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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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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9일 22시 21분 등록
저자소개

신영복.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 1966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 1968년 통일혁명단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1988년 8.15 특사로 가석방,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전공 교수

웹에서 검색하면 바로 뜨는 그의 소개이다.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 제목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 홈페이지에서 신영복 교수님의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을 추천한 것을 읽은 기억도 있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사실 몰랐다.
다음 과제이기 때문에 집어든 묵직한 이 책의 책날개를 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려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 사람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감옥에서 보낸 그 세월을, 그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그 20년을 보냈을까.
책에 언급되는 바와 같이 그는 책 3권만을 소지할 수 있는 감옥 안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는 동양고전을 선택했고, 그래서 비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감옥에서 보낸 세월동안 학문을 쌓고 서예를 한 그는 가석방 된 후 성공회대의 교수로 그 몸 자체가 역사가 되어 우리 앞에 섰다. 학생으로서 이 분의 강의를 직접 들었다면 와, 하고 감동받았을지도.

같은 사람의 소개를 여러 글로 읽으면 무엇 하겠는가. 검색하면 바로 뜨는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그의 책을 읽기를 바란다. 나처럼 그를 몰랐던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의 알게 된 것만으로 가치 있는 일이니.



책을 읽고-



이 책은 신영복 교수님이 성공회대에서 고전강독을 가르치신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서술자체도 강의 어투 그대로이고, 무엇보다 책의 서두가 아름다운 ‘시경’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책의 첫머리를 펴놓고 잠시 잔잔한 감동에 빠져들었다.

학창시절, 수학능력시험의 언어영역에 아름다운 시조가 나오면 시험을 치다말고 멍하게 감동받던 감성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조용하고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를 자랑하시던 문학 선생님의 수업시간, 양반이라 불리던 그 분의 나직한 목소리 덕에 그 시간은 수면시간이 되기 일쑤였다. 고등학교시절의 나는 착실하다고 할 수 없는 학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는 좀처럼 졸지 않는 학생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꾸벅꾸벅 잠든 조용한 문학 시간에, 문학 선생님과 눈을 마주쳐가며 수업을 들었던 그 시절의 평화로움이 기억에 남아있다.

아름다운 시로 시작하는 이 책의 첫 장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평화로운 감상에 젖어들 수 있었다. 그래서 잠깐 아주 행복했다. 물론, 이어지는 내용들은 그리 감상적으로 읽지 못했지만 말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이 어려운 단어들의 행진이란.

시경-주역-논어-맹자-노자-장자-묵자-순자-법가로 이어져 불교, 신유학, 대학 등의 간략한 설명으로 마무리 지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과는 다른 곳에 줄을 긋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를 정리하던 다른 책과 달리,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경이 무엇인지, 주역이 무엇인지, 노자가 왜 도덕경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설명에 줄긋고 있었다. 그렇다, 이 책은 나처럼 동양사상에 대해 고등학교 때 배운 얄팍한 지식만을 간신히 떠올리는 사람에게 앎의 기쁨을 주는 책이다. 얼핏 귀로만 들었던 지식들이 희미하게나마 구체화되는 느낌. 다시 한번, 대학 때 이 교수님을 모시고 강의를 들었다면 정말 기뻤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느 장인들 놀랍고 새롭지 않았으랴 만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과 가장 비슷한 철학은 장자다 싶으면서도 이상스레 묵자에 호감이 갔다.
존재 그 자체의 상태를 긍정하는 장자. 추구하는 그 무엇이 아닌 찰나의 미학, 전체가 부분인 듯 생에 걸터앉아 사는 그 가벼움이 좋으면서도, 하얀 살결로 자연을 즐기며 풍유를 읊을 것 같은 다른 사상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묵자- 검은 옷에 새까만 살결을 가진 묵가의 엄격한 눈빛이 보이는 듯 강렬했다. 아기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가 묵자일 것이라는 추측,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성경 속의 그가 동양에서 온 묵자일 거라는 상상, 이것이야말로 완전 cross-over 아닌가!
몸을 바쳐 전쟁을 막고도 그에 따른 대접을 받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그들, ‘실천 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격하였다' (p 399) 는 평을 받았다 하더라도, 오늘 날 이런 이들을 어디서 다시 찾아볼 수 있으랴.


