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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20일 17시 36분 등록

[1]저자 소개

제러미 리프킨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이다.
1945년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태어나,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자랐다. 1967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워튼 스쿨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커프츠 대학교 플레처스쿨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0 여 년 동안 15권의 저서를 통해 경제, 노동,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세계관에 근거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에너지 낭비가 가져올 인류의 재앙을 경고한 저서 <엔트로피법칙>으로 세계적인 이름을 얻었다. 2000년에는 인터넷 접속으로 상징되는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 <소유의 종말>을 발표하였다. 이밖에 <생명권 정치학> <노동의 종말> <수소경제> 등이 있다. 1994년부터 워튼 경영 대학원 최고 경영자 과정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 세계의 최고 경영자와 고위 간부들에게 과학 기술의 새로운 조류와 이것이 글로벌 경제 ,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또한 비영리 조직인 <경제 조류 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재지가면서 사회의 공공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계몽운동과 감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리프킨은 미국과 세계 각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2]읽고난 후

‘접속’이라는 하나의 키워드에 방대한 자료와 상세한 설명, 반복되는 주장들.
저자는 지금의 변화와 모든 시대현상들을 ‘접속권’ 하나로 설명하려 한다. 모든 현상이 결국은 접속권으로 귀결된다. 그의 반복적인 주장은 소유와 함께 시작되었던 자본주의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반증들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수많은 현상들을 하나의 고리에 꿰어 목걸이하나로 완성해 내는 그의 통찰력은 나에게 있어 신기에 가까웠다. 그는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것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지구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21세기라고 불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알지 못한다면, 즉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 좌표를 알지 못한다면, 앞으로 갈 길 역시 불투명할 것이다. 앞날에 대한 예언은커녕 오늘도 알지 못하고,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다니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크게 산업 시대와 접속시대로 구분하여, 그 차이가 무엇이며 그 간극이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에 지면을 대부분 할애하고 있다. 물론 그것을 관통하는 것은 ‘access'이다. 이 책에는 내가 지금껏 궁금하게 생각해온 ’시대에 대한 설명‘이 잘 나온다. 정보통신 시대로 넘어가면서 나오는 변화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리 삶에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근래 활성화 되는 문화마케팅이 문화를 흥하게 해줄 것은 아니다라는 것. ‘과연 우리가 현재 변화하는 것이 자연적인 것일까,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해가는 걸일까, 어떻게 기술이 우리 환경과 삶의 양상에 영향을 미칠까’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데도 많은 도움을 얻었다. 상품생산이 어떤 과정을 거쳐 체험생산으로 가고 있는가, 산업자본이 어떻게 하여 문화자본으로 가고 있는가?
세뇌당할 정도로 문장이 되풀이되지만 또한 매우 신속하게 전개되어 지루할 틈은 없었다. 평소 궁금해 하던 ‘변화의 현성 너머’를 꿰뚫으며, 네트워크 시대, 문화시대로 가는 데 대한 명쾌한 해석이었다.

지금의 변화 방향이 과연 우리를 생존케 할 것인가, 멸하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제레미 리프킨은 마지막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트워크 경제와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는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자본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다면 결국 인류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사회적 신뢰와 공감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우리는 상업과 교역을 제대로 해낼 수나 있을까? 경제는 문화와 인간성의 기본틀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와 감정,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

접속의 시대는 우리가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 하고 싶은가하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 좌우할 것이라고 끝을 맺는다. 내용 놓칠세라 열심히 메모하며 책을 읽던 나에게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문화가 부상하고, 각종 흐름에 저항하는 일각의 몸부림들이 모든 것이 경제권으로 매몰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를 멸하게 하는 것도 흥하게 하는 것도 결국 우리의 선택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3]내가 저자라면

