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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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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7일 20시 20분 등록
200년을 뛰어넘은 사우(師友) - 고미숙과 연암 박지원
고미숙지음 - 열하일기,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저자소개 - 고미숙


1960년 강원도 정선군 조동리 출신 - 내가 접한 저자 중 가장 산골 출신.
고대 국문과 졸업반 무렵 김흥규 선생님의 ‘고전소설 강독’을 듣고 고전문학으로 방향잡음.
87년 박사과정 시절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음.
이진경, 고병권과 연결하여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키워나가면서 ‘근대성’에 대한 집중탐구시작.
2001년 우연히 <열하일기>를 접하게 되면서 연암 박지원과 ‘운명적인 해후!’를 하다.
그녀의 꿈 - 축제, 지식, 명상을 모토로 삼는 인디언 코뮌을 만드는 것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 - 동물의 왕국 <인간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다고>
저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나비와 전사



- 소감

고미숙이 교과서 속에 갇혀있던 연암 박지원<1737 ,영조 13 ∼ 1805 ,순조 5>을 불러냈다. 북학파의 거두요, <호질>과 <양반전>의 저자로 그저 암기대상이었던 연암이, 귀엽고 유머러스하고 못말리는 호기심의 제왕이며 우정(友情)에 목숨을 걸었던 싸나이로 환생하였다.

고미숙에 의한, 고미숙의 연암을 읽으며 역시 고미숙의 열정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암 역시 고미숙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니, 그는 천재적 문장가로 정조의 러브콜을 수없이 받았으나, 주류적 가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 ‘창조적 소수자’요, 선진문물에 대한 탐구열과 이용후생정신에 빛나는 세계인이요, 우정이 지상목표였을 정도로 사람에 대해 열려있었으며, 유한한 인간조건을 웃음으로 희롱한 호모 루덴스였던 것이다. 고미숙이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에 정확하게 연암 박지원이 겹치는 것이고, 그 때문에 고미숙은 희희낙락 연암을 소개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이다. 200년을 뛰어넘은 완벽한 교감 - 식자(識者)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 4), 연암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熱河)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류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고대한문소설로 유명한 <호질(虎叱)>도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 연암은 중원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홍대용이 한 발 먼저 중원에 다녀와서 쓴 <회우기(會友記)>를 보고서 가슴벅찬 감격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기도 하고 좌우로 광할하기 때문에 도로의 이수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호호탕탕 광대무변의 땅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은연중 이 조선만을 실재하는 세상으로 생각하여 수천리 우리 안에서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 78쪽

그러다가 본인이 직접 중원에 발을 딛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 오죽하랴!
연암은 언제 어디서나 선비와 장사치를 가리지 않고 교류하며 필담을 통해 선진문화의 조류를 파악하려 애썼으며, 산천과 성곽, 배와 수레, 각종 생활도구, 저자와 점포, 서민들이 사는 동네, 농사, 도자기 굽는 가마, 언어, 의복에서 역사, 지리, 철학 등 고담준론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남겼다. 88쪽

그런데 그 기록이 고문으로 딱딱하지 않고, 재기발랄한 호기심과 열정에 가득찼는가 하면, 섬세한 감수성과 묘사력이 절절하다. 그것을 고미숙은 연암의 원초적 명랑성이 지닌 저력이라고 한다. 슬픔의 밑바닥을 본 자만이 유쾌하게 비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빛나는 명랑성과 깊은 애상은 상통한다고 한다.
니체의 아포리즘을 빌리면 ‘산정과 심연은 하나이다’
‘심해(深海)를 항해하고 돌아온 자만이 발산할 수 있는 강철 같은 명랑함’이라는 것이다.
98쪽

애초에 고미숙이 연암에게 매료된 것은 그의 유머 때문이라더니, 과연 곳곳에서 연암의 천진난만한 명랑성이 돋보였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봄날,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양손을 갑과 을로 나누어 ‘쌍륙놀이’를 하는 모습. 달빛아래 자기 그림자와 노는 모습. 연암은 ‘기운은 족히 육합을 가로지를만 하고, 재주는 천고를 능가할 만하며, 글은 온갖 부류를 거꾸러뜨릴 만한’ 천재였다. 몸집이 우람했으며 귀신을 질리게 할 정도의 양기를 지녔다고 한다. 그런 연암의 ‘혼자 놀기’는 동심, 어린이-되기가 성숙한 인격의 요건임을 보여준다.

