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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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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19일 01시 44분 등록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부영 지음, 한길사, 2001)
남성 속의 여성, 여성 속의 남성

이부영.. 서울대 의대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스위스 취리히에 가서 1966년에 융연구소를 수료하여 융학파 분석가 자격을 취득하고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독일 및 스위스 등 각지 정신병원에 수련 및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신경정신과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분석심리학>, <한국 민담의 심층분석>, <한국사상의 원천>(공저) 등이 있다.


- 깊고 어두운 마음의 심층을 향하여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의 분석심리학은 경험심리학이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가설이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는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강렬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누미노제(Numinose, 신성한 힘)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며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통찰이 바로 분석심리학설의 특징이다.

융의 학설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다는, 지극히 자연스런 구별에서 출발한다. 남녀의 의식이 다른 만큼 무의식의 심혼의 성향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은 각기 대조되는 성향의 내적 인격을 인식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내적 인격이 충분히 인식되면 남성과 여성은 각각 남녀의 타고난 장점을 살리면서도 의식에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성숙한 인격으로 변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인간은 남성이기만 하거나 여성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각자 개성을 가진 존재이다. 자기실현은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전체정신이며 진정한 의미의 개성의 실현이다. 진정한 의미의 개성이란 다른 사람과 다른 특성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은 보편적 특성을 모두 통합한 그 사람 전체를 말한다. 융의 아니마‧아니무스 학설은 남녀를 동등한 선상에서 보면서 남녀의 서로 다른 특성을 의식과 무의식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다.

<들어가는 말 - 마음의 구조와 심혼의 자리>

아니마는 한마디로 남성 속의 여성, 아니무스는 여성 속의 남성을 말한다. 아니마‧아니무스는 남성으로서 또는 여성으로서의 페르조나(외적 인격)에 대응하는 무의식의 내적 인격이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인류가 남성과 여성에 대해 상상하고 체험한 모든 것에서 우러나온 원형의 조건을 토대로 하는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인류공통의 보편성을 지닌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실현은 중년 이후에 시작된다. 융의 아니마‧아니무스론은 인간이 남성과 여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남성은 여성적 요소를, 여성은 남성적 요소를 살려서 의식에 통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전체정신의 중심에 거의 접근하게 된다.

<제1장> 아니마, 아니무스란 무엇인가?

1.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론

페르조나는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또는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말썽을 빚지 않기 위해 생긴 기능 콤플렉스로서 그 사람의 참다운 개성이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외부객체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며 살지만 동시에 주체(내적 객체, 무의식)와의 관계 속에서 살기도 한다.

밖으로 강한 남자는 안으로 약한 여자이다. 남자의 페르조나 뒤에 그 대자(對者)인 아니마가 있다. 밖을 향해서만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 싸여 있다.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그 어둠에 싸여 있는 약한 아니마를 인식하고 통합해야 하지만 대개는 그런 노력 없이 안의 ‘여자’가 밖으로, 우선 배우자에게 투사된다.

쉽게 말하면 서로 ‘이유없이 끌리고’, ‘첫눈에 반한’ 남녀 사이에서는 아니마‧아니무스상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페르조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고 있고 내적 과정과 의식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심혼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투사를 통해서만 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긋나긋하고 알아도 잘 모르는 척하고 남성의 예민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여성은 약한 아니마를 거느린 남성 집단에서 살아남는다. 이것은 사회발전을 위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다만 사회조직에서의 남녀의 알력, 더 나아가 여성 소외의 대부분의 책임이 남성에게 있지만 여성의 아니무스의 돌출행위도 이에 일부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경험한다는 것은 그 경험을 하게끔 하는 선천적‧정신적 구조가 전제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그것이 있음으로써 어떤 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마음의 준비태세가 생긴다. 남성이 여성을 경험하고 여성이 남성을 경험하는 데에는 그것을 그렇게 경험하도록 하는 내적인 구조가 있고 반응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의 형태는 태어날 때 이미 잠재적 상(像, Bild)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융은 말한다.

