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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기쁨의 기억
<지은이 소개>
강영희
문화평론가.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6년 전부터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에 대한 잡문을 써온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셈이다
강영희 칼럼을 통해 본 강영희
[문화칼럼/강영희]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위한 변명
육군과 감독이 한판의 다트게임을 시작한다. 화살을 던지는 자는 희극의 주인공이 되고, 화살을 맞는 자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게임이 길어지면 희극의 주인공은 여론의 화살받이가 되고, 비극의 주인공은 면죄부를 얻을지 모른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얘기다. 스물여섯 살의 신참 감독이 지원금과 쌈짓돈 2000만 원을 들여 만든 졸업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인 병영을 세트로 만들 만큼의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한 감독은 비극적 결말을 해피 엔딩으로 바꿔치기한 가짜 시나리오를 제출하여 군의 제작 지원을 얻어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군은 감독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로 고소할 예정이다.
태정(하정우 분)과 승영(서장원 분)은 우연히 군대에서 해후한 중학교 동창이다. 그런데 폭력이 일상 속에 스민 군대의 현실과 그럭저럭 타협한 태정과는 달리 승영은 타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가 되면 현실을 개혁하겠다고 결심한다. 승영은 새로운 신참 지훈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자 이 같은 결심을 실천으로 옮긴다. 지훈 역은 윤종빈 감독이 직접 맡았다. 문제는 지훈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승영의 시도가 결코 쉽지는 않다는 것. 마침내 애인의 변심으로 균형을 잃은 지훈을 보며 승영은 불안해진다. 둘 사이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이 같은 균열은 결국 지훈의 자살로 이어진다. 승영도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한다.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군대를 다룬 영화이면서도 군대만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것. 군대라는 제도의 폭력을 다룬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승영의 이야기로 충분했고, 승영의 이야기로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지훈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훈이라는 캐릭터의 독특함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지훈은 순진하고, 우직하며, 어수룩한 인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면이 그럴 뿐이다. 다시 자세히 보면 지훈은 어딘가 오만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며, ‘왕자병’의 기질도 있어 보인다. 이 같은 혼란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문제는 지훈이 지닌 비극적 결함(hamartia)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그는 자폐적이며 소통 불능에 빠진 고립된 영혼이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체의 수위를 조절할 줄 모르며, 자신에게 던져진 문제 앞에서 아이처럼 발버둥치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망연자실 무력해진다. 벽창호 같은 지훈. 하지만 꽁꽁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그의 고통은 타인들에게는 기껏해야 입맛 쓴 희극으로 읽힌다.
오늘날 승영처럼 어떤 개혁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군대만이 대상은 아니다. 군대가 그 대상을 대표하고 상징할 따름이다. 문제는 개혁의 궁극적인 대상이 제도(制度)가 아니라 인간(人間)이라는 데 있으며, 필연적으로 개혁의 주체 자신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데 있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은 순진하고 우직한가 하면, 때로는 오만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다. 게다가 우리는 자주 소통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래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승영처럼 벽에 부닥쳐 튕겨 나온 다음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방법은 하나다. 벽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외부의 벽 속에 도사린 내부의 벽과 마주쳐야 하며,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가 하나로 겹쳐져야 한다. 무엇보다 승영은 귀에 꽂은 리시버부터 뽑아 던져야 한다.
육군과 감독이 한판의 다트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은 결국 씁쓸한 희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게임이 시작됐으되, 게임을 끝내지 않는 묘안은 없을까.
강영희 문화평론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금빛 기쁨의 기억이라는 책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의 비판서인지 혹은 한국미의 새로운 발견을 담고자 하는지에 대해 짬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인의 한국 예술론을 일본 제국 식민사관으로 바라보는 그의 눈임을 강조하며 한국의 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에서 책을 낸 것이 역력해 보인다.
결국은 야나기 무네요시라의 한국 예술관에 얽매여 있다는인상이 강하다. 그의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 한국의 미는 결국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하나의 반증일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 같은 한국미에 대해 그동안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갑자기 튀어나온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판은 생뚱맞기 그지 없었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였다면 그동안의 생각은 한번쯤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는 책은 확실하다.
