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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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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6일 22시 08분 등록
1. 저자 소개

남해를 바라보고 들었던 10분간의 강의 중에 연구원들의 독서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 나는 북리뷰 중에서 ‘내 안에 재창조된 생각’ 즉, 책을 읽고 난 후 자유롭게 펼쳐지는 생각을 적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저자에 대한 것은 약력을 간단하게 파악하거나 책 속에 비쳐진 저자의 모습을 조금 짐작하여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는 저자에 대한 부분을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고 싶었다. 저자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찾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고자 했다.

신영복 선생에 대한 정보를 뒤지다가 우연히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들만 몇 가지 훑어볼 생각이었으나 어느새 다섯 시간째 그의 홈페이지에 머무르고 있다. 간혹 신영복 선생에 대해 이 시대의 선비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맞는 것 같다. 문사철 시서화를 모두 익힌 것도 그러하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출소한 것이 1988년이니까 올해로 거의 18년 가까이 되었다. 감옥에서 20년을 보냈고 또 속세에 나와 대학강단에서 20년 가까이를 보낸 사람 치고는 저술 작품이 좀 적은 편이라고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아마 어떤 원칙이 있을 것이다. ‘강의’를 읽으면서 간혹 더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으나 지면이 모자란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의 홈페이지를 보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아주 잘 정제된 형태를 갖춰서 상대방에게 전달되었고, 깨달음과 앎의 깊이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두루두루 가르침이 되는 말과 사상들이었다. 만약에 그의 말과 생각이 어렵게 느껴 졌다면 아마 언어라는 도구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그의 감옥 생활이 궁금해졌다. 스스로가 자기 인생을 감옥 전후로 나눌 정도이니 그 안에서 어떤 연마가 이루어졌을지 몹시도 궁금해졌다. 아마 다음 주부터 피터 드러커의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부터 읽어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저서 중에 기행문도 있다. 하나는 국내 기행 수필인 ‘나무야 나무야’ 이고 또 하나는 해외 기행 수필인 ‘더불어 숲’이다. 20년 동안 얼마나 돌아다니고 싶었을까? 20년 동안 감옥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부른 노래가 ‘시냇물’이라는 동요란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그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곁에 있던 동료들이 착찹한 표정을 지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그는 강물 따라 우리나라 곳곳을 둘러보며 감탄하였고, 세계의 수십 개 도시를 둘러보며 넓은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 여유가 되는 대로 그의 기행문을 통해 그 뒤를 같이 밟아보려 한다.

여러 시간 동안 신영복 선생을 만나면서 왜 사부께서 저자를 알기 위해 최소 두 세시간을 투자하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신영복 선생의 한마디에서 그 의미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은 결국 자기가 겪은 삶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느 개인에 대한 이해는 그가 처하고 있는 처지와 그 개인을 함께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신영복 선생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에 있는 여러 글 중 ‘나의 대학생활’이라는 글이 있다. 연구원들 중 귀자님에게 먼저 추천해 주고 싶다. 상당히 길지만 그만큼 알차다.


**신영복 선생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구문으로 저자에 대한 얘기를 마친다.

- 학생들은 스스로 배웁니다. ‘가르치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싯귀가 생각납니다만, 저는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결국은 사람입니다. 서로를 일으켜 세워 ‘더불어’ 살려는 사람.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더불어’ 체온을 느끼고 함께 사람다운 삶을 애써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것이 희망 아니겠습니까. 모든 기쁨은 사람에게서 옵니다.

- 동양학은 목표지향성이 부족해 실천적 담론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여럿이 함께 걸어가는 그 속에 길이 생겨나게 마련"이라며 "인생이란 무엇을 성취하고 소유하기보다는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나라 5천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5천 년 동안 한(韓)민족이 비록 대륙을 지배하는 강성국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의 민족동질성을 지니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개의 축(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한민족의 세계와의 관계방식에 있어서의 2개의 축입니다. 그 하나는 주체성(主體性)입니다. 민족의 내부결속과 단결을 통하여 주체성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축은 개방성(開放性)입니다.

