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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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강영희
내가 찾고 싶었던 저자 소개는 좀더 사람냄새 나는 정보들이었는데, 결국 고만고만한 정보에서 그쳐야 했다.
강영희는 문화평론가이다.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셈이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으며, 논문으로 <일제강점기 신파양식에 대한 연구, 1989>가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이 인터뷰 자료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자료당 가격이 비싸서 맛보기로 만족해야 했다.)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닌 적도 있다고 한다.
<2> 읽고난 소감
처음으로 우리 것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 지난 시절 학교에서 배운 우리의 역사와 미술, 문학 작품등을 떠올려봤다. 거기에 따른 해석은 저자의 말처럼 ‘식민사관’에 기반한 것이었다. 선생님들조차 확실한 주관없이 그저 이렇게 해석한다더라 정도의 말에서 그치곤 했다. 쟁점이 될만한 것은 ‘사대’냐, ‘자주’냐 정도였다.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우리의 것이 고작 이정도란 말야? 우린 한의 정서뿐이야? 백의가 비애의 감정이라고? 우린 왜 스스로를 못났다고 낮추기만 하는 걸까?’ 사대와 자주를 나누는 사고 자체도 식민사관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반작용을 지닌 민족사관의 산물이라는 지적은 날카로웠다.
아마 이 책을 접하기 전 혹시라도 야나기에 대해 미리 접했다면 그 시각아래 깔린 전제를 읽어내지 못하고서 그가 가진 자기애적 시각에 나 역시 동조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이광수의 책에 대해 팀을 나누어 난상토론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이광수의 입장에서 본 팀이었는데, 주된 논지는 이렇다. 그의 치적이 어찌하든 어쨌든 한민족을 조금이라도 발전시키고 개화하려던 노력의 소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는가? 이것이 야나기에 대한 시각과도 동일할 것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예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 뒤에 숨은 진실이다.
“피카소에 의해 간택된 아프리카의 민예는 아프리카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카소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점,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조선의 민예가 그것의 발견자인 일본인의 놀라운 직관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듯 말이다.” (57p)
세상을 좁아지고 남을 들여다보고 섞일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먼저 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섞임’ 과 ‘받아들임’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동감한다. 세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동북아시아의 문화권 전체를 시야 속에 확보한 세계인인 동시에 진경산수의 아름다움을 시야 중심에 놓은 한국인이었던 ‘겸재’가 역할 모델이 될 만하다.
“한국인과 세계인, 토속성과 세계성이 창조의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경계를 허물고 손잡는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둘이고 모순이되 상생적인 둘이며 창조적인 모순이 될 것이다. ” (26p)
부인(否認)은 새로운 출발선이 되지 못한다. 인정하고, 긍정하고 난 뒤에야 새 출발이든 뭐든 가능한 법이다. 부인, 부정은 회피다. 한국민으로서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제대로 찾으려면 우리 것을 우리의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라.
저자의 표현대로 ‘필름이 끊어진’ 상태로 있던 우리의 기억 상실이 한국병의 원인이자 역으로 잠재의식속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도 있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을 일깨울 것인가? “전통을 넘으 그 깊숙이 자리 잡은 생활 철학과 생활감정의 줄거리에 가 닿음”으로써 기억속 심상을 회복하는 길이 있음을 제시했지만, 이것으로 감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다시 보게 된 단어는 ‘승화’였다. 한을 흥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던 우리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가슴에 와 닿았다. 울음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는 힘. 포용하고, 그것을 곰삭혀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줄 아는 힘이 진정한 우리 문화의 저력은 아닐까?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나는 문화예술쪽에 소질이나 능력도 없으면서 늘 집착해있었다. 왠지 모를 동경. 내용 중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나올 때 이거구나 무릎을 쳤었다. 나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상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공간 취향을 회복하는 것, 우리의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힘, 이런 것들을 ‘축제’에 담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정체성을 전 국민적으로 재확인하고 살려주는 그런 축제를 기획하고 싶다. 자랑스런 한국인임을 가슴 깊이 새기고, 앞으로 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게. 물론 축제의 색채는 ‘밝고 맑은’ 색동으로 꾸며질 것이다.
