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한명석
  • 조회 수 2212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06년 5월 3일 08시 52분 등록
금빛 기쁨의 기억

<1> 저자소개 - 강영희

- 문화평론가. <길>, <사회평론> 등의 잡지를 통해 프리랜서 인터뷰어로 활동해 오던 중
94년 문화비평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다.
그 외의 저서로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다. 98년

- 문화평론가라는 이름으로 "온갖 잡사에 대한 잡문"을 써오던 강씨가 '내 안의 한국인'을 탐색키로 결심한 계기는 1998년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서 찾아왔다.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선비정신의 세례라고는 받은 적이 없는 제가 푸른 기 도는 순백자나 탈속(脫俗)의 해학이 넘치는 '골코름한' 철화백자 앞에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영혼이 말갛게 씻기는 상쾌함을 맛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답을 찾기 위해 그는 개인사의 갈피를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고 기억의 저쪽 끝에 자신이 태어난 '서울 북촌의 조선식 기와집'과 '토종 순한국인 외할머니'가 아련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루브르박물관과 북촌 기와집. 그것은 강씨에게 세계인의 길과 한국인의 길을 상징했다.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이 강영희에게 던져 준 화두,
‘식민사관 극복은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안돼, 취향의 차원으로 치고 들어가야 돼’를 붙들고 6년간의 연구-‘한국인의 원형 찾기’를 통해 이 책이 탄생하였다.

<2> 소감

이 책을 통해 내가 가장 소중하게 길어 올린 단어는 ‘기억’과 ‘취향’의 두 가지이다. 무심하게 사용해 오던 두 단어에 강영희는 문화사적인 의미를 덧입혔다. 개별적이고 사소하게만 여겼던 ‘기억’과 ‘취향’을 복원시켰다고 할까.

나도 그랬다. 조선시대 막사발과 솟대, 신라토우, 조각보를 보면 본능적인 일체감에 웃음이 저절로 피어올랐다. 이 책에 소개된 우리 미술품 중에서는 민화풍의 호랑이가 그려진 철화백자가 제일 좋다. 250쪽. 단순하고 유머러스하며 호방한 터치!

나는 이런 취향이 나만의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 투박하고 거친 듯하지만,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그것이 바로 ‘한국의 미’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취향’을 심화시키고 정리해 볼 의욕이 생겼다. 단순질박한 성격상, 취향이 분명한 데 비하여 컨텐츠가 미약하다.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古拙)이나 아졸(雅拙),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그 만듦새는 극히 소박하여 전체적으로의 조화나 균제의 미를 찾았을지언정, 부분 부분 뜯어보면 차라리 거칠다 할만큼 잔손질이 가지 않은 것이 한층 우리의 주의를 끈다<김용준>. 그러나 볼수록 여운이 남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초라한 육신에 깃들인 품격있는 정신이 느껴진다. 146쪽

통나무집, 황진이에 대한 머슴 수근이의 연정, 쑥개떡,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둥치, 어눌한 말투를 뒤집어버리는 양동근의 몰입,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 이심전심...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겉으로는 어눌할지 몰라도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는 것들. 매무새나 사교성보다는 진정으로 자기답게 존재한다.

이 원숙성은 원숙하여 도리어 아졸미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오(大悟)하고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더라는 소식이다. 늙으면 도리어 아이와 같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멋은 원숙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그 원숙에서 오는 능란함의 무난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원숙은 초규격의 바탕이지만 초규격이 곧 원숙은 아닌 것이다.
<조지훈, 멋의 연구> 114쪽

대오(大悟)하고 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새롭게 접근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우리의 멋을 자신있고 여유있게 향유하지 못하고 , 집단적인 기억상실에 시달려 온 근대화 과정이다. 심지어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술관을 황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서구화를 향해 달려가느라 우리 것은 무참히 뭉개지기도 했다. 마구잡이식 뷔페상 앞에서 우리의 취향은 간 곳이 없다. ‘금빛 기쁨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저자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야나기의 조선미술론을 반박하는 것을 보아 역으로 그의 입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피카소에 의해 간택된 아프리카의 민예는 아프리카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카소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듯, 야나기가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을 뛰어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강영희의 이론이 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 강영희의 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녀의 작업을 지지한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정체성을 찾는 일을 남이 해 준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는가. 강영희처럼 우리 손으로 우리의 기억을 현재화시켜 다시 취향으로 개발하는 일이 지속되어야 한다.

