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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은 누구인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나왔으며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예술철학 전공)을 거쳤다. <공간>과 <계간 미술>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조선시대 화론연구>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 <화인열전 상,하> 등이 있다
기사로 소개된 유홍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충무공 이순신 사당인 아산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 보다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라고발언했다가 각계의 비난이 쏟아지자 29일, 잘못된 표현이었다고 공개 사과를 했다.
유 청장은 아산이 지역구인 열린우리당 소속 복기왕 국회의원이 28일 저녁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를 통해 현충사는 박정희 기념관이 아니라는 요지의 반론을편 데 대해 29일자 문화재청 홈페이지 새소식란에 `복기왕 의원님께 드리는 글'의형식을 빌려 자신의 발언은 "부적절한 표현"이었으며 "저의 오류"였다는 사과문을게재했다.
이 글에서 유 청장은 "(복기왕) 의원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정과 멸사봉공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소중한 역사적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청에서는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하여 직접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문화재청장으로서 저는 앞으로 현충사를 충무공의 정신을 기리고후세에 널리 귀감으로 전파하는 공간으로 가꿔 나가는데 더욱 성심을 다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앞서 유 청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인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려는 것은 정치적 목적이 내재된 것이라는 요지의 한나라당 소속 김형오 국회의원의 공개 서한에대한 27일자 답신에서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는 아산 현충사, 이것은 이순신 장군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저는 이곳을 손보거나(박 전 대통령 친필인) 현판을 떼 내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아산 지역 시민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유 청장은 28일 오전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자리에서도 "아산 현충사는 거의 박정희 대통령의 기획에 의해 과대 포장돼 있기 때문에그냥 이순신 장군의 사당으로의 의미보다는 그 시대에 있었던 일종의 건축적용의 성격이 굉장히 강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예상 밖의 비판적인 여론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파문이 커지자, 유 청장은 종전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 그 자신의 발언이 부적절했으며 오류였다고 사과한 것으로 보인다.
<책속에 있는 그의 사상>
문화 유산 답사기 시리즈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가 즐겨쓰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문화재이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유교수의자부심이 잘 나타날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유산에 문관심한 사람들까지도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한 한마디이다
<인터넷에 소개된 유홍준>
지은이 소개
유홍준
우리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요 문화유물의 보물고임을 깨우쳐 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저자. 덕분에 `박경리의 토지가 한국의 정신적 GNP를 올려놓았다면 유홍준은 우리나라의 면적을 열 배는 넓혀놓았다'는 평을 얻었다.
그가 미술사에 빠져 들기 시작한 것은 1972년. 군 복무 중이던 유홍준은 재미 삼아 미술사 서적을 뒤적이다가 아예 푹 빠져들어, 휴가만 나오면 박물관을 찾아가 살았다고 한다.
유홍준은 박물관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둘이나 만났다. 하나는 평생 그의 직업이요 낙이 된 미술사 연구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답사여행을 핑계로1년에 서너달씩 집을 비우는 유홍준을 변함없이 이해하고 성원해 줬다. 이처럼 박물관으로부터 신세를 많이 진 유홍준은, 그러나, 신세진 바를 글에 쏟아부어 미술사와 문화 유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폭발시킴으로써 톡톡히 신세를 갚은 셈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출간 후 불과 4년 만인 1997년 봄 학기부터 중학교 3학년 용 국어 교과서에 1권의 서두인 「월출산과 남도」가 실리게 된 것이다. 생존 작가의 작품이, 그것도 이처럼 빨리 교과서에 실린 것도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다.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한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복학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에 또다시 연루돼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결국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까지, 그가 `분에 넘치는 들꽃 같은 평창색시'라고 표현한 그의 아내는 결혼도 하기 전에 꼬박 1년 동안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덕분에 1984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 직후 건국대 미술사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가 24시간 만에 취소당했다. 최종 승인과정에서 복권이 안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 해 곧바로 복권이 됐지만 그는 이 일로 몇 년을 더 시간강사로 떠돌아야 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전까지 그는 `겨레미술공부방'을 운영하는 의식 있는 미술평론가요, 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어 전국을 버스 타고 누비던 극성스런 소장학자였다. 답사여행 때마다 버스 안에서는 걸쭉한 입담의 유홍준이 펼쳐내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입말본`이 대인기였다.
