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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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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3일 12시 06분 등록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우리시대의 비타민 구라꾼 도정일과 최재천.

도정일과 최재천. 이 사람들은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때때로 존경심과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들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은 박식함도 지적능력도 아니다. 인문학과 생물학이라는 소재로 개그맨 보다 사람을 더 잘 웃길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들에게는 지적인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도정일표, 최재천표 개그가 있다.
육십 대 중반의 인문학자 도정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청년일 사람이다. 통신사 외신부장을 하다가 훌쩍 미국으로 건너가 사십이 넘어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죽어라 강의하고 글 쓰고 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속도 없이 한 군데도 빠짐없이 다녔다.
그는 최근 2~3년 동안 대한민국 전역에 세워진 ‘기적의 도서관’을 기획하고 감독한 당사자이다. 그렇다고 그가 본업에 부실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전 세계 신화연구를 통한 인류의 상상력을 일깨우는 데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뛰고 있다. 신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인문적 기초공사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신화를 품은 인문학자, 도정일은 오늘도 자신에게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있다.
의대에 두 번 낙방하고 밀려서 생물학도가 되어 동물행동학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된 최재천은 정말 불가사의한 생물이다. 그는 본받을 만한 실험실의 과학자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사회 문제와 대중과의 소통에 관심이 많은 인문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자연스레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클로즈업되어 온다.
‘알면 사랑하게 되죠. 제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라도 사람들에게 알리렵니다. 그럼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연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을 연구하는 최재천.
시로 생명을 쓰고 생명을 조각하고 싶어 했던 삶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가 늘 궁금했던 생물학이 전문분야인 인문학자 최재천은 우리시대에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가능케 해 줄 소중한 자산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돈, 그 안에서 나는 행복했다.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안개 속에 휩싸인 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 나와 함께 눈을 감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생물학이라는 과학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지 않았던 정보들이 밀려들어와 뇌를 정지시켜 버린 것은 아닐까?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알고 싶어졌다. 자연과학에 대해서 아니 생물학에 대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공도 자연스레 인문분야를 하였다.
‘과학적 사유는 왠지 내게 맞지 않는 옷과 같다.’는 기원을 알 수 없는 관념이 나의 뇌 속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책을 읽는 초반부에 깨달았다. 기본적인 과학적 지식도 없음과 함께.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만 들어봤지 생물학에 자연선택론이 있는지 성선택론이 있는지 도대체 뭐가 있는지 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재천은 말한다. ‘아는 게 중요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가슴 깊이 찔러 들어오는 그의 말에 기원을 알 수 없는 과학적 사유에 대한 나의 반감을 깨끗이 지울 수밖에 없었다. (깨끗이 지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논리적이기만 한 자신에게 ‘죽어가는 것까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자.’고 외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외침과는 달리 나는 일상에서 언제나 무미건조하고 냉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세계적인 생물학자가 생물학을 연구하다 보니 생명들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되니 사랑할 수밖에 없더라고 말하니 어찌 그의 꼬붕이 되는 것을 주저하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힘겨워 하며 살아온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모든 생명들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때 나 역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인 것을. (써 놓고 보니 인간도 아주 이기적인 DNA의 작품 중 하나가 맞나 보네요. 하하하)
그런데 최재천, 그가 내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생물학의 연구 성과물로 가르쳐 줄 지도 모른다고 하니 나의 고정관념 한 부분쯤 귀향 보내는 게 나의 유전자가 손해 볼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낯설고 어려운 용어들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가며 나의 기존의 관념들을 접어두고 대담을 읽어 내려갔다.
자연선택론 앞에서 그토록 오랫동안의 정신적 방황과 여러 종교의 경전들을 공부한 성과물로 얻은 나의 진리(신)에 대한 절대적 정의는 잠시 뒤로 물러나 앉아야만 했다. (이 부분에 있어 나는 엄청난 혼돈에 빠졌었고 지금은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해 정리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피그미침팬지, 보노보에 대한 연구들은 인간 종의 공존능력과 멸종에 대해 진지한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다.