이 책이 즐거웠지만, 수월했다고는 하지 않겠다. 한문이 힘든 사람으로, 읽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여태껏 과제였던 어떤 책이 안 그랬느냐만은)
하지만, 그 ‘한문’이 힘들어서 이름만 알고 있던 동양 철학자들을 책 한 권에서 만날 수 있었고, 약간이나마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했고 어떤 점이 다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동양 철학에 대해, 이제 아주 무식하지는 않다- 는 자기 위안도 함께.

참, 책을 읽으며 뿌듯했던 점 하나.
저자가 이 책에서 본인의 또 다른 저서인 ‘나무야 나무야’의 일절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다.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187)

아래는 4번째 과제였던 아니타 로딕의 ‘영적인 비즈니스’에 대한 독후감을 쓰면서 아니타 로딕의 홈페이지를 뒤지다가 바디샵이 로레알에 인수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입장을 표명한 글에서 로딕이 인용한 글귀이다.

'The reasonable woman adopts herself to the world; the unreasonable one persists in trying to adapt the world to herself. Therefore all progress depends on the unreasonable women' -Georgina Bernardette Shaw

연구원 과제를 수행하면서, 이 책 저 책에서 공통점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식은, 지혜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는 모양이다.


저자에게 바라는 점


나의 고등학교 한문 성적은 수-가-가-가-가-가 였다. 중학교 시절, 횟수가 많은 한문 글자를 좀처럼 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한문은 내게 항상 읽을 수 없는 복잡한 획의 그림문자이다.
동양 고전을 읽는 책인 만큼 이 책의 매 장의 시작은 한문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 대부분의 뜻을 풀이해 놓았지만, 직역은 거의 없이 해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무엇보다 음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나처럼 한문에 무식한 독자는 처음에는 해석을 보고 글자를 끼워 맞춰 음을 달아놓았지만, 나중에는 귀찮아져서 그냥 한문 부분은 뛰어넘고 해석만 읽었다. 어쩌겠는가. 읽을 수가 없는데.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저자가 모른 것 같지는 않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마음에 드는 구절을 외우다보면 자연스레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한문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를 매 시간 수강하는 학생의 신분이었다면 학점을 위해서라도 한문공부를 열심히 했을 테지만, 교수님의 강의를 책으로 엉성하게 접한 나 같은 독자는 그 한문공부를 따로 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해서 책을 읽는데 좀 힘들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제발 음이라도 달아주셨다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매 장을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이 게으른 독자의 불평.

그의 홈페이지를 떠돌다 느낀 것이지만, 저자는 ‘글씨’를 참으로 중요시하는 사람인 것 같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다’라고 말씀하시는듯한데, 학창시절부터 ‘그림문자’로 불리며 악필 졸필을 자랑하는 나로서는 내심 뜨끔하면서도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에 쓰는 글씨와 서예를 구분 지으신다면 다행이지만, 평소 글씨마저 인격의 대변체라고 하신다면, 글씨 잘 쓰는 유영철은 어쩌실 건데요, 하겠다. 너무 그렇게 일반화하면 섭섭하다. 이 책에 독일 젊은이들에 비해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 안하는 한국 젊은이가 되어버린 것도 그렇고, 그 이유가 지하철에서 머무는 시간이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 짧은 20분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도 지나친 일반화가 아닌가 싶다. 15분 동안 지하철을 타더라도 노인이 앞에 서면 자리를 양보하는 게 대부분의 한국 젊은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 더 하자면,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을 한 번에 간략하게 설명하신 마지막 장 ‘강의를 마치며’는 정말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시간의 촉박도 촉박이지만, 간략하게 설명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내용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설명이 아쉬우셨다면, 강의 2권을 내셔도 감사하게 읽겠습니다, 라고 하겠다.




연구원 과제를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부분이 이런 것이었다. 시간에 쫓겨 만족스럽게 책 한권을 두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연구원 과제를 위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은 누구보다 나를 위해 책을 소화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인데, 이 책은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라도 마무리 짓지 않으면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 일단 끝낸다.

아. 죄책감은 갖고 싶지 않다. 단지 반성.


