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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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유홍준. 미술평론가. 문화답사가.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전공.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의 예술철학 전공 수료. ‘공간’ ‘계간미술’ 기자를 거쳐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한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 영남대 미술대학 교수 및 박물관장 역임, 명지대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교수 및 국제한국한연구소 소장.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 1회 광주 비엔날레 커미셔너(1995) 역임.
1985년부터 매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 강좌를 개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현 문화재청장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 2, 3 ,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상, 하 ‘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 상,하
‘그의 글은 80년대의 시대정신과 무엇보다 밀접히 연관돼 있다. 유홍준에 있어 ’80년대‘로 대표되는 이 그물망은 그의 적극적인 참여를 절실히 요구하는 치열한 갈등과 대립의 장이었다. 그가 전문적인 미술평론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시평까지 다수 쓰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유홍준만큼 운동에 치열하면서 동시에 ’미학 혹은 학문‘으로서 미술비평의 수준에 달하기란, 적어도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힘든 일이다.
유홍준의 글쓰기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 있어 리얼리즘의 이상을 주축으로 하는 것으로, 그 이전 문학 쪽의 리얼리즘 운동에 상당히 영향을 받든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민중미술운동은 우리 조형전통상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현대화해 이를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장르적 특성이 있다.
유홍준은 앞으로 전문연구자로서의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읽지 않으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지 않는 한국 미술사를 한 권 쓰고 싶어 한다.‘ -(yes 24의 유홍준 작가평에서 인용함)
그에 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책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전 국민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을 때, 유홍준 교수가 한 말이라고 한다. 그래, 맞는 말인 것 같다. 국사와 서체와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안보였다. 몰라서.
나는 이 책이 정말 읽기 힘들었다. 아니, 읽기야 술술 읽었지만 책의 유명세만큼 마음에 남지도, 감동이 오지도 않았다고 해야 옳겠다. 책을 앞에 두고, 마음에 새기지 못한다는 것이 스스로 괴로웠다. 물론 내 견문이 모자라서 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 부끄럽지만, 스스로 내 기질에 맞지 않는 책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의 기질은, 찬찬히 앉아서 점잖게 그림과 글씨를 감상하는 체질은 아무래도 아니지 싶다. 사실 이 책의 1권을 다 읽고 2권의 중반 째에 들어설 때까지, 아니 무슨 글씨체 변한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일까, 싶었다.
무식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것이라면, 그래도 완당의 글씨체가 뒤로 갈수록 글씨가 아니라 그림으로 보였다고 할까, 감상할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몇몇 글씨와 그림들은 아- 하고 가만히 바라보게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회사 선배의 세 살짜리 아기도 아름다운 가락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미소를 머금고 갸웃갸웃 고갯짓으로 박자를 맞춘다고 한다. 아름다운 것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은 모든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이토록 지겹게 읽은 나도 그나마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겠지-. 문외한인 나에게도 감동을 주는 글씨와 그림들은 누군가가 이토록 공을 들여 정리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누구는 20년을, 누구는 평생을 걸려 그 작품의 발자취를 쫓아다니게 한 것이 완당의 그림이고 글씨다. 그는 정치가이자 존경할 만한 학자였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지독하리만큼 매혹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한 예술가로서 가장 아름답게 남았다. 그를 추종한 이들의 정열에 찬사를.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양, 권력 있는 집안에서 뛰어난 재능까지 타고난 그의 젊은 시절은 화려했다. 24살에 연경에 건너가 시대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나눴고 그 경험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자세가 학자로서 손색없는 완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후세에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게 한 그의 글씨 추사체는 그 화려한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곤궁했던 유배시절 후에 비로소 얻어진 것이다.
10대의 후반부터, 나에게 정말 많은 일들이 생겼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내 의도와 관계없이 벌어지고 전개되던 일들. 다른 사람의 영향력, 다른 사람의 과거가 나를 후려지던 날들. 최근에도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겨서 마음이 뒤숭숭하고 괴롭던 차였다. 도대체 내 인생에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날까 싶어 사주라도 보고 싶던 게 요즘의 마음이었다.
쓸데없이 기름지다는 평을 듣던 화려한 시절의 완당의 글씨가 두 차례의 유배시절을 겪은 후에 마치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럽고 올곧은 기가 서린 진정한 그의 글씨가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 묘한 위안이 되었다.
그래, 지나가면 다 거름이 되는 것이다. 괜찮다.
책 속에서
p 11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p 11 추사는 실학 중에서도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p 12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 우미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 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운,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의 본질이자 매력인 것이다.
p 14 추사 선생이 소사에서 남에게 써준 영어산방이라는 편액을 보니 거의 말만한 크기의 글씨인데, 혹은 몸체가 가늘고 곁다리가 굵으며, 혹은 윗부분은 넓은데 아래쪽은 좁으며, 털처럼 가는 획이 있는가 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도 있다.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하다. 마치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으로는 구속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감히 비유해서 말하자면 불가, 도가에서 세속을 바로잡고자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 (유희진, 초산잡저)
p 15 김정희의 인장 ‘불계공졸’. 추사의 200여 개의 인장 중 하나로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추구한 높은 예술의 경지이기도 했다.
p 24 완옹(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을 따르고 이북해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하였다.
