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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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최재천- 그의 간단한 프로필.
서울대학교 동물학과-하버드대 박사학위-하버드대 전임강사-미시건대 조교수를 거쳐 서울대학 생명공학부 소속 교수-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 석좌교수.
저서는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2005)’ ‘열대예찬(2003)’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2001)’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2003)’ 알이 닭을 낳는다(2001)등.
그에 대해 포탈 사이트에서 검색하려고 했다. 검색창에 ‘과학자 최재천’이라고 썼다. 그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단지 과학자이다. 초등학교 때 꿈이 뭐니 하고 물어보면 대답하는 그 과학자. 나는 과학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황우석 교수의 이야기로 한참 매스컴이 떠들썩할 때에도 어떤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혼자 모르고, 단지 그가 조금이라도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적당히 하게 하지, 어차피 이러다가 조용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정도만 했던 무심한 사람이기에, 최재천 교수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들 이름을 들어 봤을 리 만무했다. 생물학자라. 어쨌든 과학자구나. 안경 쓰고 흰색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이미지의 그런 사람.
그에 관련되어 검색된 기사들을 훑었다. 그는 공부를 잘 하는 책임감 있는 학생이었던 것 같고,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과학을 시로 쓸 날을 꿈꾼다고 말하는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 도정일 교수와 맞서 이야기한단 말이지.
그럼, 다음 도정일 교수의 프로필.
경희대학교 영문학과-하와이대 대학원 영문학 석사, 박사-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책 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책읽는 사회)상임대표,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 이사장. 북스타트 운동 한국위원회 위원장 등.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으로는 ‘사유의 공간(2004) , 여성문화의 새로운 시각(2004) ,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1994) 등 이다. (참고로 앞의 두 권은 공저임).
지난 달에 경희대학교 교수의 자리는 퇴직을 하셨을 것이다. 사실 대학시절에 이 분의 수업을 한 학기 동안 수강했었다. 교수님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빠져들었다는 플라톤을 교재로 수업을 들으면서 그의 방대한 지식세계가 존경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문학 수업을 몇 개 듣다보니 처음에는 신세계였던 교수님들의 인문학적 “썰”을 너무 들었다고나 할까. 인문학자의 ‘썰 풀기’는 가끔 한 방향으로만 발전-전개되는 경향이 있어 가끔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여운이 종종 남았던 수업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다방면에 말 그대로 박학다식한 이 시대의 흔치 않은 지식인이며, 지독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그의 강의를 들을 때, 그는 천재 아니면 괴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하신 질문에 아주 바보 같은 대답을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도정일이라는 방대한 지식의 강 앞에서 말라비틀어진 불가사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직 그를 두려워하는지도.
대담을 읽다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대담을 엮는 최초 시도를 한 책이라 하고, 책이라고는 도통 읽지 않는 애인조차 알고 있던 책이라는데, 평소에 별 관심이 없는 분야라 이 과제를 통해서야 이 책의 존재를 알았다. 서점에서 턱 집어 들었을 때의 무게감과, 그 제목들이 주는 압박감 이라니.
도정일이라는 인물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시작한 책이라, 스스로도 너무 편파적으로 읽게 되는 거 아닐까, 고민도 했다. 읽기 시작하자, 역시.
시작하는 글부터 도정일 교수는 이야기꾼답게 탁월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최재천 교수는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문학 소년이었다고 하니, 도정일 교수와 맞붙어 댓거리를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앞에 주저리주저리 두 대담자의 프로필을 적어놓았지만, 두 저자에 대해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담의 첫 꼭지를 읽어보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엮은이는 두 학자에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본인에 대해 말해달라고 주문했고, 그들이 풀어놓은 자신의 이야기들은 이 두 학자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개글이며 이 책 속의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무겁지 않게 시작한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비교적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인문학은 난해하고 자연과학은 생소하다는 느낌이지만 두 분 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잘 하신다. 하지만 간간이 온갖 사상가와 생소한 과학자의 이름과 저서가 인용되면 난감하다. 다행히 역주가 붙어있지만, 전부 다 이해하기는 힘들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분야의 석학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라서 일까, 잘 몰라서 딴지의 여지도 찾기 힘들다. 교양 참고서 같은 느낌이다. 도정일 교수님의 난해한 설명을 읽다보면 예전에 영문학수업을 처음 수강했을 때의 난감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주일에 걸쳐 책을 한 번 읽고, 독후감을 쓰기 전 오늘 다시 한 번 읽기를 시도했는데, 잠이 쏟아져 견딜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단편적이나마, 책을 읽으며 느낀 것들에 대해 언급하자면,
마음에 남는 것 중에 하나가 ‘통섭’이라는 개념이다.
여러 학문들이 모여 일관된 이론의 체계를 찾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학문의 큰 두 축을 이루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일단 그렇게 정의하고) 이 두 학문이 왜 만나야 하는지, 이 책을 구상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최재천 교수의 지도 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쓴 책의 제목이며 그가 주창한 개념이다. 그 필요성은 책을 통해 알겠지만, 도정일 교수의 이야기처럼 폐쇄적인 한국의 학문분과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흘러내릴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이 ‘대담’ 같은 형식의 책이 많이 나오면 되지 않을까.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처럼,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학문끼리의 만남을 펴낸 책. 흥미롭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는 이런 변화와 유연함이 좀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책을 쭉 읽다보면, 도정일 교수의 유려한 말솜씨에 간혹 최재천 교수가 ‘도선생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 입장을 유지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부분이 종종 눈에 띈다. 전문적 이야기꾼에게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자연과학자의 겸손인지, 도정일 교수의 말에 공감하지만 인문학자와 자연학자의 대담이라는 대립 구도의 입장에 걸려 한 보 물러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슬쩍 다른 주제로 넘어가버리는 느낌이 든다. 대화의 흐름상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처음에 대화를 시작한 의도와 어긋난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열심히 읽었는데, 별 다른 공방 이나 내용 없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고 이야기해야 옳겠다. 파고들기보다는 훑고 지나간다는 느낌의 대화가 종종 느껴진다.
사실, 이렇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시간에 쫓겨 읽을 책이 아니란 말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주석을 일일이 달아가며 읽어야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스터디용 책으로 삼아 여럿이 깊게 파고들면 좋겠다는 느낌이다. 내가 교수라면, 학생들에게 과제로 내주고 싶은 책이다.