책 속에서-


강의-나의 동양 고전 독법

책을 내면서
p 6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장 서론
p21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서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p 23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p 29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러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p30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
p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36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에 대한 애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안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 가운데에 있고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p 37 어원이나 용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도는 그것이 철학이든 도덕이든 어느 경우에나 도로와 길의 의미입니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p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p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p 41 '논어에 ‘덕불고 필유린’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 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그래서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인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p 43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의 창조에 있습니다....노장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인본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p 46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장 오래된 시와 언
p 52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p 62 공자도 그 나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하였지요. ‘악여정통’이라는 것이지요. 음악과 정치는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오늘의 서울에 와서 음악을 듣고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p 67 '서경‘은 2제 3왕의 주고받은 언, 즉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p 68 '서경’에는 수많은 정치적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정통하게 되면 정치력을 높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p 70 군다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p 72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p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3장 주역의 관계론
p 87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 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는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p 88 '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중에 점을 쳐본 사람은 많겠지만 ’주역‘ 점을 쳐 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 는 부류의 의기 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p 89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 명, 점으로 나눕니다. 상은 과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p 90 의난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주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학의 축제인 대동체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 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p 106 ..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관계론적입니다. 효과 그 효과 처한 자리와의 관계, 효와 효의 관계 즉 응과 비, 그리고 괘와 괘의 관계 등 ‘관계’가 판단과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p 130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댈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여린 상황은 담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구하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p 131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모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131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p 133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p 137 ‘논어’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공자어록입니다. ‘노자’에는 노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이 ‘노자’와 ‘논어’의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148 새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나는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새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미래 담론의 기본 구도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p 149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저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p 150 君子不器
여기서 그릇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p 151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대자본이 벌이고 있는 사업 영역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크게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으로 작게는 다각적 경영, 문어발 확장이 그런 것이지요.
p 154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지요.
p 155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무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p 157 대체로 미인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다소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입니다...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칭찬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이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p 159 미美는 글자 그대로 羊자와 大자의 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언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p 170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라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 ‘ 군사를 버려라’. ‘만약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p 172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p 199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5장 맹자의 의
p 211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춘추시대의 군주는 지배 영역도 협소하고 전통의 구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이에 비하여 전국시대의 군주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였습니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국가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음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합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습니다. 군주는 사방에서 정치 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국가 경영에 관한 고견을 듣는 것이 상례화되어 조정은 일종의 사교장이었습니다. 맹자도 그중의 한사람이지만 제자백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학자들의 총칭입니다.
맹자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물론 다른 모든 사상가의 이해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특히 이러한 시대적 특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경해는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239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유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수오지심, 즉 치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p 248 석봉의 어머님은 매우 훌륭한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만을 만들어주는 맹모에 비해서도 훨씬 뛰어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를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p 249 '맹자‘의 ’이루 상離婁上‘의 일절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 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p 253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53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p 254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위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례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의 논리가 그것이지요. 여기서 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p 256 유가 사상은 법가에 비하여 비폭력적 지배 방식을 취하고 피지배층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매우 유화적인 정치 과정을 정착시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은 본질에 있어서 폭력적 지배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p 257 ‘....공자가 찾아와 예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는데 노자는 훌륭한 상인이라면 물건을 깊이 숨겨두고 아무것도 없는 듯 하듯이 군자는 큰 덕이 있더라고 용모는 어리석게 보이는 법이라고 하면서 교기, 다욕, 태색, 음지를 버리라고 충고하였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자의 충고는 공자의 인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p 258 '노자‘는 81장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p 269 도를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박은 참’이라는 것이지요.(?) ‘참도’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 270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지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노자의 도와 명에 관한 제1장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p 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p 283 '노자‘ 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입니다.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과 피세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改世)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
p 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p 295 가장 이상적인 정치 즉 태상의 정치는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p 297 대학교 1,2학년은 고3 터널을 빠져나온 직후의 짧은 반동이기도 하지만 그 세대는 대중문화와 상품미학에 상당히 깊이 포섭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4학년이 되면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나는 해마다 신입생 몇 사람을 정해서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가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집단적으로 터득해갑니다.
p 297 노자의 자연은 ‘nature'가 아닙니다. 서구적 개념의 자연은 문명 이전의 야만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광물이나 목재를 얻는 자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나 자연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노자의 자연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7장 장자의 소요
p 310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p 311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 1편 ‘소요유’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자유를 추구하던 일민들의 경물중생, 즉 개인주의적 생명 존중론이 양주학파에서 크게 고조되었는데 이 양주학파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장자’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생명의 물리적 보존이나 생물학적 보존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뜻입니다. 무하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314 노자는 도의 존재성을 전제합니다. 도를 모든 유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p 315..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세계, 즉 ‘정신적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327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이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며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p 332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은 사람과 기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여러분은 주관적인 것은 사람이고 기계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에는 깜깜한 땅속에서 뿌리로만 견디며 봄을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기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일을 못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자기 식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주변 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습니다.
p 342 목수 장석과 도토리나무의 이야기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 가 있겠는가?
p 343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p 346 세상의 시비와 진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고 망라하는 것이 제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과 통일에 관한 것이며 앞서 읽은 방생지설에서 이야기한 모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전 독법인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354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을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역할에 지나지 않지요.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이지요.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p 366 묵가 집단이 이처럼 헌신적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몸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누구나 깡말랐고 살갗 또한 먹빛처럼 검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묵이란 별명이 붙었다고도 했습니다. ‘장자’에서도 묵가를 평하여 ‘살아서는 죽도록 일만 하고 죽어서도 후한 장례 또한 박장에 만족해야 했으니, 그 길은 너무나 각박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묵자는 다른 학파의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충 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p 376 ....묵자의 하느님 사상은 기독교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사랑이듯이 목자의 하느님 역시 겸애이기 때문입니다. 묵자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때가 기원전 100년경이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온 동방박사가 망명묵가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p 398 '논어‘에도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섭공과 공자의 대화입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에 대쪽같이 곧은 사람으로 직궁이 있습니다.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그가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의 곧은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그리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감추어줍니다.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0 399 묵자에 대한 ‘장자’의 평가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의 재사라 하겠다.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p 405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전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P 409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문 세계의 창조와 관련하여 순자는 결국 유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P 413 순자의 성악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며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위의 글에 이어서 순자는, 사람은 사법의 도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자가 성악설을 예의 근거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425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와 인심입니다. 천도와 천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가 아니라 사람의 도일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본주의가 감상적으로 피력되지 않고 냉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P 428 ‘악론’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10장 법가와 천하통일