보노보가 진화하여 지금의 인간 종의 초기와 비슷한 수준에 이른다면, 지금의 인간 종은 보노보 문명과 공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에스에프 영화에서 보듯이 종간 문명충돌을 선택할까? 아니면 그 이전에 지금의 인간 종은 선제적 조치로 유전공학의 도움을 받아 보노보의 진화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멸종시키 지는 않을까?
또한 인간 종이 환경파괴 등 자업자득의 결과로 자연선택에 의해 멸종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담을 읽는 동안 대체로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효용성을 잃고 녹슨 채로 버려져 있었던 나의 과학적 탐구정신을 뇌의 창고에서 꺼내어 닦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동물이었는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 태어나고 싶어졌다. 인간 외의 종과 인간 내의 종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도정일과 최재천 두 석학의 대담.

생물학은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어주는 생명공학에 열광한다. 인문학 또한 얄팍한 모방적 소비문화에 눌려 경시 받는다. 그러나 생물학의 생태 연구는 지구온난화 등 환경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연구가 될 것이다. 인문학 역시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의 성공에서 보듯이 인류의 창조적 상상력을 일깨워줄 중요한 토대이다.(66)
현대인은 ‘행복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다. 마치 저만치 어디쯤에 있다고 생각하는 행복을 잡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있다. 이런 기술사회의 행복 이데올로기 앞에서 인문학과 과학은 지금 사실상 속수무책이다.(77)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인문학과 과학은 완전히 별개의 문화인 것처럼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인문학의 영역과 과학기술의 영역들이 함께 문명의 토대를 이룬다고 했다. 이렇게 함께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인문학과 과학기술 사이에 접합, 교섭, 대화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86)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쳐 놓은 학문의 울타리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제 인문학과 자연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분과가 활발하게 소통하고 서로 굳게 닫힌 빗장을 열어젖히고 통섭해야 한다.(92)
오늘 우리가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은 이러한 근대 이후의 300년의 해묵은 별거를 넘어서는 일이다.(97)
다윈은 이전에는 신화적인 상상력으로만 이해하던 인간의 기원과 존재에 대한 부분을 자연선택론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을 통해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영역으로 옮겨온 인식의 혁명을 일으켰다.(114) 그러한 다윈 혁명을 통하여 신화는 비합리적이고 황당한 이야기로 과학 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합리적인 해명을 하려는 것과 신화가 상징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115)
과학의 발견이 신화를 죽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의 주체가 창조주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유전자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116) 하지만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까지 대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118)
신화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이다. 과학의 사실적 언어로 읽으려 하면 안 된다.(119) 생물학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핵심적인 생물학적 차원에 대한 연구이다. 그러나 인간은 행동, 가치, 목표 등 비생물학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121) 실은 그 ‘비생물학적인’이라는 용어도 생물학적인 것이다. 생물학은 유전학이 전부가 아니다. 생물학에는 유전자에 의해서 발현되는 형질들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가에 관련된 모든 학문이 포함된다. 그런데 환경과 관련되는 것은 싹 빼버리고 “생물학적=유전학적”이라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122) 인문학의 핵심은 환경의 차원을 넘어서 만들어지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124) 일반인과 인문학자들은 생물학에 대해 유전자과학이라는 오해가 너무 커 생물학의 생태학이라는 것이 비생물학적인 차원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윌슨 교수는 그의 저서 <사회생물학>에서 인간에 대한 모든 학문은 ‘인간생물학’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125) 인간에게만 특별히 비생물학적인 차원을 허락하는 것은 아직도 기독교의 이원론적 전통과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중심주의의 서양 본질주의 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고이다.(131)
기술이 어떤 미래를 열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으나 ‘이건 안 돼’ 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하자 하자’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는 경우가 바로 생명과학시대의 딜레마이다. 기술발전 그 자체로는 선택의 고민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이다. 지금 같은 기술시대에서도 우리는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알지 못한다.(173)
우리가 아예 복제과학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인문학은 그 방법이라는 것이 무엇을 위한 방법인가를 따진다.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은 따지지 않는 것이 기술의 맹목성이다.(175)
