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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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1876. 7. 11 황해도 해주~1949. 6. 26 서울)
김구의 활동사
어렸을 적 이름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로 후에 구(龜)로 개명하였다가 다시 구(九)로 개명하였다. 10대에 동네에서 훈장을 지내다가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가 되었다. 동학군 토벌 때에 집으로 다시 은거하던 중 스승 고능선을 만났다. 후에 만주로 건너가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집으로 돌아오던 중 치하포에서 만난 일본군 쓰치다를 때려죽였다.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사형을 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사면이 되지 않자 탈옥을 시도하여 피신 생활을 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도 했다.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한 후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썼으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시해 사건으로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안창호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초대 경무국장을 지냈으며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전략적 항복 선언으로 참전하지 못하고 8. 15 해방을 맞았다. 서울로 돌아와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였고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 의견서를 발표하였으며 북행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그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이듬 해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그해 6월,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통에 맞아 운명하였다.
김구의 개인사
3살 :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마마자국이 남음
13세: 아버지가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어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김구는 친척집을 전전하였음
20세: 스승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였다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
21세: 치하포 사건으로 해주옥에 투옥
23세: 탈옥. 대신 부모님이 투옥됨.
26세: 아버지 사망
27세: 여옥과 맞선을 보고 약혼함
28세: 약혼녀 여옥 병사
29세: 안신호와 약혼하였으나 곧 파혼
31세: 최준례와 결혼
33세: 첫째 딸 태어나 며칠 만에 사망
35세: 둘째 딸 화경 태어남
36세: 일제의 안악 사건 조작으로 체포되어 15년형 선고 받음
40세: 둘째 딸 화경 죽음. 김구 가석방
41세: 셋째 딸 은경 태어남
42세: 셋째 딸 은경 죽음
43세: 아들 인 태어남
49세: 아내 최준례 사망
59세: 여뱃사공 주애보와 동거(피신 중 신분을 감추기 위함)
63세: 이운환의 저격을 받음
64세: 어머니 사망
70세: 장남 인 사망
74세: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
그의 인생이 행복하였는지 불행하였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이었다고 했으나 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엿다. 그가 자신의 칠십 평생을 돌아보면서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라 살아져서 살았던 것'이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살아져서 살았다는 사람치고 참 정열적으로 살았다. 그의 인생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굴곡을 함께 했고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교육산업을 통해 이 나라 많은 젊은이들이 눈과 정신을 밝혔으며 국민의 아버지로 역사에 남았다.
너무나도 유명한 백범 김구, 누구나 알고 있는 백범일지. 교과서에서만 그 이름을 접해보았다면, 새로이 그를 찾을 것을 권한다. 독립운동가로서, 교육자로서, 평생 한 가지 신념을 좇은 인간 김구를 만나보기 바란다.
책을 읽고-
이 책 백범일지는 뱀범 김구가 자신의 행적을 후에 어린 두 아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은 주해본을 펴낸 도진순씨가 대중화를 위해 다시 정리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로, 백범이 기억하지 못한 관련 인물, 유적 등에 대한 자료를 보충하여 주해본을 정비, 체계를 다시 잡은 책이다. 엮은이가 밝혔듯, 백범일지 원본은 과거의 일을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것이라 시기가 모순되거나 인명, 지명에도 착오가 적지 않아 주해본에서 수정이 쉽지 않았는데, 대중용 및 청소년용으로 이 책을 펴내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비교적 읽기 매끄럽고 시각적으로 아주 훌륭하다. 국사책에서 읽던 인물들의 사진과 자필이 실려 있기 때문에 간혹 섬뜩하기까지 한데, 일본 천황 시해를 시도한 이봉창 의사나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전 사진과 선언문, 그들의 유서까지 실려 있다.
고어의 예스런 문체 때문인지, 생생한 사진 속 그들이 눈빛과 격동의 역사이야기에 빠져있어서였는지, 책 한권을 다 읽고 나니 그 시절의 분위기에서 한참동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일어나 크게 호령하며 왜놈 스치다를 발길로 차서 한 길이나 되는 계단 밑으로 떨어뜨려 칼을 빼앗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도질 한 후 손으로 그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에 들어가 호통을 치는’ 김구.
감옥에서 인천 항만 건설 공사의 노역에 동원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가면서 일이 너무 고되어 여러 번 떨어져 죽을 마음을 먹는 김구.
