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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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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28일 11시 22분 등록

약 8년 전 고미숙은 대학교수 임용에서 거부당한 박사 실업자였다. 그녀는 단지 학문이 좋아서라면 반드시 대학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아래 수유리에 20평 규모의 개인 연구실을 공개하였다. 그 연구실은 80년대 운동권 이론의 명망가 이진경, 워킹 니체 고병권 팀과 합류하여 원남동 3층 건물을 통채로 사용하는 ‘지식인 게릴라’ 연구공간 수유+너머로 발전하였다. 5월 필독서에 포함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의 저자 고병권이 현재 공동대표이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는 고미숙이 8년여의 연구소 변천사에 대해 쓴 책이다.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있지만, 전혀 학문적이지 않고 생활스케치에 가까운 소탈한 수다체이다. 사소한 일상생활도 철학과 논리로 뒷받침되고 있기는 하다. 청소에 대한 고미숙의 철학을 들어보자.

‘코뮌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공간이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야 외부를 향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움과 열림은 같은 표현이라 해도 좋다. 그리고 비어 있음의 표현이 바로 청결이다. 청결해야만 열림, 곧 변이가 가능하다.
공간을 단지 하나의 기능으로만 쓴다면 정말 낭비다. 하지만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면 공간은 두 배, 세 배로 확장된다. 내가 죽어라고 청소를 해 댄 것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145쪽

그래서 연구소 식구들은 돌아가며 청소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식을 하다 보니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시작한 공동식사가 이제는 ‘밥상 공동체’로 널리 알려졌다.
1층은 식당-강당-체육관을 겸한다. 탁구대에 식탁보를 씌워 식탁으로 쓰고 대규모 강의실로 쓰기도 한다. 물론 탁구대로도 쓴다. ‘일상이 뒤섞여야 명실상부한 배움이 가능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밥상과 탁구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건물의 2층은 카페, 세미나실, 영화관람실, 갤러리, 서점으로 이용된다. 3층은 공부방과 요가실. 책상의 좌석 독점은 금물. 장기간 많은 책을 펼쳐놓고 글을 써야하는 회원에겐 집필실이란 이름의 개인 책상을 제공한다. 논문이나 저술을 생산해야만 집필실을 나올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기에 섣불리 개인석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옥상에서는 제기를 찬다. 어느 해 명절 창경궁에서 얻어 온 제기가 이제 ‘일용할 운동’이 되어 갖가지 기술을 개발한 ‘소림제기’로까지 발전하였다.

정회원만 60명. 이 밖에 3~4개월 단위로 개설되는 각종 강좌와 세미나에 평균 100여명의 비정규 회원이 참여하고 있다. 순전히 ‘앎’의 기쁨을 찾아 온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탐구열에 따라 강좌가 새끼를 친다. 전문성이라는 이름 아래 고립을 자초하고 현실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에 의한 학문간 ‘가로지르기’, 이른바 ‘횡단’이 이루어진다.

‘우리 연구실의 세미나는 한국 근대계몽기를 대상으로 하는 자료 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개화기 신문자료를 읽다 보면, 누구나 문학 텍스트에 한정해서는 도저히 이 시기의 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 데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교, 철학, 사상사 등 근대성 담론의 영역 전반으로 시선이 확장되고, 다른 한편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탐사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적 지평을 떠나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어와 한문, 중국어 등과 관련된 다양한 세미나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성론은 전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동반해야만 비로소 심층적 탐사가 가능한 바, 중세사상사나 들뢰즈/가타리, 푸코 등 프랑스 현대철학과의 접속은 이렇게 해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을 하던 이들은 점차 동양적 사유로 눈을 돌리게 되고, 고전과 한문학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들은 서구 탈근대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212쪽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면서도 ‘앎의 기쁨’이 사라진 우리네 대학 풍경을 생각해 본다면 대단한 도발이요, 성과이지만 슬프게도 이제 겨우 기본을 찾은 것이기도 하다, 무릇 학문이란 저렇듯 자발적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기쁨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는 그들의 에너지이다. 공동식사와 카페, 문호리 텃밭을 지나 이제 ‘인터 코뮌’을 꿈꾸는 그들, 그들의 직관적인 열정과 실험정신은 인문학 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의 양식에도 하나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학문’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나름대로 꾸준히 책을 읽어 왔지만 들뢰즈/가타리, 푸코, 라캉... 이 나오면 나와는 상관없으며 재미없고 단지 현학적인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그러나 학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앎의 기쁨’이고, 일상에 헌신해야 하며 나아가 지속적인 ‘횡단’을 통해 끊임없이 ‘경계’를 허무는 ‘유목민적인 - 노마드적인’ 자유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들뢰즈/가타리를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의 발견은 ‘웃음의 힘’이다. 수유+너머에서는 성, 학연, 지연, 세대, 지위에서 차별이 없는 대신 딱 하나 ‘유머의 능력’에서는 차별을 받는다고 고미숙은 주장한다.
어떤 상처와 기억을 갖고 있건, 어떤 유형이건 코뮌이 살아 움직이려면 ‘유머러스’해야 된다고, 웃음이야말로 일상의 축제를 만들어내는 기초이자 원동력이라고.