저자의 작업 중 특히 한(限)에 대한 분석에 이끌린다.

恨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限)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또는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9쪽

고등학교 시절 그 많은 문학작품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백의민족의 한(限)’으로 풀이해 왔던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고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나는 강영희의 시각이 맘에 든다. 모든 지식은 새롭게 부정되고 진보하는 것이지만, 우리 나라 교육의 거대한 낭비성은 정말 갑갑하다.

혹자는 우리의 부박한 겉멋 혹은 한(限)에 대해 비관적 의견을 가질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인문적 주장이란 과학적 검증이 어려운 것이다. 더우기 민족성이나 미의식처럼 거시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주장과 추종, 소신>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긍정적인 Ideal type을 믿고 따르며 부정적 측면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기 위해 애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미처 신명으로 승화되기 전에는 한(限)으로 나타나며, 호생염극<생을 좋아하고 극을 싫어하는 것>의 마음이 극에 달하면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만을 맴도는 것으로 끝나거나, 아예 자폐적인 은둔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고 강영희는 경고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미의식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이상형을 추구하되, 그 부작용이나 미완의 형태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에 대해 하나 배웠다.

이제 강영희는 근대화 과정에서 미신으로 밀려난 우리 것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회복하고 우리만의 미의식 - 취향을 꽃피울 것을 권면한다. 이 책은 자기 취향을 찾아가는 개인 강영희의 노고였고 우리 모두 이 토대 위에서 각자의 취향을 꽃피워야 하리라.

오늘날처럼 개인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개인의 삶과 취향이 존중받던 때는 없었다. 애초에 객관화된 세상이나 기준은 없었고 보는 사람에 따라 N개의 세상이 있었던 것이다. 갈수록 장삼이사의 일상적인 감수성은 강조될 것이고, 따라서 일상과 취향의 혁명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자는 저자의 주장에 신뢰가 간다.

교육문화 쪽에서 먼저 양 팔을 걷어부쳐야 한다.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해 균형감각을 가지고 우리 문화를 접하는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멸종위기에 처한 우리 것에 대한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강영희를 통해 내가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비로소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취향’을 개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첫 걸음을 내딛었으면 좋겠다.

나도 윤두서의 자화상을 처음 보았을 때, 조금 놀랐었다. 우리 고미술에 이만큼 강렬하고 현대적인 화풍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고미술은 그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흔할 정도로 넘치는 고흐의 자화상 못지 않게 윤두서의 자화상에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양미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미술도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러면 우선 강영희처럼 진지한 접근을 하는 저자가 많아야겠고, 새롭게 개안(開眼)한 것에 대해서 우리 독자도 ‘아는 만큼 퍼뜨리는’ 노력을 해야 하리라.

이 시점에서 ‘완당평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유홍준과 강영희의 혜안과 노고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수월하게 ‘한국의 미’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다음에 누군가 우리가 놓은 디딤돌을 딛고 행복해 하리라는 것을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추사 김정희와 백남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내 아이들이, ‘한국성’과 ‘세계성’의 경계를 넘어 양자를 회통하는 신천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3> 내가 저자라면

- 서문: 서문부터가 저서의 시작이라고 볼 때, 이 책의 서문은 본문의 차분한 접근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 얼핏 김 훈의 문체를 떠올리게 하는, 영탄조의 문장이 아직 ‘금빛 기쁨의 기억’을 회복하지 못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 간혹 책의 흐름에 요긴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단절이 있다. 37쪽의 외국작품 <방문>과 <만남>의 예시같은 것은 이질적이고 난해하다.

