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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7일 23시 13분 등록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상가, 신영복...

내가 처음 신영복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책과 저자에 대한 기사를 읽고 신영복 선생님의 삶의 깊이와 사상에 대한 감명 때문에 손에 든 책이었다. 그리고 17년이 흘렀다. 선생님의 동양고전 독법서 ‘강의’를 손에 들고 해질녘의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선생님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고요함을 뚫고 솟아오른다.
나중에는 꿈속에서 조차도 바깥세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징역살이 20년의 세월과 그 후 18년의 세상살이가 그에게 쌓아놓은 것들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찾아뵙고 듣고 싶어진다.
올 8월이면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되는 선생님은 삶으로부터 ‘순수한 자유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선생님은 동양학은 목표지향성이 부족해 실천적 담론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여럿이 함께 걸어가는 그 속에 길이 생겨나게 마련”이라며 “인생은 무엇을 성취하고 소유하기 보다는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양고전 독법 ‘강의’의 출간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지성이자 최고의 산문가로 자리매김을 한 선생님은 문사철 시서화를 두루 겸비한 탁월한 사상가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생님의 희망론으로 저자 소개를 맺는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서로를 일으켜 세워 ‘더불어’ 살려는 사람.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더불어’ 체온을 느끼고 함께 사람다운 삶을 애써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것이 희망 아니겠습니까. 모든 기쁨은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족 하나.
선생님은 47세의 중년이 되어 감옥에서 나와 1년 후 6살 연하의 아내와 결혼을 하였고 지금은 고등학교 1년인 아들이 있다.


동양사상의 정수 ‘인간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주다.

‘오래된 미래’..... 스웨덴 출신의 여성학자 헬레나 노르베리가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인도의 라다크에서 발견한 인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빈약한 자원과 혹심한 기후에도 자연과의 조화와 가족적 공동체적 삶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곳이다.
‘강의’를 읽으며 ‘오래된 미래’를 떠올리는 것은 왜일까? 그랬다. ‘강의’는 어쩔 수 없이 동양인일 수밖에 없는 내게 정신적인 ‘오래된 미래’였다. 그래서 쉽사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집요하고 충실하게 진행된 서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교육을 받으며 오래전에 망각한 ‘동양적인 인간관계’를 나는 그곳에서 되찾을 수 있었다.
“동양적인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 결국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삶이다. 존재론적 사고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이 제 아무리 경쟁과 개별적 존재의 성공을 부추긴다 해도 결국 모든 희망은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곳곳에서 마음이 불편했다. 어쩔 수 없이 견제와 경쟁 대상인 동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진정성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자꾸만 책장을 빙빙 돌았다. 망각한 줄 알았던 그래서 내게 의식이 없는 줄 알았던 ‘정신적인 사상의 오래된 미래’가 가슴 깊이 숨겨 놓았던 불씨를 천천히 지펴왔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동양고전의 공부를 권유받았었다. 하지만 왠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고 고리타분하고 용도폐기 된 과거를 붙잡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한사코 손사래를 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중소기업 경영이라는 일과는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그런 나에게 보석같이 빛나는 동양의 고전은 ‘당신은 누구인가?’하고 연신 물어왔다.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하고 속삭여 왔다. 뒷걸음질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 앉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어렴풋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나의 가슴은 존재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서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지극히 동양적인 공동체적인 가슴을 지닌 상식적인 동양인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담 하나.
책을 덮으며 읊조린 말, “세간(世間)에서는 묵가(墨家)의 삶을 따르고 출세간(出世間)에서는 장자의 가(家)를 따르리라.”