내가 평소 많이 접해보지 않은 류의 책이어서 소화시키기가 일단 쉽지가 않았다. 저자의 방대한 자료와 주장은 놀라운 부분이 있었지만, 저자의 주장을 쉽게 따라가기에 벅찬 감이 있었다. 엄청난 자료와 통계수치, 인용구가 그의 주장을 잘 뒷받침해주지만 어느 정도 감을 잡는가 싶으면 다른 얘기로 넘어가버린다. 내가 줄기를 잡기에는 역시 여러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보고 지금껏 주는 대로 받아먹고 온 듯 휩쓸려 살아온 내가 한심스러웠다.
내가 믿고 온 것들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이 책을 덮을 때, 아무 비판 의식 없이 내가 가진 믿음들이 절대적이라 생각한 나의 믿음에 일말의 배신과 함께 금이 갔다. 이 책에 대한 흠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저자의 통찰력과 반복되지만 스피디한 전개에 찬탄을 보내고 싶다.





[4] 책 속 인상적 부분

1.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
<14>
접속의 시대를 지배하는 경영학적 전제는 시장의 시대를 지배하던 전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새로운 세계에서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고 판매자와 구매자는 공급자와 사용자로 바뀐다. 사실상 모든 것이 접속된다. (…)사유재산이 중시되던 사회에서 소유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산업시대가 가고 문화생산 시대가 오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는 노동의식이 유희 의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16>
문화생산은 더 많은 인간의 활동을 상업부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핵심적 사명으로 삼아온 자본주의 생활방식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제품생산에서 서비스 제공으로, 다시 인간관계의 상품화로, 마지막으로 문화적 체험에 대한 접속권의 판매로 경제적 우선순위가 달라져 온 것으로 우리는 모든 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만들려는 상업 영역의 집요한 의지를 목격한다.
<21>
상업영역은 언제나 문화영역에서 파생되었다. 상업영역은 언제나 문화 영역에 의존했다. 문화는 합위된 행동 기준을 낳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합의된 행동의 기준이 신뢰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런 믿을 만한 환경 속에서 상업과 교역이 발생한다. 문화영역과 상업영역의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어쩌면 접속의 시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인지도 모른다.


2.시장이 네트워크에 밀리는 날
<46>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동맹 관계가 끝없이 변하는
새로운 세계에서 네트워크로부터 탈락한다는 것은 곧 낙오를 의미한다. 우리는 시간과 정신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가 상품으로 판매되는 지적 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3.무게 없는 경제
<73>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산업시대의 시장에서는 물관을 교환했다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물리적 형태 안에 담겨 있는 개념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한다.
<84-85>
새로운 시대는 비물질적이고 사색적이다. 산업시대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데 빠져들어 있었다면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을 관리하는 데 훨씬 관심이 많다. 사업의 성패를 아이디어가 좌우하는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다.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확장하여 보편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산업 활동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생각을 관리하고 파는 능력이 궁극적으로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4.지적 재산의 독점
<92>
체인 가맹점은 사업체를 사들인 것이 아니라 공급자와 미리 정한 조건에 따라 사업체에
단기간 접속할 수 있게 허락받은 데 불과하다. 이는 판매자-구매자가 아니라 공급자-사용자의 관계이다. 이 계약의 핵심은 접속의 합의지 소유권의 양도가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이다.

5.서비스 세상
<143>
세상만사가 서비스 화 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교환하는데 바탕을 둔 체제에서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데 바탕을 둔 체제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자보주의에서는 물질의 차원보다는 시간의 차원이 훨씬 중요하다.
<146>
한 종류의 제품을 최대한 많은 고객에게 팔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고객에게 이런 저런 다양한 제품을 평생에 걸쳐서 최대한 많이 팔려고 노력한다. 곧 개인인 일평생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상품화 될 수 있다는 잠재성에 주목함을 뜻한다.
<158>
마케팅은 제품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특이한 사업기능이다. 모든 사업을 최종 결과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서 고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6.인간관계의 상품화