서울을 떠나는 순간부터 중원의 선비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중원에 가 큰 선비를 만나면 무엇으로 기선을 제압할까? 옳다구나, 지전설과 월세계 이야기로 그를 애먹여 보자’ 고 말 위에 앉아 하루에 몇 권의 책 분량을 꾸며보는 모습도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고미숙은 연암을 타고난 장난꾸러기 -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터주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기꺼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건들마다 ‘유쾌한 악센트’를 부여하는 악동! 이라고 표현한다.
심지어 <열하일기>는 연암이 펼치는 ‘개그의 향연’이라고 !
고미숙의 애정어린 탐구심에 의해 연암은 이 시대의 ‘호모 루덴스’로 거듭난다.

소문난 문장가 연암의 문체론도 돋보인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133쪽
연암도 자신의 문체에 자부심을 보인다.
“황대경씨의 글이 사모관대를 하고 패옥을 한 채 길가에 엎어진 시체와 같다면, 내 글은 비록 누더기를 걸쳤다 할지라도 앉아서 아침 해를 쬐고 있는 저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
200쪽

연암의 이런 문체론은, 고문을 신성시하는 사대부이데올로기에 치명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정조의 ‘문체반정’을 가져온다. 연암에 대한 정조의 애증(愛憎) 스토리도 인상적이다.

문체에 대해서는 고미숙도 할 말이 많다. 학위논문이 아니라 레포트 수준에서도 좀 개성있는 문장을 시도해 볼라치면 ‘그건 비평체 아냐’하며 가차없이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체야말로 체제가 지식인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라는 것. 그러나 고미숙의 솔직발랄한 문체가 오늘의 고미숙을 있게 하였다. 그녀도 연암의 문체론에 덧붙인다.
“말하자면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연암은 또한 신분에 상관없이 두루 사람을 사귀는 능력이 탁월했다.
홍대용과 정철조, 서얼인 박제가와 이덕무, 유득공, 서자 출신인 백동수 등이 주 멤버였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는 것을 같이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맡는 것을 함께 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65쪽

연암과 그의 벗들이 모여 살던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구는 모습은 단연코 아름답다.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만약 내가 언제고 벗들과 함께 웃고 토론하며 노래하고 뒹굴며 그야말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하게 된다면 이 이름을 본따 붙이려고 단단히 기억해 둔다.
백탑청연<白塔淸緣>!

고미숙은 극진한 애정을 담아 연암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암의 감수성, 필력, 강철같은 명랑함, 행동력, 세계성을 향해 열린 도저한 열정... 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보인다. 고미숙은 또한 최근 그녀가 심취한 현대철학의 개념에 비추어 연암을 읽고 있는데, 그 문장도 아름답고 철학용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 내 재주로는 다 옮길 수 없으니 한 번 꼭 읽어보기 바란다. 강추!

고미숙과 연암의 몰입과 대응은 200년을 뛰어넘어 사우(師友)가 됨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연암이 고미숙에게 빚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이 거의 20쇄가 팔린 것을 보면, 고미숙의 우정을 통해 6만 명의 독자가 연암을 발견한 것이다. 나역시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디오니소스를 한 사람 더 만난 즐거움이 크다.
IP *.85.14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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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ictree
2006.05.08 23:59:17 *.108.94.107
재밌게 읽은 책에 대한 적절한 review를 본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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