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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2일 09시 12분 등록

I. 저자 소개
강영희(姜英熙)
문화평론가.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6년 전부터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은책으로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1998)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1998)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에서 개성 있는 문화론을 주장했던 강영희는 <금빛 기쁨의 기억>에서는 우리가 당연시해왔던 미의식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지난 세기 한국인들에게 야나기의 조선미론이란 비유컨대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어두운 욕망 또는 뜨거운(hot) 이데올로기를 차가운(cool) 취향으로 위장한, 오래된 정신적 종양과 같은 것이었다.’
강영희 역시 처음엔 무네요시의 생각에 동의했다가 그것이 일본의 국학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료수집, 일본 국학 연구 등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6년 만에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금빛 기쁨의 기억이란 우리가 갖고 있던 고유한 취향과 미의식을 말합니다. 지난 세기 서구적 근대화를 따라가다 민두기 교수가 말씀했던 ‘시간과의 경쟁’에서 생겨난 조급증 탓에 그것을 잃어버렸지요. 그 사이 무네요시의 조선미론 등이 밀려온 것입니다.”


II. 책을 읽고
“형식은 그 된장찌개에서 흔히 구더기를 골랐다.”
“별로 맛은 없으나 그 새에 낀 짭짤한 고기맛이 관계치 않고 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 하였다. … 그것은 서양음식인데 샌드위치라는 것이어 … ”
우리 음식과 서양 음식에 대한 극명한 대조이다. 지금 우리는 서양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흔히 우리는 좋은 곳을 지칭할 때 그곳은 마치 외국과 같다고 한다. 외국기업은 모두 투명하고, 근무 여건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도 많다. 마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외국(서양)으로 정해놓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해 성찰해야 할 때다.

책을 읽고,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한(恨)과 백의 민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웠다. 김소월님의 진달래꽃이 생각난다. 백의 민족이라며 조상의 사진을 게재한 국사책이 기억난다. 어려서부터 교과서에서 계속 우리네 정서로 배워온 지라 작가의 주장은 정말 신선하고, 파격적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각에 대해 알았으면 한다.

옛것과 새것의 회통(會通)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서양에 대한 생각없는 동경과 같이 옛것을 버리는 데에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톱니바퀴처럼 바쁘게 살아가면서 우리의 전통과 문화의 소중함을 간직할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요즈음 나는 광화문 부근 건물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 가끔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경복궁 주변을 걸어 다닐 때 묘한 느낌이 든다. 광화문을 경계로 한쪽에서는 옛스러움의 극치를, 다른 쪽에서는 현대성의 극치를 누리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어떤 새로움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또 이런 곳에서 근무한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도 작가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찾았으면 한다. 역사, 미술, 건축, 지리, 일본에 이르기까지 섭렵한 작가의 부지런함이 부럽기도 하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키워드는 상생(相生, win-win)이다. 작가는 한국인의 미의식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의 조화로 수렴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한 우리의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할 때이다. 버릴 것은 버려야겠다. 옛것과 새것,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만남과 회통을 통해 한국적인 것을 찾아가야 할 시기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역사, 미술, 건축, 지리, 종교는 물론 일본, 정치 등에 이르는 저자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고민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자꾸 읽을수록 생각할 것도 많고, 흥미가 가는 책이었다. 짧은 소견으로 내가 저자의 입장이 되어서 몇 자 적어 본다.

만일 내가 저자였다면 현재의 한국미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언급했을 것이다. 책은 크게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과거)-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과거)-한국인의 미의식(과거와 현재)-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과거와 미래)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우리를 알고,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내세우며 주로 과거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恨)과 백의 민족이라는 우리 고유의 정서라고 알고 있었던 것들과의 이별까지 고하고 있다. 식민지와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로 인해 우리가 성찰할 계기가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것을 새로이 하는 것에 더해 지금의 한국적인 것도 언급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청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우리,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내가 저자라면 독자들을 위해 조금 더 친절하게 글을 썼을 것이다.
문화평론가인 저자는 여러 분야를 섭렵해서인지 일상 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일부 사용했다. 예컨대 명철(明哲)이나 회통, 현수곡선, 비보, 아졸미, 고졸미 등이 그런 단어다. 자세한 내용이 곁들어진 단어도 있고, 또 맛깔스러운 표현을 위해 사용했을 테지만 보다 친절한 설명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책에서 그림이나 사진에 대한 설명이 조금 아쉽다. 풍부한 사례를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참고자료로 박물관이나 유적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더했으면 어떠했을까 한다.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서울대박물관, 호암미술관 등의 특색과 지리적 위치, 참고할 만한 작품 등을 포함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책에서 뛰어난 정원이라고 언급한 소쇄원(195p)의 위치도 궁금했다. 소쇄원도 명옥헌과 같은 전남 담양군에 자리잡고 있는 정원으로,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곳이라 한다


