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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2일 22시 56분 등록
강의

<1> 저자소개

신영복선생님 <이하 존칭 생략>

천성

저서 ‘나무야 나무야’에 저자의 천성을 짐작케 하는 일화가 아주 인상적이다. 저자가 어렸을 때, 아이를 업고 걸리고 양 손에 짐을 들고 머리에 임을 이고 가는 시골 아주머니를 한동안 따라간 적이 있다고 한다. 머리 위의 임이 떨어지지 않을까, 어린 신영복은 내내 불안했다고 한다.
‘저 아주머니에게 손이 하나 더 있었으면....’ 어린 신영복의 바램이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고달픔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는 기질을 타고난 것같다. <66쪽>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5년 대학 경제학강사로 일하던 중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 복역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28세에서 48세까지의 황금기를 신영복은 감옥에서 보냈다. 타의에 의해 인생의 중추부분을 사정없이 도려낸 것이다. 이 부분에서 천차만별인 인간군상에 대해 감회가 밀려온다. 어떤 이들은 보편적인 인생의 문제에도 쉽게 굴복하는데.... 인간의 적응력에 대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징역 초기에는 꿈에서라도 바깥세상에 가고 싶었단다. 적어도 징역의 반은 바깥세상에서 사는 셈이 되니까. 그러나 사오 년이 지나고 난 후부터는 꿈속에서마저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되더란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사람은 산다.
감옥에서는 한 달에 세 권의 책만을 소지할 수 있었다. 장기수감이었고, 지방에 있기도 했으므로 가족이 책바라지를 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현실적인 고육지책으로 신영복은 동양고전을 읽기로 한다. 동양고전은 책 한 권을 갖고도 여러 달 읽을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때 그 독서의 결실이 지금 내 손에 있는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인 것이다.
고난이 영광이 되고 영화가 고난이 되는, 인생의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신영복의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8>, <엽서, 1993>, <나무야 나무야, 1996><더불어 숲, 2003><강의, 2004> 등이 있다. 수감 기간 중의 폭넓은 공부 덕분일까, 그의 문체는 쉽고 깊다. 깊어지지 않고서는 쉬울 수 없다더니,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 같다.
단아하고 기품있는 문체에 실려오는, 그의 사상의 깊이에 취한다. 문명과 사람에 대한 극진한 충심에 감동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 참 어른이 아닐 수 없다.
신영복이 허균에게 바친 헌사를 다시 그에게 돌리고자 한다.
‘그는 당대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지나간 한 줄기 미련없는 바람이었다.’

글씨

나는 신영복의 글씨를 보면 좋다. 그냥 좋다. 고루한 서체가 아니라 독특하기 그지없으며,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듯 역동적이다. 고아한 그의 문체에 비해 그의 서체는 아주 힘이 있다. 신영복의 글씨체를 어떤 사람은 '연대체' 혹은 ‘어깨동무체’ 라고 불렀다. <여럿이함께>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 모두가 뜻을 같이하여 동지애로 연대감을 북돋는 듯한 모습이라고 한다. 신영복의 사상에 어울리는 해석이다.

그림

신영복은 서예와 서화 외에도 자신의 책에 삽화를 직접 그린다. 그는 그림을 ‘그리워함’이라고 한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깜짝 놀랄 정도로 도회적이고 세련되었다. 다양한 방법을 실험하고 있으며,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보이는 것도 있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발랄한 감수성을 느끼며 가슴이 아팠다. 송두리째 앗긴 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결국 신영복은 시서화에 두루 일가견이 있는 藝人이자 全人이다. 동서양의 사상과 고전을 섭렵하여, 인격으로 육화한 진정한 사상가이다.