동네 젊은이가 가지고 다니는 총을 빼앗았더니 그가 후에 이완용을 암살을 시도한 것을 듣고 그때 총을 빼앗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는 김구.
과거 자신의 탈옥 사실을 아는 자를 감옥에서 다시 만나자 그가 밀고하여 자신의 형량이 늘어날까봐 그가 출소할 때까지 친절 또 친절하게 구는 김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큰 뜻을 이루겠다며 찾아온 청년에게 도시락 폭탄을 건네주는 김구. 윤봉길 의거 이후 몸을 피해 숨어간 해염현의 절에서 붉은 입술과 분칠한 얼굴에 승복을 맵시 있게 입은 젊은 여승들을 보고 상해의 창녀촌을 떠올리는 김구.
그의 기록은 대체로 솔직했고 소박했으며 그래서 재미있었다. 그는 교과서에서 본 까만 안경에 두루마기를 걸친 엄격한 표정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이 책의 표지처럼 순박하게 웃을 줄 아는 사내였고 머리를 써 살아남을 줄 아는 전략가이자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까지 놓을 수 있는’ 대장부였다.
그가 이토록 조국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놈 스치다를 때려죽이던 순간에도, 감옥에서 죄인들을 가르치고 사형을 선고받던 순간에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배를 곯으며 후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던 순간에도, 광복군을 계획하던 중경에서 장남 인이 불결한 환경에 페병을 얻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그 순간까지, 때로는 그를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움직이도록 이끌어온 신념은 무엇인가? 인간 김구가 모든 것을 바쳐 지켜온 ‘조국의 자주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나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가 정녕, ‘남다른 인물’ 이었기 때문인가?
저격을 받아 쓰러지던 그 순간에, 그의 머리 속을 마지막으로 스치고 지나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 속에서
p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완전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길이 보전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 생각하고 행한 일이 다 이러한 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바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사람이지만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층민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의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p 32 관상서 [마의상서] 중 한 구절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p 68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았다.
‘너는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p 126 ' 선생님이 머리 풀고 다니는 오랑캐를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것이요, 피는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진수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랄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크고 훌륭한 상투를 얹는다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의 상류층은 백성을 학대하는 약탈자에 불과합니다. 백성들은 일자무식이라 탐관오리와 토호의 학대를 당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을 학대함같이 왜와 서양을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의 피를 빨아 왜놈과 양놈에게 바치고 아첨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문명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로 길러야 합니다. 또 애국시자들을 규합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해야 합니다.‘
p 145 환등기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 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절규하였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p 152..그런지 한 달이 못 되어 이의사가 동지 몇 명과 함께 경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길거리에서 밤을 팔다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생명이 위험하고, 이의사와 그의 동지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만약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이다. 우리가 눈이 멀어 그의 행동을 간섭하고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p 163 몸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나를 달아매고 때릴 때는, 조선시대 박태보가 보습단근질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했다는 일화를 기억했다. 겨울철이나 겉옷만 벗기고 속옷을 입은 채로 때리는데, 나는 ‘속옷을 입어 아프지 않으니 다 벗고 맞겠다’고 자청하여 알몸으로 매를 맞아 살가죽에 온전한 데라곤 없었다. 바로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 음식냄새를 맡을 때면,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해서 밥을 받아먹을까, 또 아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을 해다 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중국 한나라 때 소무가 흉노에게 잡혀 19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굶주리면서도 옷 솜털을 씹어 먹으면서 끝내 절의를 지켰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p 174
'의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니 국가에 대한 의무도 너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찍이 고능선 선생에게 의리가 무엇인지 배웠고, 또 삼척동자라도 개나 양에게 절하라고 시키면 응하지 않는다고 2세들에게 가르치던 네가, 왜놈 간수에게 머리 숙여 절하느냐? 지금 왜놈이 주는 콩밥과 붉은 옷 때문에 네가 왜놈에게 순종하는 것이더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게 종신형이나 10년형을 받고 갇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히 의병으로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남자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고 어린 학생을 가르치던 네가 지금은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 감옥 안에서 왜놈에게 순종하는 개 같은 생활을 견디고서, 15년 후 감옥을 나가면 공을 세워 순종한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
p 183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나랏일을 위하여 큰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 신민회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저 강도단에 비하면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너무 유치한 것이었다.
