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6년 4월 15일 23시 23분 등록
<저자 신영복>

쇠귀(牛耳) 신영복 선생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우리시대 최고의 수상록이라고 칭해질 만큼 세인의 관심을 불러 모았었다.

최근 출시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소주 “처음처럼”의 제호를 쓰시기도 했다..

선생은 한학과 서예에도 조예가 높으시며, 어둠속에서 빛나는 현대판 선비요,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며, 한국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래는 교수신문기자 이세영님의 신영복 선생의 소개글이다.

감옥이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20년의 청춘을 묻히고도 그는 그 아픔과 절망을 다시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맑은 물로 길어 올린다. 68년 육군 사관학교 교관 시절, 그는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이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통일혁명당은 그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재학시절 당시 민주적 성향을 지닌 써클 활동에서 만들게 된 지하조직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빛나는 것은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뿐만이 아니라 그가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길러낸 사색의 깊이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작은 엽서에 또 그것이 없을 때는 두 장씩 지급되는 휴지에 깨알같이 적어 가족들에게 보냈던 감옥 안에서의 단상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수필집으로 출간되고, 수정처럼 맑은 사유와 절제된 문장은 우리 시대 최고의 수상록이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에게 감옥이라는 공간은 결코 멈춰진 공간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한 복판으로서 역사와 현실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관념적으로 깨닫고 있던 민중들의 삶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그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잠재력과 신뢰를 배우게 된다. 이후 출간한 <나무야 나무야>나 <더불어 숲>에서도 단독자로서의 인간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존재의 의미에 대한 그의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연대체'로 불리는 그의 서예체 또한 그의 사상이 예술로 승화된 예로 이미 아마츄어의 경지를 넘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서 자신이 훌쩍 뛰어넘었던 젊음들을 만나고 있는 그는, 경쟁보다는 서로 같이 존재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의 깊고 진솔한 산문들은 시대와 자신 안의 어둠을 밝혀내고 다스리는 지혜로서 더욱 많은 이들에게 곱씹어지고 있다. (이상 이세영기자의 글)

감옥이라는 막힌 공간에서 신영복 선생이 한 사색은 이제 우리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따뜻함과 애틋함을 넘어 새로운 발견을 주고 있는 것이다.


<강의를 읽고 느낀 점>

강의를 읽으면서 내가 동양사상에 대해 그동안 너무나 무심하게 방치했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순자와 한비자등을 학창시절 많이 들었었지만 그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던 시간도 없었다. 그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라는 외부적 원인으로만 돌리기에는 너무나 나의 무지가 크다. 또

다행이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라는 책을 통해 맛보기라도 보았다는 것에 다소의 위안을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두뇌에 조각조각으로 있었던 퍼즐이 하나 둘씩 정열된다는 느낌은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의 하나였다.

내가 저자라면에도 언급을 할 테지만 약간의 부분에서는 나와 견해차가 큰 부분이 꽤있었지만 전체적인 책의 탄탄한 지혜와 해석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현재 중국에서 다시 공자사상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책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공자사상은 군자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치이념으로 수천년동안 검증되었고 그것이 아마도 중국에서 부활시키려는 이유일 것이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학기 강의의 내용을 일주일동안에 모두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강의라는 이책을 통해 동양사상의 재해석과 재발견을 얻어 새로운 지식의 지평을 확장하게 되어 큰 수확을 하나 더 거두어 들인 듯 하다.




<인상 깊었던 구절>

1.서론

<23>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27>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33>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공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36>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 라고 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에 대한 애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도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辵과 首의 회의문자입니다. 착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면 생각하는 것입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0> 일반적으로 동양사상의 특징으로서 성인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41> 德不孤 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43>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2장. 오래된 시와 언

<69> 몇천 년 전의 기록이 마치 며칠 전에 띄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이 중국사입니다.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1> 청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청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3장. 주역의 관계론
<87>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102>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하지 않으면 진미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130>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인식이라 하였습니다.

<131> 우리의 삶은 처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2>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제4장 논어

<144> 증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직막 구절에 ….. 전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51>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180> 인간의 사고가 두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적어도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라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는 사고가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185> 나라에 도가 있으면 빈천이 수치요, 나라에 도가 없으면 부귀가 수치이다.-태백-

<188>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경험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201>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산다.

<206> 논어는 인간관계론의 보고입니다.

<207>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

제5장 맹자

<212>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으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7>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 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사상의 핵심입니다.


<232>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243>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로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제6장 노자의 도와 자연

<253>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284>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
1)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2)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303>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간디-

<304> 노자의 이상국가론입니다. 규모가 작은 국가, soft-technology,반전 평화, 삶의 단순화등이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05>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제7장 장자의 소요

<309>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41> 그런 말 말아라.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342>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349>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 줍시다. “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제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73>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399>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404> 순자는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407>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414> 이 DNA의 운동은 자기의 존속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422>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내가 작가라면>

강의라는 책은 일단 고전의 어려움과 따분함을 작가 특유의 사상으로 쉽게 풀어 내었고 과거의 것이라고 묻어 두었던 우리의 사상에 대한 재해석의 기회를 마련했다는데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단락도 비교적 잘 나누어져 있어 읽기 교재로는 매우 잘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몇 군데에서 작가와의 다른 이견이 있어 내가 작가라면 구성했을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신영복선생님은 점치는 사람에 대해 겸손함이라는 것을 앞세워 상당히 긍정적으로 해석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의기 방자한 사람이라고 일반화 시켰다. 그러나 이 부분은 지나친 일반화이고 겸손에 대한 해석을 지나치게 확대한 감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오히려 책에서 빼는 것이 이 책을 더욱 값지게 만들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점을 보는 것은 운명론에 빠질 수 있는 경향이 있는 일반 대중들의 심리이며 이것은 개척정신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에 대한 부정으로 그다지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둘째 주역 부분에서 중간선호에 대한 개인선호도 마찬가지다. 군대에서 항상 듣는 이야기가 중간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군대사회의 발전정체는 큰 단점이라는 것을 경험한 나로서는 중간이라는 의미는 회색 즉 기회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작가 신영복 선생님은 인간관계라는 관계라는 면을 들어 중간을 선호한다고 했는데 글쎄 많은 비평이 있을 만한 부분인 듯 하다.

셋째, 논어 편에 나온 예말에 쉰살까지 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는 부분은 21세기 정보화 지식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후준비를 제대로 못해 노년을 불운하게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사회현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넷째, 맹자편에 나오는 지하철 사례의 경우도 매우 일반화시킨 부분이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수많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중에 모스크바 한 사람의 말과 잘아는 젊은이의 한 사람의 말로 일반화를 시켰기 때문에 그 결론이 매우 거북스러웠다. 따라서 이부분을 단지 이런 생각을 가진 모스크바 시민도 있었고, 한국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청년도 있었다는 점을 알려만 주었다면 더 객관적이지 않았겠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직막으로 궁금한 것은 신영복 선생의 경우 옥살이의 경험을 통해 지하철에서도 빨리 내릴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경험은 책의 연관되 내용을 떠나서라도 매우 흥미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부분에 대해 좀더 자세한 방법을 알려 주었다면 더 신빙성이 높아졌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IP *.86.5.24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