“기억의 회복은 혁명적인 난장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예술의 몫이 아니라 일상과 취향의 몫이 될 것이며, 일상과 취향의 혁명이 문화와 예술의 변화로 이어지는 한판의 반전으로 전개될 것이다.” (226p)
<3> 내가 저자라면
수미상관과 정반합의 변증법식의 전체적인 구성이 신선하고, 내용을 이해해 들어가는 데도 썩 괜찮았다. 처음에 제시한 한국인과 세계인의 갈림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부분. 그것을 논리적이고도 재미있게 풀어나간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그 갈림길을 마주치고선 내린 결론.
그러나 사실탐색, 기존관점 반론, 긍정까지 잘 나가다 마지막의 비평과 결론부분은 끝머리 아구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말만 하기 뭐하니, 비평도 넣지 식의 구색맞추기 정도로 끝이 졸하였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우리의 문화를 다루면서 축제와 난장과 같은 ‘흥’문화를 다루지 않은 점 많이 아쉬웠다. 한이 흥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위의 것을 다뤄주었더라면 더욱 와 닿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전반적으로 ‘미술사’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서일 것이다. 또한 2004년에 발간되었다면 청계천 복원 전이다. 저자가 청계천의 복원을 공간적 취향차원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 ‘기억의 심상회복’에서 어떻게 말할지 무척 궁금하다.
<4> 글 속 인상적 글귀
ꋯ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20p
ꋯ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서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간의 엔트로피 법칙 또는 불가역성은 덧없음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진리를 탄생시킨 우주의 원죄다. 이 같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항거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 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28p
ꋯ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랴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32p
ꋯ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찰나인 동시에,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이다. 낯익은 자신의 취향을 모욕적으로 내팽개치고 낯선 타인의 취향을 선망의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48, 49p
ꋯ취향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육체와 같은 것이며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이룩한다. 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취향을 겹쳐 놓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50p
ꋯ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이T는 모든 것의 원리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50p
ꋯ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을 창조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의 주체인 한국인의 미의식으로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을 꿰뚫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128p
ꋯ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다옴’의 본뜻이 사호(私 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129p
ꋯ상(象)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生氣)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한 점의 도자기나 한 구의 조각에서 살아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생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의 배후에 상의 미의식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153p
ꋯ상극 역시 만물의 생성변화에 필요악인 까닭에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상극관계를 애당초 회피할 수 는 없다.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165p
ꋯ싸워 이기는 대신,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여 생기를 북돋움으로써 벽사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적 비보의 원리이자 한국적 미의식의 원리다. -170p
ꋯ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자화상으로 하여금 눈물과 한을 넘어 웃음과 흥으로 휘몰아치게 하는 원동력이다. -177p
ꋯ한국인의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178p
한국적 한이란 말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할 대, 이는 한민족에게만 있다거나 유달리 한이 넓고 깊다거나 한 이유에서가 아니고, 그것을 초극해가는 삶의 양식 자체가 다른 민족의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국인은 한을 삭이면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그 한을 즐기면서 멋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179p
ꋯ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187p
ꋯ풍수사상은 모든 지리적 요소들에 매우 인간적인 실존성을 부여한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삶과 관련된, 상호 유기적 관계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땅에 인간적 의미를 주어, 이용과 소유의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삶터로 환원시키는 것이 풍수사상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풍수란 주변의 공간을 살아있는 ‘기억속의 심상’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p
ꋯ명당이란 본래부터 그곳에 존재한 자연적인 풍경 위에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식에 따라 생겨난 인문적인 풍경을 겹쳐놓은 것이다. -196p
ꋯ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색 취향과 관련된 부정적인 자화상.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소멸 지향의 자의식. 제국주의자의 동정에 기대야만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인의 정체성. 이상은 조신인 스스로는 아무런 창조적 에너지도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일본인의 은총에 의지해야만 ‘기적과도 같은’ 창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 일본인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본질이다. -219p
ꋯ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단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미의 문제에 관한한,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쿨한 프리즘이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개성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231p
ꋯ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사물을 의식함으로써 그 사물을 의식하는 자신을 의식하고 반성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정신 내용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는 인식론의 주제를 떠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자의식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취향에 대한 담론은 당연히 사실을 당연하게 말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233, 234p
ꋯ개성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233p
IP *.229.28.221
내가 찾고 싶었던 저자 소개는 좀더 사람냄새 나는 정보들이었는데, 결국 고만고만한 정보에서 그쳐야 했다.
