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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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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8일 23시 30분 등록
1.
결론을 미리 당겨 이야기한다면,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는 왠지 나처럼 이렇게 열 흘만에 후다닥- 읽어서는 안될 책이다.
내용을 이해하는 수준도 그렇지만, 그렇게 읽고 나서도 왠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고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무엇을 먹든 급하게 먹는 버릇 탓에 음식 맛을 잘 아는, 음미하며 맛을 보는 미식가들의 미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책을 펼쳐 든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한 번 읽어봐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겠다, 라는 것이다. 마치 오래 씹을 수록 여러 맛이 나고, 깊은 맛이 배어나는 그런 책이란 생각이 든다.

"남이 써놓은 책을 말만 바꾸어 내어놓는 데에도 참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쪼록 그분들의 연학(硏學)에 진경(進境)이 월등하시길 빌면서 남은 잉크를 말린다."(p.7)

2.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는 그동안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되어 왔던 강의를 정리하여 묶은 책이다.
'성공회대학교'는 최근 우리 사학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풍을 지닌 대학으로 알려져 왔다. 지난 권위주의 독재 시절 이에 저항하다 감옥살이한 지식인들이 주로 교수가 된 대학, 한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수들의 수형 기간을 전부 합치면 무려 “200년” 정도 된다는 풍설의 성공회대학교. 일반 대학에서라면 교수에 임용되기 어려울 법한 문제적 지식인들이 모여 교수로 재직하는 대학이 성공회대학교이다.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다. 궁극적으로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p.28)

3.
성공회대학교의 진보적 학풍의 중심엔 멘토(mentor)로서 신영복 선생이 있다. 멘토(mentor)란 상대에게 동기(motivate)를 부여하여 그 삶에 좋은 영향을 주는 존재를 말한다. 단순히 동기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훌륭한 정신적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멘토(mentor)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오딧세우스보다 연장자였던 친구 "멘토르"에서 유래된 말이다. 오딧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되자, 친구 멘토르에게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부탁한다. 오딧세우스가 20여년 동안 지중해를 떠돌자,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데, 아테나 여신은 멘토르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에게 조언을 해준다.
이후 '멘토르'는 충실하고 현명한 조언자이자 정신적 스승, 지향할 바를 제시해주는 역할 모델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윤기 ‘그리스 로마신화’ 중 일부 인용)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p.72)

신영복 선생은 "강의"를 비전공자가 비전공자를 위해 고전 강독 강의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 전공자들이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그 자신이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고전 독법이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고 고전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강의"는 전체적으로 신영복 선생의 입장과 그에 따른 문제의식이 고전을 선정하고, 그 안에서 예시하고 있는 문안을 통해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4.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랑을 깊이 깔고 있는 그의 글은 준엄한 동시에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다. 그 체온은 자신의 이론과 사상이 세상을 걸어가는 ‘실천’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천’을 밝히려는 부분이 때론 약간의 고집스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논어’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배우고 때때로 익힌다)’에서 ‘습(習)’을 실천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의 ‘사(思)’까지도 실천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당혹스럽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사이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무시하고 새로이 등장한 지식인 계층인 사(士)를 피지배계급으로 설정, 유가(儒家)를 ‘제3의 계급 사상’으로 본 부분은 지나친 도식화라는 이론의 여지를 남긴다"

(조선일보 2004/12/18)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것만 못하다.”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이T는 경지로 풀이된다. 중요한 것은 지, 호, 낙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것이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이다.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사와 장(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p.199)

5.
신영복 선생의 글은 많은 이들이 즐겨하는 문장으로 소문이 나있다.
반면에 특별히 어려운 문장이 아님에도 어렵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다. 이 책 전체에서 그런 지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서론 부분과 주역을 다룬 3장일 것이다.

