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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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작성중)
1. 나에게 들어온 글들
<16>
한국은 동양속의 서양을 자처한 일본에 의해 식민지를 강요당했고, 한국인은 자신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모순된 상황으로 내몰렸다.한쪽에는 척사와 쇄국에서 민족주의와 주체사상에 이르는 구호가, 다른 한쪽에는 개화에서 세계화에 이르는 구호가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인에게는 자기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자화상과 자기를 바꾸려는 자화상이 공존하게 되었다.
<22>
(백남준은)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25>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28>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 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41>
근대 또는 문명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주먹을 불끈 쥐고 서둘러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재촉이라도 하듯이 칙칙폭폭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가 상징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은 이같은 풍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모범답안을 암기하듯이,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대신 같은 분량만큼의 전통적인 그것을 버려야 했는데, 이것 역시 하루빨리 서둘러서 그렇게 했다.
<42>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이같은 조급함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낳은 혁명의 열기로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수백 수천만을 남태평양과 중국 대륙에 묻는가 하면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국으로 몰아간 제국주의적 팽창의 광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47>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따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50>
지난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이처럼 습득해야 할 낯선 취향과 청산해야할 낯익은 취향의 쌍들의 들고남으로 온통 분주했다. 여기서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형식의 후예인 우리 역시 자신의 취향을 혐오하고 타인의 취향을 선망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향이란 '기억속의 심상'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육체와 같은 것이며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이룩한다.그렇다면 낯익은 취향을 청산하고 기억상실에 빠진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타인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을 양자택일의 제로섬 게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서구화로서의 근대화의 비극에 있다.
<60>
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같은 근대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
일본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77>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감정이 지성이나 도덕성보다 심오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란 그렇게 세세한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다....지적,도덕적 원리에 의해 부정되고 은폐되어 버리는 작은 감정(모노노와아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야마토타마시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국학은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이해되는 마고코로(眞心)를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면서 이것을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으로 이해되는 카라고코로(漢意)와 대비시킨다.
<78>
일제의 인접지역 연구와 식민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 국학의 전통이었다. 일본 중심의 세계인식, 특히 인접민족을 폄하하는 일본민족중심주의는 이 국학적 세계관에 의존한다.
<87>
일본문화 특유의 미의 범주에 시부사 라는 것이 있다. 야나기에 따르면, 시부사에서는 '조작을 떠난 고요함' 즉, '자연스러움의 정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94>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98>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같은 과학적 노력에 더하여 주변의 산세 특히 뒷산과의 조화를 고려한 미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103>
일본인의 자의식을 잣대로 한국사를 해석할 까닭은 없다. '작은 것을 보살피고 큰 것을 섬기는' 자소사대(字小事大)의 준말인 사대는, 동북아 세계질서의 중심인 중국과 중국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한 주변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자율적 질서의 매커니즘이었다. 이같은 사대의 질서 속에 비애의 정서 따위가 끼여들 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같은 동북아의 세계질서 자체도 조선시대라는 특정 시기에 국한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사대의 질서를 사대주의로 바꿔치기 하여 한국사의 전 시기에 걸친 민족성 따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분명 역사왜곡이자 식민사관이다.
<105>
한국인의 미의식 속에서는 야나기의 말맞다나 일본적인 기교에 해당하는 '꼼꼼한' 무엇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분방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흔히 격(格)이라 불리는 이것.
<108>
(한국의 격은)
형(形)의 격, 육체의 격을 멀리하고 상(象)의 격, 정신의 격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진선미를 종합한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24>
우리는 그의 글 속에 들어 있는 경애의 태도에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폄하의 태도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근대적인 우월감을 배경으로 해서 조선 예술을 '잡기적인 민예'로 깍아 내린 폄하의 태도는 물론이요, 조선예술을 일본국학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실현한 '예술적인 명물'로 높여올린 경애의 태도 모두 조선 예술의 참얼굴과는 무관하다.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 없이 깍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 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28>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9>
한국어에서 아름다움 고어의 본뜻이 사호(私好)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130>
고유의 풍토와 역사속에서 형성된 삶의 지혜를 대표하는 미의식은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대표한다.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멋'이라는 이름의 미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146>
상이 만족스럽다면 설령 형이 약간 허물어지더라도 너그럽게 눈감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형이 약간 허물어졌을 때 도리어 상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국문화는 이렇게 상의 세련됨과 형의 어눌함이 어우러진 아졸함이나 고졸함의 형상으로 넘쳐난다.
