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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6일 17시 5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강 영희는 문화평론가이다. 그 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전무하다. 그녀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문학뿐 만아니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 책도 궁극적으로는 인문학보다는 예술에 치중하여 한국의 미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을 그것을 반증한다.

지난날 그녀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1994)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1998)를 저술하기도 했다. 주로 오늘의 세태에 대한 비평이 주로 담기지 않았나 싶다.

문화평론가이면서 먼저 연극평론을 시작했고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으며,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6년 전부터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雜事)에 대한 잡문(雜文)을 쓴 그녀는, 이 책 『금빛 기쁨의 기억』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것이다.


[2. 책을 읽고 나서]

저자 강 영희의 눈에는 20세기의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벗어나 21세기의 새로운 우리나라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이면서 그 멋진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고 지난 20세기초부터 중반까지 역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그 전의 모든 전통을 잃어버린 듯 숨죽이고 살았다는 메시지가 풍긴다.

그러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미의식 좌표는 어디쯤인가? 그간 한국의 미의식은 민족주의라는 강박관념과 이데올로기 편향으로 경직되어 있거나 백의민족, 한(恨)의 미학이라는 용어들로 왜곡되어 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훈장까지 준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예술론을 일부 평자들이 비판없이 추종한 것도 매우 못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또한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한국인과 세계인의 길'이라는 갈림길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선택하고 걸어왔는가, 공존하고 상생으로 키워야 되는 파이를 '제로섬 게임'으로 호도하면서 한국의 미, 한국인의 미의식을 왜곡시키지 않았는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국인으로서 한(恨)을 품고 있는 민족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겉만보고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라고 갈파한다. 한의 최종적인 기착점은 흥(興)이라는 것이다. 한민족만큼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민족은 없다고 한다. 울음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모습은 우리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바로 해학과 신명의 나라라는 것이다.

백의 민족이라면서 쓸쓸함과 우울함의 단색을 좋아했던 민족임을 입방아 찐 이방인들에게도 그렇지 않음을 들어 반격한다. 백색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나 우리민족은 원래 하양, 빨강, 노랑, 까망, 파랑, 오방색이 우리 색의 기본이다. 이렇듯 분명한 색조를 드러냈던 민족이 일제를 거치면서 백색민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색동저고리나 전통혼례에서 찾을 수 있는 원색물결은 이를 입증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또한 우리민족은 상극보다는 상생을 존중한 민족이다. 서로 대치하여 다툼을 좋아한 민족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상생의 민족혼을 갖고 있다. 이러한 한국적 정서는 모든 예술품에 담겨 있음을 알려준다.

“백의민족이여 안녕, 뼈아픈 이십세기여 안녕, 이데올로기여 안녕”이라며 과거와 결별을 고하는 그녀가 한국 문화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새로운 화두로 끌어안는 것은 자주적인 감수성으로서의 ‘취향’의 해방이다.

진정 세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인로서의 기질을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백남준이 그랬고, 정선이 그랬으며, 김정희가 그랬다.

21세기 한국의 힘은 강해지고 있지만 금빛 기쁨의 기억을 담지 못한 한국은 강해질 수없기에 전통을 무시한 21세기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에 따르면 세계인 백남준이 순 한국인으로 남아있는 비결은 그가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속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그에게 전통이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인 것이다.

또한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즉 한국성을 벗어던진 사람은 세계인도 포기해야 함을 강조한다.

세계속의 한국이 되기 위해서는 ‘고유색은 전통주의자에게로’라고 쓰인 플랭카드와 ‘현대의 난장은 세계주의자에게로’라고 쓰인 플랭카드를 번갈아 들어올리며 양자를 단호하게 구분짓는 명쾌한 단색조의 목소리를 경계해야 한다고 외친다.

