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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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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3일 07시 12분 등록
a. 저자소개

호감 가는 사람이 생겼다. 대놓고 들이대거나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방법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고를 것인가. 학창시절 내내 나의 방식은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당연히 되는 일도 없이 몸만 피곤하다. 떨칠 수 없는 미련이 더듬이로 변하여 아닌 척 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스토커의 느낌이 살짝 드는데 그 정도 아니니 겁먹지 마라).

자, 이제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심의 영역 안에 들어온 두 학자가 있다. 대놓고 들이대거나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방법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솔직히 600페이지는 아무리 지면이지만 대놓고 들이대기에 너무 벅차다. 게다가 책 사이사이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이 아저씨의 인상은 더더욱 들이대기가 어렵게만 보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더듬이를 세우고 정보를 모으는 일이다.

소설책을 읽으러 간 도서관에서 겸사겸사 두 학자의 이름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질책하지 마라. 앞에서 두 학자가 호감의 영역이 아니라 관심의 영역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일단 키워드 ‘도정일’은 동화책이 제일 많이 검색되었다. 안데르센 류의 책은 아무래도 내가 찾는 사람과 거리가 있는 듯해서 좀 그럴싸한 제목의 책 두 권을 찾아보았다. 한 권은 <새천년의 한국인, 한국사회>라는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였다. <새천년의 한국인, 한국사회> 내용 일부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목차를 보다가 책을 덮었다. 머리 식히러 온 곳에서 다시금 머리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말 참 어렵게 하는 스타일이다. ‘최재천’이라는 키워드로도 검색을 해 보았는데 책이 여러 권 뜬다. 대강 훑어볼 요량으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을 빌렸는데 앉은 자리에서 반을 읽어버렸다. 전문용어를 별로 쓰지 않는 문체라 읽기가 쉽다. 과학자라는데도 글 자체가 전체적으로 참 따뜻하다. 이 사람 진짜 과학자 맞는 거야?

도서관 폐점음악에 떠밀리듯 나온 나는 집에 와서 대담의 책날개를 폈다. 말발 서는 인문학자와 따뜻한 과학자의 대담을 살펴봐야 할 것이 아닌가.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둘. 다. 만. 만. 한. 사. 람. 들. 이. 아. 니. 다. 라는 사실을. 도정일 선생에 대한 나의 판단을 접었다. 저자는 말을 어렵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데, 나의 지적인 수준이 미처 저자의 견해를 수용하기 힘든 바닥이었다. 내 자신이 한없는 애송이 임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저자 소개를 하라는데 나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가장 확실하게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라고 믿는다. “책을 읽어라.”