무의식적 요소는 사회의 집단적 의식보다도 강력한 작용으로 삶을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의식에서 나에게 밀려드는 것과 나의 의지를 구별하고 나의 직책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의식의 어둠은 외부세계를 향한 페르조나에 기울이는 노력과 꼭 같은 집중력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관찰함으로써 밝혀낼 수 있다. 그래서 외적 인격과 마찬가지로 내적 인격이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마‧아니무스는 이성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식된다고 융은 잘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투사는 그곳에서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아니마‧아니무스 원형의 무의식적 배경과 의식의 반응 사이에 관계가 없었다면 인간 사회에 그 많은 사랑의 역사와 사건들, 비극과 숙명성을 묘사한 많은 노래와 시, 소설 등은 없었을 것이다.

2. 아니마, 아니무스에 관한 여성분석가들의 이론

융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아니마‧아니무스론에 특히 관심을 보인 융의 제자이자 동반자인 세 사람의 여성분석가가 있다. 융의 부인 엠마 융(Emma Jung), 융의 수제자이자 그의 사상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 그리고 여성성의 구조에 관한 에세이를 쓴 토니 볼프(Toni Wolff)가 그들이다.

-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의 이론
아니마의 특성은 주로 어머니에 대한 경험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를 부정적으로 체험했다면 그의 아니마는 흔히 우울한 기분, 짜증, 끝없는 불안과 예민함의 특징을 갖게 된다. 병, 발기부전, 사고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이 바로 그런 아니마로부터 일어난다. 또한 그런 음산한 기분은 자살의 유혹을 강화시킨다. 아니마는 이때 죽음의 귀신이 된다.

아니마의 최고 발전단계가 지혜로운 여성이고 아니무스의 최고 발전단계는 인도의 간디와 같은 지혜로운 행동가이고 보면 둘은 표면상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예감능력으로서, 다른 하나는 확고한 신념과 행위의 조화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배경의 성질이 다를 뿐이다.

- 엠마 융의 아니무스론
심혼적인 원리는 바깥세상을 통해 인지된다. 소녀들은 그것을 아버지에게서, 좀 자란 뒤에는 선생님, 오빠들, 부인은 남자친구들에게서, 마지막으로는 심혼에 관한 객관적 문헌, 교회, 국가와 사회의 온갖 기구와 제도, 그리고 과학과 예술의 창조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심혼의 객관적인 형태에 직접 접근하지 않고 그녀의 안내자이며 매개자가 될 남성을 통해서 얻게 된다. 즉 아니무스가 그에게 투사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녀는 자신 속에 아니무스가 있음을 모른다. 다시 말해 아니무스는 무의식적 상태에 있다.

아니무스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르면, 즉 무의식의 남자를 의식하지 못하면 어느덧 이것에 사로잡히는 결과가 된다. 안에 있는 아니무스에 사로잡히면 여성은 남성화된다. 이런 현상은 아니무스상을 투사할 만한 남성이 없는 경우에 잘 일어난다. 아니무스와 동일시하거나 그것에 사로잡히면 우울, 전반적인 불만, 인생에 대한 관심의 상실 등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며 여성성이라는 인격의 반이 아니무스에 의해서 생명을 빼앗기고 질식된다.

- 토니 볼프의 '여성 마음의 구조적 형태'

여성성의 네 가지 구조적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득이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데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어머니와 아내의 정신적 형태
② 반려자, 여자친구인 헤타이라(Hetaira : 고대 그리스의 고급 기생)
③ 아마존(Amazone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호전적 여인족)
④ 메이알레(Mediale : 영매의 힘을 지닌 자, 중개자)
여성은 이 네 가지 형태 가운데서 그녀의 본성에 가장 알맞은 구조적 형태를 먼저 실현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가면 두 번째 형태가 안에서 밀려들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네 가지 기본기능이 점차 분화될 것이다.

<제2장> 한국인의 꿈에 나타난 아니마, 아니무스상

꿈은 대단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비슷한 꿈의 내용도 개인에 따라, 꿈의 내용에 따라, 그 개인이 처한 현실상황에 따라, 꿈꿀 당시의 의식 상황에 따라, 꿈의 내용에 대한 그 개인의 연상과 문맥에 따라 그 뜻이 다르다. 꿈의 뜻은 스스로 자기의 꿈을 전문가에게 해석받고 남의 꿈을 그의 지도 아래 해석하는 장기간의 수련을 거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수련을 받아도 뜻을 알 수 없는 꿈들이 있다.

