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명수
- 조회 수 305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1. 저자에 대하여]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1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 책을 읽고 나서]
백범 김구 선생님. 그는 한평생을 오직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몸바친 분이다. 지난날 나는 조직생활에 가장 어려운 업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것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 국가전체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유사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주공과 토공을 통합하려는 작업이었다. 비록 정부가 앞장서서 수행할 내용이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추진하지 않음으로써 공기업내에서 이 업무를 수행한 나로서는 적지 않은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때 만났던 책이 바로 김구선생님의 백범일지였다. 나는 그때 많은 의사결정을 강요당했는데 이를 원만히 해결하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를 고민하다가 내 나름의 광명위원회를 구성해 보기로 했다.
광명위원회란 세상을 빛낸 위인 7명을 찾아 이 분들로서 마음속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문을 구하기에 앞서 이 분들의 전기나 저서를 탐독하는 것이었다. 그 위원회의 한 분이 바로 김구 선생님이었다.
그 분이 태어나 삶을 영위한 기간은 참으로 한민족이 가장 비참했던 시절이었다.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는 도대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일제의 강점기였고 국력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주체성이 망각되고 민족혼이 도륙되는 혼탁기 속에 김구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6척이 안되는 단신임에도 강골기질을 타고나 왜세(倭勢)의 침탈에 굴하지 않고 독립에 혼과 몸을 던진 분이다. 그러한 성품과 사상이 끊임없는 감옥생활과 수없는 생사의 기로에서 더욱 다져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심에 고취된 지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 독립에 확신을 갖게 된다.
이 백범일지를 읽노라면 한 사람의 삶의 역정이 이토록 드라마틱할 수 있는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역경속에서도 굳은 심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끝없는 독서탐독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일지 곳곳에 의미심장한 문구를 보노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중 나의 가슴에 와닿는 글귀는 ‘벼랑이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懸崖撤手丈夫兒 )’라는 말이다. 국모를 살해한 왜인을 때려잡을 때도 생각했고, 생사의 기로에 설 때마다 되새기며 읽었다는 그 글귀다. 가히 장부로서의 힘을 실어주는 데 손색이 없는 말이다.
또한 일지속에는 없지만 책 서문에 있는 서산대사의 선시가 정말 마음에 든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썼던 이 시는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한 것이기에 백범이 얼마나 큰 인물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게 해준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쓰게 된 동기는 백범 출간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 의사사건 이후에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저 나라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어서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들에게 이 ‘범인(凡人)’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이 책에서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국어책에서도 배운 ‘나의 소원’부분이다.
“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아마 그 다음에도 물으면 계속해서 우리나라 독립을 외쳤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백범의 민족정신뿐 만 아니라 정치사상 그리고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 대해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주옥같은 문장들이 즐비하다.
나는 이 단락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읽어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에 살았던 분으로서 이토록 미래지향적인 글월을 남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늘 읽어보고 내일 읽어봐도 너무나 오늘의 우리 현실을 예측한 내용들이 여서 읽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나는 김구선생님의 백범일지를 읽고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정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나의 가치를 남길 한 인간으로서 남아야 될 것이라는 각오를 갖게 했고 나도 반드시 나의 자서전을 남기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한 인간으로서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아간 김 구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 틀림없기에 그 분을 기리는 작업을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 책 속에서]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p19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우리 집안이 극히 빈곤하데 나이 겨우 열일곱에 아니을 얻으니, 어머님은 항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셨다 한다. 어머님은 젖이 부족하여 암죽을 끊여 먹였고, 아버님은 나를 품고 이웃집 산모에게 젖을 구하였다. p24
2. 시련의 사회진출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信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信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p39
장수가 될 훌륭한 자질을 논하면서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泰山覆於前 心不妄動)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與士卒 同甘苦)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進退如虎)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敗)
등의 구절을 매우 흥미 있게 낭송하였다. p40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得樹攀枝不足奇)
벼랑이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懸崖撤手丈夫兒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였다. p64
3. 질풍노도의 청년기
통탄할 바, 저 왜적은 나와 함께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원수이다. (痛彼倭敵與我 不共載天之讐) p78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라고 고생하시었다.”라 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많은 고새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 살리시기 위해 천중만금(天重萬金)의 고생을 겪으셨다. 불서(佛書)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p10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로운 물고기가 아니리.(跋扈두상린)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求忠必於孝)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請看依閭人) p126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p131
4. 방랑과 모색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p181
5. 식민의 시련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p215
국가가 망하기 전 구국사업에 성의 성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으로 자인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가르침과, 사육신․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p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p221