1장 출생과 가문 1-24세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p 39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듯 추사는 대단히 까다롭고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풍채가 뛰어나고 도량이 화평해서 사람과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그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리나 이욕이냐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시 막을 자가 없었다.
p 43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스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자으올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2장 영광의 북경 60일 24-25세 ‘옹방강, 완원 두 경사와의 만남’
p 57 추사가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가서 벌인 활동과 귀국 후 연경학회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학예활동을 펴나간 것이 우리나라 지성사에서 가장 찬란한 국제적 활동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p 60 후지츠카의 이러한 열정적인 연구로 우리는 조선 북학파의 계보와 함께 단지 서예가, 금석학자로만 알려져온 추사가 사실은 청나라 학술의 정수를 훤히 꿰뚫은 경학의 대가였고 조선 500년 역사상 미증유의 국제적인 대학자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p 90 완원은 마침내 추사에게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는데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후사보다도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
p 92 귀국 후 추사는 무슨 논거를 댈 때면 ‘내가 연경의 석묵서루에서 이 진본을 보았는데 그 진본에 의하면 이렇지 않았다’는 등 혼자만의 경험과 감동으로 재단비평을 일삼아 남들을 많이 속상하게 했다....본인이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미움도 받았다.
P 98 '내가 태어난 곳은 미개한 나라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있네.‘
이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일까? 이동주 선생도 ‘완당바람’에서 아무리 ‘외교의 투가 설령 있다 할지라도 오늘날 보면 심히 맹랑한’ 말이라고 했다. 실제로 귀국 후 추사는 이런 태도로 남의 눈밖에 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그러 만도 하였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구던가. 중국에서도 최고 가는 인사들이니 당시로서는 세계의 정상급 학예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 아닌가. 나이 25세의 젊음에도 그런 오만은 비록 권장될 수는 없다 해도 용서될 수는 있는 일이 아닐까.
3장 학예의 연찬 25-34세 ‘진흥왕 순수비와 무장사비를 찾아서’
p 103 추사는 이제 더 이상 지난날의 추사가 아니었다. 요즘도 외국 한번 나갔다오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사람이 확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추사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p 104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다.
p 104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학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완당바람’이라 불렀으며,....
p 127 완당은 비바람에 마모된 글자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읽어보면서 놀랍게도 이 비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p 138 실사구시라는 구호는 청나라 고증학을 연 고염무가 주창한 표어로, 그 연원은 완당의 ‘실사구시설’ 첫 문장에 나오듯 [한서] ‘하간헌왕전’에 나오는 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완당은 바로 이 명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
p 139 1816년, 완당의 나이 서른하나에 지은 ‘실사구시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하는’ 탁견으로 학문적 견실성을 아주 명쾌히 보여준다. 완당은 단호히 말한다.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 송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심기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p 170 완당의 인재설
첫째는 주석이나 외우는 폐쇄적인 교육방식, 둘째는 과거시험이라는 입시교육, 셋째는 견문의 부족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아이 적에는 대개는 총명한데, 겨우 제 이름을 기록할 줄 알 만하면 아비와 스승이 전주와 첩괄로 그를 미혹시키어,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전적인 글을 보지 못하고, 한 번 혼탁한 먼지를 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리고 다행히 제생이 되었더라도 머리가 둔하여 민첩하고 통달하지 못함으로써 아무런 보담도 없이 어렵사리 과거시험에 출몰하다가 오래 뒤에는 기색조차 쇠락해져버리니, 어느 겨를에 제한된 테두리 밖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둘째이다.
사람이 비록 제조는 있다 하더라도 그의 생장한 곳을 보아야 한다. 궁벽하고 적막한 곳에서 생장하여 산천, 인물, 거실, 유어 등에서 크고 드러나고 높고 웅장함과 그윽하고 특이하고 괴상하고 호협한 일들을 직접 목격해보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세련된 바가 없고 흉금이 풍만해지지 못하여 이목이 이미 협소함에 따라 수족 또한 반드시 굼뜨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셋째이다. 이상의 세 가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재능이 꺾여버려서 비통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이 왕왕 이와 같다. ‘
그러면서 진정한 인재는 자유스런 상상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자기의 개성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훌륭한 문의 묘는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영기가 황홀하게 찾아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러 와서 그 괴괴하고 기기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p 174 완당의 장년과 중년 글을 이처럼 화려하고 장쾌하며 대단히 자신만만하고 현학적이다. 그래서 그를 무척 싫어하는 적이 자연히 생기곤 했다. 이처럼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데 질시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고 배기겠는가.
p 179 완당은 ‘시경’이라는 글씨를 새긴 병풍바위 오른편에 ‘천축고선생댁’이라는 각자도 새겼다. 천축고선생댁이란 ‘천축 나라(인도)의 옛 선생댁’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집’ 다시 말해서 ‘절집’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완당의 말 만들어내는 솜씨는 참으로 뛰어난 데가 있다.
p 190 이 시절 완당의 글씨는 오른쪽 어깨가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사체의 버릇이 있고 또 획에 윤기가 많아 그만큼 골기가 적다. 이 점은 ‘추사체’가 완성되어 갈수록 서서히 사라진다.
4장 출세와 가화 34-50세 ‘운와몽중, 황청경해, 예당금석과안록’
p 238 순조의 어진 판단으로 김노경과 완당은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우명의 상소문 행간에서는 20년간 요직만 옮겨 다닌 김노경의 화려한 출세에 대한 질시와 함께 완당의 거만하고 고집스런 처세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완당을 ‘요사스런 자식’이라고 하면서 ‘항상 반론을 가지고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한 말은, 말끝마다 ‘그건 그렇지 않다’며 남을 사갈시하고 궁지에 몰아붙이기 잘했던 완당의 독선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심이었는지도 모른다.
p 261 다산과 부친의 서거가 완당에게 준 정신적 충격과 의미는 적지 않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완당의 학문세계가 ‘가정과 사우들로부터 힘입어 나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였는데, 가정의 부친, 사우인 다산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제 앞 시대의 오른, 선생을 모두 잃었다는 뜻이었다.