그러던 1991년, 「사회평론」이라는 진보적 시사문화지가 창간되면서, 당시 창간 멤버였던 안병욱 교수가 `너 맨날 버스에서 떠드는 얘기, 글로 한번 써 봐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연재를 시작했고, 2년 뒤 이것이 책으로 묶여져 나오면서 전 국민의 필독서가 되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잡지 「공간」과 「계간미술」 기자를 거쳤다. 글을 쓰면서 술을 끊은 대신, 바둑을 둔다. 실력은 아마 3단. 유홍준이 직접 붙인 그의 집 당호도 `수졸당`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완당평전을 읽고 난 후 내게 일어난 몇가지 깨달음을 정리하고 싶다.
제일 먼저 완당 김정희의 재인식일 것이다. 그것은 아울로 우리나라 유명인물들에 대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에 대한 무지와 재평가의 필요성을 포함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영웅을 키우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경향이 최근 드라마나 책을 통해 변모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에게는 영웅은 비판의 대상이다. 잘은 모르지만 사학계에서도 영웅에 의한 역사의 변천보다는 시대상황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던 하나의 추세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완당평전은 무한한 기쁨을 주었다. 완당이라는 분의 우수성과 위대함을 앎이라는 단순한 차원에서 내가 그동안 국사시간에 흘려들었던 무수한 우리나라의 인물들 중에도 내가 다시 재인식하고 재평가를 해야 할 분들이 너무나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둘째,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서예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다. 서예라 예술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글씨를 잘쓴다는 단순한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동아시아의 예술의 분야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왕희지, 구양순, 소동파가 그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된 것임을 왜 이제서야 깨달았는가? 한편으로는 입시시험이라는 제도적 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한계에 대한 벽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도, 내가 그동안 외부(특히 미국)의 인물과 학문에서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는 자성도 하게 되었다.
셋째, 서예를 통한 예술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예술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예술을 하고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너무나 철학적이지만 그러나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이런 질문들이 내 내면에서 쏟아짐을 느꼈다. 서예의 경우 단순히 어떤 아름다운 필체를 모방하여 글씨가 아름답다고 하여 그것이 명품이 되지는 않는다. 명품의 글씨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이 있고 철학이 담겨져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표출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림도 그렇고 음악도 그러리라는 일반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완당 평전의 내용에 대해 오류가 200곳도 넘는다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나 같은 초문자야 그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어떤 것이 맞는가? 라는 질문은 너무나 커 보인다. 단지 이책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시야를 얻었다는 것이 큰 수확일 것이다.
그럼 이제 완당평전에 녹아있는 완당 김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주관적 느낌은 무엇인가에 대해 정리하고 싶다.
일단 그는 가문좋은 집안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별 문제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일면으로는 그가 일반 서민의 정서와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부유함과 여유속에서도 그가 이룩한 예술과 학문의 경지는 웬만한 노력이 없이는 이루지 못해 보이는 부분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서예가는 모름지기 팔뚝 아래에 309개의 예 비문 글씨를 완전히 익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직접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그가 평생 밑창을 낸 벼루가 10개요 몽당으로 변한 붓이 일천개라고 한 것은 천재라고 불리는 그가 결코 재능만으로 그의 유명세를 이룬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부단한 노력과 정진 그것이 완당에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완당이 위리안치를 명받아 제주로 갈때와 10여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의 완당의 일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완당평전에 나를 울릴만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가 제주도로 가면서 보여준 언행은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찾아 볼 수 없었기에 그랬다. 그것을 10여년이 지난 후 다시 성찰하게 되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이 환경에 의해 자신의 사고체계마저도 바꿀 수 있다는 서글픔과 아울로 완당의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이제는 평범한 모습으로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리라.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내가 저자라면>
이책은 김정희를 전체적인 조망으로 이끌어내어 김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물론 사건의 정확성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아쉬웠던 점은 서장이 너무나 짧다는 점에서였다. 서장이면 짧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쉬운 이유는 서장을 통해 총체적인 완당 김정희에 대한 인물의 평가 및 업적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대한 내용을 얻고 싶은 욕심이 개인적으로 있어서였다.
한편으로는 이책이 유홍준선생만의 한국문화 읽기의 블루오션을 이루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감탄과 존경이 우러러 나온다.
< 나를 사로 잡은 구절들>
1권에서
2권에서
434.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제하다.
438.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라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양순이 <구성궁 예천명>이나 <화도사비> 같은 글을 쓸 때 정호(精豪)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464
“왕희지는 구양순을 통해서 들어간다”
499
옛날 모기는 그래도 예를 알았는데 지금 모기는 예를 알지 못하여 늙은이에게 마구 덤벼드니 역시 지금 모기는 옛날의 모기와 같지 못해서인가요.