강영희는 문화평론가이다.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셈이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으며, 논문으로 <일제강점기 신파양식에 대한 연구, 1989>가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이 인터뷰 자료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자료당 가격이 비싸서 맛보기로 만족해야 했다.)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닌 적도 있다고 한다.
<2> 읽고난 소감
처음으로 우리 것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 지난 시절 학교에서 배운 우리의 역사와 미술, 문학 작품등을 떠올려봤다. 거기에 따른 해석은 저자의 말처럼 ‘식민사관’에 기반한 것이었다. 선생님들조차 확실한 주관없이 그저 이렇게 해석한다더라 정도의 말에서 그치곤 했다. 쟁점이 될만한 것은 ‘사대’냐, ‘자주’냐 정도였다.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우리의 것이 고작 이정도란 말야? 우린 한의 정서뿐이야? 백의가 비애의 감정이라고? 우린 왜 스스로를 못났다고 낮추기만 하는 걸까?’ 사대와 자주를 나누는 사고 자체도 식민사관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반작용을 지닌 민족사관의 산물이라는 지적은 날카로웠다.
아마 이 책을 접하기 전 혹시라도 야나기에 대해 미리 접했다면 그 시각아래 깔린 전제를 읽어내지 못하고서 그가 가진 자기애적 시각에 나 역시 동조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이광수의 책에 대해 팀을 나누어 난상토론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이광수의 입장에서 본 팀이었는데, 주된 논지는 이렇다. 그의 치적이 어찌하든 어쨌든 한민족을 조금이라도 발전시키고 개화하려던 노력의 소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는가? 이것이 야나기에 대한 시각과도 동일할 것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예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 뒤에 숨은 진실이다.
“피카소에 의해 간택된 아프리카의 민예는 아프리카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카소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점,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조선의 민예가 그것의 발견자인 일본인의 놀라운 직관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듯 말이다.” (57p)
세상을 좁아지고 남을 들여다보고 섞일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먼저 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섞임’ 과 ‘받아들임’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동감한다. 세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동북아시아의 문화권 전체를 시야 속에 확보한 세계인인 동시에 진경산수의 아름다움을 시야 중심에 놓은 한국인이었던 ‘겸재’가 역할 모델이 될 만하다.
“한국인과 세계인, 토속성과 세계성이 창조의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경계를 허물고 손잡는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둘이고 모순이되 상생적인 둘이며 창조적인 모순이 될 것이다. ” (26p)
부인(否認)은 새로운 출발선이 되지 못한다. 인정하고, 긍정하고 난 뒤에야 새 출발이든 뭐든 가능한 법이다. 부인, 부정은 회피다. 한국민으로서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제대로 찾으려면 우리 것을 우리의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라.
저자의 표현대로 ‘필름이 끊어진’ 상태로 있던 우리의 기억 상실이 한국병의 원인이자 역으로 잠재의식속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도 있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을 일깨울 것인가? “전통을 넘으 그 깊숙이 자리 잡은 생활 철학과 생활감정의 줄거리에 가 닿음”으로써 기억속 심상을 회복하는 길이 있음을 제시했지만, 이것으로 감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다시 보게 된 단어는 ‘승화’였다. 한을 흥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던 우리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가슴에 와 닿았다. 울음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는 힘. 포용하고, 그것을 곰삭혀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줄 아는 힘이 진정한 우리 문화의 저력은 아닐까?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나는 문화예술쪽에 소질이나 능력도 없으면서 늘 집착해있었다. 왠지 모를 동경. 내용 중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나올 때 이거구나 무릎을 쳤었다. 나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상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공간 취향을 회복하는 것, 우리의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힘, 이런 것들을 ‘축제’에 담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정체성을 전 국민적으로 재확인하고 살려주는 그런 축제를 기획하고 싶다. 자랑스런 한국인임을 가슴 깊이 새기고, 앞으로 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게. 물론 축제의 색채는 ‘밝고 맑은’ 색동으로 꾸며질 것이다.