책 속에서-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p.72 최재천
..생물학자들은 우울증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 우울증은 공포에 적응하려는 본성이고,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래서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기도 한 겁니다. 공포를 느끼는 능력, 우울함을 느끼는 능력도 중요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p 78 도정일
...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면서 말이죠. 이 망설임이 고민이고, 그 고민이 ‘옳고 그름’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되면 고통이 생깁니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행위가 이미 고통을 수반하는 거죠. “이쪽으로 가면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는데” 라는 판단과 “ 그런데 그게 옳은 길은 아니야” 라는 판단이 충돌해보세요. 고민스럽죠. 행복의 길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쪽 길로 가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포기한다? 이 선택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선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떳떳하게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하는 진실의 길’ 이란 말하자면 그런 경우죠. 선택의 고통 속에 이미 행복이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 경우 진실은 바른 선택과 분리될 수 없고, 바른 선택은 ‘좋은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좋은 삶’이 행복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좋은 삶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닌 것 같아요. 행복을 위해 바른 선택을 포기하면 좋은 삶이 망가지고 행복도 날아갑니다. 생명공학 기술은 ‘통증 없는 세계’를 제시하지만, 공학기술이 도덕적 판단과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더더구나 인간이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든요. 기술이 그런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기술사회의 행복 이데올로기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아주 무력해졌다는 것이 인문학의 딜레마고요. 과학과 인문학 모두 이 지점에서 함께 물에 빠지는 거죠.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p 119 도정일
과학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화나 종교가 없어지지 않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죠. 3,000-4,000년 전 신화가 지금도 힘을 가지는 것은 신화의 질문들이 인간이 노상 대면해야 하는 기본적 질문이기 때문에 아무도 쉽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질문들로부터 신과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져요. 이때 신은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놀고먹는 영감탱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공존의 정의, 자비와 결속 같은 윤리적 책임을 지우고 그 책임을 환기시키는 존재입니다. 신화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이기 때문에 과학의 사실적 언어로 읽으면 안 됩니다. 신화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고, 신화의 근본적 질문들은 여전히 해답 없이 열려있죠. 생물학이 인간의 기원을 제아무리 과학적으로 해명한다 해도 신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p 158 도정일
“인간이 계획하면 신이 웃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겸손을 위해서는 늘 기억할 만한 말이죠. 물론 이때의 신은 섭리의 신이 아니라 ‘우연의 신’입니다. 나는 우연성의 신을 부정하지 않아요. 언제 그 신을 우연히 만나면 꼭 술 한잔 나누고 싶어요. 나는 우연의 창조성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연의 신이 웃든 말든 인간은 죽자사자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 실현을 추구합니다. 내 생각에는 우연성이라는 게 인간 존재의 조건이나 운명적 저주 같아요. 왜 계획하는가? 부족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 우연성이 무수히 끼어들지만 역사가 우연의 연속만은 아니죠. 그래서 나는 생물학 혹은 진화론의 우연성 주장을 사회에 곧장 적용해서 일종의 ‘사회철학’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시세계에 대한 물리학의 ‘불확실성’ 이론 같은 것을 곧바로 인간사회에 적용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진화론이 사회이론이나 인문학에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긴 하지만, 인문사회과학과 생물학 사이에는 진화론으로는 극복되기 어려운 고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p 171 도정일
남들이 할 가능성이 있고 막을 방도가 없으니까 내가 먼저 한다는 식이 되면 과학의 정신과 윤리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어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안 하는 것이 윤리적 자세입니다. 그런데 지금 줄기세포의 경우는 막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인지 어떤지 결론을 내리기가 난감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현 시점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규범이나 기준, 가치관 같은 것으로 기술 발전에 제동을 걸 수 있느냐 문제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 치료의 길을 열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인간의 생명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니까 윤리적으로 충분히 지지를 받을 만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p 175 최재천
저는 솔직히 황우석 선생 같은 양반이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가 아예 복제과학이란 것을 생각조차 못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과학기술의 발달이 꼭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어야 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뭐 별겁니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호기심이 가장 많은 동물은 단연 우리 인간이죠. 저는 과학이란 우리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망과 행동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앎의 행동’은 우리의 본능이죠. 저는 심지어 기독교도 과학을 부추겼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대 과학이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 꽃을 피웠느냐 하는 문제에 의견들이 분분한데, 저도 하나 보태렵니다. 하느님은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지식의 나무’를 일부러 골라내어 그건 절대로 먹지 말라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을까요? 저는 하느님이 당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인간에게 과학을 허락하신 거라고 믿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멈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일 뿐이죠.
도정일
바로 거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상당한 맹목성을 가지고 있죠. 방법의 맹목성이요.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을 위한’ 방법인가를 따집니다.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거죠.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효과적 방법이 기술이라는 건데, 이때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거죠.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효과적 방법이 기술이라는 건데, 이땐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을 따지지 않는 것이 기술의 맹목성입니다. 자, 여기 유대인 100만 명이 있다. 이들을 가장 빨리, 가장 효과적으로 죽여 없애는 방법이 뭐냐? 이것이 히틀러의 주문이었어요. 기술자들이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이 가스실 처형이었습니다. 방법이 있더라도 목적 자체가 정당하지 않으면 그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문학적 사고입니다. 흔한 지적이지만 ‘어떻게?’를 생각하는 사고와 ‘왜?’라고 질문하는 사고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생명과학의 기술적 부가가치, 시장 규모, 기술 선진성, 미래산업, 다음 대박 같은 것이 지배적 관심사입니다.
p 182 도정일
..신화서사에 나오는 영생 추구의 이야기들은 예외 없이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에덴 동산에 있었다는 그 생명의 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도록 금지령이 내려진 나무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삶과 무한한 지식을 갖고 싶은 욕망을 품지만, 그건 충족시킬 수 없는 금지된 욕망이라는 이야기죠. 얻을 수 없는 것은 ‘금지된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히브리 서사의 특징입니다. 인간에게서 근원적으로 박탈된 것, 그래서 그것을 추구할 때 부딪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영토를 기웃거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히브리 서사의 지혜이죠. 그러나 금지된 것으로 향하는 게 인간 욕망의 특징이라서 욕망 추구와 실패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습니다...