5장 완당바람 50-55세 ‘해외묵연, 원교필결후, 예림갑을록’
p 269 이런 글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완당이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는 칭송이 빈말이 아니며, 그가 단지 국제적인 사조에 휩싸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여 체화, 육화, 토착화시킨, 진실한 의미의 국제파 학자였다는 사실이다.
p 275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분방한 개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청나라 사람들은 입고출신이라고 했다.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입고출신! 사실 이것은 고증학의 기본정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도 같은 맥락이었다.
p 284 완당이 이와 같이 동시대 중국의 예술사조와 그 대표적 예술가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학문적 예술적 정부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 점을 혹자는 완당이 중국을 사모함이 커서 그랬다며 완당을 사대주의, 모화주의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사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국제적 시각의 확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사실 정보력은 그 자체가 힘이다. 완당의 정보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한 채널을 통해 얻은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완당이 그런 정통한 정보력으로 청나라 학예계를 파악하고 그들과 동시대적 지평에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펴나갔다는 것은 바람직한 국제성, 세계성의 확보였다. 더욱이 완당이 그들을 열심히 좇아 모방하면서 그 현대적 흐름에 동참하는 한편,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성과를 동시에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p 315 손으로 그리지 않고 머리로 그리려니 그림다운 그림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완당은 화가가 아니었다.
p 316 요컨대 인품과 교양과 지식과 필법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 이것이 완당이 말하는 난초 치는 비결이다. 완당이 흥선대원군에게 난초그림을 얘기하면서 ‘천재도 결국은 노력이다’라고 말한 것은 난초그림에 대한 그의 지론이었다.
‘난초그림의 뛰어난 화품이란 형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화법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다.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p 321 그러나 완당이 원교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야 했던 이유는 사실 원교가 서법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원당은 원교가 죽고 9년이 지나 태어났으니 이 글은 후대인이 과거의 대가를 극복하고자 가한 역사적 비평이었다.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55세-59세 ‘세한도를 그리며’
p 332 위리안치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중형이다....완당은 그 많은 유배 중에서 절도, 그 중에서도 가장 멀고 흉악한, 이른바 원악지인 제주도, 그 중에서도 서남쪽으로 80리 더 내려가야 하는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으니 그 가혹함은 곱징역인 셈이다.
p 369 원당은 경주 김씨 월성위의 후손이라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것은 형생 벗어날 수 없었던 완당의 귀족주의, 선민의식의 뿌리였으며, 한편으로는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완당의 귀족주의, 선민의식의 뿌리였으며, 한편으로는 명문가의 종손이라는 부담과 굴레를 안고 사는 생의 조건이기도 했다.
7장 제주도 유배시절(하) 59-63세 ‘수선화를 노래하며’
p 431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티와 자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다. 이에 반하여 귀양 와서 쓴 화암사의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박규수가 말한, 완당 중년 글씨의 병폐라던 ‘쓸데없이 기름진’ 것이 귀양살이 7년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p 434 '유재‘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자연)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제하다.
p 467 이동주 선생의 추사체 제주도 성립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 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죽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p 469 제주 유배시 중 ‘시골집’
장독대 동쪽 켠으론 맨드라미 두어 송이
새파란 호박넝쿨은 외양간을 타올랐네.
삼가촌에서 꽃놀이하자고 불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융규가 붉게 피었네.
이 시를 보면 1행부터 4행까지 이미지를 나열하면서 하나의 큰 이미지를 만드는 노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흔히 보아온 1,2,3,4 행으로 흐르는 기승전결의 리듬이나, 먼저 풍경을 읊은 다음에 자신의 심회를 말하는 전경후의의 긴장이나 상투성이 없다. 그저 시골집의 풍경을 읊었을 뿐인데 그 시적 여운은 아주 진하고 길다. 이것은 완당이 시문학에서 견지한 ‘성령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p 471 완당이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인간의 감성과 영적, 활적 인연, 현대 용어로 쉽게 말해서 영감이었다. 그 점에서 성령론은 곧 시란 인간의 성정을 드러낸다는 주장이다.
p 500 ‘옹담계는 “옛 경전 읽는 것을 즐긴다”고 했고 완운대는 “남이 그렇다고 해서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바닷가의 삿갓 쓴 사람은 ’원우의 죄인‘과 흡사한고.’
p 522 ‘이런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분에게 내가 왜 그랬던가? 그때 왜 나는 창암은 창암대로, 원교는 원교대로 그들 나름의 한 생이 있고, 그들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한 글씨를 썼을 것이며, 창암 같은 처지에서 밖으로의 견문이 막혀 있는 사정이었다면 창암 이상의 글씨를 썼겠는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는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는 왕희지를 어떻게 원교만이 평지돌출로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창암의 글씨에 배어 있는 향색은 그 나름의 미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8장 강상시절 64-66세 ‘노호의 칠십이구초당에서’
p 527 제주도에서 돌아온 뒤의 2년 반과 북청 유배 1년간의 완당 일생의 편년 중 거의 공백으로 비어 있고 조사된 것도,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그러나 완당은 바로 이 시절에 수많은 명작을 남긴다. 완당 글씨 중 최고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잔서완석루’, 거의 신품의 경지로 말해지는 ‘불이선란’, 완당 행서의 명작 ‘석노시’ 등이 모두 이 시절의 소산이다.
p 579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우스갯소리로 ‘못 쓰면 추사체라고 우긴다’ 또는 ‘누구나 추사체를 쓸 줄 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것을 완당 동시대 사람을은 ‘괴‘라고 했다. 완당은 자신의 글씨를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본래 괴하다는 것은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다. 더욱이 완당은 글씨가 고하고 졸할지언정 기하거나 괴하면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p 583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p 584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9장 북청 유배시절 66-67세 ‘변방의 찬 하늘 아래서’
p 612
‘외가닥 호관길도 이와 같겠는가
우거진 나무들이 얼기설기 엉켜 있네.