- 글의 성격상 다양한 화보가 필수적인데, 박수근과 장욱진 오윤처럼 널리 알려진 화가의 작품에 한정된 경향이 있다. 특히 박수근의 작품은 6점이나 제시됨으로써, 저자의 취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동시에, 보다 폭넓게 알고자 하는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림이 글보다 직관성과 호소력, 상징성과 지속효과가 뛰어나다고 보기 때문에 이 책의 화보가 두 단계 정도 더 전문화,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4> 본문에서 인용한 부분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8-사대와 자주를 대립시킨 다음, 사대는 나쁜 것이고 자주는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은 국제정치학적 차원에서 현실적인 실리의 문제인 사대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명분의 문제로 오독(誤讀)하는 것이다.
19-강서대묘 사신도의 솟구치는 생기,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정겨운 봉안, 고려 수월관음의 휘황한 신비, 겸재 진경산수의 칼칼한 금수강산 모두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 대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같은 구별과 경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를 받아안아 한국을 피워올림으로써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였다.
26-당신은 지금 이 순간 세계인과 한국인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개안이 필요하다.
28-세계인 백남준에게 한국인 백남준이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그의 몸 속에 자리잡은 기억이다.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의 형태로 몸 속에 저장된 전통이야말로 백남준이 지난날의 수많은 다른 백남준들로부터 물려받아 자신의 작품 구서구석에 숨겨놓은 토속적인 자기의 원천이다.
32-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이 ‘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취향의 뜨락인 ‘기억 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43-이같은 조급함의 한국적인 양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의 혁명이나 일본의 팽창처럼 현실에서 자신을 관철시키지 못함으로서 더한층 강렬하게 끓어오른, 관념적인 조급함이다.
비등점에 가깝도록 뜨거워진 관념적인 조급함의 열기야말로, ‘기차가 있는 풍경’의 안쪽에 자리잡은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 풍경이다.
50-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추향을 겹쳐놓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문제는 타인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을 양자택일의 제로섬 게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서구화로서의 근대화의 비극에 있다.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57-피카소에 의해 간택된 아프리카의 민예는 아프리카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카소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점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조선의 민예가 그것의 발견자인 일본인의 놀라운 직관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듯이 말이다.
59-한국인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은 일본인의 미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60-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같은 근대 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
92-한국 예술의 선의 아름다움은 이것을 처음으로 언급한 야나기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으로 느껴온 것이다.
93-벽에 그려진 네 신, 즉 현무와 주작과 청룡과 백호를 보라... 그것은 선 속에 있는 무늬라 해도 좋을 것이다. 가늘고 긴 곡선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선에 의해 표현된 무늬의 극단적인 실례일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의 미술>
103-하지만 일본인의 자의식을 잣대로 한국사를 해석할 까닭은 없다. ‘작은 것을 보살피고 큰 것을 섬기는’ 자소사대의 준말인 사대는, 동북아 세계질서의 중심인 중국과 중국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자율적 질서의 메커니즘이었다.
107-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바꿔 말하면 격이 맞는 변격, 변격이면서 격에 제대로 맞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격에 들어가서 다시 격에서 나오는 격’이라 할 수 있다.
112-중국과 조선의 도자기가 왜 이렇게나 아름다운가 하면 불규칙 속의 규칙, 미완성 속의 완성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많은 작품은 완서의 버릇에 치우치는 까닭에 종종 생기를 잃는다. 야나기 무네요시 - 도자기의 아름다움
114-이 원숙성은 원숙하여 도리어 아졸(雅拙)미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오(大悟)하고 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더라는 소식이다. 늙으면 도리어 아이와 같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멋은 원숙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그 원숙에서 오는 능란함의 무난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원숙은 초규격의 바탕이지만 초규격이 곧 원숙은 아닌 것이다. 추사의 글씨가 이러한 문제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조지훈 -멋의 연구