-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持己秋霜) 곧 남을 대할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기를 갖기는 가을서리처럼 매섭게 하라

- 교실과 책과 이론으로 배운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착각의 하나가 바로 언어로서 설득할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소위 <먹물>이 부족한 사람일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 자본주의는 거대한 물질적인 낭비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너무 딱딱한 얘기 같아서 제가 다른 얘기로 대신하지요. 제가 있었던 어느 교도소의 4동 상층은 복도가 길게 있고 방이 10개, 한 방에 15명 내지 20명이 수용되어 있었어요. 복도입구에는 세면장이 있습니다. 세면장은 콘크리트 물탱크가 하나 있고 벽에 수도꼭지가 6개 박혀 있었어요. 그런데 물 많이 쓴다고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다 빼버렸어요. 다 빼버리곤 스패너로 단단히 잠가 버렸어요. 손으로는 틀 수가 없게 돼 버렸지요. 그러고는 꼭지 두개만 겨놨어요. 그렇게 두개만 남겨놨는데, 당연히 아우성이죠. 그 많은 사람들이 바쁜 시간에 와서 세수하고, 양말 빨려니까 아우성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자 남아 있던 2개의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들은 손잡이 빼는 방법 모르죠. 드라이브로 윗 나사를 풀면 T자의 꼭대기부분이 쏙 빠져요. 없어진 손잡이를 다시 채워 놓으면 또 없어집니다. 그것만 있으면 저쪽에 잠가 놓은 먹통 수도꼭지에 가서 혼자 여유 있게 물을 쓸 수 있으니까 손잡이를 다시 채워놓기만 하면 없어져요. 그래서 나중에 제도가 바뀌었어요. 물 쓸 사람은 수도꼭지를 교도관에게 받아서 사용한 다음에는 반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어요. 이렇게 바뀌고 난 다음부터는 다른 곳의 수도꼭지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공장에 있는 것, 변소에 있는 것, 심지어 직원 식당에 있는 것, 어디든지 있는 수도꼭지는 다 없어지는 거예요. 교도소내의 철공소에서 만든 것도 나돌았어요. 결과적으로 우리 사동에는 참 많은 수도꼭지가 있었어요. 우리 방에만 해도 우리 방 공동으로 쓰는 수도꼭지가 하나 있고, 그 다음에 수검에서 뺏길 때를 대비해서 깊이 숨겨 놓은 비상용이 또 하나 있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 방에서 복도에 왔다갔다하는 좀 잘 나가는 친구의 개인용이 하나 있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두개, 세개를 가지고 있어서 신세진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어요. 각 방마다 사정이 비슷하다면 아마 한 방에 4개씩 그러니까 사동 전체에는 수도꼭지가 40개 정도가 있다고 계산됩니다. 그래도 물은 부족하고 아우성은 계속돼요. 저는 생각했어요 전체 150명이니까 150개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았어요. 비상용으로 하나씩 더 준다면 300개, 300개 있으면 물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았어요.
이것은 교도소의 물 얘기가 아니거든요. 수도꼭지 만드는 회사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요. 6개 대신에 300개씩이나 만들어 팔 수 있지요.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물질적인 낭비의 작은 예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구조 거론하자면 한정이 없습니다. 쏟아지는 신기술 신제품에서부터 수십억 달러가 소요되는 거대한 전략방위시스템(TMD)도 마찬가지고, 더구나 우리의 경우 분단구조가 거대한 낭비구조인 것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콤플렉스. 자기 것,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없는 상태. 이것은 가장 불행한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저는 그 사람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콤플렉스라고 생각해요, 합리적인 판단을 가장 심하게 왜곡시키는 것이 콤플렉스라고 생각해요. 이 콤플렉스는 평소에 단어 하나 사용하는데도 작용하고, 안경 고르는데도 작용하고, 헤어스타일, 브랜드 고르는 데도 어김없이 끼여듭니다. 3살부터 여든 살까지 계속 끼여들어요. 완고한 무쇠형틀입니다. 그래서 개인에 있어서는 최소한 자기가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 있어야 돼요, 고치지는 못할망정.