b. 독후감

나는 식탐이 강하다.
당연히 먹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행동 중의 하나다. 입맛 역시 까다롭거나 예민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일반적인 한정식 집에서 나오는 음식은 다 내 밥인데 그동안 접해왔던 음식이 폭은 아주 조금씩 넓혀져 왔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는 ‘집밥’이 주메뉴였다.
학교급식의 개념이 전혀 없던 때라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는데, 야간자율학습이라도 있을라치면 아침부터 두 개의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수고를 해야 했다. 도시락 반찬으로 싸올 수 있는 음식들이 고만고만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찬통을 나란히 놓고 먹는다 한들 그 식은 밥이 뭐 그렇게 새롭고 신선할 일이 있었을까. 자연히 먹는다는 것은 주로 행위에 많은 부분 촛첨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나서 대학생활 및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좀 더 다양한 음식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고교때와 먹는 음식은 유사하였지만 그래도 차이는 있었다. 모양이 조금 더 발전하였거나(케잌을 눈으로도 먹는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맛이 조금 더 낫거나(분식집 냉면과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 전문점 냉면이었다), 아니면 모양과 맛에서 전혀 새롭거나(퓨전 음식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먹었었다). 이쯤 되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가 아니라 큰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 중에서도 전문점은 묘한 매력을 지녔다. 거의 모든 전문점은 하나 또는 두세 가지 메뉴 이상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운영하는 방식이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우 편했다. 남들 먹는 대로 시켜서 남들 먹는 대로 먹으면 되는 일이라 크게 고민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전문점과는 전혀 다른 매력으로 뷔페 또한 매력있었다. 물론 전문점 음식과 비교해 보면 뷔페에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만나기는 어려웠지만 중간수준의 맛을 내는 음식을 다양하게 골고루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음식과 음식가게에 대한 경험을 쌓아가는 중에 식사에 초대받았다.
얼핏 보기에 뷔페 같았다. 뷔페라면 어렵지 않다. 적당히 돌면서 중간정도의 맛을 내는 음식을 다양하게 먹으면 되는 곳이 뷔페가 아닌가. 그런데 웬걸. 뷔페에서 아주 된통 당했다. 지금까지 내가 다니던 동네 뷔페와는 수준이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요리가 모두 집합되어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뷔페에서 나는 먹기도 전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코너를 돌 때면 이게 먹어야 되는 것인지 아닌지, 접시위에 있는 것이 음식인지 장식인지를 몰라 허둥거렸다. 그 많은 음식 중에서 내가 아는 음식이 나올 때는 눈물 나게 반가워하면서 손뼉을 쳤지만 그 나마도 만나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한 바퀴를 돌고 나서 내 접시를 바라보았을 때 접시 위에 있는 음식들은 글쎄... 뭔가 내 성에 차지 않는 느낌이다. 이 끝에서 저 시작점까지 다시 돌아보면서 천천히 고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지금 당장은 그다지 내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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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쓰라는데 뭐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봐 덧붙인다. 솔직히 너무 과분한 책을 읽었다. 읽기는 읽었는데 무엇을 읽었는지 내용이 어떠한지 잘 요약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읽고 나서의 잔상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잔상을 정리하니까 이런 글이 나온다. 더불어 대담을 주도한 두 학자에 대한 느낌도 잔상으로 남는데 도정일 선생의 경우 자기만의 바다를 지키는 꼿꼿한 등대같다는 생각이, 반면 최재천 선생의 경우 자기만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한척의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c. 내가 저자라면

- 사탕을 없앤다.
- 대담 형식을 고수한다.
- 주제별 서술이 아닌 연대기적 서술을 취한다.
- 손을 잡고 통섭으로 나아가는 데 의심을 품는다.

사탕을 없앤다 : 도정일 선생과 최재천 선생의 대화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아이콘이 꼭 사탕같이 생겨서 그렇게 명명했다. 내가 만약 저자라면 중간 중간 삽입되는 제3자의 정리 및 질문을 없앴을 것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서로간의 이야기를 푸는데 왜 중재자가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논점에 근접하여 핵심을 찌를 수도, 논점과 거리가 멀어져 방황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가 주변부를 흐르던, 중심을 통과하던 간에 그것은 대담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오히려 주제와 가깝고 멀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은 생각의 기회를 넓힐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3자는 인간 내비게이션이었을까? 흔히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그러는 것처럼 지금 대담자들의 위치가 어디이고, 앞으로 대담의 방향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환기를 시켜줄 요량으로 3자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목적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임 전에 대담방향을 전달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으리라 생각된다.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한 질문을 하지 못해서 늘 아쉬움에 사로잡혀 사는 나는 질문도 기술이라고 믿는다. 대담 사이에 들어오는 질문들이 나에게는 자꾸 방해꾼처럼 느껴진다.