우리는 과학을 너무 급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이다. 기술이 먼저 들어오고 과학이 그 뒤를 미처 따르지 못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비합리성이나 비리 등은 과학적 사고가 결여된 상태에서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치우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187)
인문학 교육의 핵심은 인간은 어째서 인간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다. 즉 인문학적 소양과 식견, 가치관을 길러주는 일이다.(195)
신화에서는 인간 기원에 대하여 하나는 인간이 누군가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생적으로 나왔다고 말하는 신화이다. 수메르 신화를 비롯해서 히브리-기독교의 창조신화 등은 전자의 제조론에 속하고 그리스 신화 중에서 가이아 이야기 전통은 대표적인 후자의 자생론적 신화이다.(201) 그러나 과학에서는 생물이란 절대로 만들어진(제조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자연발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발생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하더라도.(205)
생물학자들은 신화와 과학적 서술을 혼동할 때가 있다. 신화는 인간 기원에 대한 과학적 진술일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층위에서 보면 신화는 당시 사회의 인간관과 권력관계, 세계관을 말해주는 아주 강력한 이야기이다.(207) 인간이 이런저런 신화들을 만들어낸 배후에는 아주 강한 정치적 동기와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힘 자체는 시적 상상력이다. 서양을 지배하는 기독교 서사는 인간을 유한성, 어둠, 타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구원의 희망을 갖게 하는 강한 힘이 있다. 유한자로 태어난 인간이 어째서 불멸성에 대한 그리움을 갖는가는 인간이 가진 모순의 하나이다. 이 문제는 종교학적 주제이고 인문학적 질문이지만 생명과학의 대중적 인기에 관계된 문제이기도 하다.(211)
모두들 생물학은 생명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생물학은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제일 보편적인 특성은 한계성, 즉 유한성이기 때문이다.(212) 생물학에서 죽음은 유전자의 선택 문제이다. 유전자가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것이다.(213)
우리가 휴머니즘이라고 불러온 것의 밑바닥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신은 세상만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는 생각은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온갖 악행을 정당화 시켜준다.(219) 어쩌면 신은 그러한 인간에 대해 무한한 인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히브리 경전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가르치는 것은 반성과 성찰의 지혜일 수 있다.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업적까지도 매순간 성찰하는 자만이 구원의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지혜 말이다. 성찰은 윤리적 행위인데 문명 발생 이후 지금까지 인간이 겪어온 딜레마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기술력과 윤리적 능력 사이의 불일치이다. 문제는 인간의 기술 능력은 빠르게 발전하는데 윤리적 능력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220)
생물학은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고 말한다. 진화는 내가 사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데 그 결과는 다음 순간에 판정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을 예측하고 방향에 따라 설계하면서 살 수 있는 동물은 없다고 본다.(222)
요즘 생물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는 유전적 각인이라는 분야는 같은 유전자라도 어떤 환경요인에 각인되느냐에 따라 발현패턴이 달라지는 현상을 뜻한다. 그래서 사회적 진화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문명이란 것이 일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자연 말고도 사회에 적응해야 했는데 사회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거기에 적응하는 능력도 고도화한 것이다. 이 적응능력은 생물학적으로 전수된 유전자 덕분이기 보다는 문화적으로 전수되고 자극된 능력 때문이다. 이것을 인문쟁이들은 생물학적 유전이 아니라 문화적 유전이라는 의미에서 문화DNA라고 부른다.(227)
진화론의 자연선택론은 생명의 진화를 무목적성, 맹목성, 우연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 목적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문제는 근 이백년 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세기 후반쯤부터는 무목적론이 득세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아직 종결된 것은 아니다.(234)
인간사회는 결코 인과성이나 합리성의 모델을 포기하지 못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을 포기하면 삶을 안내하는 정의, 행복, 꿈 등의 화살표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활동은 더 잘 살기 위해서 더 편하게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행복을 창조하는 활동이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어떻게 보면 인문학적인 목표를 직접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과학이 그것을 파괴하려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236)