고갯마을 사람들은 가마 메는 괴로움만 당하느니
어찌 이성의 [추수도]를 알까 보냐.‘
장대한 풍광에서 북송의 화가 이성이 그린 [추수도]를 연상하며 산수의 낭만만 찾고 가마 메고 다니는 서민의 힘겨운을 도리어 비하하는 이런 노골적인 선민의식이나 신분적 우월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0장 과천시절 67-71세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p 694 완당이 무엇 때문에 김석준을 이렇게 아끼고 좋아했는지 나는 아직 다는 모른다. 다만 50대 이후 완당의 곁에는 항상 이런 애제자가 꼭 한 명 이상 있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제주시절의 허소치, 강상시절의 조면호, 북창시절의 유요선, 그리고 과천시절의 김석준. 왜 그랬을까?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본래 창작자느 외로움을 깊이 타는 법이다. 열정이 강한 예술가일수록 그 외로움의 깊이는 더하다. 온 정열을 달구어 망아의 경지에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육신은 파김치처럼 흐느적거리고 정신은 공허해진다. 마치 관객들이 다 돌아간 뒤의 텅빈 무대만큼이나 허전하다. 더욱이 창작자들은 세평에 시달리며, 또 그것에 무천 신경쓰기도 한다. 그래서 곁에서 그 불안감을 씻어줄 격려와 칭찬을 원하곤 한다. 작품 발표 이전에 측근에게 보여주는 것은 비평을 바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위안을 얻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열정적인 예술가들은 대개 그 외로움을 받아줄 대상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p 711 완당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열정과 관용은 선택이 아니라 불 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영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와 괴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이제 과천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p 712 유홍준과 제자와의 대화
"샘, 그렇게 기이한 것만 갖고 가면 오랫동안 wmf길 수 없잖아예.“
“그러면 평범한 것을 가져가란 말이냐?”
“어데예, 그러니까 곁들여야지예.”
바로 그것이다. 곁들여야 한다.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은 곁들여야 되는 것이다.
p 745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따로가 손자‘
이렇게 평범한 것의 가치를 극대화시켜놓고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심정을 협서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이것은 촌늙은이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한 큰 황금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p 761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 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 이쯤 되면 불계공졸도 뛰어넘은 경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이 재미없었다고 욕하지 않겠다. 단지 내 기질에 맞지 않았다고 변명하련다.
전 국민의 1/3은 읽었을 법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나는 읽지 않았지만, 책에서 뽑아놓은 글들을 잠시 들여다보니 저자의 문체가 꽤 재미있다. 흥미가 있다면 술술 읽혔을 법한 문체인데, 이 책에서는 왠지 그 글빨이 제대로 살지 않은 것 같다. 단지, 문체가 꽤 캐쥬얼하다는 점이 눈에 띠었다. 한문과 고어가 주종인 책에서 멤버, 컬렉션, 콘트롤, 섹스 등의 단어를 쓴 것이 처음에는 좀 거슬렸으나 읽다보니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다 싶었다.
이 분, 글을 자유롭게 쓰려고 노력하는 분인 것 같다.
완당평전 1,2권을 읽으면서, 이 많은 관련 자료와 그림을 따로 한 권의 책에 펴냈으면 보기 좋겠다 -라고 생각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3권을 그렇게 펴냈다. 마지막에 연보를 정리해 준 것도 아주 좋고, 책의 구성에 저자가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럼, 유홍준 교수와 이 책에 대해 몇 마디만 쓰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90년대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외면당하던 ‘우리의 문화유산’ 에 대중의 관심을 모은, 아주 바람직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20년 동안 연구해 펴낸 이 책 ‘완당평전’은 김정희의 인생과 학문을 탐구한 책 중 그 대중화의 의미가 큰 작품이기도 한데,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이에 대해 흥미로운 기사가 많았다.
이 책은 2002년에 처음 나왔고, 내가 구입한 책은 2005년에 발행한 초판의 6쇄이다.
이 책은 출간 당시 많은 지적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지적이 이 책에 오류가 최소 200군데 이상이라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이 책에서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시중에 나도는 추사 글씨의 9할이 가짜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김정희에 대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한 가지 작품에 대해 ‘이 작품을 진짜라고 감정한 사람은 추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추사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라는 평을 할 정도이니, 이 책에 실린 추사의 작품에 대해서도 진품여부의 의구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200군데 이상 틀렸다는 지적에 대해서 약 80군데 정도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재판 시 수정했음을 밝히며, 인용한 원전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완당평전’ 자체가 500군데 이상이 틀린 책인 이상 한문 전공자가 아닌 자신이 어떻게 올바로 쓸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인용한 원전 자체의 오류로 어쩔 수 없는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유명한 유홍준 교수의 책이라고 100% 믿으면 안 된다는 비평가들의 말을 흘려들으면 안 된다는 점.
나 같은 독자야 이런 낯선 분야의 책을 접하면 그 책을 쓴 작가의 유식함에 찬탄하면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게 되어버리지 않는가. 주의!
...유홍준 교수는 2003년 국립박물관장에 공무신청을 했다가 자질 부족이라는 한국고고학회와 미술사학자들이 공식적 반대 의견 표명과 수많은 네티즌의 인신공격 등으로 스스로 후보신청을 거둬들인 바가 있다. 대중적으로 인기작가인 그가, 세간의 유명세에 걸맞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개인적으로 유홍준 교수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단지 책을 읽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알고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적어보았다.
네이버 블로그에 한 네티즌이 적어놓은 것처럼, 학문적으로 유홍준 교수가 완벽하지 못할지라도(사실 어느 누가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는 많은 사람이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고,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강의라면 강의료를 묻지 않고 가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김정희가 ‘추사’보다는 ‘완당’이라는 호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앞으로도 열심히 우리 문화유산 지킴이 역할을 해주시길 바란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자청해 짊어지고 땀 흘리는 자는 아름답다. 그의 노력이 좋은 방향으로 결실을 맺어가길 바랄 뿐이다.