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p 207 도정일
.. 수메르 신화를 보면 신둘은 노동하기 싫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만듭니다. 신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농사짓고 고기도 잡으러 다니느라 허리가 아파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자를 만들고자 하게된 거거든요. 말하자면 신들을 위한 ‘노예’로 만들어진 것이 수메르 신화의 ‘인간’입니다. 이건 인간 기원에 대한 과학적 진술일 수 없어요. 그러나 다른 층위에서 보면 당시 사회의 인간관과 권력관계, 세계관을 말해주는 아주 강력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p 232 도정일
...철학에는 ‘운동을 있게 한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있는데, 사실 철학은 이 최초 원인을 찾는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최초 원인이 ‘기원’입니다. 근대 철학도 마찬가지에요. ‘원인 없이도 운동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건 칸트가 평생 매달린 화두의 하나죠.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있는 것은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됩니다. 그런데 진화론처럼 생명이 출현한 원인도 목적도 모른다, 혹은 목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면 합리적 설명 모델이 무너지죠. 사건은 있는데 원인은 없다는 게 되니까요. 합리성의 부정이라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진화에 목적이 없다는 주장을 역사학적으로 옮기면 ‘인간의 역사에는 아무 목적이 없다’가 됩니다. 목적이 없으면 의미도 없죠. 의자를 만든 목적이 의자의 의미 아닙니까. 인간이 하는 일이 역사를 만드는데, 그 일에 아무 방향도 목적도 없다면 역사는 무의미한 우연적 사건들의 연쇄에 불과해지죠. 역사목적론에는 초월적 목적론과 세속적 목적론이 있는데, 기독교 섭리사관이 앞의 것이라면 마르크시즘이나 진보 사관은 뒤의 것을 대표합니다. 역사에 목적이 있느니 없느니로 근 200년 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세기 후반쯤부터는 무목적론이 득세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종결된 게 아니에요...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p 272 도정일
...개인이나 집단이 이룩한 정신적 성취로서의 혼은 문화적으로 복제되고 전승된다고 말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영혼은 결코 집단적인 것일 수 없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거죠. 한 개인에게 고유하고 유일한 것, 독특한 것일 때만 영혼은 의미가 있습니다. 영혼이 종교적 함의를 지닌다면, 그것과 가장 근접한 세속학문의 용어는 아마 ‘마음(mind)' 일 겁니다. 마음은 환경과의 교섭, 협상, 교육,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는 의식 패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마음이 있어 자기를 전개한다기보다는 태어난 이후에 사회과 교섭하고 적응하고 반발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마음입니다. 진화론에서는 ’적응‘이 핵심어지만 마음이란 것이 움직이는 꼴을 보면 적응이론만으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아요. 주어진 환경에 반발하고, 저항하고,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마음이니까요. 이 마음의 어떤 부분은 혼의 경우처럼 문화적으로 복제되고 전승될 수 있겠죠. 그러나 유일성, 단독성, 독자성으로서의 마음 혹은 영혼은 복제되지 않습니다. 복제된다면 고유성이니 단일성이니 하는 것은 어물성설이죠...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p 347 도정일
..말라깽이를 아내로 모셔다 놓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부자의 ‘위세’가 되는 거죠. ‘ 우리 마누라는 말라깽이야’라는 소리는 ‘우리 마누라는 약해서 일도 못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마누라는 일 같은 거 할 필요가 없어, 내가 부잔데 뭐’ 이런 소리가 되죠...요약하면 한국 남자들이 이쑤시개형을 선호하는 것은(이게 만약사실이라면) 자연선택도 성선택도 아니고 미적 기준의 변이현상도 아닌, 사회, 경제적 ‘부자 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라 말할 수 있죠.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p 396 도정일
..궁금한 것은 성의 영역에서 특별히 ‘인간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는지에 대한 건데, 찾아보면 있을 듯합니다....사회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특별히 인간적이라고 할 부분은 없는 것 아닙니까?
최재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은밀함이 가장 인간적인 특성이겠죠. 만약에 보노보처럼 우리 여성들이 들판에서 허구한날 자위 행위를 하면서 지나가는 남자들의 손을 잡고 섹스하자고 했으면 사랑소설 같은 건 나오기 어려웠겠죠. 쓸 만한 이야깃거리가 안 될테니까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처음부터 은밀한 섹스를 했을까요? 섹스가 은밀해지기 시작하면서 지금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생긴 것은 아닐까요? 그 옛날 석기시대에도 인간이 지금처럼 사랑의 열병을 앓았을까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p 440 최재천
이건 매우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저는 인간은 누구나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봐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이 많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어떻든 결국은 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고, 많지 않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억압적이면 결국 드러내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그 가운데는 조금씩 드러내면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을 거구요. 저는 그런 성향이 식물이나 동물 세계에도 있고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p 463 도정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세 줄로 요약될 수 있어요.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 이건 과학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나다‘ ’나는 언제나 나의 주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단연코 없어요. 나를 이끌고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나 또렷하고 명징한 언어로 말하는 나의 ’인식‘이라는 게 바로 근대 자아의 환상입니다. 데카르트적 자아죠. 근대 자유주의도 이런 개인주의적 명징성의 자아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계몽학자들이 생각한 ’ 지식과 판단의 주인‘으로서의 ’주체‘라는 것도 그런 명징한 의식의 주체죠. 프로이트가 뒤집어엎은 건 바로 이런 자아의 환상, 명징의식의 이데올로기에요. 내 의식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나의 무의식이 나의 주인이라는 건 혁명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죠. 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합리적이고 앞뒤가 딱딱 맞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면 그 합리적 이야기들은 구명이나 결략, 틈새, 모순, 생략, 은 걸로 같은 걸로 가득합니다. 이건 문학 창작이나 비평, 이론에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통찰이에요. 20세기 후반의 ‘읽기(텍스트 읽기와 해석)’ 이론은 거의 다 이 통찰에서 나오거나 그 통찰에 힘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문쟁이들이 ‘프로이트는 죽었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p. 482 도정일
서구 인문학의 기원지점, 즉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공간에서 말하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확실히 아는 일’ 입니다. 이 생각은 근대에까지 이어져서 근대가 되면 확실성의 추구가 더 치열해지죠. 인간이 자기를 알자면 유한한 경험 세계만 알아서는 어림없고, 변하지 않는 객관 존재인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인간이 그 진리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플라톤은 알 수 있다고 호언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런 걸 다 엎어놨어요. 인간은 자기를 알 수 없고, 그러므로 확실한 자기 지식이란 건 환상이 되고 맙니다. 이성이 길잡이가 아니라 비이성(무의식)이 인간을 이끌고, 욕망이 인간을 인도한다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 되면 인간의 자기 지식은 ‘욕망의 효과’에 불과해집니다. 객관 진리의 초석 위에 서 있는 확실성이 아니죠. 그 객관 진리라는 것의 자리도 무의식으로 넘겨지는데, 그 무의식은 인간이 알고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건 하나도 없죠.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p 558 도정일
지금 세계는 정치적으로 단극 체제죠. 단극 체제에서의 큰 손실은 세계가 굉장히 얇아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정치적으로도 숨을 곳이 있었어요....그런데 지금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빈 라덴을 옹호하자는 건 아니지만, 아프가니스탄이 깨지니까 그 친구가 도망칠 곳이 없었어요...미국의 관점에서는 투명하고 빈대 숨을 곳 없는 단층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세계를 관리하고 미국의 이익을 높이는 데 편리하겠죠. 미국을 위협하는 ‘악’이 숨을 곳 없는 세계를 만들자는 게 부시의 전략입니다. 하지만 그런 투명한 일차원의 세계는 결코 좋은 게 아니에요. 투명해서 좋을 것은 회계 장부뿐입니다. 투명성이란 건 절대적 가치가 아니에요. 19세기 미국 청교도들은 아무도 죄 없는 사람이 없는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결과가 뭐냐? 하느님 앞에 모두 투명해지면 참 좋은 사회가 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렇게 투명성을 요구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전부 위선자가 됐어요. 교회에 나와서는 다들 투명한 척하지만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거죠. 청교도주의의 사회적 실험은 그래서 대실패로 끝납니다. 아무리 투명성을 강조해도 인간의 가슴은 투명해지지 않아요. 한 자도 안 되는 가슴이 사실은 깊은 골짜기거든요. 그 가슴의 골짜기는 신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어둡고 컴컴하고 깊어서 하느님의 눈으로도 그 안을 볼 수가 없어요. 신조차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 그게 내가 말하는 ‘두터운 세계’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두려움, 심연이 필요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그런 심연을 가질 권리도 없다면 억울하죠.