118-조선에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 야나기에서 고유섭으로 이어지는 민예론의 전제를 이루는 이 명제는 일본의 관제 사학자들이 주장한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원경에서는 아하되 근경에서는 졸한 한국 예술을 일본인의 근경의 시선으로만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로부터 발견된 것이 바로 무기교, 무작위, 무의식의 민예성이다.
119-그는 정신의 격이 세련된 까닭에 형식의 기교는 서투른 것처럼 보이는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를 앞세우는 일본인의 미의식으로 바라보았다.
124-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깎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27-아름다움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도리어 객쩍은 일이다.
131-우리는 논리 간명한 글을 선필 또는 미문이라 하고, 선량한 행위를 미덕 또는 진심이라 하며, 아름다운 예술을 진실 또는 순정이라 해서 진. 선. 미를 혼용하고 있다... 조지훈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133-象이라는 개념은 形과는 바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만일 형을 인간의 감각에 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은 일반적인 인간, 즉 明을 잃은 인간이나 또는 자연법칙을 관찰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식되기 어려운 무형을 말하는 것이다.
139-사상이 일상의 척도로 작용할 경우 취향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취향으로 형성된 사상은, 다시 취향을 통해 전승되며, 취향을 통해 퍼져 나간다. 따라서 취향으로서의 한국인의 미의식에는 음양오행사상으로 체계화된, 상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사상이 담겨 있다.
145-뜯어보믄 잘 못 생겨서 잘 생긴 것도 있어라우
146-‘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그 만듦새는 극히 소박하여 전체적으로의 조화나 균제의 미를 찾았을지언정, 부분 부분 뜯어보면 차라리 거칠다 할만큼 잔손질이 가지 않은 것이 한층 우리의 주의를 끈다<김용준>. 그러나 볼수록 여운이 남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초라한 육신에 깃들인 품격있는 정신이 느껴지는 것.
147-그러나, 이 원숙성은 원숙하여 도리어 아졸미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오하고보니 대오하기 전과 같더라는 소식이다. 늙으면 도리어 아이와 같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멋은 원숙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그 원숙에서 오는 능란함의 무난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원숙은 초규격의 바탕이지만 초규격이 곧 원숙은 아닌 것이다.
조지훈<멋의 연구>
151-자연을 신이나 인간처럼 존중하는,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 천지인 상관적 사고관념을 보다 투철히 함으로써 자연의 이용에 있어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을 소외시키는 온갖 요소들을 점차적으로 줄여 나가는 자세를 견지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천지인을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이해했던 풍수사상가들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최창조‘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153-상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한 점의 도자기나 한 구의 조각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생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의 배후에 상의 미의식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163-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 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을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호사스런 취미와 구별되는 까다로운 취향이 옹골지게 자리잡아갈 때에만,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생기발랄하며 웅숭깊은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167-발효를 ‘썩지 않으며, 처음 그대로 유지되지도 않은 은근한 곰삭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이것이다. 그러니까 발효의 원리란 자연의 이치에 따른 상극의 과정인 부패를 인간의 지혜에 따른 상생의 과정인 발효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168-도선이 말하기를 “산천에 병이 들었거나 다쳤을 때, 그것이 모자란다면 사찰로써 보할 것이고, 지나치다면 불상으로서 억제할 것이고, 달아나는 형세라면 탑으로써 멈추게 할 것이고, 배역의 자세라면 짐대로써 되돌려야 하리니...
179-恨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또는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1-다만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상극적인 것의 늪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계하기 위해, 지난 세기의 한에 대한 담론을 역사 책의 한켠에 선명하게 기록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187-삶터 관념에서는 그 땅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곳이라든가, 예술품이 만들어진 장소라는 식의 역사적 관련성이 있는 공간 개념을 떠올린다. 인간사의 우연과 의무와 추억과 정서가 만나는 곳이다...삶터는 소속을 내포한다. 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삶터는 뿌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삶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최창조<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223-조각보; 19세기, 모시로 만든 조각보. 색동보다도 고풍스럽고 몬드리안보다도 모던한 조각보의 색꾸러미가 잠들어 있던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부터 깨어나는 중이다.