IV. 내 안에 들어온 글들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2. 기차가 있는 풍경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2.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3.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4. 일본의 기교와 한국의 격
5.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6. 자연과 작위를 통합시킨 일본의 세(勢)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2. 아졸미(雅拙美)또는 고졸미(古拙美)
3. 발효맛과 생기의 마감
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5. 해학과 신명
6. 고지도와 명당론
7. 백의와 색동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2. 상생 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3.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
4.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5.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
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따금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겸재의 진경산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또 다른 교훈이기도 하다.” (17)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고전적인, 어찌보면 이조인의 화석과도 같은 다시 말해서 전통적 인간으로서 지니는 모든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좀 생각해 봐야 한다.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22)

백남준보다 내가, 미국에 사는 한인들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토속적인 자기’를 더 잘 보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세계성의 부재를 토속성의 과장으로 얼버무리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23)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이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25)

살아 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이 ‘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취향의 뜨락인 ‘기억 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32)

2. 기차가 있는 풍경
모범 답안을 암기하듯이,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생활 양식을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대신 같은 분량 만큼의 전통적인 그것을 버려야 했는데, 이것 역시 하루빨리 서둘러서 그렇게 했다. (41)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47)

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취향을 겹쳐놓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문제는 타인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을 양자택일의 제로섬 게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서구화로서의 근대화의 비극에 있다. 하지만 된장 맛이 살아 숨쉬는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식탁에 발사믹 식초가 상큼한 맛을 더하는 샌드위치가 나란히 놓인 풍경을 얼마나 풍요로운 동시에 얼마나 센서티브한가. 한국적인 것의 항목에 한국화한 샌드위치라는 새로운 메뉴가 덧붙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의 취향과 타인의 취향이라는 모순을 창조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결실을 수확하는 만고불변의 공식이 아니겠는가. (51)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한국 예술에 대한 야나기의 사랑이 피카소가 아프리카 예술에서 영감을 얻고 고갱이 타히티 풍경의 원시적 생명력을 자신의 작품을 위해 활용한 것과 유사한 것이라면 어쩌겠는가. (57)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멍청하고 순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흙 묻고 지푸라기 묻은 모습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식 오레엔탈리즘의 산물로서 제국 일본에 의해 조작된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자화상이다. 인격을 상실하고 ‘사물적인 격’을 지닌 존재에게 미의식 대신 무의식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바로 야나기의 조선 예술론의 핵심이다. (63)

“그림 그리는 사람이 미천한 화공이건, 혹은 취미삼아 화필을 농하는 사대부이건 간에, 그 배후의 미관은 필연적으로 상류계급의 그것이며 또 상류계급의 수요에 따른다” (71)

2.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국학적 세계관에 사로 잡힌 일본인이 조선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예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거기서 ‘일본적인 것’을 발견했을 경우에 한정된다. (78)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애니메이션(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등장하는 정령적인 자연의 세계는 국학적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끝없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정령적인 자연은 신의 작위를 상징하며, 그 속에서 유영하듯이 살아가는 동심의 인간은 인간의 무작위를 상징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곳의 음식에 허락없이 손을 대었다가 돼지로 변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지 않고 상급의 위계질서에 천방지축 끼여드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벌을 받으며, 그곳의 위계질서를 지혜롭게 살펴서 적절한 일을 맡는 데 성공한 치히로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순종으로 인하여 은총을 받는다. (85)

3.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한옥의 지붕곡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그것이 저고리 깃이나 버선 같은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이루게 된 것은 이 같은 과학적 노력에 더하여 주변의 산세 특히 뒷산과의 조화를 고려한 미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98)

사대와 사대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특히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일환이었던 조선의 사대란 적극적인 세계화 정책의 일환이었을 따름이지 (자주성이나 주체성과 대립하는) 소극적인 사대주의적 근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102)

“첫째는 일본 같은 나라와는 애당초 지리적 조건도 다르고 문화권 내의 위치도 달랐습니다. 이미 성호선생이 갈파한 대로 일본은 섬나라라, 원래 작전지리상 유리했고, 또 문화권 내의 변두리요 미개국이라고 관념된 나라에 당시 누가 관심을 갖기나 했나요?" (103)

