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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8일 07시 40분 등록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돌베게


<1>저자, 신영복에 대해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지난 1968년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988년 8월 15일, 20년 만에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사 교관을 하다가 구속되어 일반인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가족과 친지 들이 책으로 엮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89년부터 성공회대에 출강, 한국 사상가등을 강의하고 있다. 또 96년 말부터 여덟 차례에 걸쳐 23개국 47개 지역을 여행하며 부쳤던 ‘엽서’를 추려 <더불어 숲>이란 이름으로 2권의 책을 내었다.

“나의 경우 나간다는 희망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배운다는 사실이 훨씬 더 자신을 지탱하는데 큰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공장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한다든가 뜨거운 인간관계를 만든다든가 스스로의 관념적인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나는 체험을 하면서 그날그날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득한 희망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스스로를 견뎌내게 했습니다.”

3년 정도면 나갈 거라던 20대의 청년은 40대가 되어서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분단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이 당하는 수난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에서 엿본 저자>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129쪽)
신영복씨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으로 바꾸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어 간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감옥에서 20년 하고도 20일을 살아야 했던 저자의 말이다.
-그는 많이 겸손하다.
“이 강의도 하나의 골목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걸어가는 여러 골목 중의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돈하는 작은 계기로서 추체험되기 바라는 것이지요.”(297쪽)
-그러면서도 근본 구성원리를 논하려는 그는 일면 과감하다.
“나는 21세기 담론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45쪽)
그는 화(和)의 원리로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고자 한다.



<돋보기-통혁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이었다. 통혁당은 전위정당으로서의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당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79년까지 통혁당 재건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건 적발지역도 서울경기에서 호남과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는 특징을 갖는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에서는 통혁당을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이남간첩조직으로 몰아갔으나, 오늘날은 이남의 독자적인 전위정당 건설로 보고 있으며, 군부 치하에 피라미드 세포로 구성된 지하당으로 존재했다는 것과 통일을 주장하면서 친북성향을 띄었던 탓에 이북연계설의 의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슬퍼런 박정희 군부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던 4.19세대와 진보인사들도 이 사건을 빌미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158명이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신영복씨도 그 중 하나다.



<강의에 앞서>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강독에 전제되어 있다.” (22쪽)
“앞으로 화동(和同)논의는 지속적으로 심화시키도록 하겠다. 동(同)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다. 지배와 억압의 논리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다. 이를 화(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46쪽)
“고전 독법은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75쪽)






<2>강의, 눈으로 듣고 난 소감

부끄럽지만 동양 고전이라 해서 사씨 남정기, 구운몽 등을 생각해 냈다. 그런데 책을 펴니 노자, 공자, 맹자, 장자가 나온다. 순간 얼씨구나~했다. 이들의 사상은 이미 중 고등학교 도덕, 윤리시간에 배웠다. 교과서에 나오는 사상이라는 것이 앞머리 자르고, 뒤꼬리 자르고 남은 건 오로지 몸통뿐이었는데, 이 몸통마저 성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시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오로지 그들 사상의 주요 핵심만 소개해놓는다. 묵자는 겸애, 장자는 절대자유와 초월, 맹자는 사단과 의(義)라는 식이다. 어린마음에 선생님이 들려주는 토막설명으로 사상 중에서 어느 것이 마음에 든다, 옳은 것 같다는 나름의 판단을 하고 이를 토론했던 것이 기억에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수업내용이었지만, 당시엔 진지했었다.
신영복 교수는 전개될 내용과 방법에 있어 미리 양해를 구하고 들어간다. ‘강의’라서 매우 친절하다. 그의 고전독법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역지사지’의 원리다. 고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본이 많이 나오고 많은 이론적 분쟁이 일어나곤 하는데, 이 책을 통해 내가 안 진정한 고전독법은 ‘그 시대의 환경을 이해하고, 사상가를 이해하고, 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작업이 전제되고서야 가능 하는 것이다. 이런 ‘易地思之’ 가 없다면, 그야말로 나름의 독법이 될 뿐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 동양과 서양의 구성원리, 세계관등을 비교함으로써 고전독법에 이해를 높이려 하고 있다.
저자는 주역부터 법가사상까지 주요 동양 고전들을 쭉 훑으며 크게 ‘관계론’이란 동양의 특징과 고전을 통해서 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허위의식을 반성해 보고자 하였다. <코리아니티 경영>에서 거론되던 한국인의 특성이 이제는 더 깊게 동양 전체의 관점에서 거론되고 있다.
“인성이란 개별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42쪽)