<2> 소감

넌센스 퀴즈 하나, ‘고전’이란 무엇인가? 정답은 ‘누구나 알고 있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다. 일리있는 꼬집음이다. 이번 주 필독서는 바로 그 고전에 슬며시 접해보는 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의’에서 내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부분은 1장 ‘서론’과 11장 ‘강의를 마치며’이다. 인구에 회자하는 고전의 향기보다는 저자 신영복의 향기를 더 많이 쐬었다는 얘기이다. 1장의, 저자가 고전을 읽게 된 동기와 고전강독의 의의는 감동적이었다. 저자는 고전 혹은 동양사상의 핵심을 관계, 현실주의, 자연의 세 가지로 압축하고 있는데, 그것을 풀어쓰는 자세가 너무도 극진하였다. 존대어로 간곡하게 풀어내는 사상의 깊이에 나는 매혹되었다. 말로만 듣던 ‘고전의 힘’을 만끽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정작 ‘공자님 말씀’에서 이렇다하게 감명을 받지는 못하였다. 자주 인용되는 귀절들이었기 때문에 아주 낯설지는 않았으며, ‘그저 좋은 얘기’로 들리지 마음에 품을 정도는 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따져 보자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원전의 중의적 의미 가 답답했다. 나는 간결한 직설법이 좋다. 오천 년을 이어 내려오기 위해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끌어다 쓸 수 있는 함축적 의미가 강해야 할 것이다. 지극히 원칙적이고 상징적인 어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수많은 사람들이 각주를 붙이고, 해석하고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같다. 아주 단순하고 상징적인 사례를 구체적인 현실로 만병통치처럼 끌어다 연결시키는 방법에 이끌리지 않았었다.

물론 신영복의 독법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다든지’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같이 주옥같은 표현이 즐비했다. 게다가 저자의 사상의 깊이와 실천가적 관점은 많은 암시를 주었다.

첫째, 저자는 1장에서 분명하게 밝혔듯이 ‘관계’라는 키워드를 시종일관 붙들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가 있으며, 인성이란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仁이란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 연구소의 기본 방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詩的 관점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내어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며, 주역 역시 관계론적인 판단 형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관계론’은 11장 불교사상에까지 이어진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다는 대목에서 조용한 감동이 밀려왔다. 華嚴 -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되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肉化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구소장님께서, 지은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자기계발서는 사기라고 말하는 부분이 생각난다. 신영복의 고전강독의 의미는 11장에서 계속 강조된다.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는 것이며 이러한 감성을 기르기 위해서, 우리 선조들도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 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포괄적인 시사를 준다. 우리나라 교육에서의 예술교육의 비중, 혹은 내가 장차 하고 싶어하는 문화학교의 이론적 토대, 그 이전에 나 자신의 문화적 이끌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고전을 너무 홀대해서 조금 민망한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좀 더 여유가 있을 때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3> 내가 저자라면

동양고전에는 처음 접하는 것이라서 책을 읽기 전에 무척 겁먹었는데, 알고보니 성공회대학교에서 저자가 행한 강의록이다. 대학생을 상대로 한 강의록이니, 일반인이 읽기에 무리가 없다. 더구나 신영복선생님처럼 지식과 실천이, 머리와 가슴이 융화된 저자가 안내해주는 고전산책이니, 신뢰가 갈 뿐 내가 무어라고 말할 수준이 되지를 않는다.

단지 하나, 입문서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 책 한 권으로 감히 고전을 읽어보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으며, 오히려 많은 연결고리와 연구과제를 넘겨받은 기분이다. 중화주의와 화엄경, 역사와 해체론에 대해 기본적인 관심이 생겼다. 나는 고전에 대한 입문서에서 고전에 대한 동기유발보다는, 부수적인 설명에서 더 자극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다른 독자는 이 입문서를 통해 보다 본격적으로 고전을 접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보다 심층적인 고전탐독을 할 수 있는 시리즈를 연결시켜, 입문서의 역할을 완수했으면 하는 생각은 든다.