p 560 최재천
...저희 분야에서 새롭게 나온 이론 중에 비대칭 이론(skew theory)이라는 게 있어요...이 이론은 한마디로 번식이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거죠. 힘이 센 으뜸 수컷이 동네에 있는 암컷들을 모두 차지하면 다른 수컷들이 합심해서 그 으뜸 수컷을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모두 다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수컷들을 따라 암컷들도 가고 나면, 으뜸 수컷 혼자 남게 되는 거죠. 가장 강한 수컷 하나만 남고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사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죠. 물론 지금은 지구가 하나니까 미국을 놓고 갈 데가 없어서 난리지만, 어느 집단이나 으뜸 수컷이 자기 번식의 일부를 버금 수컷들 몫으로 떼어줍니다. 그 비율을 계산해보면 흥미롭게도 일관성이 있어요. 지나친 독점 체제는 오래 가지 못해요. 불균형 생명은 반드시 깨지는 데 비해, 적절하게 잘 나누어준 으뜸 수컷은 장기 집권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내가 언제나 공격받을 수 있다거나, 내가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긴장이 사회 전체를 유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이런 얘길 했습니다...‘비겁합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든다’ 고 말입니다. 지금 미국은 누가 감히 나를 무너뜨리랴 하는 상황이지만, 이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정식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p. 564 도정일
두터운 세계는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입니다. 이 ‘3다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 무엇보다 ’관용의 윤리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때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닙니다. 다른 것, 타자, 타인, 차이에 대한 존중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죠. 이게 없으면 자유민주주의도 안 돼요. 그런데 ’존중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래,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서로 존중하자‘라는 태도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뭘 하든 난 관심 없어‘ 라는 무관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용의 윤리학은 ’무관심주의‘나 ’오불관업‘으로 빠집니다. 이러면 공동체나 공존, 유대가 불가능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가령 누가 굶고 있다고 칩시다.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른 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모른 체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건 아니에요. 잡아다 법정에 세울 수도 없는 일이죠. 먹을 것을 반드시 갖다 주어야 한다는 것은 법적 책임이 아니라 윤리적 책임입니다. 윤리라는 건 이럴 때 ‘도와야 한다’는 실천 명령입니다. 하지만 그건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실천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보이죠. 이럴 때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고 그 행동에 윤리성을 부여해줄 근거 같은 것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나는 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다‘라는 태도가 그겁니다.
p. 579 도정일
19세기 영국 사회사상가들이 생각해 낸 꾀가 하나 있어요. 인간은 어차피 이기적 동물이다. 그러니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남 생각도 할 줄 아는 윤리적 인간이 되라고 설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째야 하느냐? 사람들의 이기적 성향을 욕만 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하라, 그런데 이기적 행동의 결과가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되게 유도하라는 게 그 비결입니다. 뒤집어 놔도 됩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나한테도 최고 이익이더라, 기업이 윤리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기업 이윤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놨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만들면 된다는 소립니다.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이라는 역설이 나오게 말이죠.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가 18세기 유럽에 막 퍼져나갈 때, 민주주의에 반대해야 하는 유럽 왕들은 자기들 딴에는 열심히 반대하느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가 되레 민주주의의 확산을 도왔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써놓은 이야기에요.
이런 역설의 효용이 사회적 지혜가 아닐까 싶어요. 역설의 진실을 사회적으로 최대화하라는 겁니다. 바보스런 이기주의자는 자기만 챙기는 사람이고, 뛰어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을 잘 챙기는 방식으로 남도 챙기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이기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바로 이타적인 행동이더라’ 이럴 때 ‘나도 살고 남도 살고’라는 생물학적 공생의 관점이 요긴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공존의 원칙이고 넓은 의미의 호혜조의가 아닌가 싶어요. 19세기 사상가들이 현대 생물학의 발견을 선취한 걸까요?
내가 저자라면
일단, 몇 가지 칭찬을 해야겠다.
앞서 말했듯, 아름다운 소개글로 독자가 대담자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 이런 류의 책을 어려워하는 나 같은 독자라도 서점에서 책의 첫 꼭지를 읽고 ‘그래 이런 책도 한 번 읽어보자’ 하고 용기 내어 집어 들 수 있도록 책을 시작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또, 책의 끄트머리에 주제별로 인덱스를 정리하여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해 놓은 것도 좋다. 두 석학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길을 잃어버리는 나 같은 독자가 주제별로 재발견 하여 책을 새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최초의 만남-을 구상했다는 점에도 높은 점수를 준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책을 만들고자 하는 출판사는 항상 지지하고 응원한다.
이제, 잘 모르지만 몇 가지 아쉬웠던 점을 이야기하자면-
전문적인 용어에 대해 필요에 따라 그림까지 덧붙여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준 점은 참 고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이 안 달린 어려운 용어가 너무 많다. 같은 페이지에 일일이 주석을 달기는 좀 힘들었을지라도 책의 끄트머리에 간략하게라도 정리를 좀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사실, 그렇게 되면 이 책의 부피가 더 커졌을 텐데, 그것 역시 과히 반갑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까. 뭐, 이 정도 내용을 담는데 지금 나온 책 정도의 두께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더 두꺼워진다면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것은 확실하다.
인문학의 특성이랄까, 특유의 모호한 용어들은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내용에 대한 이해를 떨어뜨린다. 도정일 교수님, 존경하지만 가끔 너무 애매모호합니다.
그리고, 두 대담자의 선정에 대하여.
도정일 교수를 선정한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만큼 폭 넓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단지, 말로 진행되는 대담의 형식인지라, 아무래도 이야기꾼인 인문학자가 주장을 펼치기에 너무 유리하지 않았나 싶다.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도정일 교수님의 이야기가 주가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물론 최재천 교수님 또한 역량이 부족한 분이 아니고, 읽으면서 놀라기도 했다. 그는 멋지다 싶을 정도로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이고 이야기의 방향 또한 신선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들을 말로 다 표현하기엔 그 능력이 아무래도 인문학자에 비해 못하지 않았겠는가 싶다. 즉, 다른 방식이었다면 그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 그의 글들을 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중간 중간 코멘트를 넣어가며 대담을 이끌어가는 사회자 자체도 도정일 교수의 의견에 많이 의지하는 느낌이다. 연륜 이랄까, 도정일 교수가 더 큰 말의 파워를 가진 분이라, 최재천 교수와 진행자가 도정일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도정일 교수의 멘트가 훨씬 많다는 느낌이다. 뒤로 갈수록 그 느낌이 더 강해져서, 도정일 교수는 설명하고 최재천 교수는 짤막하게 한 마디씩만 던지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어 좀 아쉬웠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도정일 교수가 던진 말 중에 확실히 많았지만, 최재천 교수가 좀 더 길게 많이 이야기 해주었더라면 싶었다. 후에 편집자가 최재천 교수의 멘트 부분을 좀 더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나 싶다.
마치면서
시간이 부족해 꼼꼼히 읽지 못한 것이 마음이 걸린다. 첫 번째 과제의 책인데,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다. MBTI 결과 열등기능이 ‘직관’ 으로 나온 것을 변명을 꺼리로 삼아도 될까. 책을 읽고 전체를 정리한다는 것은 내게 정말 힘들다. 말 그대로 훈련이 필요하다. 앞으로 세 권이 더 남았으니, 좀 더 발전하는 독서를 할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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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그의 간단한 프로필.