4. 일본의 기교와 한국의 격
비어 있는 형태에서 충실한 정기가 배어나오는 것, 육체의 기교를 멀리하고 정신의 격을 가까이 하는 것, 이 같은 한국의 미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고 다만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밖에 없었던 야나기는, 그것을 완전하지 못하고 갖추어지지 못한 비어 있는 형태로서 받아들였다. (111)

5.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정신의 격이 세련된 까닭에 형식의 기교는 서투른 것처럼 보이는 한국 예술… (119)

6. 자연과 작위를 통합시킨 일본의 세(勢)
세라는 것은 도학을 부정하고 인욕을 긍정하는 일본적 사고의 산물이다. 야나기는 일본적 자연을 토대로 삼은 위에, 근대적 작위를 동시대의 세로 쌓아 올렸다. (123)

3부 한국인의 미의식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8)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름다옴’의 본뜻이 사호(私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한국인은 예로부터 아름다움의 뿌리가 취향에 있음을 강하게 의식해온 것이다. (130~131)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뿐 아니라 정신미(精神美)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131)

1.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사상이 일상의 척도로 작용할 경우 취향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취향으로부터 형성된 사상은, 다시 취향을 통해 전승되며, 취향을 통해 퍼져나간다. 따라서 취향으로서의 한국인의 미의식에는 음양오행사상으로 체계화된, 상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사상이 담겨 있다. 특히 상이란 형상에서부터 심상에까지 걸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속에는 미의 문제뿐 아니라 진과 선의 문제까지 포함된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미의식을 돌아보는 것은 한국인의 가치관 전반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139)

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되, 그로부터 적어도 몇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의 미학이 아닌 원경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 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拙)하기 보다 아(雅)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142)

2. 아졸미(雅拙美)또는 고졸미(古拙美)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평균치를 넘어서는 우아함을 갖춘 상은 어느 정도 형의 졸함을 수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은 도인의 격조를 지닌 선비의 글씨가 어린아이 같은 치졸한 맛을 풍기는 이치와도 같다. 상의 아름다움은 형의 어눌함을 수반하며, 높은 경지의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성격을 지닌 형상을 가리켜 아졸(雅拙)하거나 고졸(古拙)하다고 하는데, 한국 문화는 이렇게 상의 세련됨과 형의 어눌함이 어우러진 아졸함이나 고졸함의 형상으로 넘쳐난다. (146)

3. 발효맛과 생기의 마감
발효식품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얼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162)

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돌장승은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금하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손주들의 재롱을 웃는 얼굴로 받아들이는 마음씨 좋은 시골 할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사기와 싸워 이기는 대신,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여 생기를 북돋움으로써 벽사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적 비보의 원리이자 한국적 미의식의 원리다. (170)

5. 해학과 신명
결국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173)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자화상으로 하여금 눈물과 한을 넘어 웃음과 흥으로 휘몰아치게 하는 원동력이다. (177)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恨)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또는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9)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적인 정서의 한복판에 한(恨)이 자리잡고 있다는 식의 처량하고 자기연민으로 넘치는 주장은 그만두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의 정서 역시 한국적인 정서의 일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고 과거의 상처를 미래의 청사진 위에 들이대는 어리석은 주장을 계속할 까닭은 없다. 다만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상극적인 것의 늪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계하기 위해, 지난 세기의 한에 대한 담론을 역사책의 한켠에 선명하게 기록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180~181)

6. 고지도와 명당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특히 지도는 국토의 자연행세와 그 속에 담긴 유형적 문화재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회화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지도에는 땅과 측량과 관계되는 과학의 영역이 있고, 땅을 생명체로 인식해온 우리 조상들의 독특한 지리관. 우주관이 있으며, 땅을 채색그림으로 묘사한 화원들의 예술이 담겨 있다.” (185)

“사람은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람은 시간에 대한 사유보다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 절실해 한다.” (186)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평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자신이 공간취향이 발붙일 자리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186)

오늘의 우리는 어제 우리의 자리로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가는 중이다.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의 경쟁’에 쫓겨 성찰의 자세를 내던진 지난 세기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하지만 한 세기 동안 공론적인 비판의 장에서 배제되었던 그것을 이제 와서 고스란히 되살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우리들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겨를 없이 식민지가 되어 버렸고, 해방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길로 달려갔다. … 철저한 비판의 시기를 갖지 못하고, 그것을 완결하지 못하고 이제 다시 계승을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비극이다.” (191)