225-마음의 색이 풍경의 색과 하나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기억 속의 심상이 현실의 풍경과 오버랩되는 일상을 꾸리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미의식의 행복한 주인공들이다.
226-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문화와 예술의 몫이 아니라 일상과 취향의 몫이 될 것이며, 일상과 취향의 혁명이 문화와 예술의 변화로 이어지는 한 판의 반전으로 전개될 것이다.
227-이같은 일상과 취향의 혁명을 앞당길 견인차는 세련되고 전위적인 엘리트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촌스럽고 뒤처지는 남녀노소 장삼이사들의 일상적인 감수성이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231-적어도 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아름다움의 향기가 사회학적인 눈금 너머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인문학적인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이데올로기보다는 갈짓자의 취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235-물론 취향적인 사고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따름이며, 그것이 가능성이나 스타일로만 끝날수도 있다는 것이 취향의 운명이기도 하다.
236-7 미신으로 밀려난 실질합리의 자리를 상식의 이름으로 차지한 외눈의 형식합리가 지난 세기 근대 한국인의 삶을 얼마나 척박하고 기형적인 것으로 만들었는지 돌아봐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취향으로서의 미의식의 자리, 성찰의 시선이 깃들이는 자리다. 근대적인 합리성을 맹목적인 서구성과 구별짓고 그 곳에 전통적인 실질합리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한, 미의식은 물론이요 성찰 역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245-조선의 선비란 누구인가. 그들은 상생의 자연적 질서에 천지인의 일부로 합류하는 이상적인 풍류는 물론이요 상극의 인간적 질서 속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헤쳐가는 현실적인 실존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같은 노력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존재의 에너지야말로 그들의 자화상에 해당하는 운룡의 주위에 해학적인 즐거움을 감돌게 한 원천이다.
251-그리하여 나는 피카소에 경탄하고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영혼을 무장해제 당하는, 이십일 세기의 세계인에 걸맞은 잡종적 취향 속에서도 나의 취향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서울 북촌의 기와집 풍경이었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253-유럽 화폭의 원관념은 그곳의 자연과 거리의 풍광이며, 한국 화폭의 원관념은 이곳의 자연과 거리의 풍광이다.
257-여래좌상;17-8세기. 돌. 조선 문화의 어느 대목에서는 적조미와 명랑성이 뒤엉킨 장면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처럼 상생 지향이 만들어낸 탈속의 경지가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로 수렴되었을 경우다. 고유섭에 따르면 조선의 불상에 ‘어른같은 아이’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261-이 상상성, 구상성이 진실미를 못 얻을 때 일종의 허랑한 ‘멋’이란 것만이 나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적 승화를 못 얻을 때 한편으로는 ‘군짓’이 잘 나오고 한편으론 ‘거들먹 거들먹’하는 부화성이 나오게 된다. 고유섭,조선 미술문화의 몇낱 성격
따라서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262-한국인은 때로는 상생적인 탈속 지향의 안정감에서 벗어나 상극적인 속세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불안정을 적극적으로 뒤집어 써볼 필요도 있다. 호생염극의 마음이 극에 달하면,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만을 맴도는 것으로 끝나거나 아예 자폐적인 은둔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274-김정희에게 있어 스물 네 살 ‘연경의 기억’이란 젊은 날 한 때의 추억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사상과 예술의 수준을 돌아보게 하는 국제적인 척도로 남아있었다. ‘토속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과 ‘남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창조적으로 회통시켰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275-추사는 올바른 법고를 통해서 개성적인 창신을 이룩하며 이를 불이의 묘경으로 통합했다고 할 수 있다.
276-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법고창신, 옛것을 따름으로써 새것을 창조하는 것. 이것은 ‘기억 속의 심상’을 ‘오늘의 심상’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주체로 하여금 당대성을 체험하게 하는 지렛대는 무엇일까. 국제적 감각, 혹은 세계성이다.
우리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국제적인 감각을 획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연염색 조각보의 토속적인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뜰 수 있으며, 현대 회화의 개성적인 예술혼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희룡 매화도의 진한 매혹과 김수철 화훼도의 간결한 세련에 새삼스럽게 빠져들 수 있다.
279-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IP *.199.134.105