서울대학교 동물학과-하버드대 박사학위-하버드대 전임강사-미시건대 조교수를 거쳐 서울대학 생명공학부 소속 교수-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 석좌교수.
저서는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2005)’ ‘열대예찬(2003)’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2001)’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2003)’ 알이 닭을 낳는다(2001)등.
그에 대해 포탈 사이트에서 검색하려고 했다. 검색창에 ‘과학자 최재천’이라고 썼다. 그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단지 과학자이다. 초등학교 때 꿈이 뭐니 하고 물어보면 대답하는 그 과학자. 나는 과학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황우석 교수의 이야기로 한참 매스컴이 떠들썩할 때에도 어떤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혼자 모르고, 단지 그가 조금이라도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적당히 하게 하지, 어차피 이러다가 조용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정도만 했던 무심한 사람이기에, 최재천 교수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들 이름을 들어 봤을 리 만무했다. 생물학자라. 어쨌든 과학자구나. 안경 쓰고 흰색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이미지의 그런 사람.
그에 관련되어 검색된 기사들을 훑었다. 그는 공부를 잘 하는 책임감 있는 학생이었던 것 같고,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과학을 시로 쓸 날을 꿈꾼다고 말하는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 도정일 교수와 맞서 이야기한단 말이지.
그럼, 다음 도정일 교수의 프로필.
경희대학교 영문학과-하와이대 대학원 영문학 석사, 박사-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책 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책읽는 사회)상임대표,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 이사장. 북스타트 운동 한국위원회 위원장 등.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으로는 ‘사유의 공간(2004) , 여성문화의 새로운 시각(2004) ,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1994) 등 이다. (참고로 앞의 두 권은 공저임).
지난 달에 경희대학교 교수의 자리는 퇴직을 하셨을 것이다. 사실 대학시절에 이 분의 수업을 한 학기 동안 수강했었다. 교수님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빠져들었다는 플라톤을 교재로 수업을 들으면서 그의 방대한 지식세계가 존경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문학 수업을 몇 개 듣다보니 처음에는 신세계였던 교수님들의 인문학적 “썰”을 너무 들었다고나 할까. 인문학자의 ‘썰 풀기’는 가끔 한 방향으로만 발전-전개되는 경향이 있어 가끔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여운이 종종 남았던 수업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다방면에 말 그대로 박학다식한 이 시대의 흔치 않은 지식인이며, 지독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그의 강의를 들을 때, 그는 천재 아니면 괴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하신 질문에 아주 바보 같은 대답을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도정일이라는 방대한 지식의 강 앞에서 말라비틀어진 불가사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직 그를 두려워하는지도.
대담을 읽다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대담을 엮는 최초 시도를 한 책이라 하고, 책이라고는 도통 읽지 않는 애인조차 알고 있던 책이라는데, 평소에 별 관심이 없는 분야라 이 과제를 통해서야 이 책의 존재를 알았다. 서점에서 턱 집어 들었을 때의 무게감과, 그 제목들이 주는 압박감 이라니.
도정일이라는 인물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시작한 책이라, 스스로도 너무 편파적으로 읽게 되는 거 아닐까, 고민도 했다. 읽기 시작하자, 역시.
시작하는 글부터 도정일 교수는 이야기꾼답게 탁월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최재천 교수는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문학 소년이었다고 하니, 도정일 교수와 맞붙어 댓거리를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앞에 주저리주저리 두 대담자의 프로필을 적어놓았지만, 두 저자에 대해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담의 첫 꼭지를 읽어보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엮은이는 두 학자에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본인에 대해 말해달라고 주문했고, 그들이 풀어놓은 자신의 이야기들은 이 두 학자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개글이며 이 책 속의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무겁지 않게 시작한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비교적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인문학은 난해하고 자연과학은 생소하다는 느낌이지만 두 분 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잘 하신다. 하지만 간간이 온갖 사상가와 생소한 과학자의 이름과 저서가 인용되면 난감하다. 다행히 역주가 붙어있지만, 전부 다 이해하기는 힘들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분야의 석학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라서 일까, 잘 몰라서 딴지의 여지도 찾기 힘들다. 교양 참고서 같은 느낌이다. 도정일 교수님의 난해한 설명을 읽다보면 예전에 영문학수업을 처음 수강했을 때의 난감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주일에 걸쳐 책을 한 번 읽고, 독후감을 쓰기 전 오늘 다시 한 번 읽기를 시도했는데, 잠이 쏟아져 견딜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단편적이나마, 책을 읽으며 느낀 것들에 대해 언급하자면,
마음에 남는 것 중에 하나가 ‘통섭’이라는 개념이다.
여러 학문들이 모여 일관된 이론의 체계를 찾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학문의 큰 두 축을 이루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일단 그렇게 정의하고) 이 두 학문이 왜 만나야 하는지, 이 책을 구상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최재천 교수의 지도 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쓴 책의 제목이며 그가 주창한 개념이다. 그 필요성은 책을 통해 알겠지만, 도정일 교수의 이야기처럼 폐쇄적인 한국의 학문분과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흘러내릴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이 ‘대담’ 같은 형식의 책이 많이 나오면 되지 않을까.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처럼,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학문끼리의 만남을 펴낸 책. 흥미롭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는 이런 변화와 유연함이 좀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책을 쭉 읽다보면, 도정일 교수의 유려한 말솜씨에 간혹 최재천 교수가 ‘도선생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 입장을 유지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부분이 종종 눈에 띈다. 전문적 이야기꾼에게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자연과학자의 겸손인지, 도정일 교수의 말에 공감하지만 인문학자와 자연학자의 대담이라는 대립 구도의 입장에 걸려 한 보 물러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슬쩍 다른 주제로 넘어가버리는 느낌이 든다. 대화의 흐름상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처음에 대화를 시작한 의도와 어긋난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열심히 읽었는데, 별 다른 공방 이나 내용 없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고 이야기해야 옳겠다. 파고들기보다는 훑고 지나간다는 느낌의 대화가 종종 느껴진다.
사실, 이렇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시간에 쫓겨 읽을 책이 아니란 말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주석을 일일이 달아가며 읽어야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스터디용 책으로 삼아 여럿이 깊게 파고들면 좋겠다는 느낌이다. 내가 교수라면, 학생들에게 과제로 내주고 싶은 책이다.