서론은 "강의" 전체를 아우르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념을 정리하는 부분인데, 동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신영복 선생의 입장이 훌륭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읽는 족족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만큼 뛰어난 해석에, 머리를 조아리며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주역"편에 들어가면 분명히 쉬운 말로 풀이하고 있는 데도 워낙 "주역"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어선지 주눅이 들어 진도가 나가질 않았음을 고백한다.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하는 차이는 대단히 크다. 이것은 운동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한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이다." (p.232)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이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다.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고, 서로 양보되고 스스로 삼가게 된다. 지속적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 (p.242)

책을 읽다보니, 문득 저자는 그가 다룬 모든 고전에 일정한 무게 중심을 싣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 전체의 분량에서도 그렇고, 당신이 힘주어 다루고 있는 부분을 살피면 특히 "논어"와 "묵자"편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논어"야 워낙 고전의 지위란 측면에서도 그렇고, 당신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두 권의 책(자본론과 논어)이라고 밝히고 있는 탓이지만, "묵자"는 다소 뜻밖이었다. 한편으로는 신영복 선생다운 선택으로 보인다.

"묵가는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완전히 현 시민운동가의 바람직한 전형이다." (p.368)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이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소하는 방식이 냉전이든 열전이든 항상 전쟁에 의존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대체로 10년 주기로 경제공황이 반복되어왔으며 대규모 전쟁역시 10년을 주기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의 전쟁사가 입증하고 있다".(p.386)

"중국의 제자백가 가운데 유가의 카운터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은 누가 뭐래도 노자의 도가 사상이다. 흔히 서양문명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융합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때 헤브라이즘이 종교(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을 의미한다면, 헬레니즘은 과학을 의미한다. 서양 문명은 이 양자의 조화와 균형, 견제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에 비해 동양 사상은 인본주의적인 사상인 유가와 자연주의적 사상인 도가의 대립과 견제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가의 인본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반면에 도가는 이런 인본주의의 독선과 허구성을 비판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을 길러내고 꽃피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p.255)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다.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니다.(p.269)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p.272)

자본주의 경제는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이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워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 한다.(p.280)

그런 관점에서 "강의"는 유가와 도가란 주류 사상을 중심으로 고전을 다루고 있지만, 소위 비주류 사상인 "묵자, 순자, 한비자"도 함께 다룬다. 순자는 맹자와 더불어 유가의 학설이란 점에서 주류에 속하고, 한비자 역시 법가 사상을 대표해 천하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인정받을 수 있으나, 묵가는 제자백가 2000년의 중국 사상사 속에서도 비주류 가운데 비주류였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를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에 비해 배 가까운 분량으로 다룬다. 여기에 신영복 선생의 입장이 녹아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사마천의 "사기"에 단 24자로 기록된 묵자이지만 오늘날 묵자, 묵가의 사상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묵가의 사상적 복권은 실로 2000년만의 일인 것이다. 묵가의 사상이 이제야 빛을 볼 수 있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묵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유가에 의해 "사문의 난적"으로 지탄받아 왔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묵자의 사상이 오늘날의 좌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오랫동안 묵자는 묻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에 의해 "묵가의 하느님 사상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되어 부정적 평가를 받았고,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의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이 묵자와 묵가 사상에 대해 호의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맹자"와 "장자"를 빌어 와 "실천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며 묵가를 비판하는데, 이는 과거를 빌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 내지 과거 좌파적 실천의 각박함을 함께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p.334)


6.
신영복 선생은 고전을 역사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며 이를 과거의 텍스트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함께 모색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강구해야 할 오늘의 ‘살아 숨쉬는’ 텍스트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부분에서 신영복 선생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진의 시기는 통일과 건국의 과정이며 한의 시기는 이를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다스려 나가는 수성의 시기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법치와 덕치의 비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55)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141)

이상과 같은 부분들은 역사 해석이란 측면에서 시제의 관점, 현실적 조건에 따른 대응, 시대의 상황에 따른 평가 등이란 측면에서 유연한 해석을 가능케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객관은 관객의 역어란 애초의 신영복 선생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주관주의로 흐를 여지를 남겨둔다.