'오냐, 나는 죽어도 몽우리돌로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몽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죽는 날까지 왜마의 소위 법률이란 것을 한 푼이라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계속 행하고, 왜마를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보리라고 결심하였다. p239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食人之食衣人衣)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所志平生莫有違) p244
오랜만에 모자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절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원수 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p246
표면으로 나도 붉은 옷을 입은 복역수이나, 정신상으로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의 이른바 ‘신부민(新付民: 식민 백성)이 아니고, 나의 정신으로는 죽으나 사나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왜놈의 법률을 복종치 않는 실제 사실이 있어야만, 내가 살아 있는 본뜻이 있는 자이다. p249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백정)범부(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p267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p267
6. 망명의 길
나의 본뜻은 우리가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로 인해 무한한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라일에 공헌한 것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연금하여 장의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p288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p289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빈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p289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p291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은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p298
세사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p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당시 상해에 있는 한인은 500여명 가량 되었다. 그 가운데 약간의 상업 종사자와 유학생, 10명 남짓의 전차회사 검표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본국․일본․미주․중국․러시아 등에서 모여든 지사(志士)들이었다. p300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p307
명색이 국무위원회 주석이지만 그것은 개회할 때 주석일 뿐이었다. 또한 국무위원들이 주석을 돌아가며 맡아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 이후 정부의 분란은 일단 가라앉았으나, 경제적으로는 정부 명의마저 유지할 길이 막연하였다. p317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이씨는 의기남자(義氣男子)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할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씨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나는 이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봉창은 공경하는 의지로 나에게 국사에 헌신할 지도를 요청하였다. 나는 그의 뜻을 쾌히 승낙하였다. p323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으로 나가 식장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며 거사할 위치를 점검하였다. p334
어저께까지 채소바구니를 메고 날마다 홍구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나 이외에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 몇 명만 이 사실을 짐작하였을 뿐이고, 그날의 거사는 나 혼자만 알고 있었다. p337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되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p352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p353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 서대문감옥에서 소원하기를, 천우신조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가 성립되거든 정부 문지기를 하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p365
이 소원을 초과하여 최고직을 경험한 나의 책임을 무엇으로 이행할까 하는 생각에서 모험사업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고,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년2개월 만에 상편을 완성하였다. p365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였다.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하고 자연히 노복제를 물리치고 고용제를 사용하였다. p379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p379
어머님께서는 중경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대가족을 따라 기강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석오 이동녕 선생이 71세 노령으로 작고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 석오 선생이 별세한 뒤, 일을 만나면 당장 선생 생각부터 하게 되니 이는 선생만한 고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랴. 우리 운동계의 대손실이라 할 수 있다. p390
6. 해방 전후의 대륙
나는 우리가 주의를 논의할 때가 아니고, 민족적으로 조국을 광복한 후 각각의 주의로써 당적 결합을 할 셈하고, 지금은 단일적으로 각 단체를 합동․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제의하였다. p392
세상만사가 어찌 모두 무심하고 우연이라 하리오.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 수가 13년전보다 몇십 배나 증가되었으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의 고통으로 인하여 각종 공장과 사업 방면에서 부정한 자가 속출하였다. p408
7. 조국에 돌아와서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p409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것과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p409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p409
나의 소원(p423-p433)
1. 민족국가
“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신라의 충신)이, “내 차라리 계림(신라의 별칭)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이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러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설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一點一劃)이라는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리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는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크리스트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는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喧喧囂囂)하여 귀일(歸一)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國論),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투표․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의 이론으로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행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3.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이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로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大韓)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전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春風)이 태탕(駘蕩)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各員)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행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韓土)의 기자(奇字)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칠십이 넘었으니 몸소 국민 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끝.