책 속에서-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p.72 최재천
..생물학자들은 우울증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 우울증은 공포에 적응하려는 본성이고,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래서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기도 한 겁니다. 공포를 느끼는 능력, 우울함을 느끼는 능력도 중요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p 78 도정일
...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면서 말이죠. 이 망설임이 고민이고, 그 고민이 ‘옳고 그름’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되면 고통이 생깁니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행위가 이미 고통을 수반하는 거죠. “이쪽으로 가면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는데” 라는 판단과 “ 그런데 그게 옳은 길은 아니야” 라는 판단이 충돌해보세요. 고민스럽죠. 행복의 길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쪽 길로 가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포기한다? 이 선택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선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떳떳하게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하는 진실의 길’ 이란 말하자면 그런 경우죠. 선택의 고통 속에 이미 행복이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 경우 진실은 바른 선택과 분리될 수 없고, 바른 선택은 ‘좋은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좋은 삶’이 행복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좋은 삶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닌 것 같아요. 행복을 위해 바른 선택을 포기하면 좋은 삶이 망가지고 행복도 날아갑니다. 생명공학 기술은 ‘통증 없는 세계’를 제시하지만, 공학기술이 도덕적 판단과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더더구나 인간이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든요. 기술이 그런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기술사회의 행복 이데올로기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아주 무력해졌다는 것이 인문학의 딜레마고요. 과학과 인문학 모두 이 지점에서 함께 물에 빠지는 거죠.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p 119 도정일
과학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화나 종교가 없어지지 않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죠. 3,000-4,000년 전 신화가 지금도 힘을 가지는 것은 신화의 질문들이 인간이 노상 대면해야 하는 기본적 질문이기 때문에 아무도 쉽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질문들로부터 신과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져요. 이때 신은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놀고먹는 영감탱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공존의 정의, 자비와 결속 같은 윤리적 책임을 지우고 그 책임을 환기시키는 존재입니다. 신화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이기 때문에 과학의 사실적 언어로 읽으면 안 됩니다. 신화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고, 신화의 근본적 질문들은 여전히 해답 없이 열려있죠. 생물학이 인간의 기원을 제아무리 과학적으로 해명한다 해도 신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p 158 도정일
“인간이 계획하면 신이 웃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겸손을 위해서는 늘 기억할 만한 말이죠. 물론 이때의 신은 섭리의 신이 아니라 ‘우연의 신’입니다. 나는 우연성의 신을 부정하지 않아요. 언제 그 신을 우연히 만나면 꼭 술 한잔 나누고 싶어요. 나는 우연의 창조성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연의 신이 웃든 말든 인간은 죽자사자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 실현을 추구합니다. 내 생각에는 우연성이라는 게 인간 존재의 조건이나 운명적 저주 같아요. 왜 계획하는가? 부족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 우연성이 무수히 끼어들지만 역사가 우연의 연속만은 아니죠. 그래서 나는 생물학 혹은 진화론의 우연성 주장을 사회에 곧장 적용해서 일종의 ‘사회철학’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시세계에 대한 물리학의 ‘불확실성’ 이론 같은 것을 곧바로 인간사회에 적용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진화론이 사회이론이나 인문학에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긴 하지만, 인문사회과학과 생물학 사이에는 진화론으로는 극복되기 어려운 고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p 171 도정일
남들이 할 가능성이 있고 막을 방도가 없으니까 내가 먼저 한다는 식이 되면 과학의 정신과 윤리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어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안 하는 것이 윤리적 자세입니다. 그런데 지금 줄기세포의 경우는 막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인지 어떤지 결론을 내리기가 난감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현 시점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규범이나 기준, 가치관 같은 것으로 기술 발전에 제동을 걸 수 있느냐 문제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 치료의 길을 열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인간의 생명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니까 윤리적으로 충분히 지지를 받을 만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p 175 최재천
저는 솔직히 황우석 선생 같은 양반이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가 아예 복제과학이란 것을 생각조차 못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과학기술의 발달이 꼭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어야 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뭐 별겁니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호기심이 가장 많은 동물은 단연 우리 인간이죠. 저는 과학이란 우리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망과 행동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앎의 행동’은 우리의 본능이죠. 저는 심지어 기독교도 과학을 부추겼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대 과학이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 꽃을 피웠느냐 하는 문제에 의견들이 분분한데, 저도 하나 보태렵니다. 하느님은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지식의 나무’를 일부러 골라내어 그건 절대로 먹지 말라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을까요? 저는 하느님이 당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인간에게 과학을 허락하신 거라고 믿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멈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일 뿐이죠.
도정일
바로 거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상당한 맹목성을 가지고 있죠. 방법의 맹목성이요.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을 위한’ 방법인가를 따집니다.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거죠.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효과적 방법이 기술이라는 건데, 이때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거죠.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효과적 방법이 기술이라는 건데, 이땐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을 따지지 않는 것이 기술의 맹목성입니다. 자, 여기 유대인 100만 명이 있다. 이들을 가장 빨리, 가장 효과적으로 죽여 없애는 방법이 뭐냐? 이것이 히틀러의 주문이었어요. 기술자들이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이 가스실 처형이었습니다. 방법이 있더라도 목적 자체가 정당하지 않으면 그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문학적 사고입니다. 흔한 지적이지만 ‘어떻게?’를 생각하는 사고와 ‘왜?’라고 질문하는 사고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생명과학의 기술적 부가가치, 시장 규모, 기술 선진성, 미래산업, 다음 대박 같은 것이 지배적 관심사입니다.
p 182 도정일
..신화서사에 나오는 영생 추구의 이야기들은 예외 없이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에덴 동산에 있었다는 그 생명의 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도록 금지령이 내려진 나무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삶과 무한한 지식을 갖고 싶은 욕망을 품지만, 그건 충족시킬 수 없는 금지된 욕망이라는 이야기죠. 얻을 수 없는 것은 ‘금지된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히브리 서사의 특징입니다. 인간에게서 근원적으로 박탈된 것, 그래서 그것을 추구할 때 부딪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영토를 기웃거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히브리 서사의 지혜이죠. 그러나 금지된 것으로 향하는 게 인간 욕망의 특징이라서 욕망 추구와 실패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습니다...