“기억의 회복은 혁명적인 난장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예술의 몫이 아니라 일상과 취향의 몫이 될 것이며, 일상과 취향의 혁명이 문화와 예술의 변화로 이어지는 한판의 반전으로 전개될 것이다.” (226p)
<3> 내가 저자라면
수미상관과 정반합의 변증법식의 전체적인 구성이 신선하고, 내용을 이해해 들어가는 데도 썩 괜찮았다. 처음에 제시한 한국인과 세계인의 갈림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부분. 그것을 논리적이고도 재미있게 풀어나간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그 갈림길을 마주치고선 내린 결론.
그러나 사실탐색, 기존관점 반론, 긍정까지 잘 나가다 마지막의 비평과 결론부분은 끝머리 아구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말만 하기 뭐하니, 비평도 넣지 식의 구색맞추기 정도로 끝이 졸하였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우리의 문화를 다루면서 축제와 난장과 같은 ‘흥’문화를 다루지 않은 점 많이 아쉬웠다. 한이 흥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위의 것을 다뤄주었더라면 더욱 와 닿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전반적으로 ‘미술사’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서일 것이다. 또한 2004년에 발간되었다면 청계천 복원 전이다. 저자가 청계천의 복원을 공간적 취향차원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 ‘기억의 심상회복’에서 어떻게 말할지 무척 궁금하다.
<4> 글 속 인상적 글귀
ꋯ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20p
ꋯ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서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간의 엔트로피 법칙 또는 불가역성은 덧없음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진리를 탄생시킨 우주의 원죄다. 이 같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항거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 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28p
ꋯ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랴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32p
ꋯ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찰나인 동시에,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이다. 낯익은 자신의 취향을 모욕적으로 내팽개치고 낯선 타인의 취향을 선망의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48, 49p
ꋯ취향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육체와 같은 것이며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이룩한다. 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취향을 겹쳐 놓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50p
ꋯ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이T는 모든 것의 원리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50p
ꋯ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을 창조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의 주체인 한국인의 미의식으로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을 꿰뚫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128p
ꋯ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다옴’의 본뜻이 사호(私 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129p
ꋯ상(象)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生氣)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한 점의 도자기나 한 구의 조각에서 살아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생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의 배후에 상의 미의식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153p
ꋯ상극 역시 만물의 생성변화에 필요악인 까닭에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상극관계를 애당초 회피할 수 는 없다.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165p
ꋯ싸워 이기는 대신,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여 생기를 북돋움으로써 벽사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적 비보의 원리이자 한국적 미의식의 원리다. -170p
ꋯ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자화상으로 하여금 눈물과 한을 넘어 웃음과 흥으로 휘몰아치게 하는 원동력이다. -177p
ꋯ한국인의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178p
한국적 한이란 말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할 대, 이는 한민족에게만 있다거나 유달리 한이 넓고 깊다거나 한 이유에서가 아니고, 그것을 초극해가는 삶의 양식 자체가 다른 민족의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국인은 한을 삭이면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그 한을 즐기면서 멋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179p
ꋯ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187p
ꋯ풍수사상은 모든 지리적 요소들에 매우 인간적인 실존성을 부여한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삶과 관련된, 상호 유기적 관계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땅에 인간적 의미를 주어, 이용과 소유의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삶터로 환원시키는 것이 풍수사상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풍수란 주변의 공간을 살아있는 ‘기억속의 심상’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p
ꋯ명당이란 본래부터 그곳에 존재한 자연적인 풍경 위에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식에 따라 생겨난 인문적인 풍경을 겹쳐놓은 것이다. -196p
ꋯ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색 취향과 관련된 부정적인 자화상.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소멸 지향의 자의식. 제국주의자의 동정에 기대야만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인의 정체성. 이상은 조신인 스스로는 아무런 창조적 에너지도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일본인의 은총에 의지해야만 ‘기적과도 같은’ 창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 일본인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본질이다. -219p
ꋯ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단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미의 문제에 관한한,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쿨한 프리즘이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개성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231p
ꋯ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사물을 의식함으로써 그 사물을 의식하는 자신을 의식하고 반성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정신 내용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는 인식론의 주제를 떠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자의식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취향에 대한 담론은 당연히 사실을 당연하게 말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233, 234p
ꋯ개성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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