[4.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상권, 하권 그리고 나의소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과 하권은 시대는 다르지만 유서형식으로 작성된 것이고 저자 본인의 독립운동사라 할 수 있기에 무엇이라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내가 자서전을 적는 다면 상권 하권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작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연도별로 작성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유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노년시절 정도면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백범선생님은 특수한 시대의 인물이니만큼 조국에서의 독립운동,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서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상권은 김구선생님이 1919년 중국으로 건너온 지 10년이 되는 1928년(당시 53세)부터 약 1년간 쓴 것이고 내용도 주로 백범 개인의 성장과 신변활동에 관한 것이라면, 하권은 중경 임시청사에서 67세(1942년)에 집필하였고 백범개인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주변인물들에 관한 기록이므로 상․하권의 흐름이 일치되지 못한 면이 많다. 이것은 집필시기나 집필동기가 차이가 나기에 발생된 일이나 자서전으로 일관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아무렴은 어떠랴. 철혈남아(鐵血男兒)로서 70평생을 오직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시기에 쓰여진 일지이기에 그 흐름이나 형식을 떠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어떤 저작보다도 감동있게 다가온다.
IP *.18.196.24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1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 책을 읽고 나서]
백범 김구 선생님. 그는 한평생을 오직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몸바친 분이다. 지난날 나는 조직생활에 가장 어려운 업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것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 국가전체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유사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주공과 토공을 통합하려는 작업이었다. 비록 정부가 앞장서서 수행할 내용이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추진하지 않음으로써 공기업내에서 이 업무를 수행한 나로서는 적지 않은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때 만났던 책이 바로 김구선생님의 백범일지였다. 나는 그때 많은 의사결정을 강요당했는데 이를 원만히 해결하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를 고민하다가 내 나름의 광명위원회를 구성해 보기로 했다.
광명위원회란 세상을 빛낸 위인 7명을 찾아 이 분들로서 마음속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문을 구하기에 앞서 이 분들의 전기나 저서를 탐독하는 것이었다. 그 위원회의 한 분이 바로 김구 선생님이었다.
그 분이 태어나 삶을 영위한 기간은 참으로 한민족이 가장 비참했던 시절이었다.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는 도대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일제의 강점기였고 국력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주체성이 망각되고 민족혼이 도륙되는 혼탁기 속에 김구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6척이 안되는 단신임에도 강골기질을 타고나 왜세(倭勢)의 침탈에 굴하지 않고 독립에 혼과 몸을 던진 분이다. 그러한 성품과 사상이 끊임없는 감옥생활과 수없는 생사의 기로에서 더욱 다져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심에 고취된 지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 독립에 확신을 갖게 된다.
이 백범일지를 읽노라면 한 사람의 삶의 역정이 이토록 드라마틱할 수 있는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역경속에서도 굳은 심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끝없는 독서탐독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일지 곳곳에 의미심장한 문구를 보노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중 나의 가슴에 와닿는 글귀는 ‘벼랑이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懸崖撤手丈夫兒 )’라는 말이다. 국모를 살해한 왜인을 때려잡을 때도 생각했고, 생사의 기로에 설 때마다 되새기며 읽었다는 그 글귀다. 가히 장부로서의 힘을 실어주는 데 손색이 없는 말이다.
또한 일지속에는 없지만 책 서문에 있는 서산대사의 선시가 정말 마음에 든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썼던 이 시는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한 것이기에 백범이 얼마나 큰 인물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게 해준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쓰게 된 동기는 백범 출간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 의사사건 이후에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저 나라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어서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들에게 이 ‘범인(凡人)’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이 책에서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국어책에서도 배운 ‘나의 소원’부분이다.
“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아마 그 다음에도 물으면 계속해서 우리나라 독립을 외쳤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백범의 민족정신뿐 만 아니라 정치사상 그리고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 대해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주옥같은 문장들이 즐비하다.