여기에서 우리 홈페이지 ‘살다보면’ 코너 112번 구소장님의 ‘말 타다 생긴 일들 - 좀 웃기는 몽골 이야기’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좋은 삶’을 이루는 요소는 그렇게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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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질주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말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바람 같이 멋진 일이지

우리는 흥분하고
조금 두려워하며
말 잔등 위에 올라탔어
날 떨어뜨리지 말아라
날 걷어차지도 말아라

말잡이들은 고삐를 넘겨주고
또 하나의 긴 고삐를 쥐고
우리 옆에 섰지
말 잔등 위에서 우리는 가슴을 펴고
멀리 초원의 끝을 보며
“ 츄 - , 츄어 “라고 그들처럼 곧 외치게 되길 바랐어
그러면 말들이 쏜살 같이 달려나가거든
그들은 이랴 라고 하지 않아

말은 화살같이 달리고
말 잔등 위에서 다리로 버티고 서서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 들고
슬그머니 엎드려 굽힌 채
어느 덧 우리도 기수가 되어 있었지

배움과 시간은
우리가 달릴 수 있게 해 주었어
두려움을 없애주고
약간의 요령을 터득하게 하고
말을 어루만져 쓰다듬게 하고
목소리에 주인의 근엄함을 담게 만들었지

말들은 당당함에만 복종하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동안은
우리를 태워줄 뿐 따르지 않아
우리가 고삐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빡빡이 움켜 쥘 수도 강물처럼 풀어 흐르게 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면
네 굽을 놓아 달릴 때 오히려 바람 탄 새처럼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우릴 따르지
그러면 그때 같이 놀 수 있지
바람을 가르는 바람갈이 놀이를 할 수 있지




승마 일지

그는 말을 타다
꽁지 벼를 다쳤어
엉덩이가 양쪽으로 동전 만큼씩 까졌어
너무 아파서 잠도 잘 수 없었어

그러나 그만둘 수 없었어
쪽도 팔리고 더욱이
너무 재밌어
어떻게라도 계속 타야만 했어

여자들이 그에게 가져 온 생리대를 다 줬어
난 생리대를 꽁지 뼈에 차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봤어
그 위에 성인용 종이 기저귀도 찼어
그리고 웃으며 탔어

또 한 남자는 말에서 떨어졌어
그러나 아주 가벼운 낙마였지
말이 천천히 회전하는데
모래밭에 덜퍽 떨어졌어
아픈가 안아픈가 실험해 보기 위한 낙마 같았어
다음날 아침에 약간 허리가 결렸데

또 다른 한 남자도 말에서 떨어졌어
떨어질 때 이번엔 모두 놀랐어
말이 두더지 구멍에 앞발이 빠져 발굽이 꺾였어
기우뚱 놀란 말이 제멋대로 달렸어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떨어졌는 데
바닥이 하필이면 바위였어
큰일났다 모두 너무 놀랬어
다행히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어
멀쩡한 것은 참 기적 같은 일이었어

여섯 명 여자들은 하나도 안 떨어졌어
참 이상한 일이지
말타기엔 여자들이 더 좋은 것 같아
가슴이 흔들려서 왕가슴 되고
(정말 몽골 여자 치고 작은 가슴 보질 못했어)
알이 없어 알도 끼지 않고
아, 초보 남자들은 말 잔등 위에서
엇박자 덜컥거릴 때 하마트면 알이 낄 뻔 하거든
조심하지 않으면 눈물이 찔끔 나거든