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p 207 도정일
.. 수메르 신화를 보면 신둘은 노동하기 싫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만듭니다. 신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농사짓고 고기도 잡으러 다니느라 허리가 아파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자를 만들고자 하게된 거거든요. 말하자면 신들을 위한 ‘노예’로 만들어진 것이 수메르 신화의 ‘인간’입니다. 이건 인간 기원에 대한 과학적 진술일 수 없어요. 그러나 다른 층위에서 보면 당시 사회의 인간관과 권력관계, 세계관을 말해주는 아주 강력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p 232 도정일
...철학에는 ‘운동을 있게 한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있는데, 사실 철학은 이 최초 원인을 찾는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최초 원인이 ‘기원’입니다. 근대 철학도 마찬가지에요. ‘원인 없이도 운동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건 칸트가 평생 매달린 화두의 하나죠.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있는 것은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됩니다. 그런데 진화론처럼 생명이 출현한 원인도 목적도 모른다, 혹은 목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면 합리적 설명 모델이 무너지죠. 사건은 있는데 원인은 없다는 게 되니까요. 합리성의 부정이라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진화에 목적이 없다는 주장을 역사학적으로 옮기면 ‘인간의 역사에는 아무 목적이 없다’가 됩니다. 목적이 없으면 의미도 없죠. 의자를 만든 목적이 의자의 의미 아닙니까. 인간이 하는 일이 역사를 만드는데, 그 일에 아무 방향도 목적도 없다면 역사는 무의미한 우연적 사건들의 연쇄에 불과해지죠. 역사목적론에는 초월적 목적론과 세속적 목적론이 있는데, 기독교 섭리사관이 앞의 것이라면 마르크시즘이나 진보 사관은 뒤의 것을 대표합니다. 역사에 목적이 있느니 없느니로 근 200년 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세기 후반쯤부터는 무목적론이 득세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종결된 게 아니에요...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p 272 도정일
...개인이나 집단이 이룩한 정신적 성취로서의 혼은 문화적으로 복제되고 전승된다고 말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영혼은 결코 집단적인 것일 수 없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거죠. 한 개인에게 고유하고 유일한 것, 독특한 것일 때만 영혼은 의미가 있습니다. 영혼이 종교적 함의를 지닌다면, 그것과 가장 근접한 세속학문의 용어는 아마 ‘마음(mind)' 일 겁니다. 마음은 환경과의 교섭, 협상, 교육,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는 의식 패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마음이 있어 자기를 전개한다기보다는 태어난 이후에 사회과 교섭하고 적응하고 반발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마음입니다. 진화론에서는 ’적응‘이 핵심어지만 마음이란 것이 움직이는 꼴을 보면 적응이론만으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아요. 주어진 환경에 반발하고, 저항하고,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마음이니까요. 이 마음의 어떤 부분은 혼의 경우처럼 문화적으로 복제되고 전승될 수 있겠죠. 그러나 유일성, 단독성, 독자성으로서의 마음 혹은 영혼은 복제되지 않습니다. 복제된다면 고유성이니 단일성이니 하는 것은 어물성설이죠...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p 347 도정일
..말라깽이를 아내로 모셔다 놓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부자의 ‘위세’가 되는 거죠. ‘ 우리 마누라는 말라깽이야’라는 소리는 ‘우리 마누라는 약해서 일도 못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마누라는 일 같은 거 할 필요가 없어, 내가 부잔데 뭐’ 이런 소리가 되죠...요약하면 한국 남자들이 이쑤시개형을 선호하는 것은(이게 만약사실이라면) 자연선택도 성선택도 아니고 미적 기준의 변이현상도 아닌, 사회, 경제적 ‘부자 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라 말할 수 있죠.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p 396 도정일
..궁금한 것은 성의 영역에서 특별히 ‘인간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는지에 대한 건데, 찾아보면 있을 듯합니다....사회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특별히 인간적이라고 할 부분은 없는 것 아닙니까?
최재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은밀함이 가장 인간적인 특성이겠죠. 만약에 보노보처럼 우리 여성들이 들판에서 허구한날 자위 행위를 하면서 지나가는 남자들의 손을 잡고 섹스하자고 했으면 사랑소설 같은 건 나오기 어려웠겠죠. 쓸 만한 이야깃거리가 안 될테니까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처음부터 은밀한 섹스를 했을까요? 섹스가 은밀해지기 시작하면서 지금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생긴 것은 아닐까요? 그 옛날 석기시대에도 인간이 지금처럼 사랑의 열병을 앓았을까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p 440 최재천
이건 매우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저는 인간은 누구나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봐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이 많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어떻든 결국은 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고, 많지 않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억압적이면 결국 드러내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그 가운데는 조금씩 드러내면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을 거구요. 저는 그런 성향이 식물이나 동물 세계에도 있고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p 463 도정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세 줄로 요약될 수 있어요.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 이건 과학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나다‘ ’나는 언제나 나의 주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단연코 없어요. 나를 이끌고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나 또렷하고 명징한 언어로 말하는 나의 ’인식‘이라는 게 바로 근대 자아의 환상입니다. 데카르트적 자아죠. 근대 자유주의도 이런 개인주의적 명징성의 자아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계몽학자들이 생각한 ’ 지식과 판단의 주인‘으로서의 ’주체‘라는 것도 그런 명징한 의식의 주체죠. 프로이트가 뒤집어엎은 건 바로 이런 자아의 환상, 명징의식의 이데올로기에요. 내 의식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나의 무의식이 나의 주인이라는 건 혁명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죠. 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합리적이고 앞뒤가 딱딱 맞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면 그 합리적 이야기들은 구명이나 결략, 틈새, 모순, 생략, 은 걸로 같은 걸로 가득합니다. 이건 문학 창작이나 비평, 이론에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통찰이에요. 20세기 후반의 ‘읽기(텍스트 읽기와 해석)’ 이론은 거의 다 이 통찰에서 나오거나 그 통찰에 힘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문쟁이들이 ‘프로이트는 죽었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p. 482 도정일
서구 인문학의 기원지점, 즉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공간에서 말하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확실히 아는 일’ 입니다. 이 생각은 근대에까지 이어져서 근대가 되면 확실성의 추구가 더 치열해지죠. 인간이 자기를 알자면 유한한 경험 세계만 알아서는 어림없고, 변하지 않는 객관 존재인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인간이 그 진리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플라톤은 알 수 있다고 호언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런 걸 다 엎어놨어요. 인간은 자기를 알 수 없고, 그러므로 확실한 자기 지식이란 건 환상이 되고 맙니다. 이성이 길잡이가 아니라 비이성(무의식)이 인간을 이끌고, 욕망이 인간을 인도한다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 되면 인간의 자기 지식은 ‘욕망의 효과’에 불과해집니다. 객관 진리의 초석 위에 서 있는 확실성이 아니죠. 그 객관 진리라는 것의 자리도 무의식으로 넘겨지는데, 그 무의식은 인간이 알고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건 하나도 없죠.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p 558 도정일
지금 세계는 정치적으로 단극 체제죠. 단극 체제에서의 큰 손실은 세계가 굉장히 얇아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정치적으로도 숨을 곳이 있었어요....그런데 지금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빈 라덴을 옹호하자는 건 아니지만, 아프가니스탄이 깨지니까 그 친구가 도망칠 곳이 없었어요...미국의 관점에서는 투명하고 빈대 숨을 곳 없는 단층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세계를 관리하고 미국의 이익을 높이는 데 편리하겠죠. 미국을 위협하는 ‘악’이 숨을 곳 없는 세계를 만들자는 게 부시의 전략입니다. 하지만 그런 투명한 일차원의 세계는 결코 좋은 게 아니에요. 투명해서 좋을 것은 회계 장부뿐입니다. 투명성이란 건 절대적 가치가 아니에요. 19세기 미국 청교도들은 아무도 죄 없는 사람이 없는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결과가 뭐냐? 하느님 앞에 모두 투명해지면 참 좋은 사회가 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렇게 투명성을 요구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전부 위선자가 됐어요. 교회에 나와서는 다들 투명한 척하지만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거죠. 청교도주의의 사회적 실험은 그래서 대실패로 끝납니다. 아무리 투명성을 강조해도 인간의 가슴은 투명해지지 않아요. 한 자도 안 되는 가슴이 사실은 깊은 골짜기거든요. 그 가슴의 골짜기는 신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어둡고 컴컴하고 깊어서 하느님의 눈으로도 그 안을 볼 수가 없어요. 신조차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 그게 내가 말하는 ‘두터운 세계’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두려움, 심연이 필요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그런 심연을 가질 권리도 없다면 억울하죠.