<162>
이처럼 발효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얼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잘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167>
불에서 익히는 것은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자연을 바꿔놓는 것이지만, 김치 같은 발효식의 익힘은 효모균을 이용한 상생의 방법에 의한 변용이다.
<169>
비보의 원리란 상극의 원리가 관철되는 무정한 자연을 상생의 원리가 숨쉬는 유정한 자연으로 바꾸려는 인문적인 자의식의 소산이다. 인과율에만 따르는 자연적인 상극을 목적률을 지향하는 인문적인 상생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랄까?
<173>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176>
이같은 멈춤의 그늘, 울음의 그늘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몸으로 부딪혀온 '상극적인 것'의 살아있는 과거이며, 이같은 그늘을 슬며시 드리운 웃음 이상의 웃음,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 마음으로 삭혀온 '상생적인 것'의 살아 있는 미래다.
<177>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생기의 느낌 또는 '가동적인 정지태'의 출렁거림이 해학과 신명이라는 인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를 넘어 사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로 확장될 경우, 그 자리에서 한국적인 선(線)의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179>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전의 한(恨)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과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5>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196>
이처럼 한국인의 공간 취향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명당이란 본래부터 그곳에 존재한 자연적인 풍경 위에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식에 따라 생겨난 인문적인 풍경을 겹쳐놓은 것이다.
<199>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조선시대의 고지도가 오늘날의 지도로 탈바꿈한 사실은,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고유의 공간 취향을 잃어버리고 기억상실에 빠져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6>
한국인은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221>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이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배제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다.
<225>
고유색의 부재란 한국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의 문제인데, 이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 잡고 있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231>
적어도 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아름다움의 향기가 사회학적인 눈금 너머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인문학적인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이데올로기보다는 갈짓자의 취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36>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46>
조선 선비의 탈속적인 자의식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자의식을 해소시킨 것이 아니라, 탈속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되 그 안에서 속세의 인간을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게 가다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61>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271>
'남의 유행'을 참고로 해서 '토속적인 자기'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이랄까? 아니면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본' 것이랄까. 이것이 바로 김정희의 창작방법론으로 거론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올바른 해석이다.
<276>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IP *.148.19.104
1. 나에게 들어온 글들
<16>
한국은 동양속의 서양을 자처한 일본에 의해 식민지를 강요당했고, 한국인은 자신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모순된 상황으로 내몰렸다.한쪽에는 척사와 쇄국에서 민족주의와 주체사상에 이르는 구호가, 다른 한쪽에는 개화에서 세계화에 이르는 구호가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인에게는 자기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자화상과 자기를 바꾸려는 자화상이 공존하게 되었다.
<22>
(백남준은)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25>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28>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 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41>
근대 또는 문명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주먹을 불끈 쥐고 서둘러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재촉이라도 하듯이 칙칙폭폭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가 상징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은 이같은 풍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모범답안을 암기하듯이,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대신 같은 분량만큼의 전통적인 그것을 버려야 했는데, 이것 역시 하루빨리 서둘러서 그렇게 했다.
<42>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이같은 조급함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낳은 혁명의 열기로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수백 수천만을 남태평양과 중국 대륙에 묻는가 하면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국으로 몰아간 제국주의적 팽창의 광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47>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따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50>
지난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이처럼 습득해야 할 낯선 취향과 청산해야할 낯익은 취향의 쌍들의 들고남으로 온통 분주했다. 여기서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형식의 후예인 우리 역시 자신의 취향을 혐오하고 타인의 취향을 선망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향이란 '기억속의 심상'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육체와 같은 것이며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이룩한다.그렇다면 낯익은 취향을 청산하고 기억상실에 빠진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타인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을 양자택일의 제로섬 게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서구화로서의 근대화의 비극에 있다.
<60>
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같은 근대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
일본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77>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감정이 지성이나 도덕성보다 심오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란 그렇게 세세한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다....지적,도덕적 원리에 의해 부정되고 은폐되어 버리는 작은 감정(모노노와아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야마토타마시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국학은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이해되는 마고코로(眞心)를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면서 이것을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으로 이해되는 카라고코로(漢意)와 대비시킨다.
<78>
일제의 인접지역 연구와 식민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 국학의 전통이었다. 일본 중심의 세계인식, 특히 인접민족을 폄하하는 일본민족중심주의는 이 국학적 세계관에 의존한다.