‘강의’에서 찾은 모습들

1. 서론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사회의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 가는 운동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24)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 so)입니다.(38)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39)

2. 오래 된 시와 언

『시경』은 황하유역의 북방문학입니다. 북방문학의 특징은 사언체에 있고 사언체는 보행리듬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노동이나 생활의 리듬으로서 춤의 리듬이 육언체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에 담겨있는 思無邪(사무사)의 정서가 절실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6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77)

3. 『주역』의 관계론

『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88)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90)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날 수밖에 없습니다.(101)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102)
『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관계론적입니다.(106)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119)
최후의 궤가 완성궤가 아니라 미완성궤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28)
나는 이 미제궤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매카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된다고 믿습니다.(129)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130)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31)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고전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人(인)에 대한 담론이든 民(민)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41)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149)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和(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同(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同(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和(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63)
새로운 문명은 이 同(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和(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165)
子曰 德不孤 必有隣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166)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됩니다.(171)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 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가치와 자본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막지한 사회일 뿐입니다.(175)
우리는 경험주의 즉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學(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182)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183)
공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188)
교도소는 거짓말이 많은 곳입니다만 동시에 거짓말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곳입니다.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납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189)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거칠게 되고 형식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면 공동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품미학에서는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197)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198)
『논어』의 독자적 영역이라면 숱한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06)

5. 맹자의 義(의)

현자는 與民同樂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219)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223)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입니다.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245)

6. 노자의 도와 자연

유가사상은 서구사상과 마찬가지로 ‘進(진)’의 사상입니다. 인문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253)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체주의자로서의 노자가 생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57)
도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임은 물론이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노자의 道(도)와 名(명)은 서양의 사유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입니다.(270)
노자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될 수 없는 고정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념론적인 체계입니다. 그리고 노자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자연이야말로 최고·최선·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273)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276)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소비의 악순환이 자본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합니다.(280)
노자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285)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하방연대입니다.(289)

7. 장자의 소요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 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318)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을 강요하는 제국과 패권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335)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에 노닐게 함으로써 만물을 부리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아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340)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 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묵자는 종래 귀족 지배계층의 행동규범인 예학을 철저히 부정하고 유가의 덕치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인민의 협동적 연대와 경제적 상호이익을 통하여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려고 했습니다.(372)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장 큰 해악이 바로 서로 차별하는 교별자라고 묵자는 주장합니다.(377)
묵자는 전쟁의 모든 희생을 최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기층 민중의 대변자답게 전쟁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반대합니다.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379)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381)
마치 소비가 미덕이듯이 전쟁이 미덕이 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자본주의 발전과정은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이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소하는 방식이 냉전이든 열전이든 항상 전쟁에 의존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385)
묵자는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묵자의 ‘절용’편에 나오는 辭過論입니다. 과소비를 없애는 것이지요. 반전론의 대안이라 할 만합니다.(389)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층민중의 이상을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투철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대중 속에서 설교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였으며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400)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맹자의 성선설이 천성과 천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자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14)
우리가 본성을 선악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저급한 논의인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담론 환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것이 바로 인간본성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인간본성론 위에 구축하는 것이지요.(416)
순자의 이론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417)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까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424)

10. 법가와 천하통일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법가의 인식입니다.(433)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빈번한 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동력 있는 기능과 구조를 갖춘 강력한 정부가 요청되게 됩니다. 치자는 더 이상 성인이거나 군자일 필요가 없으며 그 대신 탁월한 전문성을 지녀야만 합니다.(445)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458)
개별적 가치나 배타적 성격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신조입니다.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460)

11. 강의를 마치며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476)
『대학』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입니다. 이러한 체계적 논리의 최상에 놓여 있는 것이 ‘명덕’입니다. 德(덕)은 ‘관계’입니다. 개인과 사회, 사회와 국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성의 자각과 실현이 궁극적으로는 세계평화의 기초인 동시에 한 개인의 수양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통일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492~493)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를 완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품성이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한 우리의 삶과 사회가 바람직한 것이 되기는 어렵지요.(493)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創新(창신)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504)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505)
자본주의의 체제가 양산하는 물질의 낭비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보다 근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당면한 문명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고전의 독법에 있어서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507)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508~509)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509)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510)


내가 저자라면.

'강의'를 읽고 내가 저자라면을 아무리 궁리해봐도 나의 얄팍한 앎으로 인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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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04.18 06:54:55 *.118.67.206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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