517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열심히 좇다 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는 법이라네. 제주도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으니 그게 작은 것이며, 어디 그게 연경이 가르쳐줄 것인가
-완당이 초의선사에게 쓴 편지글 중에서
522
창암 이삼만을 다시 찾아가면서
이런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분에게 내가 왜 그랬던가? 그때 왜 나는 창암은 창암대로, 원교는 원교대로 그들 나름의 한 생이 있고, 그들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한 글씨를 썻을 것이며, 창암 같은 처지에서 밖으로의 견문이 막혀 있는 사정이었다면 창암 이상의 글씨를 써겠는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는 왕희지를 어떻게 원교만이 평지돌출로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창암의 글씨에 배어 있는 향생은 그 나름의 미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579
원래 글씨의 묘를 진실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582
바르셀로나 시는 사실상 가우디의 건축으로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가우디의 건축은 정말로 괴의 극치라 할 만하다. ….그런데 가우디의 건축을 보면 괴는 괴로되 그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건축 곳곳에 서려 있다.
“가우디의 본질은 형태가 아니라 구조다”
예술은 그렇게 예술로서 통하고 대가는 대가로서 통하는 것이다.
583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584
완당의 예술적 성취가 이런 노력의 결실임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완당이 예술의 천재성을 따로 인정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유명한 ‘구천구백구십구분의 일’론 때문인데 이것도 문장을 끝까지 새겨보면 결론은 노력이라는 얘기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완당은 이처럼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전집 6권)
694
완당의 곁에는 항상 애제자가 꼭 한 명 이상 있었다
제주시절의 허소치, 강상시절의 조면호, 북청시절의 유요선, 그리고 과천시절의 김석준.
… 마치 관객들이 다 돌아간 뒤의 텅빈 무대만큼이나 허전하다. 더욱이 창작자들은 세평에 시달리며 또 그것에 무척 신경쓰기도 한다. 그래서 곁에서 그 불안감을 씻어줄 격려와 칭찬을 원하곤 한다.
699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역사 같은 눈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 (전집 권3. 권동인에게, 제33신)
726
보통 조선 시대의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복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를 꼽는다.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만 남는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나(유홍준)의 소견으로는 완당 김정희이다.
723
남북조 시대에는 왕희지,왕헌지가 있고 당나라에는 구양수,저수량이 있고, 송나라에는 소동파, 미불이 있고, 원나라에는 조맹부가 있고 명나라에 동기창이 있다면 청나라시대에는 완당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
IP *.200.97.235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나왔으며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예술철학 전공)을 거쳤다. <공간>과 <계간 미술>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조선시대 화론연구>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 <화인열전 상,하> 등이 있다
기사로 소개된 유홍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충무공 이순신 사당인 아산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 보다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라고발언했다가 각계의 비난이 쏟아지자 29일, 잘못된 표현이었다고 공개 사과를 했다.
유 청장은 아산이 지역구인 열린우리당 소속 복기왕 국회의원이 28일 저녁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를 통해 현충사는 박정희 기념관이 아니라는 요지의 반론을편 데 대해 29일자 문화재청 홈페이지 새소식란에 `복기왕 의원님께 드리는 글'의형식을 빌려 자신의 발언은 "부적절한 표현"이었으며 "저의 오류"였다는 사과문을게재했다.
이 글에서 유 청장은 "(복기왕) 의원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정과 멸사봉공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소중한 역사적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청에서는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하여 직접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문화재청장으로서 저는 앞으로 현충사를 충무공의 정신을 기리고후세에 널리 귀감으로 전파하는 공간으로 가꿔 나가는데 더욱 성심을 다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앞서 유 청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인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려는 것은 정치적 목적이 내재된 것이라는 요지의 한나라당 소속 김형오 국회의원의 공개 서한에대한 27일자 답신에서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는 아산 현충사, 이것은 이순신 장군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저는 이곳을 손보거나(박 전 대통령 친필인) 현판을 떼 내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아산 지역 시민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유 청장은 28일 오전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자리에서도 "아산 현충사는 거의 박정희 대통령의 기획에 의해 과대 포장돼 있기 때문에그냥 이순신 장군의 사당으로의 의미보다는 그 시대에 있었던 일종의 건축적용의 성격이 굉장히 강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예상 밖의 비판적인 여론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파문이 커지자, 유 청장은 종전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 그 자신의 발언이 부적절했으며 오류였다고 사과한 것으로 보인다.
<책속에 있는 그의 사상>
문화 유산 답사기 시리즈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가 즐겨쓰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문화재이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유교수의자부심이 잘 나타날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유산에 문관심한 사람들까지도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한 한마디이다
<인터넷에 소개된 유홍준>
지은이 소개
유홍준
우리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요 문화유물의 보물고임을 깨우쳐 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저자. 덕분에 `박경리의 토지가 한국의 정신적 GNP를 올려놓았다면 유홍준은 우리나라의 면적을 열 배는 넓혀놓았다'는 평을 얻었다.