<87>
일본문화 특유의 미의 범주에 시부사 라는 것이 있다. 야나기에 따르면, 시부사에서는 '조작을 떠난 고요함' 즉, '자연스러움의 정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94>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98>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같은 과학적 노력에 더하여 주변의 산세 특히 뒷산과의 조화를 고려한 미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103>
일본인의 자의식을 잣대로 한국사를 해석할 까닭은 없다. '작은 것을 보살피고 큰 것을 섬기는' 자소사대(字小事大)의 준말인 사대는, 동북아 세계질서의 중심인 중국과 중국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한 주변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자율적 질서의 매커니즘이었다. 이같은 사대의 질서 속에 비애의 정서 따위가 끼여들 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같은 동북아의 세계질서 자체도 조선시대라는 특정 시기에 국한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사대의 질서를 사대주의로 바꿔치기 하여 한국사의 전 시기에 걸친 민족성 따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분명 역사왜곡이자 식민사관이다.
<105>
한국인의 미의식 속에서는 야나기의 말맞다나 일본적인 기교에 해당하는 '꼼꼼한' 무엇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분방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흔히 격(格)이라 불리는 이것.
<108>
(한국의 격은)
형(形)의 격, 육체의 격을 멀리하고 상(象)의 격, 정신의 격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진선미를 종합한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24>
우리는 그의 글 속에 들어 있는 경애의 태도에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폄하의 태도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근대적인 우월감을 배경으로 해서 조선 예술을 '잡기적인 민예'로 깍아 내린 폄하의 태도는 물론이요, 조선예술을 일본국학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실현한 '예술적인 명물'로 높여올린 경애의 태도 모두 조선 예술의 참얼굴과는 무관하다.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 없이 깍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 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28>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9>
한국어에서 아름다움 고어의 본뜻이 사호(私好)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130>
고유의 풍토와 역사속에서 형성된 삶의 지혜를 대표하는 미의식은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대표한다.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멋'이라는 이름의 미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146>
상이 만족스럽다면 설령 형이 약간 허물어지더라도 너그럽게 눈감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형이 약간 허물어졌을 때 도리어 상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국문화는 이렇게 상의 세련됨과 형의 어눌함이 어우러진 아졸함이나 고졸함의 형상으로 넘쳐난다.
<162>
이처럼 발효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얼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잘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167>
불에서 익히는 것은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자연을 바꿔놓는 것이지만, 김치 같은 발효식의 익힘은 효모균을 이용한 상생의 방법에 의한 변용이다.
<169>
비보의 원리란 상극의 원리가 관철되는 무정한 자연을 상생의 원리가 숨쉬는 유정한 자연으로 바꾸려는 인문적인 자의식의 소산이다. 인과율에만 따르는 자연적인 상극을 목적률을 지향하는 인문적인 상생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랄까?
<173>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176>
이같은 멈춤의 그늘, 울음의 그늘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몸으로 부딪혀온 '상극적인 것'의 살아있는 과거이며, 이같은 그늘을 슬며시 드리운 웃음 이상의 웃음,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 마음으로 삭혀온 '상생적인 것'의 살아 있는 미래다.
<177>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생기의 느낌 또는 '가동적인 정지태'의 출렁거림이 해학과 신명이라는 인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를 넘어 사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로 확장될 경우, 그 자리에서 한국적인 선(線)의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179>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전의 한(恨)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과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5>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196>
이처럼 한국인의 공간 취향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명당이란 본래부터 그곳에 존재한 자연적인 풍경 위에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식에 따라 생겨난 인문적인 풍경을 겹쳐놓은 것이다.
<199>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조선시대의 고지도가 오늘날의 지도로 탈바꿈한 사실은,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고유의 공간 취향을 잃어버리고 기억상실에 빠져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6>
한국인은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221>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이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배제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다.
<225>
고유색의 부재란 한국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의 문제인데, 이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 잡고 있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231>
적어도 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아름다움의 향기가 사회학적인 눈금 너머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인문학적인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이데올로기보다는 갈짓자의 취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36>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46>
조선 선비의 탈속적인 자의식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자의식을 해소시킨 것이 아니라, 탈속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되 그 안에서 속세의 인간을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게 가다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61>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271>
'남의 유행'을 참고로 해서 '토속적인 자기'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이랄까? 아니면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본' 것이랄까. 이것이 바로 김정희의 창작방법론으로 거론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올바른 해석이다.
<276>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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