꿈의 의미는 언제나 ‘마치’ 어떤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꿈은 감추지 않는다. 가르친다.’ 꿈은 인간 본성, 전체정신의 핵인 자기(selbst)의 의도를 표현한다. 다만 해석의 다른 점은 길흉을 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과제, 대극의 합성과 전체정신의 실현, 즉 자기실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성과의 접촉이나 성적행위 없이도 대환희와 통일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생리적 성적 쾌락이나 알코올과 도박, 약물을 통해서만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전일감의 착각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공허감을 낳게 되고, 그 공허감을 다시 같은 방법으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중독현상을 낳는다.

우리가 보통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아의식이 모르는 것을 무의식의 심혼은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월한 지혜, 통찰력이다. 우리가 무의식의 의미를 깊이 통찰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의미를 의식화한 것이며 숨은 보배를 손에 넣은 것과 같다. 이러한 통찰과정에 매개적 기능이 관여하는데, 남성에게서는 그것이 에로스의 성질을 여성에게서는 로고스의 성질을 갖는다.

꿈은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다른 각도’의 뜻을 발견하려면 꿈을 꾼 사람의 자아의식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 의식이 얼마만큼 아니마‧아니무스를 통합하고 있는지, 또는 어느 정도 유리되어 있는지에 따라 무의식의 내면적 인격의 특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제3장> 밖에서 보는 한국인의 아니마, 아니무스상

첫눈에 반할 때는 물론 대단한 매혹감, 절절한 사랑의 감정, 흠모하는 마음, 그리움과 안타까움, 좀더 가까워지고 싶은 조바심, 때로는 전기가 오른 듯, 얼어붙은 듯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에서 말 한마디 못하거나, 한다는 말이 엉뚱하게 퉁명스럽게 나와 웃음거리가 된다든가……. 이때 그 남자, 또는 그녀는 자신들의 아니마‧아니무스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 원형상을 상대방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에게서 보고 느끼는 황홀감, 이상적인 여성상, 또는 남성상이 사실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가 생각했던 이상형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실망은 환멸로, 환멸은 공허감으로, 공허감은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어지며 나중에는 ‘너 때문’이라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싶어진다. 아니마‧아니무스 원형의 투사는 이렇게 사정없이 ‘이성’을 빼앗고 장님으로 만들며 그 뒤에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사실 많은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아니마‧아니무스에 의식‧무의식적으로 맞추어 살고 있다. 두 부부의 만남 자체가 아니마‧아니무스의 무의식적 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보면 오래 함께 사는 부부가 서로 닮는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아내를 보면 그의 아니마의 한 면을 알 수 있고, 남편을 보면 그녀의 아니무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암탉을 무시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암탉의 자율성에 대한 수탉인 남성의 불안에서 나온 말이다. 구체적으로 아니무스 의견에 의한 극도의 공포가 거기에 있다. 남성의 연약한 아니마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남성이 여성을 낮추어보는 것은 남성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니마, 무의식의 여성성을 낮추는 것과 같다.

남성이 권위를 크게 내세우는 문화권의 남성들은 겉으로 보이듯이 그렇게 강한 남성이 아니다. 무의식적인 모성과의 유대, 모성에 대한 무한한 의존심을 은폐하려는 반작용으로 남성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아니마는 아직 모성성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남성의 보편적 특성을 모성콤플렉스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성의 아니무스가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영적인 지혜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창조적 효과를 자기 자신과 사회에 주게 될 것이다. 한국의 여성은 미래의 가능성이다. 그런데 그 가능성 뒤에 한국의 남성이 있다. 이들의 발전을 뒷받침하려면 한국남성의 아니마가 분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내적 인격을 일깨우고 의식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의 동반자이다.