그가 미술사에 빠져 들기 시작한 것은 1972년. 군 복무 중이던 유홍준은 재미 삼아 미술사 서적을 뒤적이다가 아예 푹 빠져들어, 휴가만 나오면 박물관을 찾아가 살았다고 한다.
유홍준은 박물관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둘이나 만났다. 하나는 평생 그의 직업이요 낙이 된 미술사 연구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답사여행을 핑계로1년에 서너달씩 집을 비우는 유홍준을 변함없이 이해하고 성원해 줬다. 이처럼 박물관으로부터 신세를 많이 진 유홍준은, 그러나, 신세진 바를 글에 쏟아부어 미술사와 문화 유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폭발시킴으로써 톡톡히 신세를 갚은 셈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출간 후 불과 4년 만인 1997년 봄 학기부터 중학교 3학년 용 국어 교과서에 1권의 서두인 「월출산과 남도」가 실리게 된 것이다. 생존 작가의 작품이, 그것도 이처럼 빨리 교과서에 실린 것도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다.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한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복학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에 또다시 연루돼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결국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까지, 그가 `분에 넘치는 들꽃 같은 평창색시'라고 표현한 그의 아내는 결혼도 하기 전에 꼬박 1년 동안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덕분에 1984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 직후 건국대 미술사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가 24시간 만에 취소당했다. 최종 승인과정에서 복권이 안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 해 곧바로 복권이 됐지만 그는 이 일로 몇 년을 더 시간강사로 떠돌아야 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전까지 그는 `겨레미술공부방'을 운영하는 의식 있는 미술평론가요, 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어 전국을 버스 타고 누비던 극성스런 소장학자였다. 답사여행 때마다 버스 안에서는 걸쭉한 입담의 유홍준이 펼쳐내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입말본`이 대인기였다.
그러던 1991년, 「사회평론」이라는 진보적 시사문화지가 창간되면서, 당시 창간 멤버였던 안병욱 교수가 `너 맨날 버스에서 떠드는 얘기, 글로 한번 써 봐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연재를 시작했고, 2년 뒤 이것이 책으로 묶여져 나오면서 전 국민의 필독서가 되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잡지 「공간」과 「계간미술」 기자를 거쳤다. 글을 쓰면서 술을 끊은 대신, 바둑을 둔다. 실력은 아마 3단. 유홍준이 직접 붙인 그의 집 당호도 `수졸당`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완당평전을 읽고 난 후 내게 일어난 몇가지 깨달음을 정리하고 싶다.
제일 먼저 완당 김정희의 재인식일 것이다. 그것은 아울로 우리나라 유명인물들에 대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에 대한 무지와 재평가의 필요성을 포함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영웅을 키우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경향이 최근 드라마나 책을 통해 변모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에게는 영웅은 비판의 대상이다. 잘은 모르지만 사학계에서도 영웅에 의한 역사의 변천보다는 시대상황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던 하나의 추세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완당평전은 무한한 기쁨을 주었다. 완당이라는 분의 우수성과 위대함을 앎이라는 단순한 차원에서 내가 그동안 국사시간에 흘려들었던 무수한 우리나라의 인물들 중에도 내가 다시 재인식하고 재평가를 해야 할 분들이 너무나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둘째,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서예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다. 서예라 예술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글씨를 잘쓴다는 단순한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동아시아의 예술의 분야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왕희지, 구양순, 소동파가 그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된 것임을 왜 이제서야 깨달았는가? 한편으로는 입시시험이라는 제도적 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한계에 대한 벽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도, 내가 그동안 외부(특히 미국)의 인물과 학문에서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는 자성도 하게 되었다.
셋째, 서예를 통한 예술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예술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예술을 하고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너무나 철학적이지만 그러나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이런 질문들이 내 내면에서 쏟아짐을 느꼈다. 서예의 경우 단순히 어떤 아름다운 필체를 모방하여 글씨가 아름답다고 하여 그것이 명품이 되지는 않는다. 명품의 글씨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이 있고 철학이 담겨져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표출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림도 그렇고 음악도 그러리라는 일반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완당 평전의 내용에 대해 오류가 200곳도 넘는다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나 같은 초문자야 그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어떤 것이 맞는가? 라는 질문은 너무나 커 보인다. 단지 이책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시야를 얻었다는 것이 큰 수확일 것이다.
그럼 이제 완당평전에 녹아있는 완당 김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주관적 느낌은 무엇인가에 대해 정리하고 싶다.