대담의 형식을 고수한다 : 작년에 MBTI라는 성격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개인이 응답할 수 있는 자기보고의 문항을 통해 인간의 선천적 심리유형을 설명하는 검사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검사의 시행 전에 실시하는 오리엔테이션인데, 좋아하는 꽃이나 주로 사용하는 손 등의 사례를 들며 꽤 장시간에 걸쳐 주의사항을 설명한다. 그런데 설명하는 내용의 핵심이라는 것이 ‘틀리다’와 ‘다르다’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인간유형에서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다만 너와 나는 다르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대담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인문학자는 인문학에 대해서, 자연과학자는 자연과학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차이를 인정해 나가는 것이 대담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식으로 갈 생각이었다면 책의 제목은 대담보다는 토론이 어울리지 않는가.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실제 대화만큼 순수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재단을 하다보면, 특히나 말을 재단하다보면 아무리 객관적인 요소를 중시하려 한다고 해도 주관적인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담 자체를 그대로 싣는 것은 가장 안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주제별 서술이 아닌 연대기적 서술을 취한다 : 사실 이 책은 내 수준의 책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내용의 양적 질적 수준이 방대하여 각 장을 읽을 때 그 장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많은 장에서 힌트는 고사하고 전혀 감 잡을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나의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어차피 목차에서 내용의 힌트를 얻지 못한다면 연대기적 서술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자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지적영역을 넓혀가는 사람일진데, 대담이 하루 이틀이 아닌 4년간 진행된 것이라면 연대기적 서술은 개인의 논점 변화를 보여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손을 잡고 통섭으로 나아가는 데 의심을 품는다 : 나는 허구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꽤 충실하게 디즈니랜드적인 감상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to be continued'식으로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히든(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외계 생물체에 관한 영화로 에일리언과 유사하다. 주인공들은 외계생물체를 모두 죽인 것으로 생각하고 안심하는데, 외계생물체는 또 다른 숙주의 몸에서 건재함을 보여주면서 화면에 end 자막이 처리된다)‘식의 영화를 보면 마음이 탐탁치않다. 아니, 아주 불편하다. 그런데 이건 뭐야. 책에서도 역시 통섭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손을 잡는 화해무드다. 글쎄다. 영화가 아닌 책이라서 그런지 나의 해피엔딩스토리에 대한 강박이 다분히 흔들리는 부분이다. 지나치게 마무리 지향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내용의 이해를 충분히 못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추후에 시간의 공백이 충분히 주어지고 나서 다시 한 번 대담을 훑어봐야 할 필요를 느낀다.



d. 책 속에서

1.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63p 탁월한 학자를 길러내는 최상의 전략은 자유

65p 기술만 있으면 문화산업이 되는 줄 압니다. 촬영술을 가르치고 특수효과 기술을 가르친다고 곧바로 좋은 영화가 나옵니까? 문화산업에서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야기입니다.

67p 창조력 상상력은 아무 기초도 없는 백지상태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에 기초학문이 있다면 인문학은 전공이 뭐냐에 관계없이 모든 학문과 교과의 기초입니다.

72p 인문쟁이 대선배 소크라테스가 진작 그런 말을 했어요. “고통과 쾌락은 하나의 머리를 가진 두 몸뚱이”라고 말이죠.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행복약은 ‘삼불’을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행복’을 제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79p 진실은 바른 선택과 분리될 수 없고, 바른 선택은 ‘좋은 삶’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좋은 삶’이 행복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91p 옆집은 뭐하나 구경도 하고 기웃거려보는 것은 학문의 시야를 넓히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기웃거리다간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제 것에나 신경 쓰지 남의 영역은 왜 기웃거리느냐는 거죠. ‘전문가주의’입니다. 학문의 전문성은 아주 중요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학문이 왜소해지고 무엇보다 오류나 자기도취, 시대착오에 빠집니다. ‘외길을 간다’는 말은 옆집이 뭐 하는지 한눈팔지 않고 가는 것이 아니라 두루 살피면서도 자기 길을 간다는 소리일 때만 의미가 있죠.

94p ‘트랜스’란 한 사람의 연구자가 다수의 전공영역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분야의 연구를 살찌우기 위해서, 혹은 어떤 연구대상에 대한 더 나은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 인접 학문이나 다른 학문의 성과들을 부단히 조회, 참조하고 원용하는 것일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07p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2.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119p 신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일 때가 많습니다.

136p 족내협동, 족외협동

151p 학습능력을 갖춘 동물이라 할지라도 대개 당대에 배워 써먹고 다음 세대는 나름대로 또 홀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 세대가 터득한 것을 문자로 다음 세대에 남깁니다.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은 세대마다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서 뛰기 시작하지만 우리는 아예 출발선을 들고 옮기며 사는 동물인 셈입니다.

154p 발생학적 잡음 또는 반응양태

162p 문화도 유전됩니다. 생물학적 유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탄생은 생물학적 사건이되 그의 성장은 사회문화적 사건입니다 .어떤 문화 속에 태어나 자라는가에 다라 전혀 다른 인간이 나와요. 제국주의 문화는 제국주의적 인간을 기르고 남성중심의 문화는 남성중심주의의 인간을 키웁니다. 문화론에서는 이걸 ‘문화는 인간을 재생산한다’고 말하죠.

3.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170p 공학적 사고는 공리적 효용을 계산하는 데 아주 바릅니다 .기술자들은 난치병 치료나 인류의 미래 복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죠. 하지만 모든 과학적 실험에는 어두운 면이 있어요....(중략).... 그러나 문제가 있을 때는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시인해야지, 없다고 우기면 안 됩니다.