<4> 책에서 인용한 부분

1장 서론
23-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29-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30-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34-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는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 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7-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도재이,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1-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42-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和는 쌀을 함께 먹는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2장 오래된 시와 언
56-<시경>의 시는 약 3천여 년 전의 세계 최고의 시입니다. 은말 주초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 중엽인 기원전 6세기 까지 약 600년간의 시와 가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8-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거짓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65-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1-1957년과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하방 운동의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무일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간부들의 주관주의와 관료주의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 운동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 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72-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81-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82-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
3장 <주역>의 관계론
90-<주역>은 귀납지이면서 동시에 연역지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94-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면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장 골목에 있건 가정에 있건 변함없이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존재론의 폭력적 단순성이라 할 만한 것이지요.
107-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이라 하였습니다. 죽간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110-경복궁 교태전은 바로 <주역>의 지천태괘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천지교태입니다.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입니다.
119-<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다.
128-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50-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밥그릇으로도 쓰고 국그릇으로도 쓴다고 우길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그릇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160-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163-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대륙적 소화력-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
173-공자는 사마우에게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까닭은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181-‘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182-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은 멀고 소이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183-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191-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199-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
5장 맹자의 義
215-많은 숙어들의 출전이 바로 <맹자>입니다. 연목구어, 오십보소백보, 농단, 호연지기, 인사무적, 항산항심 ...
219-여민동락 - 만약 백성들이 그와 함께 죽어 없어지기를 바랄 지경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대와 못, 아름다운 새와 짐승들이 있다고 한들 어찌 혼자서 그것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하는 안도감과 동감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 가는 것이지요.
249-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253-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 이 아니라 되돌아 가는 것<歸>입니다.
254-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5-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의지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며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9-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든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270-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71-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74-선도 미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시대에 갇혀 있고 사회적으로 갇혀 있지요. 초역사적이고 절대적인 미와 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281-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283-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289-불벌중책,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290-노동 교육 농민 환경 의료 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진정한 결집 방법이라고 생각하지요.
292-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의 배후로서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
301-맷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302-그 말더듬은 청중을 지배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 大辯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이 청자의 연상 세계를 확장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304-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 Progress is Simplification. ’라고 했습니다.

7장 장자의 소요
309-<장자>는 6만 5천여 자나 되는 대단히 방대한 책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10-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311-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314-<노자>의 서술방식은 사설을 최소한으로 하는 엄숙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되기 짝이 없는 가공과 전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318-‘유유소대자’ 즉 아직도 의지하는 바가 있다.
326-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327-노나라 교외에서 갈매기를 잡아 묘당에 모시고 구소의 음악과 태뢰의 요리로 대접했더니 3일만에 죽었다. 백락이 말을 잘 다루고, 도공이 점토를 잘 다루고, 목수가 나무를 잘 다룬다고 한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니 열에 둘 셋이 죽었다. 점토와 나무의 본성이 어찌 원과 곱자와 먹줄에 맞고자 하겠는가.
333-기계와 기계가 서로 응답하고 있는 참으로 황당한 상황 - 여론조사 전화에 응답기가 돌아감 - 기계와 기계가 서로 상대방을 고려하는 법 없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334-불치병자가 밥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343-빈 배 -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345-장자를 몽접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나비 꿈’때문입니다. ‘나비 꿈’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나비와 장자의 실재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346-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이 사실을 장자는 물화, 즉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347-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緣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華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349-혼돈과 일곱 구멍-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하고 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와 분별상이며, 개아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352-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354-나는 하늘과 땅을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56-나는 그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263-사상이란 독자성에 앞서 시대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366-맹자에 따르면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
382-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92-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395-비명이란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복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00-묵가는 좌파사상과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409-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14-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415-단연 계란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닭은 계란 속의 DNA가 자기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낸 생존 기계일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도 이 DNA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식욕과 성욕이 이 DNA의 활동인 것은 물론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 활동도 일정한 수의 화학적 및 전기적 반응의 총체적 활동을 일컫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DNA의 생존을 위한 장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422-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듯 둥글다.
424-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10장 법가와 천하 통일
431-법가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434-법가의 논리에 다르면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의를 말할 것이 아니라 利를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444-법가는 법 지상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지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공개성, 공정성, 그리고 개혁성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451-2 탁과 발, 책과 현실, 시장에 신발 사러 간 사람이 발의 본을 뜬 탁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탁은 믿을지언정 내 발은 믿을 수 없다.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457-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 교사巧詐가 졸성拙誠보다 못하다는 이 말의 뜻을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읽고 있습니다. 나는 <한비자>의 이 한 구절만으로도 한비자는 매우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 문장은 뛰어났지만 말은 더듬었다는 기록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11장 강의를 마치며
471-동양고전은 5천 년 동안 쌓여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473-화엄이란 꽃이 엄숙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왜 이 세계가 고해가 아니고 꽃으로 장식된 화엄의 세계인가에 대하여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474-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넓은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475-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따르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입니다. 칸트의 物 자체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478-불교 사상은 모든 생명과 금수초목은 물론이며 흙 한 줌, 돌멩이 한 개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화엄학이면서 동시에 모든 생명의 무상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화엄과 무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불교 속에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481-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 서구 사상이 도입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 이외에 문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亡이라 하지 않고 도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특히 불교사상은 개인주의적이며 잔사회적인 해체 사상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483-해탈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가 일종의 초윤리적이고 탈사회적인 의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탈에는 일체의 사회적 관점이 없습니다. 사회적 책무도 사회적 윤리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506-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 -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구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보다는 개인의 존재 조건을 고양하는 것이며 그 존재 조건들 간의 마찰과 충돌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09-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도 그래서 문사철과 나란히 시서화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10-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
511-‘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13-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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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4.12 23:05:58 *.85.148.132