저자 강 영희의 금빛 기쁨의 기억은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지만 사색의 깊이와 한국인의 미에 대한 심오한 탐구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물론 힘든 책의 숙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3. 책 속에서]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전통은 ‘기억속의 심상’이다. 세계인 백남준이 인간의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다. p27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p28

‘기억 속의 심상’에 의지하여 시간의 흐름에 떠밀리는 세월의 무사함에 대항하는 몸부림이야말로, 인간에게 정체성의 후광을 부여하며 주체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인문적인 가치의 본령이다. p29

전통이란 ‘기억속의 심상’을 토대로 한 것이며, 새롭게 창조되는 오늘의 심상의 전생(前生)이다. p31

취향의 뜨락인 ‘기억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p32

미륵반가상은 ‘먼 저곳’이 아닌 ‘가까운 이곳’에서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의식이 담긴 고유의 심상 가운데 하나다. p34

‘기차가 있는 풍경’이란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 속에서 근대화를 향해 강박적으로 내몰리는 조선사람의 조급함을 상징하는 기호다. p41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p47

취향이란 저마다의 몸 속에 자리잡은 나름의 척도인 까닭에, 낯익은 취향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척도를 향해 침을 뱉고 낯선 취향 속에 들어 있는 타인의 척도를 향해 미소짓는 것은 결국 저다움에 대한 가지부정을 의미한다. p50

한국적인 것의 항목에 한국화한 샌드위치라는 새로운 메뉴가 덧붙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의 취향과 타인의 취향이라는 모순을 창조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결실을 수확하는 만고불변의 공식이 아니겠는가. p51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기억상실에 빠진 지난 세기의 한국인들에게, 당신들에게는 미의식대신 무의식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말한 사람이다. p55

한국 예술을 소중하게 여긴 일본인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 나머지, 그의 ‘사랑’뒤에 숨은 ‘진실’도 알아보지 않은 채 그의 한국 예술론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한국인의 태도는 달라져야 한다. p59

흔히 ‘무의식의 미’ ‘무작위의 미’ ‘무기교의 미’로 표현되는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핵심은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인의 미의식에 덮어씌우면서 그것을 미의식에 미달하는 무의식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p63

조선 도자기의 미와 관련해서 조선 선비의 미의식은 언급하지 않고 조선 도공의 무의식만을 언급한 다음,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일본 다인의 미의식을 덮어씌운 야나기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p71

일본의 국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질서에 동참하는 ‘세계인’이기를 거부하고 ‘일본인’이기만을 고집한, 이를테면 동북아시아 세계의 왕따(?)를 자처한 일본의 독자적인 사상이다. p76

일본의 국학은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이해되는 마고코로(眞心)를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면서 이것을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으로 이해되는 카라고코로(漢意)와 대비시킨다. p77

국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일본인이 조선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예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거기서 ‘일본적인 것’을 발견했을 경우에 한정된다. 야나기가 바로 그런 것이다. p78

국학적인 자연주의에 토대를 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 씌운 ‘무작위의 미’나 ‘비애의 미’와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도리어 일본인의 미의식이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p91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p94

우리는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p98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원한과 슬픔과 동경’이라고 못박은 야나기의 주장은 적어도 한국인의 미의식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p100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일환이었던 조선의 사대란 적극적인 세계화 정책의 일환이었을 따름이지 소극적인 사대주의적 근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p102

사대의 질서를 사대주의로 바꿔치기 하여 한국사의 전 시기에 걸친 민족성 따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분명 역사왜곡이자 식민사관이다. p103

추사의 글을 통해 우리는 격에 대한 한국인의 애증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형(形)의 격, 육체의 격을 멀리하고 상(象)의 격, 정신의 격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전선미를 종합한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p108

중국과 조선의 도자기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하면 불규칙 속의 규칙, 미완성 속의 완성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많은 작품은 완성의 버릇에 치우치는 까닭에 종종 생기를 잃는다. p112

조선에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 야나기에서 고유섭으로 이어지는 민예론의 전제를 이루는 이 명제는 일본의 관제 사학자들이 주장한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p118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깍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p124