171p 남들이 할 가능성이 있고 막을 방도가 없으니까 내가 먼저 한다는 식이 되면 과학의 정신과 윤리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어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안 하는 것이 윤리적 자세입니다.

173p 선택과 결정의 문제 앞에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딜레마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 그 자체로는 선택의 고민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를 여기서도 보죠. 지금 같은 기술시대에서도 우리는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알지 못합니다.

175p 기술과 과학은 상당한 맹목성을 가지고 있죠. 방법의 맹목성이요.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을 위한’방법인가를 따집니다.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거죠.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효과적 방법이 기술이라는 건데, 이때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은 따지지 않는 것이 기술의 맹목성입니다.

177p 누군가가 죽어주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죠.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

182p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당 시빌은 아폴론의 욕정에 응해주는 대가로 영생을 약속받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영생’만 원했지 ‘젊은 몸’으로 영생해야 한다는 조건은 빼먹습니다. 한 500년, 아니 한 1,000년쯤 살긴 사는데 몸은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지죠. 그런 꼴로 사느니 죽고 싶지만 영생의 약속을 받았으니 죽을 수도 없어요. 산 속 동굴에 숨어들어 비참하게 사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묻습니다. “시빌아, 시빌아, 이제 너는 무엇을 원하니?” 시빌이 대답합니다. “나는 죽고 싶다”

191p 홀로 서는 연구자 키워내기, 그것이 대학원 과정의 목표죠.

194p 대학은 앵무새 우는 언덕이 아니고 복사 전문가를 키우는 곳도 아니다.

196p 달마게이트

4. 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212p 사실 생물학은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왜냐하면 죽는다는 게 결국 생명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32p 원인을 찾아 결과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과학이죠.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과학은 그래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방식입니다. ‘그 원인에 그 결과’라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합당하게 이어주는 것이 과학적 합리주의죠.

5.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256p 이렇게 되면 참으로 묘한 모순이 생깁니다. 유전적으로 볼 때 개인은 월등해지는 데 비해 집단은 완전히 열등해지는 길로 들어서는 거죠.

268p 문학이 영혼이니 망령이니 하는 것을 등장시킬 때는 그런 것이 실체로 꼭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팔아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죠. 팔아먹을 수 없고 팔아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 때 인간은 제법 그럴듯한 존재가 되잖아요? 훨씬 덜 초라해 보이죠.

268p 이건 성찰과 객관화의 아주 효과적인 장치죠.

279p 원시사회의 생존 방식에서 ‘개인’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백치(idiot)'의 그리스 말 어원은 ’이디오테스(idiotes)'인데 이건 공동체를 떠난 외톨이를 의미합니다. 무리를 벗어난 외톨이란 죽기로 작정한 바보 중의 바보라는 소립니다. 내 생각에, 영원성에 대한 갈망의 뿌리는 인간이 가진 종교 성향과도 직결되는 것 같은데 이 종교 성향이란 것은 무리를 지어야 살 수 있다는 생존 명령이 유전 정보로 되먹임된 결과가 아니가 싶습니다. 집단을 결속시키는 데는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것 이상의 효과적인 방법이 없으니까요.

6. 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286p 과학과 허구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과학은 반드시 입증의 책임 앞에 서야하고 검증에 실패하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허구적 이야기는 검증의 책임을 지지 않고 검증을 요구받지도 안습니다....(중략)... 이것이 과학과 허구의 결정적 차이죠. 그러나 과학적 방법이란 게 확립된 이후에도 과학은 여전히 ‘구라’가 될 수 있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요. 아인슈타인 이전에 빛은 휘지 않고 시간은 직선적이라는 게 과학의 정설이었어요. 과학의 불안은 정설이 언제나 ‘잠정적으로만’ 정설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불안이 과학의 위대성이 되기도 하고요.

289p 그런데 문학이나 인문학 구라들에게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믿음 같은 게 몇 개 있습니다. “이 구라 속에 진실이 있다‘는 말에 대한 믿음, ”나는 마음만 먹으면 허위와 진실 양쪽을 모두 말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나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라는 주장에 대한 믿음이죠. 이 마지막 것이 아무래도 최고 걸작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거짓말을 통해서만 진실을 말한다“는 소리기도 한데, 이건 문학만이 아니라 인간사 전반을 꿰뚫는 대단한 진실 같아요.