p 187 나는 서대문감옥에서 중형의 도적이 가벼운 횡령죄로 들어온 동료를 고발하여 종신형을 받게 하고, 자기는 그 공으로 형을 줄이고 후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았다. 만일 문가를 건드려 놓으면 감옥 눈치가 훤한 자이니 어떤 나쁜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안악 사건으로 근거 없이 15년형을 주는 왜놈들인데, 치하포 사건으로 왜놈을 죽이고 탈옥한 사실까지 발각되면 내 처치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제껏 감당하기 어려운 욕과 학대를 다 받고 만기가 1년 남짓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문가가 과거사를 이야기해 버리면 내 하 몸은 고사하고 늙은 어머님과 어린 처자는 어찌 될까?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굴었다. 집에서 부쳐 주는 사식도 틈을 타서 나눠 주고, 감옥 밥이라도 문가가 곁에만 오면 나는 굶으면서도 주었다. 그러다 문가가 먼저 만기 출옥하니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않게 시원하였다.
p 188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여러 번 떨어져 죽을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같이 쇠사슬을 맨 자가 인천항에서 구두 켤fp나 담뱃갑을 도적질한 죄로 두세 달 징역 사는 가벼운 죄수라 그자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아무 잔뀌도 무리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p 210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내게 와서 국무령으로 조각하라고 강권했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굳이 사양하였다.
첫째, 임시정부가 아무리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해주 서촌 미천한 김존위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다. 둘째, 이상룡과 홍진 두 분도 함께 일하려는 인재가 없어 실패하였는데, 내가 나서면 더욱 호응하는 인재가 없을 것이다.
p 226 칠십 평생을 돌이켜보니,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p 230 이봉창의 말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꺼내 주신 큰 돈을 받아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민단 사무실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서 같이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돈뭉치를 주시니 아무 말도 못하겠더이다. 제가 이 돈을 마음대로 써 버리더라도, 선생님은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못 나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십니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p 255 우리 민족의 비운은 대체로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실질적인 행복은 내 모른다 하고, 창시자 주희 이상으로 성리학만 주창하여 사색당파로 수백 년이나 다투어 왔으니, 민족 원기는 다 닳아 없어지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만 남았다. 이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오.
슬프다. 오늘날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향하여 낡고 봉건적이라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문제 또한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한꺼번에 할 것을 극력 주장하다가도, 레닌이 ‘식민지는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뒤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자,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청년들은 중국 정자와 주자의 방귀조차도 향기롭다다는 옛사람들을 비웃지만, 같은 입과 혀로 러시아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정신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자, 주자 학설의 신봉자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위해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p 279'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내게 이 말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노력한 참전 준비가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서안훈련서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투시킨 후 조직적으로 공작하게 하려고 미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는데,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나의 소원
p 306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지만,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되지 못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항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의 밖의 생각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지만, 그것도 바람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처럼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도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p 309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p 309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자유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일 개인에서 나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우리 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로 수백 년 계속하였다....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 년 동안 조선에서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 생활, 가정 생활, 개인 생활까지 규정하는 독재였다...우리 나라가 망하고 국민의 힘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국민의 머릿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니거나, 집권세력이더라도 사문난적이라는 이단의 범주에 들어가면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p 312 그러므로 한 학설을 표준우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할 것이다. 이래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놓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p 313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 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 및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을 대강 짐작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동포 각 개인이 충분한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정치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p 315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인류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늘 것이다. 인류에게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p 315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이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고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명을 달성할 민족은 한마디로 말하면 국민 모두를 성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p 318 옛날 한나라 지역의 기자가 우리 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다.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도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진다면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내가 저자라면
내가 백범일지의 저자라면, 이라고 생각하고 백범을 비판하기는 뭣하고, 백범일지를 엮은이에게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겠다. 주해본은 읽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대중과 청소년을 위해 엮은 책 치고는 고어와 한문이 아직도 많다. 동학의 ‘접주’라는 말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건 나뿐인가?