3부 한국인의 미의식

모든 아름다움에는 황금비라는 특정한 비율이 숨어 있으며, 이같은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p127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28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름다움’의 본뜻이 사호(私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p129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멋’이라는 이름의 미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p130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정신미(精神美)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p131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p132

음양오행사상은 우주의 생성론과 만물의 변화론이 결합하여 인식과 실천의 체계를 이룬 것인데, 이것들은 모두 형 너머의 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주 만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했다. p134

'눈에 보이는‘ 형(形) 너머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흔히 멋이라고 불리는 한국인의 미의식은 형태미를 넘어서는 정신미의 성격을 지닌다. p139

우리는 일그러진 달항아리와 휘어진 대들보를 통해, ‘형의 어눌함’의 후광에 해당하는 ‘상의 세련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p147

한국문화는 이렇게 상의 세련됨과 형의 어눌함이 어우러진 아졸함이나 고졸함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p147

비균제성이나 비대칭성이란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결과 생겨난 무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형의 어눌함을 수반하는 상의 미의식의 산물이다. p150

상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p153

한국의 발효음식이 양과 질 모두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것은 전통적인 밥상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감한다. p158

우리는 먼저 발효맛의 취향과 화해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되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 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을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p163

한국인의 밥상에서 호사스런 취미와 구별되는 까다로운 취향이 옹골지게 자리잡아갈 때에만,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생기발랄하며 웅숭깊은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p163

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서로 상 자(相)와 살릴 생 자(生)자 합쳐져서 서로가 서로를 살린다는 뜻을 나타내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서로를 돕고 이해하며 서로 생각해 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P164

발효의 원리란 자연의 이치에 따른 상극의 과정인 부패를 인간의 지혜에 따른 상생의 과정인 발효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P167

비보(裨補)의 원리란 상극의 원리가 관철되는 무정한 자연을 상생의 원리가 숨쉬는 유정한 자연으로 바꾸려는 인문적인 자의식의 소산이다. P169

한국에는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비보적 벽산의 산물인 도깨비가 있다. P171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완전한 땅이란 ‘자연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을 거친 ‘인문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사람의 손길이란 비보요,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상(象)의 아름다움이다. P171

한국인의 자화상은 눈물을 웃음으로,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해학과 신명의 본질이 관철된다. P173

한국인은 눈물과 한, 웃음과 흥이 한데 버무려져, ‘생짜의 것’이 ‘곰삭은 것’으로 발효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한 위에 어느새 흥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P175

멋은 형상이나 가락이나 마음에 있어서 한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에고 이어 가고 넘어 가는 과정에 나타난다. 가동적인 정지태(靜止態), 멈추려는 움직임이 연속되는 가동적인 경향상태가 멋의 형태미의 본질이다. P175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P177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생겨나는 ‘가동적인 정지태’의 절제된 움직임은 한국인의 ‘기억 속의 심상’을 대표한다. p178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恨)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또는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p179

울음이란 마침내 웃음으로 초극되고야 만다는 것, 한이란 결국 흥으로 곰삭여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한에만 주목하는 한국적인 한에 대한 담론은 이제는 청산되어야 한다. p179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상극적인 것의 늪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계하기 위해, 지난 세기의 한에 대한 담론을 역사책의 한켠에 선명하게 기록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p181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p185

사람은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람은 시간에 대한 사유보다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 절실해 한다. p186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의 경쟁’에 쫓겨 성찰의 자세를 내던진 지난 세기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p191

풍수사상에 의하면 고지도의 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주산이거나 안산, 좌청룡이거나 우백호이고, 고지도의 하천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명당수이거나 객수이며, 고지도의 산줄기는 단순한 산줄기가 아니라 정기가 흐르는 맥(脈)이다. p194

명당이란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유정함을 지닌 곳’이나 ‘속기가 없는 유토피아’가 된다. p196