무지했던 분야에 대해 견문을 넓히는 즐거움. 아직 깊이를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과정에 의의를 두는 것이 내가 버티는 방법.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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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미술평론가. 문화답사가.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전공.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의 예술철학 전공 수료. ‘공간’ ‘계간미술’ 기자를 거쳐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한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 영남대 미술대학 교수 및 박물관장 역임, 명지대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교수 및 국제한국한연구소 소장.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 1회 광주 비엔날레 커미셔너(1995) 역임.
1985년부터 매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 강좌를 개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현 문화재청장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 2, 3 ,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상, 하 ‘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 상,하
‘그의 글은 80년대의 시대정신과 무엇보다 밀접히 연관돼 있다. 유홍준에 있어 ’80년대‘로 대표되는 이 그물망은 그의 적극적인 참여를 절실히 요구하는 치열한 갈등과 대립의 장이었다. 그가 전문적인 미술평론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시평까지 다수 쓰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유홍준만큼 운동에 치열하면서 동시에 ’미학 혹은 학문‘으로서 미술비평의 수준에 달하기란, 적어도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힘든 일이다.
유홍준의 글쓰기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 있어 리얼리즘의 이상을 주축으로 하는 것으로, 그 이전 문학 쪽의 리얼리즘 운동에 상당히 영향을 받든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민중미술운동은 우리 조형전통상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현대화해 이를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장르적 특성이 있다.
유홍준은 앞으로 전문연구자로서의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읽지 않으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지 않는 한국 미술사를 한 권 쓰고 싶어 한다.‘ -(yes 24의 유홍준 작가평에서 인용함)
그에 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책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전 국민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을 때, 유홍준 교수가 한 말이라고 한다. 그래, 맞는 말인 것 같다. 국사와 서체와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안보였다. 몰라서.
나는 이 책이 정말 읽기 힘들었다. 아니, 읽기야 술술 읽었지만 책의 유명세만큼 마음에 남지도, 감동이 오지도 않았다고 해야 옳겠다. 책을 앞에 두고, 마음에 새기지 못한다는 것이 스스로 괴로웠다. 물론 내 견문이 모자라서 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 부끄럽지만, 스스로 내 기질에 맞지 않는 책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의 기질은, 찬찬히 앉아서 점잖게 그림과 글씨를 감상하는 체질은 아무래도 아니지 싶다. 사실 이 책의 1권을 다 읽고 2권의 중반 째에 들어설 때까지, 아니 무슨 글씨체 변한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일까, 싶었다.
무식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것이라면, 그래도 완당의 글씨체가 뒤로 갈수록 글씨가 아니라 그림으로 보였다고 할까, 감상할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몇몇 글씨와 그림들은 아- 하고 가만히 바라보게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회사 선배의 세 살짜리 아기도 아름다운 가락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미소를 머금고 갸웃갸웃 고갯짓으로 박자를 맞춘다고 한다. 아름다운 것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은 모든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이토록 지겹게 읽은 나도 그나마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겠지-. 문외한인 나에게도 감동을 주는 글씨와 그림들은 누군가가 이토록 공을 들여 정리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누구는 20년을, 누구는 평생을 걸려 그 작품의 발자취를 쫓아다니게 한 것이 완당의 그림이고 글씨다. 그는 정치가이자 존경할 만한 학자였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지독하리만큼 매혹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한 예술가로서 가장 아름답게 남았다. 그를 추종한 이들의 정열에 찬사를.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양, 권력 있는 집안에서 뛰어난 재능까지 타고난 그의 젊은 시절은 화려했다. 24살에 연경에 건너가 시대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나눴고 그 경험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자세가 학자로서 손색없는 완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후세에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게 한 그의 글씨 추사체는 그 화려한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곤궁했던 유배시절 후에 비로소 얻어진 것이다.
10대의 후반부터, 나에게 정말 많은 일들이 생겼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내 의도와 관계없이 벌어지고 전개되던 일들. 다른 사람의 영향력, 다른 사람의 과거가 나를 후려지던 날들. 최근에도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겨서 마음이 뒤숭숭하고 괴롭던 차였다. 도대체 내 인생에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날까 싶어 사주라도 보고 싶던 게 요즘의 마음이었다.
쓸데없이 기름지다는 평을 듣던 화려한 시절의 완당의 글씨가 두 차례의 유배시절을 겪은 후에 마치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럽고 올곧은 기가 서린 진정한 그의 글씨가 되었다는 사실이, 내게 묘한 위안이 되었다.
그래, 지나가면 다 거름이 되는 것이다. 괜찮다.
책 속에서
p 11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p 11 추사는 실학 중에서도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p 12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 우미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 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운,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의 본질이자 매력인 것이다.
p 14 추사 선생이 소사에서 남에게 써준 영어산방이라는 편액을 보니 거의 말만한 크기의 글씨인데, 혹은 몸체가 가늘고 곁다리가 굵으며, 혹은 윗부분은 넓은데 아래쪽은 좁으며, 털처럼 가는 획이 있는가 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도 있다.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하다. 마치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으로는 구속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감히 비유해서 말하자면 불가, 도가에서 세속을 바로잡고자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 (유희진, 초산잡저)
p 15 김정희의 인장 ‘불계공졸’. 추사의 200여 개의 인장 중 하나로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추구한 높은 예술의 경지이기도 했다.
p 24 완옹(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을 따르고 이북해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하였다.