나는 이 단락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읽어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에 살았던 분으로서 이토록 미래지향적인 글월을 남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늘 읽어보고 내일 읽어봐도 너무나 오늘의 우리 현실을 예측한 내용들이 여서 읽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나는 김구선생님의 백범일지를 읽고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정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나의 가치를 남길 한 인간으로서 남아야 될 것이라는 각오를 갖게 했고 나도 반드시 나의 자서전을 남기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한 인간으로서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아간 김 구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 틀림없기에 그 분을 기리는 작업을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 책 속에서]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p19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우리 집안이 극히 빈곤하데 나이 겨우 열일곱에 아니을 얻으니, 어머님은 항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셨다 한다. 어머님은 젖이 부족하여 암죽을 끊여 먹였고, 아버님은 나를 품고 이웃집 산모에게 젖을 구하였다. p24
2. 시련의 사회진출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信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信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p39
장수가 될 훌륭한 자질을 논하면서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泰山覆於前 心不妄動)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與士卒 同甘苦)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進退如虎)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敗)
등의 구절을 매우 흥미 있게 낭송하였다. p40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得樹攀枝不足奇)
벼랑이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懸崖撤手丈夫兒 )라는 구절을 힘있게 설명하였다. p64
3. 질풍노도의 청년기
통탄할 바, 저 왜적은 나와 함께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원수이다. (痛彼倭敵與我 不共載天之讐) p78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라고 고생하시었다.”라 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많은 고새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 살리시기 위해 천중만금(天重萬金)의 고생을 겪으셨다. 불서(佛書)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p10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로운 물고기가 아니리.(跋扈두상린)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求忠必於孝)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請看依閭人) p126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p131
4. 방랑과 모색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p181
5. 식민의 시련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p215
국가가 망하기 전 구국사업에 성의 성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으로 자인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가르침과, 사육신․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p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p221
'오냐, 나는 죽어도 몽우리돌로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몽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죽는 날까지 왜마의 소위 법률이란 것을 한 푼이라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계속 행하고, 왜마를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보리라고 결심하였다. p239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食人之食衣人衣)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所志平生莫有違) p244
오랜만에 모자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절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원수 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p246
표면으로 나도 붉은 옷을 입은 복역수이나, 정신상으로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의 이른바 ‘신부민(新付民: 식민 백성)이 아니고, 나의 정신으로는 죽으나 사나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왜놈의 법률을 복종치 않는 실제 사실이 있어야만, 내가 살아 있는 본뜻이 있는 자이다. p249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백정)범부(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p267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p267
6. 망명의 길
나의 본뜻은 우리가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로 인해 무한한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라일에 공헌한 것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연금하여 장의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p288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p289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빈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p289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p291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은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p298
세사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p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당시 상해에 있는 한인은 500여명 가량 되었다. 그 가운데 약간의 상업 종사자와 유학생, 10명 남짓의 전차회사 검표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본국․일본․미주․중국․러시아 등에서 모여든 지사(志士)들이었다. p300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p307
명색이 국무위원회 주석이지만 그것은 개회할 때 주석일 뿐이었다. 또한 국무위원들이 주석을 돌아가며 맡아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 이후 정부의 분란은 일단 가라앉았으나, 경제적으로는 정부 명의마저 유지할 길이 막연하였다. p317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이씨는 의기남자(義氣男子)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할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씨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나는 이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봉창은 공경하는 의지로 나에게 국사에 헌신할 지도를 요청하였다. 나는 그의 뜻을 쾌히 승낙하였다. p323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으로 나가 식장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며 거사할 위치를 점검하였다. p334
어저께까지 채소바구니를 메고 날마다 홍구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나 이외에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 몇 명만 이 사실을 짐작하였을 뿐이고, 그날의 거사는 나 혼자만 알고 있었다. p337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되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p352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p353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나이 오십여라. 과거를 회상하고 장래를 추상하니 신세 가련하다. 서대문감옥에서 소원하기를, 천우신조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가 성립되거든 정부 문지기를 하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p365
이 소원을 초과하여 최고직을 경험한 나의 책임을 무엇으로 이행할까 하는 생각에서 모험사업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고,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년2개월 만에 상편을 완성하였다. p365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였다.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하고 자연히 노복제를 물리치고 고용제를 사용하였다. p379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p379
어머님께서는 중경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대가족을 따라 기강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석오 이동녕 선생이 71세 노령으로 작고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 석오 선생이 별세한 뒤, 일을 만나면 당장 선생 생각부터 하게 되니 이는 선생만한 고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랴. 우리 운동계의 대손실이라 할 수 있다. p390
6. 해방 전후의 대륙
나는 우리가 주의를 논의할 때가 아니고, 민족적으로 조국을 광복한 후 각각의 주의로써 당적 결합을 할 셈하고, 지금은 단일적으로 각 단체를 합동․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제의하였다. p392
세상만사가 어찌 모두 무심하고 우연이라 하리오.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 수가 13년전보다 몇십 배나 증가되었으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의 고통으로 인하여 각종 공장과 사업 방면에서 부정한 자가 속출하였다. p408
7. 조국에 돌아와서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p409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것과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p409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p409
나의 소원(p423-p433)
1. 민족국가
“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신라의 충신)이, “내 차라리 계림(신라의 별칭)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이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러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설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一點一劃)이라는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리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는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크리스트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는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喧喧囂囂)하여 귀일(歸一)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國論),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투표․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의 이론으로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행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3.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이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로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大韓)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전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春風)이 태탕(駘蕩)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各員)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행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韓土)의 기자(奇字)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칠십이 넘었으니 몸소 국민 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끝.