책을 읽어가면서 글로벌리제이션의 이름아래 무수 히 파괴되었던 지역문명을 떠올렸다. 그것은 문화의 우월이 아니라 힘의 우월이었다. 우리의 과거를 포기해버릴 때 미래 역시 포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뿌리 없이 크는 나무는 없다.
중간 중간 지나치게 개인적 생각을 일반화시킨 사례가 보인다. 여담을 소개해 놓는데, 공감대 형성이 되지 않아서 왜 실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88 쪽에 나오는 점치는 사람에 대한 내용, 102쪽에 득위,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능력의 70% 의 자리가 가장 적당하다는 저자의 생각이 특히 공감이 가지 않았다.
전에 읽은 <대담>, <소유의 종말>에서 볼 수 있었던 날카로운 비판과 현세대에 대한 관찰이 배제된 채 피상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만 가지고 웃어른이 요새 젊은이들에게 일러주는 식의 말만으로 끝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저자의 고전에 대한 지식만큼 현대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생활에 대한 고려난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저자에게 종종 불안감을 느꼈다.
“옛말에 쉰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168쪽)

그러나 읽어 가면서 나의 생각이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고전을 빌려와 현 상황을 멋들어지게 해석해내고 있다. 또한 속도와 효율성,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사회에 대한 그의 표현이 매우 시적이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8쪽)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이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틀이다.” (87쪽)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그 모델을 현재와 현실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소위 건충의지가 바야흐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상황입니다. 설계도면을 파기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關係)론’입니다.” (23쪽)
오늘날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로 만남의 부재(不在)를 말하고 있다. 본다는 것은 만나고, 아는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만남이 없기 때문에 ‘불인인지심’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지식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지식도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현 소통방식을 개탄하고 있는 저자의 말위에 모든 것을 ‘접속권’하나로 설명하였던 제레미 리프킨이 오버 랩되기도 했다.
과정과 역사는 완벽히 망각되고 오로지 결과만을 보게 하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딜가나 ‘부자’에 대한 논의와 담론과 열망이 넘쳐난다.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부귀는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것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은 솔직히 현실에서 요원(遙遠)해 보인다.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란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도의 깨달음과 체득, 합일이 주는 동양의적가치와 정서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번 책에서 다 쉽지 않았지만 특히나 주역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장 공감한 것은 유가의 인문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 노자의 근본(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 화(和)의 원리였다.






<3>내가 ‘신영복’이라면

방대한 양인만큼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논의가 좀 진행된다는 싶으면 다른 논의로 옮겨가 버린다. 독자로서 뭔가 미적지근한 감이 있다. 결국 볼일을 보고 난 뒤 뒤처리는 독자의 몫인가?
장자 편에서 장자의 사상이 관념적 해방이며 주관적인 해방임을 부정할 수 없다‘ 는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더라면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재밌는 우화와 예시가 적절히 이어진 장자편이 가장 흥미로웠다.

말로 하는 특성상 책에 ‘곁다리 이야기’가 많다. 이것이 ‘강의’로 전달될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문자화 되어 책으로 읽을 땐 문제가 된다. 실마리를 붙들기 위해 시작한 이야기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집중을 방해하기도 했다. 현장감도 좋지만, 강의를 책으로 옮길 때 텍스트로서의 특성을 이해하여 좀더 고려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순자, 묵자, 법가의 사상이 뒤에 이어지고 있지만 초반에 저자가 동양 고전을 통해 이야기 하려던 관계론과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에서는 한걸음 물러선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크게 관련은 없으되, 한 시대를 풍미하고 많은 영향을 준 사상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저자가 초기의 주제에 충실하려는 의도를 유지했다면, (저자가 이미 아쉬움을 표시한 것처럼)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불교’를 더 심도 있게 다룰 지면을 확보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인상적인 글귀들

19-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23,24-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인 ‘존재론’은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원리를 갖는다. 동양의 관계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며,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승인한다.