이 책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권에 비해 하권은 많은 사건들이 비교적 짧게 기록되어 있다.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역주로 보충되었다면 역사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외는 거의 만족스럽다. 책의 마지막에 백범의 행적을 연도별로 정리해 줌으로써 그의 장대한 기록의 내용들을 한눈에 정리할 수 있도록 해 준 것도 좋고, 특히 백범의 ‘나의 소원’을 덧붙인 것이 이 책의 진정한 백미라고 생각된다. ‘나의 소원’에 밝힌 백범의 생각,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독재 정치를 가장 멀리할 정치 형태로 규정하고 교육과 문화의 힘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은 만약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백범이었다면 이 나라가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구나-하는 아쉬움의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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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활동사
어렸을 적 이름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로 후에 구(龜)로 개명하였다가 다시 구(九)로 개명하였다. 10대에 동네에서 훈장을 지내다가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가 되었다. 동학군 토벌 때에 집으로 다시 은거하던 중 스승 고능선을 만났다. 후에 만주로 건너가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집으로 돌아오던 중 치하포에서 만난 일본군 쓰치다를 때려죽였다.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사형을 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사면이 되지 않자 탈옥을 시도하여 피신 생활을 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도 했다.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한 후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썼으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시해 사건으로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안창호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초대 경무국장을 지냈으며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전략적 항복 선언으로 참전하지 못하고 8. 15 해방을 맞았다. 서울로 돌아와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였고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 의견서를 발표하였으며 북행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그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이듬 해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그해 6월,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통에 맞아 운명하였다.
김구의 개인사
3살 :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마마자국이 남음
13세: 아버지가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어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김구는 친척집을 전전하였음
20세: 스승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였다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
21세: 치하포 사건으로 해주옥에 투옥
23세: 탈옥. 대신 부모님이 투옥됨.
26세: 아버지 사망
27세: 여옥과 맞선을 보고 약혼함
28세: 약혼녀 여옥 병사
29세: 안신호와 약혼하였으나 곧 파혼
31세: 최준례와 결혼
33세: 첫째 딸 태어나 며칠 만에 사망
35세: 둘째 딸 화경 태어남
36세: 일제의 안악 사건 조작으로 체포되어 15년형 선고 받음
40세: 둘째 딸 화경 죽음. 김구 가석방
41세: 셋째 딸 은경 태어남
42세: 셋째 딸 은경 죽음
43세: 아들 인 태어남
49세: 아내 최준례 사망
59세: 여뱃사공 주애보와 동거(피신 중 신분을 감추기 위함)
63세: 이운환의 저격을 받음
64세: 어머니 사망
70세: 장남 인 사망
74세: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
그의 인생이 행복하였는지 불행하였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이었다고 했으나 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엿다. 그가 자신의 칠십 평생을 돌아보면서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라 살아져서 살았던 것'이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살아져서 살았다는 사람치고 참 정열적으로 살았다. 그의 인생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굴곡을 함께 했고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교육산업을 통해 이 나라 많은 젊은이들이 눈과 정신을 밝혔으며 국민의 아버지로 역사에 남았다.
너무나도 유명한 백범 김구, 누구나 알고 있는 백범일지. 교과서에서만 그 이름을 접해보았다면, 새로이 그를 찾을 것을 권한다. 독립운동가로서, 교육자로서, 평생 한 가지 신념을 좇은 인간 김구를 만나보기 바란다.
책을 읽고-
이 책 백범일지는 뱀범 김구가 자신의 행적을 후에 어린 두 아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은 주해본을 펴낸 도진순씨가 대중화를 위해 다시 정리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로, 백범이 기억하지 못한 관련 인물, 유적 등에 대한 자료를 보충하여 주해본을 정비, 체계를 다시 잡은 책이다. 엮은이가 밝혔듯, 백범일지 원본은 과거의 일을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것이라 시기가 모순되거나 인명, 지명에도 착오가 적지 않아 주해본에서 수정이 쉽지 않았는데, 대중용 및 청소년용으로 이 책을 펴내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비교적 읽기 매끄럽고 시각적으로 아주 훌륭하다. 국사책에서 읽던 인물들의 사진과 자필이 실려 있기 때문에 간혹 섬뜩하기까지 한데, 일본 천황 시해를 시도한 이봉창 의사나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전 사진과 선언문, 그들의 유서까지 실려 있다.
고어의 예스런 문체 때문인지, 생생한 사진 속 그들이 눈빛과 격동의 역사이야기에 빠져있어서였는지, 책 한권을 다 읽고 나니 그 시절의 분위기에서 한참동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일어나 크게 호령하며 왜놈 스치다를 발길로 차서 한 길이나 되는 계단 밑으로 떨어뜨려 칼을 빼앗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도질 한 후 손으로 그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에 들어가 호통을 치는’ 김구.
감옥에서 인천 항만 건설 공사의 노역에 동원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가면서 일이 너무 고되어 여러 번 떨어져 죽을 마음을 먹는 김구.
동네 젊은이가 가지고 다니는 총을 빼앗았더니 그가 후에 이완용을 암살을 시도한 것을 듣고 그때 총을 빼앗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는 김구.