우리는 유전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유전자 과학의 길은 아직 멀었는데 기술이 인류를 구한답시고 이런 저런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과학을 응용한 기술은 생명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좀 달라야 할 것이다.(249)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영혼도 결국 물질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영혼도 DNA의 산물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직 영혼이 어떻게 유전되는지 알 수 없고 입증할 방법도 없다. 생명공학에서 복제인간의 몸은 복제될 수 있어도 그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유전자가 그 사람의 영혼을 처음부터 결정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과 성찰에 의해 다듬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266)
인간을 복제할 때 유전적으로 복제되는 부분과 복제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나눈다면 전자는 생물학적인 DNA가 될 것이며 후자는 문화적 DNA가 될 것이다.(276)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제인간을 만들어도 그 개체가 어떤 사회, 문화, 교육환경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개성과 정신을 지닌 인간이 될 것이다. 생물학적 자질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인 반면 개체의 형성에 개입하는 다른 많은 변인들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281)
자기기만은 인간본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인간이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자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자기와 세계가 마치 특별한 우호 동맹관계에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도 이러한 인간의 자기기만인 것이다.(296)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만의 재주가 아니다. 동물들도 속임수의 천재라는 것은 다윈의 관찰이다. 기만은 자연계의 공통현상인 것이다.(298) 거짓말, 기만, 위장은 이미 수십억 년의 진화가 만들어놓은 결과다. 단세포 생명체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 까지 자연선택이 갈고 닦은 적응, 번식, 생존술의 일부이다.(304)
진화론을 사회이론으로 옮길 때 발생하는 가장 심각한 쟁점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도덕성의 문제이다. 유전자는 부도덕이 아니라 무도덕이다. 다윈은 인간이야말로 자연계에서 유일한 도덕적 종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도덕문화가 그 최고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라고 다윈은 말했다.(305) 이러한 면들에서 인문학은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서로 왕성한 상호소통, 통찰과 발견의 교환을 시도해야 한다.(307) 21세기는 학문의 통섭의 시대가 될 것이다.(309)
이제 인간의 자연서식지는 기계문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환경이다.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도시문명은 곧 자연이 되었다. 인간두뇌가 조작하고 변화시키는 도시환경 자체가 우리의 자연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312) 인문학에서는 정치, 사회, 경제 같은 문화적 환경이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더 중요한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의 개념에 생물학적 진화 말고도 정치적 진화, 사회적 진화, 문화적 진화 같은 개념들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313)
생물학자 도킨스는 문화 역시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이라고 했다. 문화 역시 유전자에 기록되어 진화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예술을 번식에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공작 수컷이 날기에 방해가 될 긴 꼬리깃털을 가진 것은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불리하지만 성 선택의 입장에서는 유리하다고 본다. 아름다움과 예술행위는 번식에 결정적인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에서는 예술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실용설, 제의설, 놀이설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331)
예술에 있어서 자연계와는 달리 인간사회에서는 성 선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 미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시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347)
사회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사랑도 번식의 관점에서 분석하게 된다. 그러나 보노보의 경우를 보면 인간처럼 성이 번식과 완전이 별개로 되어있는 형태가 굉장히 많이 관찰된다. 암컷은 매우 자유롭게 여러 수컷과 교대로 섹스를 즐기고 자위행위도 많이 한다. 우리 인간보다 훨씬 섹스를 즐기는 영장류라고 객관적인 판정이 나 있다.(370)
성이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게 번식 이외의 목적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373) 인간과 보노보는 꼭 사회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개체 또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성을 선택한다. 사랑의 생물학적 의미는 번식의 유혹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텐데.(375)
자연계에서 인간을 빼놓고 산아 제한을 하는 동물이나 식물을 관찰한 경우는 지금까지 전혀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번식을 자제해야 하는 순간에 와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그것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반자연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느 순간에 번식을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인데 그건 사실 종족보다는 내가 애를 낳아 키울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할 줄 알게 된 것이다.(383)