일단 그는 가문좋은 집안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별 문제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일면으로는 그가 일반 서민의 정서와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부유함과 여유속에서도 그가 이룩한 예술과 학문의 경지는 웬만한 노력이 없이는 이루지 못해 보이는 부분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서예가는 모름지기 팔뚝 아래에 309개의 예 비문 글씨를 완전히 익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직접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그가 평생 밑창을 낸 벼루가 10개요 몽당으로 변한 붓이 일천개라고 한 것은 천재라고 불리는 그가 결코 재능만으로 그의 유명세를 이룬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부단한 노력과 정진 그것이 완당에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완당이 위리안치를 명받아 제주로 갈때와 10여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의 완당의 일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완당평전에 나를 울릴만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가 제주도로 가면서 보여준 언행은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찾아 볼 수 없었기에 그랬다. 그것을 10여년이 지난 후 다시 성찰하게 되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이 환경에 의해 자신의 사고체계마저도 바꿀 수 있다는 서글픔과 아울로 완당의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이제는 평범한 모습으로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리라.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내가 저자라면>
이책은 김정희를 전체적인 조망으로 이끌어내어 김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물론 사건의 정확성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아쉬웠던 점은 서장이 너무나 짧다는 점에서였다. 서장이면 짧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쉬운 이유는 서장을 통해 총체적인 완당 김정희에 대한 인물의 평가 및 업적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대한 내용을 얻고 싶은 욕심이 개인적으로 있어서였다.
한편으로는 이책이 유홍준선생만의 한국문화 읽기의 블루오션을 이루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감탄과 존경이 우러러 나온다.
< 나를 사로 잡은 구절들>
1권에서
2권에서
434.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제하다.
438.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라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양순이 <구성궁 예천명>이나 <화도사비> 같은 글을 쓸 때 정호(精豪)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464
“왕희지는 구양순을 통해서 들어간다”
499
옛날 모기는 그래도 예를 알았는데 지금 모기는 예를 알지 못하여 늙은이에게 마구 덤벼드니 역시 지금 모기는 옛날의 모기와 같지 못해서인가요.
517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열심히 좇다 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는 법이라네. 제주도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으니 그게 작은 것이며, 어디 그게 연경이 가르쳐줄 것인가
-완당이 초의선사에게 쓴 편지글 중에서
522
창암 이삼만을 다시 찾아가면서
이런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분에게 내가 왜 그랬던가? 그때 왜 나는 창암은 창암대로, 원교는 원교대로 그들 나름의 한 생이 있고, 그들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한 글씨를 썻을 것이며, 창암 같은 처지에서 밖으로의 견문이 막혀 있는 사정이었다면 창암 이상의 글씨를 써겠는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는 왕희지를 어떻게 원교만이 평지돌출로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창암의 글씨에 배어 있는 향생은 그 나름의 미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579
원래 글씨의 묘를 진실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582
바르셀로나 시는 사실상 가우디의 건축으로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가우디의 건축은 정말로 괴의 극치라 할 만하다. ….그런데 가우디의 건축을 보면 괴는 괴로되 그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건축 곳곳에 서려 있다.
“가우디의 본질은 형태가 아니라 구조다”
예술은 그렇게 예술로서 통하고 대가는 대가로서 통하는 것이다.
583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584
완당의 예술적 성취가 이런 노력의 결실임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완당이 예술의 천재성을 따로 인정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유명한 ‘구천구백구십구분의 일’론 때문인데 이것도 문장을 끝까지 새겨보면 결론은 노력이라는 얘기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완당은 이처럼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전집 6권)
694
완당의 곁에는 항상 애제자가 꼭 한 명 이상 있었다
제주시절의 허소치, 강상시절의 조면호, 북청시절의 유요선, 그리고 과천시절의 김석준.
… 마치 관객들이 다 돌아간 뒤의 텅빈 무대만큼이나 허전하다. 더욱이 창작자들은 세평에 시달리며 또 그것에 무척 신경쓰기도 한다. 그래서 곁에서 그 불안감을 씻어줄 격려와 칭찬을 원하곤 한다.
699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역사 같은 눈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 (전집 권3. 권동인에게, 제33신)
726
보통 조선 시대의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복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를 꼽는다.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만 남는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나(유홍준)의 소견으로는 완당 김정희이다.
723
남북조 시대에는 왕희지,왕헌지가 있고 당나라에는 구양수,저수량이 있고, 송나라에는 소동파, 미불이 있고, 원나라에는 조맹부가 있고 명나라에 동기창이 있다면 청나라시대에는 완당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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