과거 자신의 탈옥 사실을 아는 자를 감옥에서 다시 만나자 그가 밀고하여 자신의 형량이 늘어날까봐 그가 출소할 때까지 친절 또 친절하게 구는 김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큰 뜻을 이루겠다며 찾아온 청년에게 도시락 폭탄을 건네주는 김구. 윤봉길 의거 이후 몸을 피해 숨어간 해염현의 절에서 붉은 입술과 분칠한 얼굴에 승복을 맵시 있게 입은 젊은 여승들을 보고 상해의 창녀촌을 떠올리는 김구.
그의 기록은 대체로 솔직했고 소박했으며 그래서 재미있었다. 그는 교과서에서 본 까만 안경에 두루마기를 걸친 엄격한 표정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이 책의 표지처럼 순박하게 웃을 줄 아는 사내였고 머리를 써 살아남을 줄 아는 전략가이자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까지 놓을 수 있는’ 대장부였다.
그가 이토록 조국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놈 스치다를 때려죽이던 순간에도, 감옥에서 죄인들을 가르치고 사형을 선고받던 순간에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배를 곯으며 후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던 순간에도, 광복군을 계획하던 중경에서 장남 인이 불결한 환경에 페병을 얻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그 순간까지, 때로는 그를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움직이도록 이끌어온 신념은 무엇인가? 인간 김구가 모든 것을 바쳐 지켜온 ‘조국의 자주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나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가 정녕, ‘남다른 인물’ 이었기 때문인가?
저격을 받아 쓰러지던 그 순간에, 그의 머리 속을 마지막으로 스치고 지나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 속에서
p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완전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길이 보전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 생각하고 행한 일이 다 이러한 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바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사람이지만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층민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의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p 32 관상서 [마의상서] 중 한 구절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p 68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았다.
‘너는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p 126 ' 선생님이 머리 풀고 다니는 오랑캐를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것이요, 피는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진수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랄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크고 훌륭한 상투를 얹는다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의 상류층은 백성을 학대하는 약탈자에 불과합니다. 백성들은 일자무식이라 탐관오리와 토호의 학대를 당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을 학대함같이 왜와 서양을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의 피를 빨아 왜놈과 양놈에게 바치고 아첨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문명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로 길러야 합니다. 또 애국시자들을 규합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해야 합니다.‘
p 145 환등기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 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절규하였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p 152..그런지 한 달이 못 되어 이의사가 동지 몇 명과 함께 경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길거리에서 밤을 팔다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생명이 위험하고, 이의사와 그의 동지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만약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이다. 우리가 눈이 멀어 그의 행동을 간섭하고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p 163 몸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나를 달아매고 때릴 때는, 조선시대 박태보가 보습단근질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했다는 일화를 기억했다. 겨울철이나 겉옷만 벗기고 속옷을 입은 채로 때리는데, 나는 ‘속옷을 입어 아프지 않으니 다 벗고 맞겠다’고 자청하여 알몸으로 매를 맞아 살가죽에 온전한 데라곤 없었다. 바로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 음식냄새를 맡을 때면,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해서 밥을 받아먹을까, 또 아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을 해다 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중국 한나라 때 소무가 흉노에게 잡혀 19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굶주리면서도 옷 솜털을 씹어 먹으면서 끝내 절의를 지켰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p 174
'의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니 국가에 대한 의무도 너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찍이 고능선 선생에게 의리가 무엇인지 배웠고, 또 삼척동자라도 개나 양에게 절하라고 시키면 응하지 않는다고 2세들에게 가르치던 네가, 왜놈 간수에게 머리 숙여 절하느냐? 지금 왜놈이 주는 콩밥과 붉은 옷 때문에 네가 왜놈에게 순종하는 것이더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게 종신형이나 10년형을 받고 갇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히 의병으로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남자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고 어린 학생을 가르치던 네가 지금은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 감옥 안에서 왜놈에게 순종하는 개 같은 생활을 견디고서, 15년 후 감옥을 나가면 공을 세워 순종한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
p 183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나랏일을 위하여 큰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 신민회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저 강도단에 비하면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너무 유치한 것이었다.