그러나 사회 전체를 보면 마치 우리가 섹스를 자제하고 번식을 자제하는 동물처럼 보이지만 단지 힘없는 존재들만이 사회적으로 어떤 이념과 체제에 의해서 번식을 못 한 채 밀려있는 것이다. 가장 힘 있는 존재는 그것을 교묘하게 조절하면서 자기 유전자의 전파를 극대화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386)
동물들은 섹스 기회만 생기면 무조건 달려들지만 인간은 성의 기회가 주어져도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생물학적으로 성적 욕망은 결국 번식의 욕망인데 인간에게 그런 욕망이 왜 감추어져야 하는가, 은밀해야 하는가, 내밀해야 하는가, 공개할 수 없는 것인가, 같은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어쩌면 그러한 인간성의 은밀함은 상당히 최근에 문화적으로 형성된 속성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성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도록 진화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398)
19세기 생물학은 과학의 이름으로 서구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그리고 남성 우월주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해준 크나큰 과오를 저질렀다. 현대 생물학이 그러한 오류들을 교정할 수 있게 해준 것은 큰 다행이다.(409)
진화생물학에서 보면 수컷은 꼭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존재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최초의 동식물은 다 무성생식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유성생식으로 건너올 때 수컷이 만들어진 것이다.(412) 자연의 질서라는 것이 결국은 암컷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컷은 암컷이 번식하는데 잉여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여성이 잉여존재이다.(413) 대부분의 신화는 아주 정교하게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로 짜여 있다.(415)
생물학적 성이라고 하면 마치 확정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대부분의 현화식물의 경우 수컷으로 삶을 시작해서 암컷으로 삶을 마감한다. 동물의 경우는 대부분 암컷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수컷이 된다.(432) 따라서 염색체 수준에서는 분명히 수컷인데도 여성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변이가 어느 개체군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433) 인간을 포함한 동물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성애의 예들을 엄청나게 많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동성애를 과연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을까?(436) 생물학적으로 보면 동성애를 비자연, 비정상, 반자연으로 보는 사회적 편견은 근거가 희박하다.(439)
질서 만들기라는 면에서 보면 남자에게 맞는 것은 이런 것이고 여자에게 맞는 것은 저런 것이라고 역할을 분담하면서 두 성을 사회적으로 철저히 분리하여 젠더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유용하다.(445) 이것이 젠더의 정치학인 것이다. 현대 생물학의 큰 공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사회적 성차 구분을 깨는데 기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447)
동물계를 보면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한 매커니즘이 아주 철저하게 발달되어 있다. 근친상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적응현상이다. 나와 같이 태어나 같은 집안에서 자란 남자는 분명히 나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에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있다.(451)
생물학에서는 배우자의 선택을 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선택처럼 말하지만 인류학자들은 반대로 사회집단이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여성에게 또는 암컷에게 강요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자는 교환수단이고 교환에 의한 동맹은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454)
프로이트의 이론은 진화생물학자의 입장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경우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463)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세 줄로 요약될 수 있다.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 이것은 과학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의식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나의 무의식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다.(465)
생물학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비와 유사성을 동물의 기준에서 설명하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생물학적으로 가깝다면 같은 인간들 사이의 생물학적, 유전적 유사성은 그보다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제각각 다른 문명, 다른 문화, 다른 가치와 리듬의 체계, 다른 관습들을 만들어 왔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유사성 논의만으로는 이런 거대한 차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487) 생물학이 인간과 동물이 다르지 않다고 줄기차게 떠들어 왔지만 다름도 많이 연구한다. 다만 다름이 다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같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과 동물은 모두 하나의 DNA로부터 진화한 집안 식구들이기 때문이다.(489)
진화생물학의 이론 중에 섬생물지리학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진화는 바다에 떠있는 섬이든 육지에 고립되어 있는 개체군이든 이 모든 섬에 있는 것이 다 합쳐져서 한꺼번에 한 뭉치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섬 단위로 따로 일어난다는 것이다.(503)