7.삶으로의 접속
<194>
소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좋지만 그 바람에 아예 우리가 만들고 쓰는 것에 대한 책임 의식마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상호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교감하는 것은 좋지만 그 바람에 칼자루를 쥔 기업들의 막강한 네트워크에 더욱더 의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198>
우리의 생활공간을 소유에서 접속으로 어느 정도까지 탈바꿈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21세기를 어떤 식으로 살고 싶어 하는 가에 대한 두 가지 감수성의 우열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8.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
<203>
문화라는 것이 인간이 자기 주위에 엮어나가는 ‘의미망’이라면, 커뮤니케이션은 우리 인간이 이 의미망을 해석하고 생산하고 유지하고 변형하는 수단이다. 미디어 이론가 리 데이어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인간 문화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는 뜻이며, 어떤 인간 문화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문화를 매일매일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보며 알고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이다.’
<207>
다이엘 벨은 현대분명을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경제, 정치, 문화 세 가지 권역으로 나눈다. 경제 영역의 핵심원리는 자원 이용의 효율화이고, 정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라고 벨을 주장한다. 문화 영역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자기실현과 자기 고양이다. 20세기 들어와 정치 영역과 문화 영역의 가치는 경제 영역으로 포섭되어 끊임없이 상품화되었다.
<213>
접속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체험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 자체를 산다. 오길비는 체험 산업은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드는 모든 내용을 거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236>
개블러에 따르면 ‘미국의 성장 산업은 점점 전통적 오락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분야’가 주도하고 있다.
<243>
새로운 시대의 주역은 근면이 아니라 창조이며 사업은 일보다는 유희에 가까워진다. 문화 사업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창조성과 예술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분야의 기업이 조직 환경을 재구축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다. 업무환경은 실 체험의 마케팅과 문화적 연기를 중시하는 유희환경으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다.


9.문화의 광맥을 찾아서
<252>
마케팅은 문화라는 공공재로부터 가치 있는 문화적 의미를 캐낸 다음 예술적 조작을 거쳐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상품화된 체험으로 변형시키는 수단이다.
<272>
웨이드 데이비스는 ‘이 세상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인류가 쌓아온 지적 성취와 살아있는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언어의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켄 헤일은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이 폭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10.탈근대
<276-277>
탈근대와 근대가 이토록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그것은 바로 시간, 문화, 실 체험의 상품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탈근대와 맞물려 있는 반면, 근대의 자본주의는 토지와 자원의 상품화, 노동력의 고용, 제품 생산, 기본적 서비스의 제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277>
근대인이 가졌던 믿음 혹은 신념은, 세계는 인간이 알아낼 수 있고 인간 생활을 개선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285-286>
하이덴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을 노출시킨 자연이다.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연구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자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란 말을 한 적이 있다. 햄릿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은 ‘말,말, 말’이다.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 탈근대에는 아이러니, 역설, 회의가 득세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
<288>
근대의 핵심이 근면이라면 탈근대의 핵심은 유희다.
<303-305>
인쇄는 질서 정연하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방식으로 현상을 조직하며 이 과정에서 직선적, 순차적, 인과적 사유 방식을 장려한다.(…)컴퓨터 통신은 직선으로 전개되지 않고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순서와 인과가 밀려나고 그 자리에 연속적이고 통합된 활동의 총체적 장이 들어선다.
<306>
책은 경계선이 분명하고, 단선적이며 배타적이고 완전하다. 하이퍼텍스트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다. 부단히 변신하며 완성이라는 것을 모른다. 책은 결과지만 하이퍼텍스트는 과정이다. 순간순간 접속하는 것이 제격이다. 또한 종래의 저자 개념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308>
인쇄가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관념이 싹트는 것을 도왔던 것처럼 컴퓨터는 관계를 중시하는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북돋운다.
<311>
탈근대 세계에서는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식 대신 무수히 연결된 관계망 안에 있는 하나의 접속점처럼 행동하는 새로운 개인이 들어선다.
<314>
물건을 산다는 것은 하나의 거래가 다음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이고 연속적인 활동이지만 체험의 성격은 다형적이고 사이버적이다. 변화무쌍함은 한편으로는 외부 상황에 맞추어 자기 모습을 바꾸어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응집하고 강화하는 노력이라고 리프턴은 말한다.
<316-317>
접속의 시대에 두드러지는 특성 중 하나는 ‘연극성’이다. 인간은 끝없는 변신의 과정을 밟는다. 자꾸만 존재의 상태를 바꾸어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 다른 누군가가 된다.
<322>
세계를 연극무대로 보는데 익숙한 세대에게는 상업세계가 제공하는 대본, 무대 ,다른 배우 청중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는 끊임없이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연기를 할 수 있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11.접속자와 비접속자
<336>
지금까지 정부가 의지한 것은 지리적 기반이었다. 정부는 국토를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러나 경제와 사회에서 비중 있는 활동이 상품화된 문화 체험이 형태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세계에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343>
전자 네트워크 세계에 접속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기 위한 필수적 능력’이 될 것이다 라고 ‘타임’은 내다보고 있다.