<제4장> 정신과 임상에서 보는 아니마, 아니무스 문제

신경증적 장애를 앓는 우리나라 기혼여성 환자들에게서 삶의 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남편에 대한 불만, 다른 하나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시어머니를 중간에서 조절하지 못한 무능한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초점이 바뀌고 있다. 신경증적 장애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아내들에게 남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며 남편의 몰이해는 아내의 심리적‧신체적 고통을 해결하는 데 적지않은 장애가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최소한 여기에 부정적 아니무스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내가 말한 남편은 그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성격뿐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투사된 자신의 부정적 아니무스상이라는 점이다. 투사를 통하여 그 부정적인 면은 더욱 강화되게 마련이다. 아내들은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확고하게 ‘아니무스의 의견’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무스의 의견은 항상 틀림없는 확신으로 나타난다.

여성에게 구체적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아니무스는 흐리멍텅한 것을 싫어한다. 표현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서 부부 사이에 깊은 신뢰가 쌓이기 전까지는. 중년이 넘어 노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남성은 여성심리를 여성은 남성심리를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남성이 자신의 아니마를 표현하고 여성이 자신의 아니무스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분화시켜야 한다. 부부는 서로 다른 자신의 세계를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우울증상을 밖으로 향한 공격성이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된 것이라고 본 정신분석적 해석은 일리가 있다. 의식이 무의식을 소홀히 하면 할수록 무의식의 콤플렉스는 대상적으로 의식에서 에너지를 빼앗고 힘을 더하여 의식을 압박하게 된다. 우울증상은 자아의식의 탈진상태, 즉 의식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간 상태이다. 그것은 의식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자기고백이다. 우울증은 자아의식의 재생을 목적으로 하는 고통이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잃어버린 것들을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제5장> 한국문화에 나타난 아니마, 아니무스상

1. 심혼의 노래

아니마‧아니무스를 그 본래의 언어인 ‘심혼’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저 많은 시인들의 노래에 한 걸음 다가간다. ‘혼’이 있으므로 아니마‧아니무스 원형의 초월성과 자율성, 그 감동, 그 엄숙미가 잘 표현되는 것이다. 심혼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진지한 자아의식의 자세로 심혼의 움직임을 관조할 때 그것은 창조적 예감이 되고 거룩한 확신이 된다.

경솔한 호기심, 삐뚤어진 의식으로 심혼을 대하면 그것은 상처를 입고 왜곡될 것이다. 시인은 심혼을 관조하는 사람이다. 심혼의 열쇠로 비밀의 문을 열어 사람들에게 그 안의 것을 보여준다. 시인은 심혼이 그리워 그를 노래한다. 그는 심혼에 관해 말하나 사실 그 자신이 심혼이 된다.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이 시의 생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보편적인 인간정신의 원초적 심층, 그리고 집단적 무의식에서 우러나온 것일수록 그것은 시대를 넘어 영속한다. 난해하여 당대에는 비록 이해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2. 민간 전승을 통해 본 아니마, 아니무스 현상

- 무속의 세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샤머니즘에서는 영혼을 잃으면 병이 든다는 질병관념이 아주 널리 퍼져 있다. 심혼의 상실이란 심혼과 의식의 관계단절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분리상태이다. 그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이다. 자아의식이 한쪽 방향으로 치달을 때, 즉 남성이 오직 ‘남성적’인 것에만 집착할 때, 여성이 오직 인습적 여성성에만 의지할 때 심혼과의 관계가 상실된다. 원시종족은 이 경우 혼의 위험(perils of soul)을 말한다.

- 민담의 세계
우리나라에서 무속적 점복은 대부분 여성이 한다. 그 까닭은 여성이 남성보다 무의식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적 태도의 특성은 수용성(Receptibility)이며 그것은 열려 있음과 비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융이 말했듯이 ‘여성성의 위대한 신비’이다. 창조적인 남성에게서도 그러한 여성적 속성은 자아의식을 무의식의 심층으로 연결하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

- 전통 종교사상과 여성성
종교사상은 사상, 즉 사유의 산물이거나 형이상학이지 심리학이 아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말할 뿐 우주의 창생과 신의 성격을 말하지 않는다. 심리학, 특히 경험심리학은 개개인의 심리적 체험을 대상으로 한 경험을 토대로 학설을 세우지만 종교사상은 보편적 윤리의식과 규범, 인격의 완성을 위한 일반적인 당위성을 주장한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정신현상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에 주목한다.