2. 내안에 재창조된 생각

이 책을 완전히 읽어 내는데 자그마치 6개월 정도가 걸렸다. 작년 7월에 처음 읽기 시작해서 올 1월에 마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게으른 독서인가. 게다가 또 넉 달이 지난 지금에야 독후감을 한 편 써내고 있다. 하지만 마냥 나의 게으름만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책의 논어 부분을 읽고 나서 ‘논어’ 전문을 직접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맹자 부분을 읽고 나서 그 맛깔 나는 논리 정연함을 ‘맹자’ 원문에서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게으른 독서가 되고 말았다고 핑계 아닌 핑계를 좀 대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한마디로 동양의 재발견이었고, 동양 인문학의 뿌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 포털이기도 했다. 동양에 사는 사람이 동양을 다시 발견했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더 늦기 전인 나이 서른 즈음에 이렇게 동양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인연을 만난 건 참으로 행운이다. 여지껏 살면서 여러 사상과 이론을 접해봤지만 공맹과 노장처럼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이 없었다. 새로운 것을 찾아냈을 때의 희열과는 다른 것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을 때의 자신감, 그리고 자부심, 이런 것들에서 비롯되는 벅참이다. 내가, 우리가, 또 우리 조상이 그리고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관계의 문화’에 대한 명백한 논거를 찾은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나에게 있어 동양고전은 인문학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영역이다. 2500년 전에 이미 이러한 기초를 세웠던 사상가들의 천재성도 놀랍지만 그 때의 사상이 지금에도 유효할 만큼 사회의 어떤 부분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 어떤 부분이란 곧 사람에 대한 것이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나는 왜 사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의 주변 사람에서부터 나와 잘 모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간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란 어떤 모습인가?
인간의 과학문명은 세기가 지날수록 ‘출발선을 옮겨가며’ 전진해 왔지만 위와 같은 인문학적인 질문은 처음 그 해답을 구하려 했던 시기의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답을 찾지 못하고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기 보다 인문학적 질문이 그만큼 난해하고 다양하여 하나의 답으로 귀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고, 이러한 질문은 원래 답을 구하기 보다는 그저 사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던져진 질문이기에 끝까지 인간과 함께 미완성으로 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2500년이나 곰삭은 동양고전에는 때에 따라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온갖 답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우려 내면 우려낼수록 진한 맛이 날 것이다. 그것이 동양 고전이 매력적인 이유이다.


3. 내안에 들어온 글들

<21>
1.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관계론의 화두를 걸어놓고 전과정을 진행합니다.

<23>
유럽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 가는 운동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운동의 표현입니다...근대 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28>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30>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오늘날에는 종교의 과학에 대한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과학이 자신의 대립면을 상실하고 무한 질주를 거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동양의 역사에는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동양에 대한 관심은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과도하게 축적된 초국적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권에서 분리되어 있던 동구권과 러시아 대륙에 이어서 다시 광범한 중국시장에 쏟는 관심, 이것이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공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42>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특을 법어나고 있습니다.

<44>
유가와 도가는 서로 견제하고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46>
동同은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의 논리를 화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과 서경
<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일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72>
무일無逸, 불편함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있게 하는 것

<82>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 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역
<88>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되어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92>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101>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 밖에 없습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여담이었습니다만, 자기의 능력을 키우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103>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23>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129>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매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31>
주역 독법에 잇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논어
<151>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대자본이 벌이고 있는 사업영역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크게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으로 작게는 다각적 경영, 문어발 확장이 그런 것이지요.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동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 시서화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154>
사회의 지배 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 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 원칙이었습니다...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입니다...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62>
논어의 이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5>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17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다시 말하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187>
윗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욕심이 날로 사라지고 지혜가 날로 밝아진다고 하였습니다...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189>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거짓말을 했을때 누구누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기억해둬야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도대체 감당이 불감당이지요.