1장 출생과 가문 1-24세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p 39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듯 추사는 대단히 까다롭고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풍채가 뛰어나고 도량이 화평해서 사람과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그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리나 이욕이냐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시 막을 자가 없었다.
p 43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스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자으올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2장 영광의 북경 60일 24-25세 ‘옹방강, 완원 두 경사와의 만남’
p 57 추사가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가서 벌인 활동과 귀국 후 연경학회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학예활동을 펴나간 것이 우리나라 지성사에서 가장 찬란한 국제적 활동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p 60 후지츠카의 이러한 열정적인 연구로 우리는 조선 북학파의 계보와 함께 단지 서예가, 금석학자로만 알려져온 추사가 사실은 청나라 학술의 정수를 훤히 꿰뚫은 경학의 대가였고 조선 500년 역사상 미증유의 국제적인 대학자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p 90 완원은 마침내 추사에게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는데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후사보다도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
p 92 귀국 후 추사는 무슨 논거를 댈 때면 ‘내가 연경의 석묵서루에서 이 진본을 보았는데 그 진본에 의하면 이렇지 않았다’는 등 혼자만의 경험과 감동으로 재단비평을 일삼아 남들을 많이 속상하게 했다....본인이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미움도 받았다.
P 98 '내가 태어난 곳은 미개한 나라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있네.‘
이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일까? 이동주 선생도 ‘완당바람’에서 아무리 ‘외교의 투가 설령 있다 할지라도 오늘날 보면 심히 맹랑한’ 말이라고 했다. 실제로 귀국 후 추사는 이런 태도로 남의 눈밖에 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그러 만도 하였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구던가. 중국에서도 최고 가는 인사들이니 당시로서는 세계의 정상급 학예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 아닌가. 나이 25세의 젊음에도 그런 오만은 비록 권장될 수는 없다 해도 용서될 수는 있는 일이 아닐까.
3장 학예의 연찬 25-34세 ‘진흥왕 순수비와 무장사비를 찾아서’
p 103 추사는 이제 더 이상 지난날의 추사가 아니었다. 요즘도 외국 한번 나갔다오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사람이 확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추사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p 104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다.
p 104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학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완당바람’이라 불렀으며,....
p 127 완당은 비바람에 마모된 글자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읽어보면서 놀랍게도 이 비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p 138 실사구시라는 구호는 청나라 고증학을 연 고염무가 주창한 표어로, 그 연원은 완당의 ‘실사구시설’ 첫 문장에 나오듯 [한서] ‘하간헌왕전’에 나오는 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완당은 바로 이 명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
p 139 1816년, 완당의 나이 서른하나에 지은 ‘실사구시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하는’ 탁견으로 학문적 견실성을 아주 명쾌히 보여준다. 완당은 단호히 말한다.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 송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심기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p 170 완당의 인재설
첫째는 주석이나 외우는 폐쇄적인 교육방식, 둘째는 과거시험이라는 입시교육, 셋째는 견문의 부족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아이 적에는 대개는 총명한데, 겨우 제 이름을 기록할 줄 알 만하면 아비와 스승이 전주와 첩괄로 그를 미혹시키어,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전적인 글을 보지 못하고, 한 번 혼탁한 먼지를 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리고 다행히 제생이 되었더라도 머리가 둔하여 민첩하고 통달하지 못함으로써 아무런 보담도 없이 어렵사리 과거시험에 출몰하다가 오래 뒤에는 기색조차 쇠락해져버리니, 어느 겨를에 제한된 테두리 밖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둘째이다.
사람이 비록 제조는 있다 하더라도 그의 생장한 곳을 보아야 한다. 궁벽하고 적막한 곳에서 생장하여 산천, 인물, 거실, 유어 등에서 크고 드러나고 높고 웅장함과 그윽하고 특이하고 괴상하고 호협한 일들을 직접 목격해보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세련된 바가 없고 흉금이 풍만해지지 못하여 이목이 이미 협소함에 따라 수족 또한 반드시 굼뜨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셋째이다. 이상의 세 가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재능이 꺾여버려서 비통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이 왕왕 이와 같다. ‘
그러면서 진정한 인재는 자유스런 상상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자기의 개성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훌륭한 문의 묘는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영기가 황홀하게 찾아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러 와서 그 괴괴하고 기기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p 174 완당의 장년과 중년 글을 이처럼 화려하고 장쾌하며 대단히 자신만만하고 현학적이다. 그래서 그를 무척 싫어하는 적이 자연히 생기곤 했다. 이처럼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데 질시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고 배기겠는가.
p 179 완당은 ‘시경’이라는 글씨를 새긴 병풍바위 오른편에 ‘천축고선생댁’이라는 각자도 새겼다. 천축고선생댁이란 ‘천축 나라(인도)의 옛 선생댁’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집’ 다시 말해서 ‘절집’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완당의 말 만들어내는 솜씨는 참으로 뛰어난 데가 있다.
p 190 이 시절 완당의 글씨는 오른쪽 어깨가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사체의 버릇이 있고 또 획에 윤기가 많아 그만큼 골기가 적다. 이 점은 ‘추사체’가 완성되어 갈수록 서서히 사라진다.
4장 출세와 가화 34-50세 ‘운와몽중, 황청경해, 예당금석과안록’
p 238 순조의 어진 판단으로 김노경과 완당은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우명의 상소문 행간에서는 20년간 요직만 옮겨 다닌 김노경의 화려한 출세에 대한 질시와 함께 완당의 거만하고 고집스런 처세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완당을 ‘요사스런 자식’이라고 하면서 ‘항상 반론을 가지고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한 말은, 말끝마다 ‘그건 그렇지 않다’며 남을 사갈시하고 궁지에 몰아붙이기 잘했던 완당의 독선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심이었는지도 모른다.
p 261 다산과 부친의 서거가 완당에게 준 정신적 충격과 의미는 적지 않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완당의 학문세계가 ‘가정과 사우들로부터 힘입어 나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였는데, 가정의 부친, 사우인 다산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제 앞 시대의 오른, 선생을 모두 잃었다는 뜻이었다.