정보통신이 발달한 세계화 시대에는 이러한 섬생물지리학 이론에 따른 다양성이라는 차원은 사라지게 된다.(508) 진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다양성의 증가이다. 생명은 지금까지 무조건 다양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런 면에서 선택과 집중의 논리는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위태롭기 짝이 없어 보이는 도박이다.(518)
사회생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사회를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 진화에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519) 사회문화적 다양성이나 생태계에서의 다양성이 중요한 것은 생명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자연계라는 거대한 생태창고 안에는 인간이 아직 모르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해 버리면 인간은 제 손으로 미래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521) 이러한 생태계의 다양성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문학에서는 사회적으로 쓸모없다 해서 바보로 여겨지는 존재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문학적 보존인 것이다.(522)
인간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젖을 많이 짤 수 있는, 가장 살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소를 계속 인위적으로 선택하며 소들의 다양성을 없앤 결과는 광우병이 영국에서 일어났는데 일본까지 걱정을 하게 되는 현실이다. 전 세계에서 똑같은 소를 키우게 되었기 때문에 병원균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소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 같으면 이웃 마을의 소 한 마리가 쓰러져도 우리 집 소는 쓰러질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541) 이렇게 유전자 다양성이 줄어들게 되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스스로를 무척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다.(542)
사상이나 표현, 정치체제 같은 문학적 다양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문명이나 문화권, 사회 안에서도 별 녀석이 별 소리를 다 하고 별 생각 다 해보는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문화가 창조성과 적응성을 유지할 수 있다. 가장 강한 문화는 왕성하게 다양성을 유지하는 문화인 것이다.(543)
세계화가 서로 다른 문화들 사이에 교류를 증진시킨다고들 말하지만 고유한 문화들이 잡종화 하거나 강대국의 지배적인 문화형식에 압도당해 소멸의 위기를 맞게 할 수도 있다.(551) 다양성보다 동질성이 높아지면 세계는 그만큼 얇아지는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세계화의 그늘에서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현존하는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552) 문화도 문화지만 시장의 세계화도 세계를 얇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크나큰 도전이다.(553)
시장의 원칙이 교육과 언론을 포함해서 사회의 공영역과 사영역을 모두 휩쓸면 다양성은 죽게 된다. 그래서 시장 유일주의적 원칙이 다른 모든 활동영역을 장악하고 지배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554) 세계화는 섬들이 천천히 연결되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부 하나의 대륙으로 뭉쳐져 버려 그 안에 있던 유전적인 독특함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무너진 것과 같다.(556)
생물학의 새로운 이론 중에 비대칭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한마디로 번식이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불균형 생명은 반드시 깨지는데 비해 적절하게 잘 나누어진 균형적인 생태계는 오래 간다는 것이다.(561) 신화의 특성 중의 하나가 모순 대립물의 공존이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 시대로 넘어오면서 악은 완전히 쳐부숴야 하고 소멸시켜야 한다, 완전한 승리는 가능하다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562)
자연계가 만약 정치세계라면 지금의 자연은 인간이 지배하는 단극체제이다. 이 단극체제에서 인간이 저 혼자만 잘 먹고 잘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종의 삶과 다양성을 얼마만큼 보장해 줄 수 있는가, 이것이 지금 인간에게 안겨진 가장 큰 윤리적 과제이다.(570)
농업혁명이라는 것이 다른 말로 하면 공생이다. 자연에서 혼자 사는 식물을 데려다 키워주고 그 식물들이 공생을 통해서 굉장한 번식을 이룬 것이다. 공생 덕택에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공생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생물학은 자연계 어디에도 다른 생물과 요즘 표현으로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고는 살아남을 종은 없다고 말한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상태에서 경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무차별적 전투가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들과 동맹을 맺은 생물들이 더 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생물학은 우리 인간이 이번 세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다시금 공생인간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595)
인문학 역시 우리 인간이 이번 세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경쟁을 넘어 협동으로’ 이다. 그것이 인문학에서 말하는 두터운 세계이다.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고,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고 공생을 추구해야 할 지점도 바로 이곳이다. 대담 끝에 이르러 우리가 어떤 미래를 함께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에서 통섭의 희망을 본다.(597)


대담을 다시 쓰다.