[4.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상권, 하권 그리고 나의소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과 하권은 시대는 다르지만 유서형식으로 작성된 것이고 저자 본인의 독립운동사라 할 수 있기에 무엇이라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내가 자서전을 적는 다면 상권 하권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작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연도별로 작성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유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노년시절 정도면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백범선생님은 특수한 시대의 인물이니만큼 조국에서의 독립운동,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서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상권은 김구선생님이 1919년 중국으로 건너온 지 10년이 되는 1928년(당시 53세)부터 약 1년간 쓴 것이고 내용도 주로 백범 개인의 성장과 신변활동에 관한 것이라면, 하권은 중경 임시청사에서 67세(1942년)에 집필하였고 백범개인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주변인물들에 관한 기록이므로 상․하권의 흐름이 일치되지 못한 면이 많다. 이것은 집필시기나 집필동기가 차이가 나기에 발생된 일이나 자서전으로 일관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아무렴은 어떠랴. 철혈남아(鐵血男兒)로서 70평생을 오직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시기에 쓰여진 일지이기에 그 흐름이나 형식을 떠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어떤 저작보다도 감동있게 다가온다.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5032 | #3 떠남과 만남(장성한) | 뚱냥이 | 2017.04.24 | 2087 |
5031 | #21 파우스트1 (이정학) | 모닝 | 2017.08.29 | 2089 |
5030 | #3 떠남과 만남 (윤정욱) | 윤정욱 | 2017.04.23 | 2128 |
5029 | #2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_이수정 [2] | 알로하 | 2017.04.17 | 2140 |
5028 | #3 떠남과 만남(이정학) | 모닝 | 2017.04.23 | 2152 |
5027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수정 중 | 종종 | 2015.01.05 | 2170 |
5026 | #7-열정과 기질 | 왕참치 | 2014.05.26 | 2174 |
5025 | #12 철학이야기 1_이수정 | 알로하 | 2017.06.26 | 2179 |
5024 | #40 대통령의 글쓰기 (윤정욱) [1] | 윤정욱 | 2018.01.16 | 2182 |
5023 | #25 -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 - 이동희 | 희동이 | 2014.10.14 | 2185 |
5022 |
#45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윤정욱) ![]() | 윤정욱 | 2018.02.19 | 2193 |
5021 | #1 익숙한 것과의 결별(장성한) [3] | 뚱냥이 | 2017.04.11 | 2197 |
5020 | #23 사기열전1_1 [1] | 뚱냥이 | 2017.09.10 | 2197 |
5019 | 떠남과 만남 [2] | 박혜홍 | 2018.09.18 | 2197 |
5018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앨리스 | 2015.01.05 | 2199 |
5017 |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 박혜홍 | 2018.08.05 | 2199 |
5016 | #33 그림자 - 내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이정학) | 모닝 | 2017.11.27 | 2200 |
5015 | #13 철학이야기 2/2 (정승훈) | 정승훈 | 2017.07.02 | 2201 |
5014 | 숨결이 바람 될 때 | 송의섭 | 2018.01.28 | 2201 |
5013 | [구본형 다시읽기] 신화읽는 시간 [1] | -창- | 2013.09.08 | 2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