책의 시작은 매우 산뜻했다.
“여기 두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다. 당신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금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인가,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인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인가.” 이 질문은 책을 처음 펼친 나에게 상상의 나래와 선택의 어려움을 동시에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선호할까?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기 보다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인이 되고 싶다는 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다시 그 질문을 바라다 보니 분명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판단이 섰고, 나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답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글로벌화한 이 시대에 세계화로 흘러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은 한국인 중에 그렇게 많지 않다. 그는 세계의 아티스트에서 베스트였기 때문에 한국에 소개되었다. 즉 내가 선택한 것과는 반대의 경우다. 무엇이든 좋다. 결국은 세계화라는 큰 물결속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한 지류로 만난다는 자연의 법칙에 이끌릴 테니까 말이다.
이렇듯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 이 책은 또 하나의 나를 유혹하는 문구를 던졌다. “전통은 기억 속의 심상이다.” 가 그것이다. 이 말은 내가 배우고 있는 학문과도 통하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오감 즉 시각, 청각, 촉각, 후각/미각으로 이루어져있고 이것을 언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이라는 것도 기억이라는 경험이고 경험의 구성요소인 오감 즉 이 책에서 표현하는 단어인 심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풍부한 한국의 미를 전달해 주었다. 하지만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일반화와 삭제가 분명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직 예술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 예술이라는 장르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을 주었고 앞으로의 한국 예술의 발전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책은 하나의 성공이지 않을까?
<내가 작가라면>
작가의 비평을 좀 해야겠다.
작가는 야나기라는 한 일본을 일본 제국주의에 예속되어 그 사상속에서 한국의 미를 바라본 한계를 맹렬히 비난한다. 책 대로라면 1984년 정부가 일본인에게 준 최초의 훈장인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의 야나기에 대한 수여는 잘못되었다는 뉘앙스가 진하게 깔려 있다. 야나기라는 한 인물이 일본인이라는 한계점도 있겠지만 일본인이였기에 우리의 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을 희석하려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독자의 경우 통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웬지 상대방의 공적을 깎아내려는 듯한 인상이 강해 거부감이 든 면이 있음을 고백한다.
예술은 주관적이다. 주관적이기에 다양한 창조가 나오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다양한 선택이 있지는 않을까? 그저 이책을 야나기는 이렇게 한국의 미를 이렇게 표현을 했지만 나는 이렇게 보고 있다라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야나기라는 인물의 백그라운드를 통해 그의 조선의 예술의 관점이 오로지 일본 식민사관에 의거한 해석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은 이책이 의도하는 방향과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가 강영희님은 야나기의 예술에 대한 태도가 객관적인 연구가 아니라 주관적인 이해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기에 이를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목까지 차오른다. 예술이 주관적일 텐데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을 소위 말하는 학문으로 받아들여 객관적인 데이터를 필요로한다는 것은 소위 말하는 “지식인의 눈”일 뿐이다. 예술은 지식인의 소유물이 아니지 않는가?
한편 작가의 한국의 미에 대한 풍부한 감정과 지식은 읽는 나로 하여금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렇게 정교하고 주관적인 감정을 개입시켜 해석할 수 있구나라는 점에서 놀라움과 존경감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족함이 있다. 강영희라는 이름의 책을 다시 사서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작가의 화려한 수사와 문체는 나에게 매력이었다.
또한 예술이 서로 연계를 맺고 있는 설명은 나의 예술을 보는 차원을 한 단계 높여준 부분으로 책을 읽고 흡족한 미소를 받는다.
<책의 인상깊었던 부분>
1부.기억살실과 어제의 한국인
<17>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19>
한국인 백남준이란 죽어버린 과거이며, 세계인 백남준이야말로 살아있는 현재이자 미래가 아니겠는가.
<20>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22>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김용옥,[도올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 석도화론
<23>
세계인 백남준 속에 들어 있는 순한국인 백남준, 이 같은 사정은 작곡가 윤이상의 경우도, 화가 이응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이상이 자신의 음악을 위한 염감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강서대묘의 사신도, 이응노가 즐겨 그린 풍죽을 떠올려보라.