오후 일만 하고 있어서, 시간이 많아 일찍일찍 리뷰를 올리고 있습니다만, 풀타임으로 바쁜 다른 연구원들에게 공연히 미안하네요.
원고에는 신영복님의 글씨와 그림을 넣었는데 입력이 안되는 것도 서운하구요. 어느새 수요일이 저물고 있네요. 한 주일의 후반부, 의미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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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옥균
2006.04.12 23:56:17 *.62.201.51
저는 예전에 한때 아주 오만한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모인 연구원들이 나보다 특별히 나아보이지도 않고 그저그런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점점 말이 없어 집니다. 그건 내가 그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나니 별로 할 말이 없어지는 게지요. 이번에 만난 2기 연구원들에게도 그런 기분을 느낍니다. 한선생님이 쓰신 글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노력을 하질 않고 남들만 바라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제 자신입니다. 올려주신 글 늘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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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6.04.13 08:56:20 *.57.36.18
한선생님 지난번 잘들어가셨지요
처음인상이 풋풋한 누님같았어요
정감있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저도 미국에 동년배의 누님이
있거든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저에게 카운트 펀치를 날리시는 군요
어제서야 겨우 저는 코리아니티를 올렸는데

언제 강의를 다읽으시고, 이 책은 왜이리도 저한테 두꺼운지
아참 아드님 만나서 영적 비즈니스 전해야 되거든요
만난 이후 연락드릴께요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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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아이드잭
2006.04.13 10:10:14 *.248.117.3
저자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 잘 봤습니다..
다른 연구원들을 배려하는 님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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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4.13 13:47:45 *.85.148.192

옥균님, 청년처럼 풋풋한 그 이미지 속에 어떤 열망을 숨기고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가끔 속내를 드러내주시지요. ^^;

명수님, 중후한 외모에서 쏟아져나오는 그 유머라니~~ 참 열심히 사시는 분 같아서 보기 좋으세요.

원아이드잭님, 나야말로 가지고 있는 패를 다 동원해서 최고의 패를 만들어야 되는 상황이거든요. 내가 그 아이디를 사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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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아이드잭
2006.04.13 15:55:42 *.248.117.3
저녁 식사 한번에 빌려 드리도록 하죠.. 팔 수는 없고..ㅋㅋ
사은품으로 열정 한박스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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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4.13 16:15:08 *.109.152.197
한명석선생님...
간단하면서도 섬세함이 베어 있는 문체가 읽기 쉬워 좋습니다.
확실히 한선생님의 글쓰기에는 삶의 연륜이 담겨있네요. 아직 얼마 읽지는 못했지만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인 굴원의 '이소'에서 다룬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에 대한 연륜 말입니다.
그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고민들에서 우러나오는 삶에 대한 진지함과 이상에 대한 동경을 한선생님의 글에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섬섬옥수같은 모성 특유의 마음을 깔고 거친 생명력으로 표출되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문체이고 글쓰기 형태라 주제 넘게 적어보았습니다.
나머지 시간들도 행복하게 마음 따뜻하게 보내세요. (합장,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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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4.15 12:13:20 *.229.28.221
부끄럽지만, 책보다 한선생님의 글을 먼저 접하게 되네요...
전 주말내내 집에 책읽을 예정입니다.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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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귀한자식
2006.04.19 00:59:34 *.229.28.221
연구원들이 올린 글을 다 읽고 다시 왔습니다.
또 봐도 좋은 글이네요.

그리고 조회수 200은 제가 달성하려 했는데..
안타깝습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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