p 560 최재천
...저희 분야에서 새롭게 나온 이론 중에 비대칭 이론(skew theory)이라는 게 있어요...이 이론은 한마디로 번식이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거죠. 힘이 센 으뜸 수컷이 동네에 있는 암컷들을 모두 차지하면 다른 수컷들이 합심해서 그 으뜸 수컷을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모두 다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수컷들을 따라 암컷들도 가고 나면, 으뜸 수컷 혼자 남게 되는 거죠. 가장 강한 수컷 하나만 남고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사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죠. 물론 지금은 지구가 하나니까 미국을 놓고 갈 데가 없어서 난리지만, 어느 집단이나 으뜸 수컷이 자기 번식의 일부를 버금 수컷들 몫으로 떼어줍니다. 그 비율을 계산해보면 흥미롭게도 일관성이 있어요. 지나친 독점 체제는 오래 가지 못해요. 불균형 생명은 반드시 깨지는 데 비해, 적절하게 잘 나누어준 으뜸 수컷은 장기 집권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내가 언제나 공격받을 수 있다거나, 내가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긴장이 사회 전체를 유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이런 얘길 했습니다...‘비겁합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든다’ 고 말입니다. 지금 미국은 누가 감히 나를 무너뜨리랴 하는 상황이지만, 이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정식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p. 564 도정일
두터운 세계는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입니다. 이 ‘3다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 무엇보다 ’관용의 윤리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때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닙니다. 다른 것, 타자, 타인, 차이에 대한 존중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죠. 이게 없으면 자유민주주의도 안 돼요. 그런데 ’존중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래,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서로 존중하자‘라는 태도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뭘 하든 난 관심 없어‘ 라는 무관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용의 윤리학은 ’무관심주의‘나 ’오불관업‘으로 빠집니다. 이러면 공동체나 공존, 유대가 불가능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가령 누가 굶고 있다고 칩시다.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른 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모른 체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건 아니에요. 잡아다 법정에 세울 수도 없는 일이죠. 먹을 것을 반드시 갖다 주어야 한다는 것은 법적 책임이 아니라 윤리적 책임입니다. 윤리라는 건 이럴 때 ‘도와야 한다’는 실천 명령입니다. 하지만 그건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실천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보이죠. 이럴 때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고 그 행동에 윤리성을 부여해줄 근거 같은 것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나는 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다‘라는 태도가 그겁니다.
p. 579 도정일
19세기 영국 사회사상가들이 생각해 낸 꾀가 하나 있어요. 인간은 어차피 이기적 동물이다. 그러니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남 생각도 할 줄 아는 윤리적 인간이 되라고 설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째야 하느냐? 사람들의 이기적 성향을 욕만 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하라, 그런데 이기적 행동의 결과가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되게 유도하라는 게 그 비결입니다. 뒤집어 놔도 됩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나한테도 최고 이익이더라, 기업이 윤리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기업 이윤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놨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만들면 된다는 소립니다.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이라는 역설이 나오게 말이죠.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가 18세기 유럽에 막 퍼져나갈 때, 민주주의에 반대해야 하는 유럽 왕들은 자기들 딴에는 열심히 반대하느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가 되레 민주주의의 확산을 도왔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써놓은 이야기에요.
이런 역설의 효용이 사회적 지혜가 아닐까 싶어요. 역설의 진실을 사회적으로 최대화하라는 겁니다. 바보스런 이기주의자는 자기만 챙기는 사람이고, 뛰어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을 잘 챙기는 방식으로 남도 챙기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이기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바로 이타적인 행동이더라’ 이럴 때 ‘나도 살고 남도 살고’라는 생물학적 공생의 관점이 요긴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공존의 원칙이고 넓은 의미의 호혜조의가 아닌가 싶어요. 19세기 사상가들이 현대 생물학의 발견을 선취한 걸까요?
내가 저자라면
일단, 몇 가지 칭찬을 해야겠다.
앞서 말했듯, 아름다운 소개글로 독자가 대담자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 이런 류의 책을 어려워하는 나 같은 독자라도 서점에서 책의 첫 꼭지를 읽고 ‘그래 이런 책도 한 번 읽어보자’ 하고 용기 내어 집어 들 수 있도록 책을 시작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또, 책의 끄트머리에 주제별로 인덱스를 정리하여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해 놓은 것도 좋다. 두 석학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길을 잃어버리는 나 같은 독자가 주제별로 재발견 하여 책을 새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최초의 만남-을 구상했다는 점에도 높은 점수를 준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책을 만들고자 하는 출판사는 항상 지지하고 응원한다.
이제, 잘 모르지만 몇 가지 아쉬웠던 점을 이야기하자면-
전문적인 용어에 대해 필요에 따라 그림까지 덧붙여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준 점은 참 고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이 안 달린 어려운 용어가 너무 많다. 같은 페이지에 일일이 주석을 달기는 좀 힘들었을지라도 책의 끄트머리에 간략하게라도 정리를 좀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사실, 그렇게 되면 이 책의 부피가 더 커졌을 텐데, 그것 역시 과히 반갑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까. 뭐, 이 정도 내용을 담는데 지금 나온 책 정도의 두께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더 두꺼워진다면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것은 확실하다.
인문학의 특성이랄까, 특유의 모호한 용어들은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내용에 대한 이해를 떨어뜨린다. 도정일 교수님, 존경하지만 가끔 너무 애매모호합니다.
그리고, 두 대담자의 선정에 대하여.
도정일 교수를 선정한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만큼 폭 넓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단지, 말로 진행되는 대담의 형식인지라, 아무래도 이야기꾼인 인문학자가 주장을 펼치기에 너무 유리하지 않았나 싶다.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도정일 교수님의 이야기가 주가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물론 최재천 교수님 또한 역량이 부족한 분이 아니고, 읽으면서 놀라기도 했다. 그는 멋지다 싶을 정도로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이고 이야기의 방향 또한 신선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들을 말로 다 표현하기엔 그 능력이 아무래도 인문학자에 비해 못하지 않았겠는가 싶다. 즉, 다른 방식이었다면 그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 그의 글들을 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중간 중간 코멘트를 넣어가며 대담을 이끌어가는 사회자 자체도 도정일 교수의 의견에 많이 의지하는 느낌이다. 연륜 이랄까, 도정일 교수가 더 큰 말의 파워를 가진 분이라, 최재천 교수와 진행자가 도정일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도정일 교수의 멘트가 훨씬 많다는 느낌이다. 뒤로 갈수록 그 느낌이 더 강해져서, 도정일 교수는 설명하고 최재천 교수는 짤막하게 한 마디씩만 던지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어 좀 아쉬웠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도정일 교수가 던진 말 중에 확실히 많았지만, 최재천 교수가 좀 더 길게 많이 이야기 해주었더라면 싶었다. 후에 편집자가 최재천 교수의 멘트 부분을 좀 더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나 싶다.
마치면서
시간이 부족해 꼼꼼히 읽지 못한 것이 마음이 걸린다. 첫 번째 과제의 책인데,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다. MBTI 결과 열등기능이 ‘직관’ 으로 나온 것을 변명을 꺼리로 삼아도 될까. 책을 읽고 전체를 정리한다는 것은 내게 정말 힘들다. 말 그대로 훈련이 필요하다. 앞으로 세 권이 더 남았으니, 좀 더 발전하는 독서를 할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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