 자신의 나르시시즘과 맞닥뜨렸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삶은 내게 실험 같은 것이었다.

<자기 실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일

창조성이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간다.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때, 낯선 지방을 방문할 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때도 창조성을 발휘한다. 생이라는 것도 60이나 70년쯤 되는 시간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기획해서 사용하는가 하는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자기 실현이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 생을 보다 지혜롭고 풍족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엮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일 것이다.


***


애초에 여행기는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취재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던 이십대 내내 내 소원은 관찰하거나 기록하지 않고, 활자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상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감을 열고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온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감각과 감정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여행은 바로 그 소원대로 진행되었고 나는 아무것도 기록하거나 기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쓰게 된 것 역시 ‘마음’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십대 중반부터 정신분석과 심리학 책을 읽어온 마음, 생의 한 시기에 정신분석을 받았던 마음, 그 뒤 끝에 여행을 떠났던 마음들이 이 책을 계기로 일단락지어진 듯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이 책을 꽤 여러 번 읽었다.
처음엔 그냥 곁눈으로 읽었고, 그 다음엔 아주 오래도록 읽었고, 그리고는 아무 때나 읽었다.
아마도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처음부터 책을 꽉 잡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건성으로 한 번을 읽고는 한참만에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곤 작정을 하고 참 많이 울면서 아껴서 읽었다.
그 다음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심심하면 옆에 끼고 있곤 했다.
나를 만나게 하는 작가 김형경의 글은 나에게 정말 좋은 실험들이다.

어쩌면 나는 …
이런 책을 쓰고 싶은가보다.
‘마음’으로 쓰는 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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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2006.01.11 09:30:32 *.118.67.206
책이 님과 함께 뒹굴었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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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6.01.11 16:12:15 *.210.111.168
어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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