관세음보살이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따지는 것은 사실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곳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융합된 전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융이 말하였듯이 붓다가 더할 나위 없는 자재력(自在力)의 외적 현현인 관세음보살 또한 전체상의 일부 또는 전체성으로 이끄는 내적 인격상, 아니마, 때로는 아니무스(관자재보살이라 할 때)상에 비길 수 있다.

<맺음말>

그림자나 아니마‧아니무스나 궁극적으로는 전체정신의 중심핵인 ‘자기’에 이르는 길목에서 만나는 무의식의 요소들이다. 그림자가 의식화되고 아니마‧아니무스가 의식화되어 의식의 내용으로 동화될 때 우리는 거의 우리 전체인격의 중심, ‘자기’에 가까이 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그 사람을 가지고 있음을 모른다.”
내가 어떤 아니마‧아니무스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뿐 아니라 그것이 언제 어디서 자아를 사로잡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지적인 앎을 넘어선 깨달음에 접근한다.

분석심리학은 종교도 아니고 도덕률은 더구나 아니다. 무의식의 탐구를 통하여 발견한 사실을 전할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남성의 마음속에 여성이 있고 여성의 마음속에 남성이 있다는 가설,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하여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그의 전체에 도달하려는 내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름을 붙여 이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숙한 아니마, 미숙한 아니무스를 밖으로 투사하여 다른 사람들의 부도덕성과 위선을 지탄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미숙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누르고 없애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려서 발달시키는 일종의 정신적 연단술(鍊丹術)에 전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동양의 양생술에서 기(氣)나 정(精)이 밖으로 새지 않게 하고 안에서 돌리는 ‘회광(回光)’이며 ‘암컷과 수컷의 뒤집기’일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내향화와 자기성찰의 자세이다.


***


몇 달 전, 「분석심리학」이라는 책을 처음 접하면서 푹 빠져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설명해내는 매력에 이끌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져서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기대가 컸던지 생각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이론을 접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수확은 내 안의 남성이라는 아니무스의 일부를 알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혼자 텔레비전만 본다’, ‘피곤하다고 잠만 잔다’, ‘내가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한다’, 기타 등등의 무뚝뚝함, 이기적, 독선적이라 여겨왔던 남편의 모습들이 부정적 아니무스의 특성과 꼭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남편이 결코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확신 또한 전형적인 아니무스적 사고이며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벽’이란 남편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내 마음속의 부정적 아니무스의 투사상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막연하게나마 인정하고 있었던 ‘투사’를 넘어서는 이론이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되었고 한참을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소리 뻥뻥 치면서 잘난 척하면서 살던 ‘나 자신’에게 스스로 갇혀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아아! 나는 왜 이다지도 모르는 것이 많단 말인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부부 일심동체론' 중에 나온 그린랜드 전설이었다.
어떤 사람이 저승에 가 보았다. 어느 곳에 다다르니 몇 사람은 살아 있는데 몇 사람은 반쯤 썩은 채 누워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누가 죽어서 남아 있는 유족으로부터 너무 심한 애도를 받으면 그는 다시는 힘을 쓸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이 더 이상 울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누워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상으로 내려가거든 부디 그 사람들에게 말해주시오. 죽은 사람을 애도하되 너무 정신없이 울어서는 안 된다고.”

배우자의 죽음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겪는 생활변화 중 가장 큰 변화로 큰 감정부담(스트레스)을 주기 때문에 살아남은 배우자의 몸과 마음의 건강에 막대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한다.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은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이고 아픈 추억은 평생을 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삐딱선을 탔다. 배우자의 죽음과 배우자의 외도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스트레스가 심할까 하는 생각을 갑자기 하다가 한동안 머리가 지끈거림을 경험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아니 인간의 뇌를 열고서 들여다본 듯했다. 물론 굉장히 거대하다는 정도만 알고 다시 뇌를 닫아버렸지만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살면서 가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그게 결국은 다 머릿속의 난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왜 그걸 하필이면 ‘마음’이라고 표현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나이를 더해 이러한 느낌을 경험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인간이, 나아가 온 세상 만물이 온통 물음표 투성이로 변한 듯도 했다. 이래서 인간은 신을 창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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