5장 완당바람 50-55세 ‘해외묵연, 원교필결후, 예림갑을록’
p 269 이런 글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완당이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는 칭송이 빈말이 아니며, 그가 단지 국제적인 사조에 휩싸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여 체화, 육화, 토착화시킨, 진실한 의미의 국제파 학자였다는 사실이다.
p 275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분방한 개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청나라 사람들은 입고출신이라고 했다.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입고출신! 사실 이것은 고증학의 기본정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도 같은 맥락이었다.
p 284 완당이 이와 같이 동시대 중국의 예술사조와 그 대표적 예술가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학문적 예술적 정부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 점을 혹자는 완당이 중국을 사모함이 커서 그랬다며 완당을 사대주의, 모화주의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사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국제적 시각의 확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사실 정보력은 그 자체가 힘이다. 완당의 정보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한 채널을 통해 얻은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완당이 그런 정통한 정보력으로 청나라 학예계를 파악하고 그들과 동시대적 지평에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펴나갔다는 것은 바람직한 국제성, 세계성의 확보였다. 더욱이 완당이 그들을 열심히 좇아 모방하면서 그 현대적 흐름에 동참하는 한편,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성과를 동시에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p 315 손으로 그리지 않고 머리로 그리려니 그림다운 그림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완당은 화가가 아니었다.
p 316 요컨대 인품과 교양과 지식과 필법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 이것이 완당이 말하는 난초 치는 비결이다. 완당이 흥선대원군에게 난초그림을 얘기하면서 ‘천재도 결국은 노력이다’라고 말한 것은 난초그림에 대한 그의 지론이었다.
‘난초그림의 뛰어난 화품이란 형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화법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다.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p 321 그러나 완당이 원교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야 했던 이유는 사실 원교가 서법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원당은 원교가 죽고 9년이 지나 태어났으니 이 글은 후대인이 과거의 대가를 극복하고자 가한 역사적 비평이었다.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55세-59세 ‘세한도를 그리며’
p 332 위리안치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중형이다....완당은 그 많은 유배 중에서 절도, 그 중에서도 가장 멀고 흉악한, 이른바 원악지인 제주도, 그 중에서도 서남쪽으로 80리 더 내려가야 하는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으니 그 가혹함은 곱징역인 셈이다.
p 369 원당은 경주 김씨 월성위의 후손이라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것은 형생 벗어날 수 없었던 완당의 귀족주의, 선민의식의 뿌리였으며, 한편으로는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완당의 귀족주의, 선민의식의 뿌리였으며, 한편으로는 명문가의 종손이라는 부담과 굴레를 안고 사는 생의 조건이기도 했다.
7장 제주도 유배시절(하) 59-63세 ‘수선화를 노래하며’
p 431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티와 자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다. 이에 반하여 귀양 와서 쓴 화암사의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박규수가 말한, 완당 중년 글씨의 병폐라던 ‘쓸데없이 기름진’ 것이 귀양살이 7년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p 434 '유재‘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자연)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제하다.
p 467 이동주 선생의 추사체 제주도 성립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 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죽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p 469 제주 유배시 중 ‘시골집’
장독대 동쪽 켠으론 맨드라미 두어 송이
새파란 호박넝쿨은 외양간을 타올랐네.
삼가촌에서 꽃놀이하자고 불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융규가 붉게 피었네.
이 시를 보면 1행부터 4행까지 이미지를 나열하면서 하나의 큰 이미지를 만드는 노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흔히 보아온 1,2,3,4 행으로 흐르는 기승전결의 리듬이나, 먼저 풍경을 읊은 다음에 자신의 심회를 말하는 전경후의의 긴장이나 상투성이 없다. 그저 시골집의 풍경을 읊었을 뿐인데 그 시적 여운은 아주 진하고 길다. 이것은 완당이 시문학에서 견지한 ‘성령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p 471 완당이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인간의 감성과 영적, 활적 인연, 현대 용어로 쉽게 말해서 영감이었다. 그 점에서 성령론은 곧 시란 인간의 성정을 드러낸다는 주장이다.
p 500 ‘옹담계는 “옛 경전 읽는 것을 즐긴다”고 했고 완운대는 “남이 그렇다고 해서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바닷가의 삿갓 쓴 사람은 ’원우의 죄인‘과 흡사한고.’
p 522 ‘이런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분에게 내가 왜 그랬던가? 그때 왜 나는 창암은 창암대로, 원교는 원교대로 그들 나름의 한 생이 있고, 그들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한 글씨를 썼을 것이며, 창암 같은 처지에서 밖으로의 견문이 막혀 있는 사정이었다면 창암 이상의 글씨를 썼겠는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는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는 왕희지를 어떻게 원교만이 평지돌출로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창암의 글씨에 배어 있는 향색은 그 나름의 미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8장 강상시절 64-66세 ‘노호의 칠십이구초당에서’
p 527 제주도에서 돌아온 뒤의 2년 반과 북청 유배 1년간의 완당 일생의 편년 중 거의 공백으로 비어 있고 조사된 것도,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그러나 완당은 바로 이 시절에 수많은 명작을 남긴다. 완당 글씨 중 최고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잔서완석루’, 거의 신품의 경지로 말해지는 ‘불이선란’, 완당 행서의 명작 ‘석노시’ 등이 모두 이 시절의 소산이다.
p 579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우스갯소리로 ‘못 쓰면 추사체라고 우긴다’ 또는 ‘누구나 추사체를 쓸 줄 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것을 완당 동시대 사람을은 ‘괴‘라고 했다. 완당은 자신의 글씨를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본래 괴하다는 것은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다. 더욱이 완당은 글씨가 고하고 졸할지언정 기하거나 괴하면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p 583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p 584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9장 북청 유배시절 66-67세 ‘변방의 찬 하늘 아래서’
p 612
‘외가닥 호관길도 이와 같겠는가
우거진 나무들이 얼기설기 엉켜 있네.