<27>
전통은 기억 속의 심상이다.
<28>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론: 과거도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다. 기억도 감각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50>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사들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확}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예술론
<56>
특히나 한국인들을 감동시켰던 것은 한국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가 객관적인 연구가 아니라 주관적인 이해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59>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고대 예술인들의 세계는 ‘思考이전’ ‘人爲이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한국미의 정신은 실로 이 평언으로써 적중되었으며 여기에 더 덧붙일 말을 찾을 수 없다.
<61> 서양은 어디까지나 행위자이고 동양은 수동적인 반응자이다. 서양은 동양의 행동의 모든 측면에 관하여 관찰자이고 재판관이며, 배심원이다.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70> 백자대접
15세기 조선. 순백색의 색이나 선비의 백색 두루마기처럼 조선시대를 풍미한 순백의 색은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선비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잘 드러낸다. 천지인 상관의 사상 속에서 수인사하고 대천명하는 삶을 꾸려간 조선 선비들은 사심이 없는 공심을 유지하고자 애써 왔는데, 이것이 바로 순백색으로 표현되었다.
<73> 종묘의 정전
종묘는 조선 문화의 격조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89>
마치 고대 일본이 조선 예술에 의해 그 문명의 첫걸음을 내딛었듯이, 지금의 일본도 그것을 돌봄으로써 마음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야네기 무네요시, “그의 조선행”)
<93>
선의 비밀을 풀지 못하면 조선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 (야네기 무네요시,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
<94>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98>
우리의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98>
외형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림보다 내면적인 생명이 약동하는 그림이고서야 비로서 좋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벽화를 통해서 우리는 배울 수 있다.
<102>
사대외교는 어디까지나 민족보전을 위한 현실적 외교정책으로서 결코 자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104>
실로 꼼꼼한 기교란 그들이 모르는 수법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시대 도자기의 특질”)
<111>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바라본 야나기는 거기에 불가사의한 신비의 분위기를 덧씌워 부정형, 불균제, 불균등 같은 것으로 정리해 낼 수밖에 없었다.
<116>
조선 예술의 아름다움은 기교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 작위에 의지하지 않고 만들어진 잡기나 민예의 성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31>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132>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132>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40>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가운데는 돌로 된 조각이 유난히 많다. 중국에는 벽돌로 만든 전탑이 많고, 일본에는 목탑이 많으며, 한국에는 석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153>
다시금 눈을 크게 뜬 상태에서 원경의 미학으로 그것을 바라보라, 거기서 문득 유정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면 그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155>
한국인이 이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생활 속에서 물질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해온 감각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발효맛이다.
<159>
중요한 것은 발효음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요리의 시스템이나 코드로 사용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어령, “김치맛과 한국문화”)
<169>
비보의 원리란 이처럼 상극적인 것을 향해 대립과 투쟁을 전개하는 대신 허전한 곳을 메우고 험악한 곳을 달래는 보완과 화해를 통해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177>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178>
한은 흥으로 발효된다.
<186>
사람은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람은 시간에 대한 사유보다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 절실해 한다.
<187>
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삶터는 뿌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삶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189>
그것은 땅을 인체와 마찬가지로 뼈대(산줄기)와 핏줄(물줄기)을 갖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본 것이다.
<190>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각을 체계화시킨 것이 풍수사상이다.
<210>
동양화에 있어서 공간은 그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비사기적인 풍요로움으로부터 실체인 모든 것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기도 한다…..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이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 (박용숙, “한국미술의 해학정신”)
<212>
한국인이 음양오행사상을 배후에 지닌 오방색의 원리를 사용한 사실은 한국문화의 배색 원리가 상생적인 조화로움을 지향한 것임을 의미한다.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231>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231>
사회학이란 인간의 집단적 삶을 반듯하게 그려내기 위한 모눈종이와 같은 것이다.