우리는 한국인의 공간 취향이 자연적인 동시에 인문적인 것이며, 인문적인 동시에 다시 자연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p199

공간 취향이라는 말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가.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느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p200

미의식을 상징하는 ‘기억 속의 심상’의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가 바로 색(色)이다. 고유색 또는 조선색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짐작되듯이, 색이란 보편 너머의 특수가 자신의 ‘저다움’을 드러내는 눈빛과도 같은 것이다. p201

한국인이 좋아하는 색은 무엇보다 ‘밝고 맑은’ 색, 명도와 채도가 아울러 높은 색이다. p201

한국인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p206

한국인의 색 취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색채적 심상의 바탕색에 해당하는 소색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P208

한국인이 즐겨 사용한 소색이 생기의 미감을 발산한다는 것은, 한국인의 색채적 심상이라는 큰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소색이 수묵채색화의 여백과도 같이 그림 속의 다른 색들을 생기 있게 돋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통해 한층 분명해진다. P210

오방색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민족이 누려온 수많은 색 가운데 순수한 우리말로 된 명칭은 하양, 까망, 빨강, 노랑, 파랑의 다섯 가지뿐인 데, 이것이 바로 오방색이라는 것이다. P211

이처럼 한국인이 음양오행사상을 배후에 지닌 오방색의 원리를 사용한 사실은 한국문화의 배색 원리가 상생적인 조화로움을 지향한 것임을 의미한다. P212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P219

백의민족의 이미지는 풍요로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취향을 빼앗은 대신, 척박한 강박의 틀거리를 덮어씌우는 이데올로기를 떠안겼다. 따라서 취향의 해방을 위해서는, 풍요로운 성찰을 토대로 한 진정한 저다움을 위해서는, 먼저 백의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표상과 결별해야 한다. P222

이제 우리는 어느새 친근한 벗인양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는 백의민족의 표상을 향해 ‘백의민족이여 안녕, 그동안 겪어내야 했던 뼈아픈 이십 세기여 안녕, 이십 세기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데올로기여 안녕, 역사의 갈피 속으로 영원히 안녕!’ 이라는 단호한 고별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P223

색에 대한 취향을 잃어버리고, 색의 부조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며, 색에 대한 몰개성을 천연스럽게 무릅쓰는 색치의 일상을 말이다. P224

고유색의 부재란 한국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의 문제인데, 이같은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잡고 있다. P225

이같은 일상의 취향의 혁명을 앞당길 견인차는 세련되고 전위적인 엘리트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촌스럽고 뒤처지는 남녀노소 장삼이사들의 일상적인 감수성이다. P227

4부 취향과 성질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P231

동양화이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P232

취향은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문적인 지혜의 산물이다. P232

이제 우리는 이같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사고, 이원론적 사고, 이데올로기적 사고를 넘어, 앞뒤가 따로 없는 ‘뫼비우스의 띠’나 안팎이 따로 없는 ‘클라인 씨의 병’에 비유될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사고를 모색해야 한다. 나는 이같은 사고를 취향적 사고라고 부를 것을 새롭게 제안한다. P234

이데올로기적인 사고의 강박 속에서 심지어는 ‘가공할 만한 폭력성을 지닌 미적 불관용’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이십 세기적인 취향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P236

근대적 합리성을 맹목적인 서구성과 구별짓고 그곳에 전통적인 실질합리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한, 미의식은 물론이요 성찰 역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P237

한국인의 미의식을 취향적인 사고에 따른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P238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의 테두리 안으로 수렴시키는 것. 이것은 천지인이 하나라는 사상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한 한국인의 가치관으로부터 비롯된다. 상생지향이 만들어낸 탈속의 경지는 참으로 아름답다. P239

조선의 선비는 현실적인 실존과 이상적인 풍류를 양 어깨에 짊어진 채 현실적인 실존을 이상적 풍류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존재들이다. P245

