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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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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2일 19시 05분 등록
백범일지 (백범정신신양회 엮음, 하나미디어)



1.
뉴욕에 있었을 때, 나는 전공공부는 뒤로하고 약 한 달 동안 도서관에 틀어박혀 한국에 관한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 왜 그렇게 한국의 자료와 한국적인 것들에 목말라했는지. 그때, 아무도 없던, 눅눅한 곰팡이가 자리했던 그 좁은 도서관에서 ‘백범일지’를 탐독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새롭다. 눈물을 흘리는 도중 누군가 나타나 재빠르게 눈물을 훔치던 기억- 그리고 외롭던 도서관의 냄새가 다시금 펼쳐졌다.

UN에서 인턴을 할 때였다. 이러저러한 복잡한일들로 인해 여기서 일을 해야 하나,는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인임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이 이국 땅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고는 한없이 작아지고 위축되던 시기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었다.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다른 한국인을 만나자니 괜히 소문만 퍼질 것 같고, 외국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자니 내 나라의 상황을, 내가 처한 위치를 잘 이해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책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개화기의 우리 선조들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당했을 때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들로부터 위로 받기로 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당했을 때 인간적으로 어떠한 갈등을 겪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교과서를 벗어나 처음으로 명성황후를, 이 준 열사를, 윤봉길 의사를 그리고 김옥균을, 유길준을 만났다. 뉴욕에 위치한 학교라 자료가 미약했지만, 미약한대로 그들과의 만남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백범선생을 만났다.
실은 나는 자서전 읽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자서전을 읽다 보면 본인이 쓰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강조를 많이 하고, 본인이 감추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한 언급 정도만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약점을 볼 수 있는 재미가 솔솔하다. 더 이상 우리는 초등학생이 읽는 것 처럼 ‘우리가 이 위인에게 배워야 할 것은 이런 이런 점입니다.’ 라고 강요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판단 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백범 일지도 그랬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저 ‘위로 받고자’ 해서 무작정 집어들었고, 또 선생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읽어내려 갈수록 향기도 느꼈던 것 같다. 특히, 임시정부 주석까지 역임하고도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96) 라고 담담하게 서술한 것을 보면서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그러나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이고, 그 자신이 직접 써 내려간 자서전이라 본인이 감추고자 했던 부분- 미국과 이승만-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비판도 했지만, 정작 이승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고, 특히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특별히 기술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구절로 보아 미국에 대해서는 호감 정도만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미국과 국내진공작전까지 함께 계획했던 것만큼 백범은 미국의 도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아니면, 미국의 원조만을 받다가 해방공간에서 일찍 암살당했기에 그런 특별언급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곰팡이 냄새 속의 도서관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I have a dream’ 이라고 외쳤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나의 소원’이라고 외쳤던 백범 김구선생. 그 둘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이길래 한 사람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교과서에 실리고 또 다른 사람은 오직 전세계 유일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만 알려 져있는 것일까 라는.

선생은 말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며,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니... 독립운동의 험난한 과정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도 힘을 길러 전세계에 우뚝서는 것을 꿈꾸었건만 그는 단지 독립을 하고나면 문화의 힘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고- .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438)

2.
두 번째 그림은 샹하이에 위치한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와 홍커우 공원을 방문헀을 때의 그림이다. 상해임정유적지는 조그만 골목 안에 숨어있듯 위치해 있었다. 그 옛날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든 그 곳- 지금 둘러보아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미미한 시작」인 곳이었다. 1층에 있는 회의실의 조그만 탁자와 고작 6개의 의자, 2층엔 임정의 독립투사들이 머물렀던 부엌과 숙소, 그리고 김구선생의 방이 위치해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렇게 협소한 곳에서, 정말 독립투사들은 조국이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이 무력한, 초라한 현실에서 어떻게 스스로 추스르며 독립을 위해 싸웠을까?’
성서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끝은 창대 하리라-‘
만약 그때 상해 임시정부가 위치한 그 곳에서 계셨던 분들께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시면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 잘했다, 박수를 쳐주실까 아님, 어떻게 지켜낸 국가인데 이게 뭐냐, 하시며 내치실까. 궁금했다.

실은 내가 샹하이에서 감동을 받은 부분은 백범선생에서가 아니라 윤봉길 의사에서였다.
윤봉길의사가 일본 관리들에게 도시락폭탄을 던진 의거의 현장인 홍커우공원의 윤봉길의사기념관은 그의 역사적 궤적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흉상 앞에서 잠시 멈춰서서 “25살”에 나라를 위해 폭탄을 던지고 자폭하려 했던 한 젊은이를 마주보았다.

빛 바랜 흑백사진 속의 한 청년이 있었다. 반듯한 이마, 마치 깍아 만든 조각을 연상케 하는 푹 들어간 범상치 않은 광채의 눈, 높은 코, 단호하게 다문 입-
이 잘 생긴 젊은이가 바로 윤봉길의사였다. 더 놀라운 것은 거사 바로 전날, 김구선생과 애국단 가입선서를 한 뒤 찍은 사진이었다. 담담하고 확신에 가득 찬 그 얼굴 속에 나는 내 나이가 부끄러웠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세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226)

누군가 목숨을 던진 자, 자신을 희생한 자에 의해 역사는 발전한다 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초라한 3층 쪽방같은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확신했던 것은 바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던질 확신, 언젠가 스스로를 ‘부름’이 있을 때 한 점 주저 없이 던질 각오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날. 나는 상해임시정부와 홍커우 공원을 둘러보며 먼저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내 자신을 던질 수 있는가?’ 라고.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혹시 자네 앞길에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68)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18)

3.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내용인용)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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