<235>
한복바지는 우리의 인체에다 옷을 그대로 맞추어 놓은 것이라면, 양복바지는 2차원의 평면에다 3차원의 인체를 넣는 무리를 저지르고 있다. (김상일, “대”)
IP *.153.216.107
<지은이 소개>
강영희
문화평론가.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6년 전부터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에 대한 잡문을 써온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셈이다
강영희 칼럼을 통해 본 강영희
[문화칼럼/강영희]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위한 변명
육군과 감독이 한판의 다트게임을 시작한다. 화살을 던지는 자는 희극의 주인공이 되고, 화살을 맞는 자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게임이 길어지면 희극의 주인공은 여론의 화살받이가 되고, 비극의 주인공은 면죄부를 얻을지 모른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얘기다. 스물여섯 살의 신참 감독이 지원금과 쌈짓돈 2000만 원을 들여 만든 졸업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인 병영을 세트로 만들 만큼의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한 감독은 비극적 결말을 해피 엔딩으로 바꿔치기한 가짜 시나리오를 제출하여 군의 제작 지원을 얻어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군은 감독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로 고소할 예정이다.
태정(하정우 분)과 승영(서장원 분)은 우연히 군대에서 해후한 중학교 동창이다. 그런데 폭력이 일상 속에 스민 군대의 현실과 그럭저럭 타협한 태정과는 달리 승영은 타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가 되면 현실을 개혁하겠다고 결심한다. 승영은 새로운 신참 지훈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자 이 같은 결심을 실천으로 옮긴다. 지훈 역은 윤종빈 감독이 직접 맡았다. 문제는 지훈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승영의 시도가 결코 쉽지는 않다는 것. 마침내 애인의 변심으로 균형을 잃은 지훈을 보며 승영은 불안해진다. 둘 사이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이 같은 균열은 결국 지훈의 자살로 이어진다. 승영도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한다.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군대를 다룬 영화이면서도 군대만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것. 군대라는 제도의 폭력을 다룬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승영의 이야기로 충분했고, 승영의 이야기로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지훈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훈이라는 캐릭터의 독특함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지훈은 순진하고, 우직하며, 어수룩한 인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면이 그럴 뿐이다. 다시 자세히 보면 지훈은 어딘가 오만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며, ‘왕자병’의 기질도 있어 보인다. 이 같은 혼란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문제는 지훈이 지닌 비극적 결함(hamartia)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그는 자폐적이며 소통 불능에 빠진 고립된 영혼이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체의 수위를 조절할 줄 모르며, 자신에게 던져진 문제 앞에서 아이처럼 발버둥치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망연자실 무력해진다. 벽창호 같은 지훈. 하지만 꽁꽁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그의 고통은 타인들에게는 기껏해야 입맛 쓴 희극으로 읽힌다.
오늘날 승영처럼 어떤 개혁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군대만이 대상은 아니다. 군대가 그 대상을 대표하고 상징할 따름이다. 문제는 개혁의 궁극적인 대상이 제도(制度)가 아니라 인간(人間)이라는 데 있으며, 필연적으로 개혁의 주체 자신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데 있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은 순진하고 우직한가 하면, 때로는 오만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다. 게다가 우리는 자주 소통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래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승영처럼 벽에 부닥쳐 튕겨 나온 다음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방법은 하나다. 벽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외부의 벽 속에 도사린 내부의 벽과 마주쳐야 하며,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가 하나로 겹쳐져야 한다. 무엇보다 승영은 귀에 꽂은 리시버부터 뽑아 던져야 한다.
육군과 감독이 한판의 다트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은 결국 씁쓸한 희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게임이 시작됐으되, 게임을 끝내지 않는 묘안은 없을까.
강영희 문화평론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금빛 기쁨의 기억이라는 책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의 비판서인지 혹은 한국미의 새로운 발견을 담고자 하는지에 대해 짬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인의 한국 예술론을 일본 제국 식민사관으로 바라보는 그의 눈임을 강조하며 한국의 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에서 책을 낸 것이 역력해 보인다.
결국은 야나기 무네요시라의 한국 예술관에 얽매여 있다는인상이 강하다. 그의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 한국의 미는 결국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하나의 반증일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 같은 한국미에 대해 그동안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갑자기 튀어나온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판은 생뚱맞기 그지 없었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였다면 그동안의 생각은 한번쯤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는 책은 확실하다.