프로필 이미지
귀한자식
2006.05.03 11:20:51 *.229.28.221
한선생님 글을 읽고 보니
금빛----에 대한 책이 더욱 일고싶어지네요.
저는 화인열전부터 읽을려던 참입니다만...

표현이 멋스럽습니다.

그리고 위에
' 투박하고 거친 듯하지만,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그것이 ....'
저도 이게 제 취향인줄 알았는데.
우리 민족의 취향이었군요. ㅎㅎ
재밌어요.
내것이라고 느낀 것이 알고보면 다른사람도 모두 느끼는것이란걸 알때의 안도감, 약간의 허탈감이랄까~
프로필 이미지
미 탄
2006.05.03 12:36:57 *.85.148.44

귀자씨, 인생의 황금기 20대와 계절의 여왕 5월을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20대는 방황하라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이 멋진 계절을 향유하기 바래요. 부러워하는 사람 많으니까 ^^;

누가 클림트 얘기하면 아는 게 없으니까 공부 좀 해둬야지 ~~ 싶잖아요?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철화백자나 벅수 얘기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처음으로 우리 미의식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책을 본 셈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출발이구요.

나로서는 '금빛'이 입문이자 개론서이기 때문에 먼저 읽고, 두 권짜리 각론을 나중에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같네요.

다음에 만나요 ~~

프로필 이미지
도명수
2006.05.04 17:17:35 *.57.36.18
한명석선생님 인사드립니다.

모처럼 한선생님이 써내려간 '금빛 기쁨의 기억'에 대해
읽었습니다. 책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시는 분처럼 그 이해의
깊이 있음을 느낍니다.

저도 이 번주 이책을 읽기 위해 구입했습니다.
한국인의 풍취와 멋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인듯 합니다.

한 선생님이 써주신 내용이 책을 좀더 알차게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가정에 화목이 함께하길 빕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프로필 이미지
자로
2006.05.07 06:02:02 *.118.67.206
참 감칠맛 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금빛 기쁨의 기억 [4] 한명석 2006.05.03 2212
471 숨겨진 힘, 사람 (20060501) 이미경 2006.05.02 2621
470 [7] 피터 드러커-프로페셔널의 조건(Essential Drucker) [2] 조윤택 2006.05.02 6667
469 사람, 숨겨진 힘. [3] 이종승 2006.05.02 1980
468 숨겨진 힘은 사람이었다.` [2] 김귀자 2006.05.01 2031
467 숨겨진 힘.. 사람 file [1] 꿈꾸는간디 2006.05.01 2156
466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읽고나서.. 도명수 2006.05.01 2259
465 &lt;7&gt; 미래 경영 (피터 드러커) 정경빈 2006.04.30 2453
464 고미숙의 코뮌실험 -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3] 한명석 2006.04.28 3041
463 사람, 숨겨진 힘 [2] 한명석 2006.04.26 2360
462 The Essential Drucker Vol. 1 박소정 2006.04.26 2233
461 한명의 구경꾼 탄생, &lt;자서전&gt; [2] [1] 김귀자 2006.04.25 2179
460 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드러커) // 쓰는중 강미영 2006.04.25 2168
459 (Managing in the) Next Society 이종승 2006.04.24 2051
458 The Effective Executive(피터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 오성민 2006.04.24 3005
457 프로페셔널의 조건 (20060424) 이미경 2006.04.24 1824
456 '피터드러커 북클럽'- '피터드러커 자서전'을 읽고 [4] 정재엽 2006.04.20 2959
455 피터 드러커의 '프로페셔널의 조건' 한명석 2006.04.20 2270
454 (6)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1] 박소정 2006.04.19 2371
453 -->[re]신영복의 '나의 대학시절' [3] 귀한자식 2006.04.19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