두 구라꾼의 왕성한 지적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때로는 인문학과 생물학의 공방에 대해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물학이 모든 종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영역까지 학문의 범위를 넓힌 상태에서 인문학과의 공방은 무의미하게 보였다. 그보다는 인문학이 현대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종인 인간에 대한 가치 발견임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생물학의 영역에 관용을 베풀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상대의 영역에 대한 공방이 “통섭해야 한다.”는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대담 전편에 흐르는 그러한 공방은 대담의 전체적인 깔끔하고 깨끗한 맛을 상당부분 떨어뜨렸다. 신선도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시종일관 생물학과 인문학의 ‘다름을 통한 드러남’의 대담 방식을 중반부쯤에서 ‘유사성을 찾아가는 통섭’의 방식으로 바꿨다면, 더 재미있게 유쾌하게 통섭의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조금 무리해 보이는 일관된 진행방식은 전반적인 책 읽기의 수월성을 떨어뜨린 것 같다. 또한 대담의 주요쟁점들을 주변의 이야기들에 묻히게 한 측면도 많았던 것 같다. 단순성만큼 자신을 극명하게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다소 분량이 줄더라도 주제를 조금 줄여서 주요쟁점들을 더욱 부각시켰다면 더욱 싱싱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또 하나 책의 구성에서 아쉬움을 느낀 점이 있다면, 4년 동안 진행된 대담이라서 그런지 전반부의 ‘다름’에 대한 불꽃 튀는 격돌이 어느 순간 이해로 바뀌어 졌다는 것이다. 아마 그 사이에 두 분이 상대 영역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아닌가 추측해 본다. 결국 전반부의 자기 영역에 대한 밥그릇 지키기 싸움은 상대학문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에 어느 정도 기반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독자입장에서 보면 책 읽는 시간차에 대한 눈높이를 맞춘 재미있는 구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전반부의 공방이 부질없는 소모적이 것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어차피 책의 구성이 대담 내용 전체를 놓고 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시간차에서 오는 대담자들의 지식의 양의 증가가 구성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된 원인은 아까도 말 한 ‘다름’을 통한 일관된 진행방식 때문인 것 같다.
만일 내게 이런 대담을 구성해 보라고 한다면, 우선 생물학과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다름을 통해서 드러내게 하겠다. 자신의 영역들이 무엇인지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장을 활짝 펼쳐 놓겠다. 쉽게 말하면 싸움을 붙이겠다는 것이다. 실컷 싸움을 시켜서 생물학과 인문학에 대한 일반의 오해와 이해부족을 해결하겠다. 이 책을 읽기 위한 최소한의 생물학적, 인문학적 교양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자, 이제 독자들이 본격적인 주제들에 대해 생물학과 인문학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실력을 쌓았으니 마음 놓고 다루고자 하는 쟁점들을 펼쳐 보인다. 여기서 은근 슬쩍 생물학과 인문학의 ‘다름을 통한 드러남’을 버리고 ‘상호보완을 통한 쟁점들에 대한 판단’을 해 나간다. 물론 독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쟁점 주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물학과 인문학이 자연계와 인간 종을 위해 해야 할 공통의 과제를 ‘다름 속의 같음’을 통해 찾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해피 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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