책의 시작은 매우 산뜻했다.
“여기 두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다. 당신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금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인가,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인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인가.” 이 질문은 책을 처음 펼친 나에게 상상의 나래와 선택의 어려움을 동시에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선호할까?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기 보다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인이 되고 싶다는 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다시 그 질문을 바라다 보니 분명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판단이 섰고, 나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답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글로벌화한 이 시대에 세계화로 흘러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은 한국인 중에 그렇게 많지 않다. 그는 세계의 아티스트에서 베스트였기 때문에 한국에 소개되었다. 즉 내가 선택한 것과는 반대의 경우다. 무엇이든 좋다. 결국은 세계화라는 큰 물결속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한 지류로 만난다는 자연의 법칙에 이끌릴 테니까 말이다.
이렇듯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 이 책은 또 하나의 나를 유혹하는 문구를 던졌다. “전통은 기억 속의 심상이다.” 가 그것이다. 이 말은 내가 배우고 있는 학문과도 통하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오감 즉 시각, 청각, 촉각, 후각/미각으로 이루어져있고 이것을 언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이라는 것도 기억이라는 경험이고 경험의 구성요소인 오감 즉 이 책에서 표현하는 단어인 심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풍부한 한국의 미를 전달해 주었다. 하지만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일반화와 삭제가 분명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직 예술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 예술이라는 장르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을 주었고 앞으로의 한국 예술의 발전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책은 하나의 성공이지 않을까?
<내가 작가라면>
작가의 비평을 좀 해야겠다.
작가는 야나기라는 한 일본을 일본 제국주의에 예속되어 그 사상속에서 한국의 미를 바라본 한계를 맹렬히 비난한다. 책 대로라면 1984년 정부가 일본인에게 준 최초의 훈장인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의 야나기에 대한 수여는 잘못되었다는 뉘앙스가 진하게 깔려 있다. 야나기라는 한 인물이 일본인이라는 한계점도 있겠지만 일본인이였기에 우리의 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을 희석하려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독자의 경우 통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웬지 상대방의 공적을 깎아내려는 듯한 인상이 강해 거부감이 든 면이 있음을 고백한다.
예술은 주관적이다. 주관적이기에 다양한 창조가 나오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다양한 선택이 있지는 않을까? 그저 이책을 야나기는 이렇게 한국의 미를 이렇게 표현을 했지만 나는 이렇게 보고 있다라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야나기라는 인물의 백그라운드를 통해 그의 조선의 예술의 관점이 오로지 일본 식민사관에 의거한 해석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은 이책이 의도하는 방향과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가 강영희님은 야나기의 예술에 대한 태도가 객관적인 연구가 아니라 주관적인 이해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기에 이를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목까지 차오른다. 예술이 주관적일 텐데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을 소위 말하는 학문으로 받아들여 객관적인 데이터를 필요로한다는 것은 소위 말하는 “지식인의 눈”일 뿐이다. 예술은 지식인의 소유물이 아니지 않는가?
한편 작가의 한국의 미에 대한 풍부한 감정과 지식은 읽는 나로 하여금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렇게 정교하고 주관적인 감정을 개입시켜 해석할 수 있구나라는 점에서 놀라움과 존경감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족함이 있다. 강영희라는 이름의 책을 다시 사서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작가의 화려한 수사와 문체는 나에게 매력이었다.
또한 예술이 서로 연계를 맺고 있는 설명은 나의 예술을 보는 차원을 한 단계 높여준 부분으로 책을 읽고 흡족한 미소를 받는다.
<책의 인상깊었던 부분>
1부.기억살실과 어제의 한국인
<17>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19>
한국인 백남준이란 죽어버린 과거이며, 세계인 백남준이야말로 살아있는 현재이자 미래가 아니겠는가.
<20>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22>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 (김용옥,[도올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 석도화론
<23>
세계인 백남준 속에 들어 있는 순한국인 백남준, 이 같은 사정은 작곡가 윤이상의 경우도, 화가 이응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이상이 자신의 음악을 위한 염감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강서대묘의 사신도, 이응노가 즐겨 그린 풍죽을 떠올려보라.