297p 자기기만 이야기가 나오니까 최 교수님이 앞에서 언급했던 로버트 트리버즈가 또 생각나네요. 그 사람 말인즉, 인간이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세계에 대해 정확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는 주장은 순진한 소리라는 거예요. 인간의 정신진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분명한 의식 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틀린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 그림을 정확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도록 자기를 속이는 능력이라는 주장이었죠?

300p 히브리 경전(기독교의<구약>)이 씌여지기 시작한 것은 유대민족이 강성했을 대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 유대의 두 왕국이 차례로 망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 잡혀 있을 때입니다. 민족이 고초를 당하고 있던 시기의 산물이죠. 나라 상실의 고통, 노예의 고초가 가장 깊었던 시기에 가장 강력한 신화가 만들어진 겁니다.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 기간은 1세기가 넘어요. 그 기간 동안 유대 지식인들은 이스라엘을 버린 야훼 신을 팽개칠 만도 한데 버리기는커녕 되레 그 절대의 신을 강화하고 그 유일신에 대한 충성과 믿음을 희망의 조건으로 삼게 되죠 .놀라운 이야기에요. 고통 속에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강한 신화가 만들어진 겁니다. 유대 신화가 다른 신화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거기 아닌가 싶어요. 가령 그리스 신화는 그런 민족적 고통의 산물은 아닙니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죠.

305p 부도덕이 아니라 무도덕

7.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328p 생각할 거리

341p 놀이에는 참 이상한 성질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실용적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 도비니다. 실용성을 떠나는 거죠. 스포츠도 그래요. 달리기나 창던지기, 투원반, 수영, 태권도 할 것 없이 애초에는 어떤 실용적 목적과 가치 때문에 시작되었던 것들이 나중에는 스포츠를 위한 스포츠로 발전하죠. 예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는 거죠. 도자기를 보세요. 삶의 도구였던 질그릇과 단지, 항아리들이 삶의 현장을 떠나서 완성의 대상으로 옮겨 앉는 거죠. 사기장이가 도자예술가로 분화, 발전하고, 이런 문화적 분화가 생물학 용어로는 예술의 ‘진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화의 관점에서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예술 그 자체입니다. 예술의 진화가 이 단계에 이르면 예술 행위는 자연선택이거나 성 선택 같은 생물학적 도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거죠.

352p 기술은 ‘쓸모’를 찾아가고 ‘예술’을 쓸모를 떠납니다.


8.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373p 보노보 사회에서도 성은 번식의 용도로만 쓰이지는 않는 다고 말하면 보노보도 인간처럼 필연의 명령을 이탈해서 자유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재주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보노보의 경우,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을 대 암컷이 나서서 적장과 동침하는 방법으로 갈등을 해소한다는 것은 ‘사회적 행위’입니다. 성을 사회적 용도로 쓸 줄 안다는 것은 보노보의 사회적 진화인 셈이죠. 생물학적 필요성이 아닌, 사회적 필요성이 보노보를 그 방향으로 진화하게 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가 필요성의 성질이 좀 다르긴 하지만 여전히 보노보의 행태는 어떤 필연에 묶여 있는 것 아닙니까?

378p ‘왜’는 이른바 궁극원인을 묻는 것이고, ‘어떻게’는 근접원인을 묻는 겁니다.

379p 사회생물학에서는 유전자가 부처님 손바닥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선택도, 그 손바닥을 못 벗어나죠. 이렇게 되면 사회 생물학은 하느님 이론 같은 것이 됩니다. 아무도 그 힘 바깥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392p 수치심의문제도 이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신의 창조 행위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걸 아비인 신의 면전에서 여봐란 듯이 내놓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숨어서 해야 했죠. 이게 ‘은밀성’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명 창조 행위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죠.