12.문화와 자본주의의 생태학을 향하여
<347>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 우리의 경제 생활과 사회생활이 점차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상, 문화 자체가 최고의 상품으로 각광받는 세상, 인간관계에 항상 돈이 개입되고 체험도 돈을 내야만 할 수 있는 세상, 자율성을 가진 자아는 물러나고 복수로 존재하는 인격, 연극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 사회는 연극적 용어로 파악되고 각 개인의 삶도 현실 무대와 가상 무대에서 공연되는 수많은 각본과 대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도대체 ‘접속’이 무엇을 뜻하는 가이지만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적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다.
<351>
상호 의존성이 높은 복잡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의 형태는 ‘사회 전체의 누적된 생산 자원을 이용하거나 여기서 혜택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을 개인의 권리’이다. 소유의 개념은 ‘접속으로부터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까지 포함시키는 쪽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362>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364>
문화체험을 상품화하고 마케팅 하는 데 따르는 희생은 만만치 않다. 문화가 시들면 문화의 가장 중요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와 공감은 어떻게 될까? 네트워크 경제와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는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자본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다면 결국 인류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사회적 신뢰와 공감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우리는 상업과 교역을 제대로 해낼 수나 있을까?
경제는 문화와 인간성의 기본 틀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와 감정,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371>
문화와 상업이 생태학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려면 문화상품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가를 터주는 것 못지않게 지역 문화를 소생시키는 데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73>
문화를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려면 적어도 사이버스페이스에 쏟아 붓는 만큼의 관심을 지리적 공간에도 보여야 하고 채팅방에 들이는 만큼의 정성을 현실 공동체에도 기울여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는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는 소생되어야 한다. )
<376>
교육은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육성하고 타인과의 유대를 권장하며 문화가 문명생활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는가를 학생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379>
접속의 시대에는 좌우가 대립하는 정치가 내재가치와 효용가치가 갈등을 빚는 새로운 사회구도에 흡수된다. 내재가치는 가장 깊은 의미의 문화적 정체성을 뜻한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가치다.
문화와 상업의 갈등은 내재 가치와 효용가치의 갈등이다.
<380>
모든 문화는 자연에 공동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자연에 우리가 진 빚을 이야기 하며 우리를 더 큰 생명의 힘으로 이끈다. 이런 생명의 긍정이 바로 내재 가치의 핵심이다.
<382>
시민 사회 조직은 지역 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다른 문화가 존재 할 수 있는 한 존중해야한다고 믿는다. ‘의식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국지적으로’
<383>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 -마하트마 간디
<384-387>
산업자본주의가 문화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지금, 노동 정신은 놀이 정신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놀이는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놀이가 없으면 문명도 존립할 수 없다.
놀이는 신나고, 즐겁고 자발적이다.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390>
자유와 놀이는 토대가 같다. 사람은 문화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를 경험하는 동안 마음을 열고 만과 어울리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빠져들 때만 진정한 인간이 된다.
<392>
새로운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에 대한 접속을 보장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건강하고 다양한 지역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안정된 길을 보장하는 것이다.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 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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