<191>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195>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예를 들어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사史하다(사치스럽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의 성명서처럼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전개하는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질이 승하여 야野한(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00>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낙은 관계의 최고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맹자
<213>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명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에 비하여 사회성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219>
이것이 맹자의 유명한 여민동락與民同樂사상입니다. 주자가 주를 달아서 강조하고 있듯이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고 한 대목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 회사도 마찬가지

<232>
궁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활 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더 중요한 것은 활을 쏘는 동작 전체에 일관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궁도에서 이러한 것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궁도란 그 과정과 자세의 정진 여부가 중中, 부중不中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노자
<272>
이 장의 핵심개념은 무위입니다.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위가 핵심적인 주제가 됩니다. 굳이 하나를 고집할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美와 오惡, 善과 不善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275>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280>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282>
노자의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굽는' 이야기 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284>
노자의 물의 철학. 물은 최고 선과 같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300>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 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기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304>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動 보다는 정靜을, 만滿 보다는 허虛를, 교巧보다는 졸拙을 ,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데 있습니다.

장자
<329> - 고전에서 읽는 경영학 (1)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331>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가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333>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56>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묵자
<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390>
묵자의 절용이 과연 문화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문화 그 자체가 과연 인간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기업의 논리, 경쟁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규모와 소비 수준이 설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묵자의 절용 편은 소염론, 사과론과 함께 과잉생산과 대량 소비로 귀착될 수 밖에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구조를 조명하는 유력한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392>
항상 판단의 표준을 세우지 않으면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며 삼표가 바로 판단의 세가지 표준입니다. 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정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순자
<413> -성악편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426>
순자는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養)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은 이미 얘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8>
예로써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만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하며 이것이 예의 기원이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428> 난세의 징조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몀,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법가
<442>
대부는 예로 다스리고 서민은 형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며
<475>
불교에서 깨닫는다느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509>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과 나란히 시서화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것이죠...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몇가지 의유에 대하여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 되어야 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정을 기르는 것은 인성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515>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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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ictree
2006.04.17 01:24:51 *.52.85.117
책을 제대로 읽었네요. review가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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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4.17 15:53:11 *.229.28.221
저자에 대한 부분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긴~~시간 독서인만큼 글의 내공이 깊으시네요. 감탄~~

그리고 신영복님 홈피, 오늘내로 꼭 들어갑니다.
추천 감사해요, 보고나서 feel 받는대로 답글 남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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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6.04.17 22:01:53 *.116.34.204
이 책을 6개월에 걸쳐 읽었다면 잘 읽은 것이다. 좋다. 아마 평생 읽게될 것이다. 사기열전을 책상에 두고 읽기 시작한 지 여러해가 지났는데, 읽을 때 마다 다르다. 동양의 고전을 두고 평생 읽었던 선비들이 지루한 학문을 한 것이 아니다. 그때 마다 새로웠을 것이다. 물리가 터득되는 것이 그러하니 책읽는 재미가 어떠했겠는가 ! 무릎을 치며 기꺼워 하길 수 없이 했을 것이다. 그대의 글에서 그 재미가 느껴진다.

'내가 저자' 라면이 빠졌는데, 넣도록 하라. 두려워 하지 마라. 선생을 끝없이 빛나게 하는 학생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선비는 길을 닦아 후일 후학이 자기의 앞에서 걷게 하기 위해 애쓴다. 선생의 앞으로 가지 못하면 선생에게 죄스러운 제자가 된다. 궁금한 것을 묻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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