"내가 향원(鄕愿)을 싫어하는 것은 사이비(似而非)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주색을 싫어하는 것은 빨강색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향원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나로서는 이 구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감옥을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그 마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이 물론 문제이긴 합니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곳에나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p.191-193)

이 때 문제가 되는 두 가지는 좋고 나쁨의 기준을 누가 어떻게 세울 것이며, 이것이 주관적이지 않음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것이란 점이다. 과연, 다수의 민중은 항상 선량한것인가?
이는 신영복 선생이 자신이 "강의"를 통해 힘주어 주장하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란 말이 지닌 힘이자 동시에 한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수가 결코 선량하지 않았던 시대를 알고, 그런 한 시대를 살았다. 다수란 한정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깨달음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p.328)

7.
또한 이 책은 강의의 편의상 그랬겠지만 너무 도식적 구조를 많이 따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즉, 이분법을 피한다고 하면서도
서구:동양, 존재론: 관계론, 상품자본주의: 화동의 사회, 부정의 대상: 복원의 대상 과 같은 대립구도를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다.
신영복 선생은 이를 '당파성'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강의의 편의상이거나 또는 당파성의 필요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이런 이분법적 대립은 너무 용이한 길을 찾으려는 편의주의적 설명이라는 혐의를 받을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더 급박하게 필요한게 무었인가를 두고 내 견해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우리사회에 더 많은 의견을 낼 수 있는 '개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사회가 혼란스러운것은 결국 아직 우리사회가 압축근대의 암호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회 각 영역을 지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불합리성이 너무 많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대다수 개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시 부정적 관계론의 그림자이지 싹수없는 개인의 존재감이 아니지 않는가. 물론 고전이 현대에 요구하는 것이 개인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주의의 근원도 이러한 자기성찰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p.319)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페이지를 조금 할애해서 ‘우리나라의 사상에 대해서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즉, Coreanity 에 대한 성찰이 조금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 것이다. 지은이 스스로가 식민사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양고전을 택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고전도 그에 포함되어야 되지 않을까? 물론 중국 사상이 고대 동양사상의 원류이므로 우선이 되야 하고, 한국 사상까지 다루다 보면 흐름을 잃고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기 쉽지만, 역시나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된다.(p.473)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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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4.19 00:52:40 *.229.28.221
1번 내용 특히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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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4.19 08:51:30 *.225.18.152

"오늘은 뉴요커가 글을 더 잘 썼네" 하는 내 말에 딸애가 냉큼 이렇게 대꾸하네요. " 왜, 위기감 느껴?"

'재주'가 앞서 '정'이 가지 않던 이전의 글에 비해 오늘 글은 상당히 편안하네요. '고전'에 대한 애정일지, 아니면 연구원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 진 탓일지....?

신영복의 '관계론'이 재엽님이 말하는 '건강한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자아'를 가정하는 것일테니까요.

날카로운 지성이 숨기고 있는 감성은 어떤 것일지, 재엽님의 다양한 면모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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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6.04.19 22:36:22 *.148.138.182
한선생님,
다른 연구원분들께선 어떠셨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번 프로젝트는 저에게는 너무나도 힘겨웠답니다.커다란 산을 넘기전에 미리 겁을 먹은 느낌이랄까요-. 그러나 그 두려움은 산을 오리고 있는 도중에도 내내 저와 함께 했답니다.

책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한번 쓱- 읽어보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그 책에 대한 모독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읽는 동안 내내 들었거든요.
하지만, 이 책을 제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변화된 나의 모습으로 시선을 달리보니 처음의 암담함이 사라졌습니다.

'그래, 담번에 또 읽을때 그때 나름의 글을 써내려가자. 이번엔 이번에 느낀 만큼만 써 보자!' 라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관계론에 관해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신영복 선생께선 '독립된 자아'를 기반으로한 '관계론'을 말씀하신것이겠지요.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남과의 관계를 통해 본인의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다양한 개인의 목소리를 낼때, 올바른 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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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4.20 10:47:16 *.109.152.197
재엽님...
글 잘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바쁘신 일상속에서도 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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