28-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머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다. 궁극적으로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2-동양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다.

72-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7-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
165-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한다.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것은 여기에서 통한다.

186-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 자신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知)가 참된 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愚)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이다.

199-“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것만 못하다.”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이T는 경지로 풀이된다.
중요한 것은 지, 호, 낙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것이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이다.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사와 장(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 맹자의 의(義)]
232-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하는 차이는 대단히 크다. 이것은 운동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한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이다.
242-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이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다.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고, 서로 양보되고 스스로 삼가게 된다. 지속적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


[노자의 도와 자연]
255-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을 길러내고 꽃피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269-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다.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니다.

272-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

280-자본주의 경제는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이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워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 한다.


[장자의 소요]
318-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다.

319-대립적인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328-절대적인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깨달음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31-일과 놀이와 학습의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된다.
;기계로 인한 비인간화를 인간화 하려는 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 이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자본주의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334-“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장자)

335-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 반성은 불가능하다.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을 강요하는 제국과 패권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346-제(齊)란 세상의 시비와 진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고 망라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분별(分別)상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分別智)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356-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이고,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고기를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물이다.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68-묵가는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 완전히 현 시민운동가의 바람직한 전형이다.

383-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이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소하는 방식이 냉전이든 열전이든 항상 전쟁에 의존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대체로 10년 주기로 경제공황이 반복되어왔으며 대규모 전쟁역시 10년을 주기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의 전쟁사가 입증하고 있다.

[강의를 마치며]
474, 476-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된다.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5>책 속 신(新) 개념
*현실주의
이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지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이다. (34쪽)

*철학
서양: 지혜를 사랑하는 것.
진리란 삶 너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이다.
동양: 도(道), 글자 그대로 길.
우리 삶의 한 복판, 우리의 일상 속에 있으며 비종교적이다. (36,37쪽)

*인성
개별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 더 적절하다.
고로 인성을 쌓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 이를 통해 자기를 키우는 순서이다.
자기가 서기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 (42쪽)

*혁명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는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이다.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 현장이다.

*지(知)
“지(知)란 지인(知人)이다.”라는 단호한 선언이 실용적 의미로 왜소화되어서는 안된다.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고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나와 관계가 있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 될 수밖에 없다. 애정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한다. (174,175쪽)
;나는 그동안 상대방에게 나를 알리는데 나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다 쏟았다. 1차적인 것에만 치중했던 것이다. 관계를 쌍방향으로 열었으면 상대를 보고, 알려고 노력하려는 시도가 적었다. 내 인간관계가 내면보다 겉보기가 화려했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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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6.04.18 08:03:39 *.116.34.216
귀자의 글이 아주 빨리 자라고 있다. 제 키 만큼 크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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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6.04.19 00:00:04 *.148.138.235
'대담' 과 '소유의 종말' 과 연결시켜 '고전'과 '현대'에 대한 이해를 대비시킨 부분에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전에 대한 해석도 결국엔 현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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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4.19 00:26:12 *.229.28.221
쓸때는 내용이 뒤죽박죽돼서 정리는 포기하다시피 하며 썼는데,
써놓고 보니 글이 새롭네요.
지난 글이 형편없었던 탓이겠지요. 다아~ 사부님의 10분강의 덕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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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4.19 08:23:55 *.225.18.152

전국의 문화제를 다 아는 척하고 다니느라, 주말에 뚝딱 썼어도 '저력'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네요. 보폭 크겠다, 귀자씨는 멀리 갈 수 있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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