그리하여 여행이 끝날 때 쯤
우리들은 바람처럼 달릴 수 있게 되었어
참 재밌었어





테를지에서 비를 만나다

테를지는 땅이 좋아
초원이 비단 같아
뒤에 산을 등지고
구릉처럼 살짝 언덕진 초원 위에
둥근 겔들 모여있는 멋진 캠프장이 있어

짐을 풀자마자
말을 탔어
우린 승마여행을 떠나 온 것이니까
이젠 말 맛을 조금 알거든

모두 올라 타
기마병처럼 가슴 펴고 말과 함께 나아갔지
그만 그녀의 말 하나가
몽골 말잡이 앞을 건너 뛰어 달리기 시작했어
아, 저런 저런
그러나 그녀는 아주 침착했지
놓친 고삐를 다시 잡고
멋지게 말을 세웠어
그 후 그녀는 애마부인이라 불리게 되었지

거북 바위를 지나
멀리 사원이 보이는 산 속에서
갑자기 소나기 쏟아져
잎새 무성한 나무 아래
오르르 모여 떨고 있었지
그러나 모두 산 속 참새 떼처럼 지저귀고 있었어

왜 그랬는 지 몰라
그저 즐거웠거든
작은 일에 웃고
느닷없는 비에 몸을 맡기고
물론 처음엔 안 맞을려고 버티긴 했지만
그건 문명을 벗어난 일종의 탈출 과정이었어
우린 수없이 많은 감탄을 되찾았어

돈도 걱정도
사람 사이의 분노도
그리움조차도
어두운 미래도
그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머리 속엔
지금 여기 밖엔 없었어

우리가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 지 몰라
아마 애마부인 같은 시시한 이야기들이었꺼야
그러나 기억하는 것이 있어
그건 반은 웃음이었다는 거야

일상의 모든 유치함 속으로
또한 모든 진지함을 걷어내고
맑고 투명했어
우린 그곳 이름 없는 나뭇잎 아래 모여
간다라 불상처럼 웃고 있었어
웃음이 깨달음임을 깨닫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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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연암 박지원에게 매혹된 것도 연암의 유머 때문이라니, 연암의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긴장과 돌출이 모두 ‘유머러스한’ 멜로디 속에서 산포된다니, 나의 책읽기 영역도 또 하나의 경계를 넘어 박지원까지 갈 참이다.

‘그런 점에서 유머는 누가 뭐래도 ‘노마디즘의 토대’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예기치 않은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으로서의 유머, 더 나아가 그것은 주류적 질서를 전복하면서 매끄럽게 옮겨 다니는 ‘유목적 특이점이자 우발점의 기법’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내게 무엇 때문에 공동체를 추구하느냐고 묻는다면 연암 박지원의 뒤를 이어 이렇게 말해줄 작정이다.

웃음의 물결을 사방팔방에 전파하기 위해서, 웃음이 사람들의 삶과 사유에 무르녹아 전복적 열정을 솟구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단호하게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누구든 코뮌을 꿈꾼다면 가장 먼저 웃음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고.’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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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6.04.28 15:12:38 *.72.66.253
나도 탁구대를 밥상으로! 외치며
신혼집을 보고 사실 내가 생각한 식탁은 바로 탁구대 였는뎅.
괜시리 그 대목 몇번 더 읽게 되네.
지금이라도 해볼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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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2006.04.28 22:36:13 *.100.65.249
한명석님, 어떤 분이신가 한창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올려 주시는 글들 모두 매~~매 (경상도 사투리? 딴딴하게? 꼭꼭?)
읽고 있지는 못하지만, 잘 보고 있긴 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많이 부러워 하는 중입니다.
오늘 우째 이런 우연인가요? 아침에 중앙일보를 읽으셨나요?
저는 한명석님 글을 먼저 읽었고, 아침 신문을 이 밤에 보았습니다.
올리신 책에 대한 글을 읽고 얼마나 흥분되었는지 모릅니다.
오후 내내 일하면서 계속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라고 했지... 고미숙이라고..
수유+너머 라고 했나? 내일 당장 나도 읽어봐야지 했더랬습니다.
그러다 저녁에 신문에서 대문 두짝만한 크기로 실린 수유+너머 기사를 보고
흥분이 극에 달해서 지금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오늘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아~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있었구나~
나는 왜 이렇게 까맣게 모르고 살았을까 정말 좋겠다 좋겠다
친구가 50평짜리 아파트를 샀대도 잠만 잘 오더니, 배도 안 아프더니,
수유+너머 사람들 사람들이 부러워서 ..... 아직 진정이 잘 안되어요.
내일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갑니다.
책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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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4.28 22:40:37 *.229.28.221
앗 저도 오늘 중앙일보에서 이 기사 읽었어요.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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