고갯마을 사람들은 가마 메는 괴로움만 당하느니
어찌 이성의 [추수도]를 알까 보냐.‘
장대한 풍광에서 북송의 화가 이성이 그린 [추수도]를 연상하며 산수의 낭만만 찾고 가마 메고 다니는 서민의 힘겨운을 도리어 비하하는 이런 노골적인 선민의식이나 신분적 우월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0장 과천시절 67-71세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p 694 완당이 무엇 때문에 김석준을 이렇게 아끼고 좋아했는지 나는 아직 다는 모른다. 다만 50대 이후 완당의 곁에는 항상 이런 애제자가 꼭 한 명 이상 있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제주시절의 허소치, 강상시절의 조면호, 북창시절의 유요선, 그리고 과천시절의 김석준. 왜 그랬을까?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본래 창작자느 외로움을 깊이 타는 법이다. 열정이 강한 예술가일수록 그 외로움의 깊이는 더하다. 온 정열을 달구어 망아의 경지에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육신은 파김치처럼 흐느적거리고 정신은 공허해진다. 마치 관객들이 다 돌아간 뒤의 텅빈 무대만큼이나 허전하다. 더욱이 창작자들은 세평에 시달리며, 또 그것에 무천 신경쓰기도 한다. 그래서 곁에서 그 불안감을 씻어줄 격려와 칭찬을 원하곤 한다. 작품 발표 이전에 측근에게 보여주는 것은 비평을 바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위안을 얻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열정적인 예술가들은 대개 그 외로움을 받아줄 대상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p 711 완당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열정과 관용은 선택이 아니라 불 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영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와 괴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이제 과천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p 712 유홍준과 제자와의 대화
"샘, 그렇게 기이한 것만 갖고 가면 오랫동안 wmf길 수 없잖아예.“
“그러면 평범한 것을 가져가란 말이냐?”
“어데예, 그러니까 곁들여야지예.”
바로 그것이다. 곁들여야 한다.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은 곁들여야 되는 것이다.
p 745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따로가 손자‘
이렇게 평범한 것의 가치를 극대화시켜놓고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심정을 협서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이것은 촌늙은이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한 큰 황금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p 761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 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 이쯤 되면 불계공졸도 뛰어넘은 경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이 재미없었다고 욕하지 않겠다. 단지 내 기질에 맞지 않았다고 변명하련다.
전 국민의 1/3은 읽었을 법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나는 읽지 않았지만, 책에서 뽑아놓은 글들을 잠시 들여다보니 저자의 문체가 꽤 재미있다. 흥미가 있다면 술술 읽혔을 법한 문체인데, 이 책에서는 왠지 그 글빨이 제대로 살지 않은 것 같다. 단지, 문체가 꽤 캐쥬얼하다는 점이 눈에 띠었다. 한문과 고어가 주종인 책에서 멤버, 컬렉션, 콘트롤, 섹스 등의 단어를 쓴 것이 처음에는 좀 거슬렸으나 읽다보니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다 싶었다.
이 분, 글을 자유롭게 쓰려고 노력하는 분인 것 같다.
완당평전 1,2권을 읽으면서, 이 많은 관련 자료와 그림을 따로 한 권의 책에 펴냈으면 보기 좋겠다 -라고 생각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3권을 그렇게 펴냈다. 마지막에 연보를 정리해 준 것도 아주 좋고, 책의 구성에 저자가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럼, 유홍준 교수와 이 책에 대해 몇 마디만 쓰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90년대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외면당하던 ‘우리의 문화유산’ 에 대중의 관심을 모은, 아주 바람직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20년 동안 연구해 펴낸 이 책 ‘완당평전’은 김정희의 인생과 학문을 탐구한 책 중 그 대중화의 의미가 큰 작품이기도 한데,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이에 대해 흥미로운 기사가 많았다.
이 책은 2002년에 처음 나왔고, 내가 구입한 책은 2005년에 발행한 초판의 6쇄이다.
이 책은 출간 당시 많은 지적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지적이 이 책에 오류가 최소 200군데 이상이라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이 책에서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시중에 나도는 추사 글씨의 9할이 가짜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김정희에 대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한 가지 작품에 대해 ‘이 작품을 진짜라고 감정한 사람은 추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추사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라는 평을 할 정도이니, 이 책에 실린 추사의 작품에 대해서도 진품여부의 의구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200군데 이상 틀렸다는 지적에 대해서 약 80군데 정도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재판 시 수정했음을 밝히며, 인용한 원전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완당평전’ 자체가 500군데 이상이 틀린 책인 이상 한문 전공자가 아닌 자신이 어떻게 올바로 쓸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인용한 원전 자체의 오류로 어쩔 수 없는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유명한 유홍준 교수의 책이라고 100% 믿으면 안 된다는 비평가들의 말을 흘려들으면 안 된다는 점.
나 같은 독자야 이런 낯선 분야의 책을 접하면 그 책을 쓴 작가의 유식함에 찬탄하면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게 되어버리지 않는가. 주의!
...유홍준 교수는 2003년 국립박물관장에 공무신청을 했다가 자질 부족이라는 한국고고학회와 미술사학자들이 공식적 반대 의견 표명과 수많은 네티즌의 인신공격 등으로 스스로 후보신청을 거둬들인 바가 있다. 대중적으로 인기작가인 그가, 세간의 유명세에 걸맞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개인적으로 유홍준 교수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단지 책을 읽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알고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적어보았다.
네이버 블로그에 한 네티즌이 적어놓은 것처럼, 학문적으로 유홍준 교수가 완벽하지 못할지라도(사실 어느 누가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는 많은 사람이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고,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강의라면 강의료를 묻지 않고 가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김정희가 ‘추사’보다는 ‘완당’이라는 호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앞으로도 열심히 우리 문화유산 지킴이 역할을 해주시길 바란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자청해 짊어지고 땀 흘리는 자는 아름답다. 그의 노력이 좋은 방향으로 결실을 맺어가길 바랄 뿐이다.
무지했던 분야에 대해 견문을 넓히는 즐거움. 아직 깊이를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과정에 의의를 두는 것이 내가 버티는 방법.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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