p 187 나는 서대문감옥에서 중형의 도적이 가벼운 횡령죄로 들어온 동료를 고발하여 종신형을 받게 하고, 자기는 그 공으로 형을 줄이고 후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았다. 만일 문가를 건드려 놓으면 감옥 눈치가 훤한 자이니 어떤 나쁜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안악 사건으로 근거 없이 15년형을 주는 왜놈들인데, 치하포 사건으로 왜놈을 죽이고 탈옥한 사실까지 발각되면 내 처치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제껏 감당하기 어려운 욕과 학대를 다 받고 만기가 1년 남짓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문가가 과거사를 이야기해 버리면 내 하 몸은 고사하고 늙은 어머님과 어린 처자는 어찌 될까?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굴었다. 집에서 부쳐 주는 사식도 틈을 타서 나눠 주고, 감옥 밥이라도 문가가 곁에만 오면 나는 굶으면서도 주었다. 그러다 문가가 먼저 만기 출옥하니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않게 시원하였다.
p 188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여러 번 떨어져 죽을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같이 쇠사슬을 맨 자가 인천항에서 구두 켤fp나 담뱃갑을 도적질한 죄로 두세 달 징역 사는 가벼운 죄수라 그자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아무 잔뀌도 무리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p 210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내게 와서 국무령으로 조각하라고 강권했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굳이 사양하였다.
첫째, 임시정부가 아무리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해주 서촌 미천한 김존위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다. 둘째, 이상룡과 홍진 두 분도 함께 일하려는 인재가 없어 실패하였는데, 내가 나서면 더욱 호응하는 인재가 없을 것이다.
p 226 칠십 평생을 돌이켜보니,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p 230 이봉창의 말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꺼내 주신 큰 돈을 받아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민단 사무실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서 같이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돈뭉치를 주시니 아무 말도 못하겠더이다. 제가 이 돈을 마음대로 써 버리더라도, 선생님은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못 나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십니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p 255 우리 민족의 비운은 대체로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실질적인 행복은 내 모른다 하고, 창시자 주희 이상으로 성리학만 주창하여 사색당파로 수백 년이나 다투어 왔으니, 민족 원기는 다 닳아 없어지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만 남았다. 이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오.
슬프다. 오늘날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향하여 낡고 봉건적이라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문제 또한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한꺼번에 할 것을 극력 주장하다가도, 레닌이 ‘식민지는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뒤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자,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청년들은 중국 정자와 주자의 방귀조차도 향기롭다다는 옛사람들을 비웃지만, 같은 입과 혀로 러시아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정신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자, 주자 학설의 신봉자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위해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p 279'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내게 이 말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노력한 참전 준비가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서안훈련서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투시킨 후 조직적으로 공작하게 하려고 미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는데,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나의 소원
p 306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지만,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되지 못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항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의 밖의 생각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지만, 그것도 바람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처럼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도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p 309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p 309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자유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일 개인에서 나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우리 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로 수백 년 계속하였다....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 년 동안 조선에서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 생활, 가정 생활, 개인 생활까지 규정하는 독재였다...우리 나라가 망하고 국민의 힘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국민의 머릿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니거나, 집권세력이더라도 사문난적이라는 이단의 범주에 들어가면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p 312 그러므로 한 학설을 표준우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할 것이다. 이래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놓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p 313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 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 및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을 대강 짐작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동포 각 개인이 충분한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정치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p 315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인류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늘 것이다. 인류에게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p 315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이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고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명을 달성할 민족은 한마디로 말하면 국민 모두를 성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p 318 옛날 한나라 지역의 기자가 우리 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다.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도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진다면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내가 저자라면
내가 백범일지의 저자라면, 이라고 생각하고 백범을 비판하기는 뭣하고, 백범일지를 엮은이에게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겠다. 주해본은 읽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대중과 청소년을 위해 엮은 책 치고는 고어와 한문이 아직도 많다. 동학의 ‘접주’라는 말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건 나뿐인가?
이 책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권에 비해 하권은 많은 사건들이 비교적 짧게 기록되어 있다.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역주로 보충되었다면 역사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외는 거의 만족스럽다. 책의 마지막에 백범의 행적을 연도별로 정리해 줌으로써 그의 장대한 기록의 내용들을 한눈에 정리할 수 있도록 해 준 것도 좋고, 특히 백범의 ‘나의 소원’을 덧붙인 것이 이 책의 진정한 백미라고 생각된다. ‘나의 소원’에 밝힌 백범의 생각,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독재 정치를 가장 멀리할 정치 형태로 규정하고 교육과 문화의 힘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은 만약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백범이었다면 이 나라가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구나-하는 아쉬움의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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