<27>
전통은 기억 속의 심상이다.
<28>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론: 과거도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다. 기억도 감각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50>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사들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확}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예술론
<56>
특히나 한국인들을 감동시켰던 것은 한국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가 객관적인 연구가 아니라 주관적인 이해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59>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고대 예술인들의 세계는 ‘思考이전’ ‘人爲이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한국미의 정신은 실로 이 평언으로써 적중되었으며 여기에 더 덧붙일 말을 찾을 수 없다.
<61> 서양은 어디까지나 행위자이고 동양은 수동적인 반응자이다. 서양은 동양의 행동의 모든 측면에 관하여 관찰자이고 재판관이며, 배심원이다.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70> 백자대접
15세기 조선. 순백색의 색이나 선비의 백색 두루마기처럼 조선시대를 풍미한 순백의 색은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선비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잘 드러낸다. 천지인 상관의 사상 속에서 수인사하고 대천명하는 삶을 꾸려간 조선 선비들은 사심이 없는 공심을 유지하고자 애써 왔는데, 이것이 바로 순백색으로 표현되었다.
<73> 종묘의 정전
종묘는 조선 문화의 격조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89>
마치 고대 일본이 조선 예술에 의해 그 문명의 첫걸음을 내딛었듯이, 지금의 일본도 그것을 돌봄으로써 마음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야네기 무네요시, “그의 조선행”)
<93>
선의 비밀을 풀지 못하면 조선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 (야네기 무네요시,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
<94>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98>
우리의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98>
외형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림보다 내면적인 생명이 약동하는 그림이고서야 비로서 좋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벽화를 통해서 우리는 배울 수 있다.
<102>
사대외교는 어디까지나 민족보전을 위한 현실적 외교정책으로서 결코 자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104>
실로 꼼꼼한 기교란 그들이 모르는 수법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시대 도자기의 특질”)
<111>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바라본 야나기는 거기에 불가사의한 신비의 분위기를 덧씌워 부정형, 불균제, 불균등 같은 것으로 정리해 낼 수밖에 없었다.
<116>
조선 예술의 아름다움은 기교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 작위에 의지하지 않고 만들어진 잡기나 민예의 성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31>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132>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132>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40>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가운데는 돌로 된 조각이 유난히 많다. 중국에는 벽돌로 만든 전탑이 많고, 일본에는 목탑이 많으며, 한국에는 석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153>
다시금 눈을 크게 뜬 상태에서 원경의 미학으로 그것을 바라보라, 거기서 문득 유정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면 그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155>
한국인이 이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생활 속에서 물질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해온 감각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발효맛이다.
<159>
중요한 것은 발효음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요리의 시스템이나 코드로 사용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어령, “김치맛과 한국문화”)
<169>
비보의 원리란 이처럼 상극적인 것을 향해 대립과 투쟁을 전개하는 대신 허전한 곳을 메우고 험악한 곳을 달래는 보완과 화해를 통해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177>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생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다.
<178>
한은 흥으로 발효된다.
<186>
사람은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람은 시간에 대한 사유보다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 절실해 한다.
<187>
삶터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소속감을 규정하며 운명을 가늠한다. 삶터는 뿌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삶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189>
그것은 땅을 인체와 마찬가지로 뼈대(산줄기)와 핏줄(물줄기)을 갖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본 것이다.
<190>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각을 체계화시킨 것이 풍수사상이다.
<210>
동양화에 있어서 공간은 그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비사기적인 풍요로움으로부터 실체인 모든 것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기도 한다…..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이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 (박용숙, “한국미술의 해학정신”)
<212>
한국인이 음양오행사상을 배후에 지닌 오방색의 원리를 사용한 사실은 한국문화의 배색 원리가 상생적인 조화로움을 지향한 것임을 의미한다.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231>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231>
사회학이란 인간의 집단적 삶을 반듯하게 그려내기 위한 모눈종이와 같은 것이다.
<235>
한복바지는 우리의 인체에다 옷을 그대로 맞추어 놓은 것이라면, 양복바지는 2차원의 평면에다 3차원의 인체를 넣는 무리를 저지르고 있다. (김상일,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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