393p 수치는 신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9 판도라 속의 암컷, 이데올로기 속의 수컷

425p 유성생식만이 최선의 생식방법이 아니라면, 가족의 구성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겠죠. 미래 사회에 일어날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가족’이 아닐까 싶어요. 아직은 많은 나라들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10.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440p 이건 매우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저는 인간은 누구나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봐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든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이 많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어떻든 결국은 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고, 많지 않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억압적이면 결국 드러내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그 가운데는 조금씩 드러내면서 왔다갔다하는 사람도 있을 거구요. 저는 그런 성향이 식물이나 동물 세계에도 있고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이느냐 안보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445p 질서 만들기라는 면에서 보면 젠더 구분처럼 유용한 것이 없어요. 남자가 할 일은 이것이고 여자가 할 일은 저것이다. 남자는 이런 성향을 가져야 하고 여자는 저런 성격을 가져야 한다. 남자에게 맞는 것은 이런 것이고 여자에게 맞는 것은 저런 것이라고 역할을 부담하면서 두 성을 사회적으로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죠. ‘분리’라는 것은 권력분할, 누가 더 권력을 가졌는가를 정할 때의 첫 번째 수순입니다. 권력을 많이 가진 자는 덜 가진 자보다 당연히 우수하거나 우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죠. 젠더의 정치학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1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470p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뒤집어놓으면 거세 충동은 아비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들놈이 언젠가 자기를 거세하려 들 거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거세 공포는 아비의 것이기도 하고 아들의 것이기도 해요.

477p 패러다임 넘기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은 예술적 상상력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 점에서 신화적 상상력과도 닮았고요. 그러니까 방법은 철저히 과학적으로 하도, 머리는 신화적으로 돌리는 게 과학의 묘사가 아닐까요? 즉 프로이트의 ‘신화들’이 비록 비과학적이라 해도, 거기서부터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이 비상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립니다. 특히 무의식 이론이 그래요. 한 20년 전까지 ‘이데올로기’라면 고도의 의식적인 가치 체계이자 신념이라고 행각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원용한 사회과학자들은 그 이데올로기란 게 철저하게 무의식이란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무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라는 중요한 인식 전환이 일어나요.

487p 동물 기준에서 인간을 설명하는 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게 하는데 기여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사성만 자구 세워나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란 점입니다. 인간과 동물이 생물학적으로 가깝다면, 같은 인간들 사이의 생물학적 유전적 유사성은 그보다 더 큽니다. 하지만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제각각 다른 문명, 다른 문화, 다른 가치와 믿음의 체계, 다른 관습들을 만들어왔고 지금도 만들고 있어요. 행동 방식도 다릅니다. 그러니까 생물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유사성 논의만으로는 이런 거대한 차이들을 설명할 수 없어요.

488p 섹스에 대한 태도도 생물핮거 이유보다는 문화적 이유 때문에 큰 차이가 납니다.

12. 다양한 생멱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500p 개인은 서구 근대의 독특한 발명품입니다. 그 개인은 운명의 주체, 지식과 판단의 주체, 자유와 책임의 주체입니다. 전통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이 자기 운명을 제 손으로 만들고 수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의 기원, 지점, 거기에 개인주의 가 있습니다. 미래라는 사회적 시간형식을 발명한 것도 근대입니다. 내가 내 운명을 so 손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미래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 들어온 역사는 300년이 채 안 되었어요. 이런 개인주의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천민자본주의, 물질주의, 비도덕적 가족주의, 상업주의, 출세주의 같은 것들과 결합해서 비속한 개인이기주의로 전락한 겁니다. 개인주의의 타락은 사실 한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채택한 사회들에서 지금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속화 현상입니다. 우리 시대의 세계적 현상은 정신의 비속화일 겁니다. 개인과 사회가 끝도 없이 천박해 지고 있어요.

517p 몸은 젊어서 번식력이 왕성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번식 능력을 박탈당하는 상황입니다. 번식하지 말아야 자기가 살아남아요. 생존과 번식이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니라 따로 놀죠. 번식과 생존이 모순관계에 놓이는 겁니다. 번식의 기회가 줄면 사회적으로는 다양성의 자원이 줄어듭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닥칠지 모르는데 지금의 사회화가 요구하는 쪽으로만 적응력을 집중하면 이런 일이 벌어져 미래에 대배할 수가 없게 되죠. 우리 사회는 빠른 적응에 성공하기 위해서 긴 적응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530p 희석효과

536p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약자일수록 호혜성향이 더 높다는 소릴 하고 싶어서입니다.