조선의 백자 가운데 특히 푸른기 도는 단정한 백자를 대할 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영혼이 말갛게 씻기우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처럼 ‘정색을 한’ 선비의 취향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기 때문이다. P247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다. P255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기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의 몸짓이어야 한다. P261

무엇보다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에 들어앉고자 하는 닫힌 마음 대신,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를 향해 걸어나가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의 저다움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은자의 소극성 또는 폐쇄성을 벗어 던지고 세계시민의 적극성 또는 개방성을 추구해야 한다. P261

한국적인 상생의 질서 위에 이십 세기적인 상극의 질서를 겹쳐놓는 발상의 전환, 지난 세기 후반의 한국인은 이같은 발상의 전환을 거대한 실험의 형태로 실천에 옮겼다. P264

기쁨. 산다는 것의 기쁨. 육체의 기쁨.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 이것이 바로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로 승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한국적인 감성의 본질이다. P268

추사는 ‘토속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과 ‘남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창조적으로 회통시켰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P274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따름으로써 새것을 창조하는 것. 이것은 ‘기억 속의 심상’을 ‘오늘의 심상’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것이다. P277

새것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남은 옛것의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P278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P279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P279

우리는 ‘고유색은 전통주의자에게로’라고 쓰인 플랭카드와 ‘현대의 난장은 세계주의자에게로’라고 쓰인 플랭카드를 번갈아 들어올리며 양자를 단호하게 구분짓는 명쾌한 단색조의 목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P280


[4. 내가 저자라면]

한국의 미를 ‘기억속의 심상’에서 찾고 이를 승화하여 궁극적으로 21세기는 한국인의 세계화를 꿈꾸자는 이야기인 듯한 ‘금빛 기쁨의 기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제목인 금빛 기쁨의 기억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직 감이 오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인 의 왜곡된 미의식을 극복하고 21세기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자는 의견일 수 있고 그러한 주장을 피력하는 제목으로 이를 택한 것이라 보는데 내가 저자라면 책과 제목의 연계성을 높이는 것이 좋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국의 미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의 멋을 찾아’는 어떤가?

특히 평론가와 인문학자들의 언어체계는 대부분 은유적 표현과 비유적 언사를 좋아하고 인간의 정도적 언어(?)에 인색해 보인다. 과거의 어두운 연상을 지우고 우리의 고유한 멋과 아름다움을 찾아 새로운 미의식으로 한국의 세계화를 꿈꾼다는 내용이 왜 이리도 어렵게 접근할까가 나의 의문의 하나이다.

우리 역사는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가들이나 역사책을 펴낸 사람들의 태도에서 좌우되지만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도 좌우될 수 있으며 오늘날 역사를 곁들여 저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좌우된다.

우리의 어두운 과거 역사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긍정적 결과를 많이 찾고 발굴하여 향후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청사진을 제시하는 저술이 많았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일제시대에 한국 미술을 풍미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관의 비판내용을 장문으로 아니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독자는 그 사람을 알 필요성을 그리 많이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세대에 살았던 많은 분들의 고통을 되새기며 앞날을 밝히기에는 너무나 쓰라린 과거가 있기에 말이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덮혀진 한국인의 미의식, 한국인의 기질,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곡, 이런 것들을 미의식과 대칭시키기에는 너무나 이면의 갑갑함을 느낀다. 미의식을 통한 아픔에 대한 사유가 절절히 들어있지만 왠지 그들을 통한 밝은 미래가 떠오르기보다는 한 많은 한국인의 정서에 치중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한국인의 아픈 과거에 대한 성찰은 자중하고 싶다. 그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들의 반복적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에 휩싸이게 된다. 과거에서 배우고 과거의 잘못된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정신력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는 미래지향적 자세로 몰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기다.

그런 점에서 사회 지향점을 제시하고 국가 발전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회비평가로서 진취적인 아름다움에 치중된 문장의 나열이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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