당신의 마음 속에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과 무관한 동기에 따라 기억 속에 자리잡은 공간적 심상이 있다면, 그 같은 공간적 심상으로부터 문화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통찰을 제공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 취향이며 저다움의 미의식의 교두보라고 말이다.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느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200)

7. 백의와 색동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인 소색이란 것이다. 소색이란 무엇인가. 바탕 소(素)에 색 색자(色),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이다. (206)

“동양화에 있어서 공간은 그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비가시적인 풍요로움으로부터 실체인 모든 것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기도 한다. … 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 (210)

한국인은 누구인가.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과 마주칠 경우, 누구든지 마음 한구석에 떠올리는 것이 있다. 백의민족이라는 표상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표상은, 한국인의 마음 속에 친근하게 자리잡고 있는 동시에 어딘가 불편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214)

백의민족의 이미지는 풍요로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취향을 빼앗은 대신, 척박한 강박의 틀거리를 덮어씌우는 이데올로기를 떠안겼다. 따라서 취향의 해방을 위해서는, 풍요로운 성찰을 토대로 한 진정한 저다움을 위해서는, 먼저 백의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표상과 결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어느새 친근한 벗인양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는 백의민족의 표상을 향해 ‘백의민족이여 안녕, 그동안 겪어내야 했던 뼈아픈 이십 세기여 안녕, 이십 세기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데올로기여 안녕, 역사의 갈피 속으로 영원히 안녕! 이라는 단호한 고별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23)

고유색의 부재란 한국 도시 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의 문제인데, 이 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잡고 있다. (225)

일상의 취향의 혁명을 앞당길 견인차는 세련되고 전인적인 엘리트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촌스럽고 뒤처지는 남녀노소 장삼이사들의 일상적인 감수성이다. (227)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적어도 미의 문제에 관한 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보다는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쿨한 프리즘이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231)

개성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232)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36)

2. 상생 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사실로는 졌지만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신조였다.” (250)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의 눈을 떠보니, 그들이 탁월한 예술가인 까닭은 그곳의 낯익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돌아보게 만든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곳의 대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응시할 수 있게 만든 그림들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 “우리 민족이 애당초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고 우리의 자연이야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이 분명하니, 결국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삶 자체가 본모습을 잃은 데다 우리네 삶과는 무관한 그림들이 양산되었고, (다소 거친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들이 거간 노릇을 하면서 우리네 삶과는 무관한 남의 그림들에게 우리의 시선을 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252~253)

3.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
조선문화의 어느 대목에서는 적조미와 명랑성이 뒤엉킨 장면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처럼 상생 지향이 만들어낸 탈속의 경지가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로 수렴되었을 경우다. (257)

4.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의, 평균적인 한국인은 오히려 라이벌을 앞에 두고도 노래하며 춤추며 물러서는 처용, 모진 가난의 한스러움을 통하여 오히려 그 마음이 여려지고 착해져간 박 홍보의 경우처럼 내향적. 선적인 삶의 궤적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 꾸준하고도 집요한 시김새의 과정을 통하여 울창하고도 너그러운 그늘을 드리우게 되는 판소리예술의 성취경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 결코 그렇게 쉽사리 만만하거나 그렇게 쉽사리 허술한 것은 아니다.” (260)

5.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
기쁨. 산다는 것의 기쁨. 육체의 기쁨.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 이것이 바로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로 승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한국적인 감성의 본질이다. (268)

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국제적인 안목과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토속적인 안목과 감각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양자는 창조의 주체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추사는 ‘토속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과 ‘남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창조적으로 회통시켰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274)

그러고 보면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이 우리네 삶의 현장 곳곳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눈에 띈다. 몇백 년전의 순간에 정지해버린 듯한 남대문과 이십 일 세기를 향해 날렵한 촉수를 뻗친 듯한 고층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사잇길을 이리저리 다니는 것이 우리들의 삶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공존을 옛것 쪽으로 되돌리거나 혹은 새것 쪽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그것들을 하나로 버무려내는 모순적인 공존을 통해 창조의 길로 나아가는 유연하고도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새것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지금 이 순간’에 살아 남은 옛것의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277~278)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유월의 햇살 아래 붉은 악마로 서 있었던 우리 모두가 눈부시게 깨달았듯이,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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