P 431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P 442 주 이래로 규제 방식에는 예와 형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공경대부와 같은 귀족들은 예로 다스리고,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는 서민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 이것이 법 집행의 원칙이었습니다. 법가는 주대의 이러한 예와 형의 구분을 없앱니다.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유가는 반대로 서민을 올려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써 다스리자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의 이러한 방식을 현실을 외면한 백면서생들의 주장이라 조소하는 한편, 유가는 법가적 방식을 비열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법가의 법치 원칙은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 법제와 구별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법가의 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법가 비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 계층이 법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야 합니다. 입법과 사법을 동시에 장악하고, 금과 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는 예로 다스리고 서민은 형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 451 탁과 발, 책과 현실
‘장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신반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나로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이것은 물론 제자백가의 공리공담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이나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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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2 07:13:01 *.116.34.229
"지식은, 지혜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는 모양이다."
그렇다.

병속에 갇혀있다 잔에 따라진 포도주 처럼 글이 풀리는 듯 하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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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 사람, 숨겨진 힘. [3] 이종승 2006.05.02 1980
468 숨겨진 힘은 사람이었다.` [2] 김귀자 2006.05.01 2031
467 숨겨진 힘.. 사람 file [1] 꿈꾸는간디 2006.05.01 2156
466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읽고나서.. 도명수 2006.05.01 2259
465 <7> 미래 경영 (피터 드러커) 정경빈 2006.04.30 2454
464 고미숙의 코뮌실험 -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3] 한명석 2006.04.28 3041
463 사람, 숨겨진 힘 [2] 한명석 2006.04.26 2361
462 The Essential Drucker Vol. 1 박소정 2006.04.26 2233
461 한명의 구경꾼 탄생, <자서전> [2] [1] 김귀자 2006.04.25 2179
460 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드러커) // 쓰는중 강미영 2006.04.25 2169
459 (Managing in the) Next Society 이종승 2006.04.24 2051
458 The Effective Executive(피터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 오성민 2006.04.24 3007
457 프로페셔널의 조건 (20060424) 이미경 2006.04.24 1824
456 '피터드러커 북클럽'- '피터드러커 자서전'을 읽고 [4] 정재엽 2006.04.20 2959
455 피터 드러커의 '프로페셔널의 조건' 한명석 2006.04.20 2270
» (6)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1] 박소정 2006.04.19 2371
453 -->[re]신영복의 '나의 대학시절' [3] 귀한자식 2006.04.19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