538p 유전자 사이의 경쟁

538p 두 가지 병원균이 어떻게 하면 전파가 잘 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546p 그들의 유전자에는 우성유전인자만 있는 게 아니라 열성인자도 들어 있는 셈입니다. 물론 그 열성인자는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의 것이긴 하지만 말이죠. 신의 유전자에는 탁월한 것과 열등한 것, 고귀한 것과 미숙한 것, 선한 것과 선하지 않ㅇ느 것이 함께 들어있다, 헤라클레스와 헬렌은 신성 자체의 이런 모순성과 다중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열성인자는 언제나 우성인자로 기능을 발휘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헤라클레스의 광기와 헬렌의 바람기도 인간이 잘 모르는 탁월한 신성일 수 있습니다.

13.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552p 다양성과 동질성이 높아지면 세계는 그만큼 문화적으로 궁핍해 집니다.

552p 세계화의 그늘에서 말라죽는 대표적인 문화의 꽃이 바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553p 문화도 문화지만 시장의 세계화도 세계를 얇게 만드는 우리의 크나큰 도전입니다. 시장 그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지만요.

553p 사농공상

556p 인간은 옛날에 자연에 적응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그 못지않은 치열성을 가지고 자기가 만든 사회에 적응해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화가 모든 문화의 섬들을 다 없애고 세계를 하나의 대륙으로 묶게 된다면 인간은 별 수 없이 거기 적응하게 되겠죠. 다양성은 죽고 문화는 획일화, 표준화 될 수 있습니다.

558p 투명성이라는 건 절대적 가치가 아니에요.

559p 은신처이론, 경쟁 배제의 원리, 니치

560p 이 이론은 한마디로 번식이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거죠.

561p 어느 집단이나 으뜸 수컷이 자기 번식의 일부를 버금 수컷들 몫으로 떼어 줍니다. 그 비율을 계산해보면 흥미롭게도 일관성이 있어요. 지나친 독접 체제는 오래가지 못해요. 불균형 생명은 반드시 깨지는 데 비해, 적절하게 잘 나누어준 으뜸 수컷은 장기 집권을 합니다.

562p 모순대립물의 공존, 모순의 통일성

564p 투터운 세계는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입니다. 이 3다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관용의 윤리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때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닙니다. 다른 것, 타자, 타인, 차이에 대한 존중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죠. 이게 없으면 자유민주주의도 안 돼요. 그런데 ‘존중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래,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서로 존중하자.”라는 태도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뭘 하든 난 관심 없어.”라는 무관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용의 윤리학은 ‘무관심주의’나 ‘오불관언’으로 빠집니다. 타자의 존재와 행동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처럼 돼요. 이러면 공동체나 공존, 유대가 불가능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565p 나라는 존재, 나라는 주체가 사실은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필요해요. 여기서 주체라는 것이 발생하는 기원 지점은 나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입니다. 나/너를 절대적으로 구분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라는 책임의 윤리학이 나오게 되죠. “나는 누구인가?”라는 건 전통적인 정체성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책임의 윤리학으로 대답하면 “나는 타자에 대해 책임지는 자다”가 됩니다.

577p 모방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겁니다. 감염되는 거죠. 후천적 영향과 교육이 개입해요. 인간에게 모방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도덕 유전자 말고도 모방 유전자에 주목해야 할 것 같아요. 유전자 속에 도덕적 성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버려두었을 때보다는 그것이 발현될 가능성을 옆에서 사회, 문화적으로 자꾸 자극하고 보상을 해주고 모방하도록 하면 효과가 더 크지 않겠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경쟁력입니다. 자유 경쟁이란 것은 반드시 공정성과 규칙을 전제합니다. 규칙을 지키면서 경쟁하는 것이 진짜 자유경쟁이죠. 그럴 ·때만 경쟁은 탁월성을 가려내는 선체제가 됩니다.

581p 생명을 끊는 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생명의 더 큰 긍정 때문이라는 게 마르쿠제의 주장입니다.

583p 에고의 자존심과 자기 이미지가 심하게 상처받고 이 상처가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가면 에고는 자기 파괴의 방법으로 문제를 수습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가족은 별개 존재가 아니라 자기와 동일시 됩니다. 이 동일시 때문에 동반 자살은 타살이면서 자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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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다
2006.03.13 17:54:46 *.179.205.243
동감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앞부분에 이 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며 읽어 나갔더니 책 속에서 길을 잃곤 했습니다.
아직도 다 읽지못했습니다, 다 읽어 나갈지도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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