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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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 , “ 미술전시장 가는 날 ”
뜰에서 붉은 장미 네 송이와 노란 붓꽃 두 송이, 붓꽃 칼잎 여섯 잎을 따서 유리컵에 꽂는다. 장미가 빠른 속도로 벙그는 것을 보려고 유리컵을 들고 다닌다. 컴퓨터 앞에서 사무실 책상으로, 사무실 책상에서 침대 앞으로.
할 수 있으면 저걸 좀 그려보고 싶어진다. 4B연필로 시도해 본다. 그리고는 이내 깨닫는다. 꼼꼼하고 성의있게 시간을 투자해서 잘 그릴 생각보다는 빨리 끝낼 생각이 앞서는거다. 시인 김영태나 이제하가 그리는 시인들의 캐리커츄어나 상뻬 식의 스케치를 아주 좋아해서, 가끔은 직접 그려보고 싶다는 욕구가 이는데, 훈련한 적이 없으므로 소출이 있을리 없다. 언제나 끈기없는 성격이 문제이다. 이 급한 성격에는 사진이 더 나을 것같다는 결론에 도달. 빠른 시간에 어쨌든 사진은 한 장 나오잖아?
요즘 ‘이미지’가 자꾸 땡겨서 체계적으로 접근해 볼 생각에 입문서를 하나 골랐다. 박영택의 “미술전시장 가는 날”, 결과는 대만족이다. 인사동과 사간동에서 저자가 추천하는 미술관을 소개하고, 그 미술관에서 저자가 의미있게 본 전시에 대해 평론하는 형식인데, 입문서와 전문서의 성격을 겸했다고 할까. 미술관의 약도는 물론, 카페와 밥집까지 소개되어 있어 인사동과 사간동을 속속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한편, 미술계의 모든 이슈가 총망라되어 있다.
미술은 ‘물질’을 빌려 관념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미술의 몸을 빌려 정신과 마음의 사유를 드러내고 반성하는 일이다. 결국 작업에는 사회와 역사 속에 포함된 나의 존재와 인간의 생명이 진화되어온 모든 시간이 농축된다.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20쪽
작가는 살아나가기 위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의미에 도취한 이들이다. 자족적인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자기를 정당화하거나 믿고 싶어하는 우리네 일상과 마찬가지로 많은 작가들이 자기의 의미를 강변한다. 그 절실한 의미부여와 내가 만날 때, 우리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주제를 지나치게 강변하지 않되, 우리들 삶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한 개인의 고유한 감성과 기질아래 뿜어져나오는 화풍을 보는 일이 그림감상의 포인트이다. 59쪽
나는 박영택의 눈을 빌려, 많은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주로 한 편의 작품을 소개하고, 박영택이 평론하는 형식이지만, 평론을 읽기 전에 작품만 보아도 우선 좋았고, 그 다음에 평론을 읽으면 그 작품이 갖는 시공간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어 더욱 좋았다. 문학작가에 못지않게 다양한 시선과 방법을 지닌 미술작가들이 거기에 있었다. 비교적 문학작품에는 익숙해져 있었던 탓인지, 회화나 사진 조각같은 작품에 내포된 철학적인 의미와 방법적인 다양함과 시도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우순옥이라는 작가는 어느 한옥집을 전시작품으로 변모시킨 ‘한옥 프로젝트’를 보여주었다. 한옥의 방안 창을 개조해 인왕산과 경복궁이 한 눈에 쏘옥 들어오는 기막힌 조망의 시선을 관자에게 선사했다고만 소개되어 있어, 다른 내용에 대해서 궁금하다.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는 1953년에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는 ‘구겐하임 펠로우십’을 받게 되었다. 아내와 어린 자녀 둘을 데리고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작가는 유럽인의 시선으로 미국을 바라보았고 2년에 걸쳐 2만 8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중 83장을 묶어 <미국인들>이라는 사진집을 펴냈는데. 이는 어떤 사회사적 연구나 인류학적 객관보다 미국 사회의 인종적, 사회적 분리를 관찰해낸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인들의 삶의 공간에 유령처럼 버티고 있는 미국의 국기들, 선술집이나 가정집의 식탁에서 혼자 마냥 돌아가는 텔레비전 화면들...2차대전 후의 단절되고 무의미한 시간을 살아가는 침울한 권태와 절망....이 담겨있단다.
젊은 동양화가 박윤영도 매력적이다. 박윤영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천진난만한 영민함을 가지고 동양화 전통을 갖고 혼자 놀고 있다고. 에비앙 생수의 로고를 수묵으로 그려놓고 ‘에비앙 산수’라 이름짓거나, 실종된 소녀들이 낮에는 백조가 되었다가 밤에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겹쳐 놓는 식의 유쾌한 낯섬으로 컬트영화의 팬과 같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이 책에서 접한 대전 지역화가 김동유<41>의 작품 <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이 28일 홍공 크리스티 경매에서 3억 2300만원에 낙찰되었다는 기사가 아침신문에 실렸다. 생존작가중 최고가이거니와, 한국미술이 본격적으로 국제경매에 진출한 지 2년도 안되었는데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청바지를 잘라 붙여 우리의 전형적 마을 풍경을 만드는 젊은 작가 최소영<26>의 <광안교>는 1억 9500만원.
앞으로 인사동을 가게될 때 든든한 지침서를 갖게되어 뿌듯하거니와, 그 어떤 작가보다도 이 책의 저자 박영택을 발견한 것이 기쁘다. 박영택은 박수근의 그림 속에 납작하게 들어와 앉은 빈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림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준 것은 ‘향장’이나 ‘쥬단학’같은 화장품 선전책자였다. 한독약품에서 나온 ‘홈닥터’라는 조그만 소책자와 달력에 실린 그림이 그에겐 중요한 도판이고 화집이었다고 한다. 나역시 삼성생명에서 나온 달력에서 이왈종과 팝아트를 접하고 버리기 아까워 두고 있는데, 미술의 대중화에 달력이 좀 더 개발되어도 좋겠구나.
미술학원에 다닐 형편이 안되어 고1 때는 고궁이 쉬는 날을 빼고는 거의 매일 향원정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심지어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그림을 그렸다.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그를 휘감았고, 그 때의 열정으로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미술평론가 겸 경기대 미술학부 교수로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되, 스스로 향기와 그늘을 주는 꽃나무처럼, 확실히 그의 문체는 식물성이다. 맑고 깨끗하다. 신뢰가 간다. 스스로 이런 자신을 잘 알아 <식물성의 사유>라는 책을 펴내고 기획전도 한 적이 있다.
그는 네이비블루를 좋아한다.
“맘에 쏙 와닿는 청색계열의 색상을 지닌, 적당히 빛바랜 사물들을 소유하면서 그것들과 함께 조용히 세월을 견뎌내고 싶다. 알 수 없이 생겨난 감각에 이끌려 기꺼이 삶을 소모시키는 내게, 그러므로 생의 목표란 존재한 적이 없다. 아니 생각해본 적도 없다. 있다면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기호와 감각에 이끌려 그런 사물과 이미지를 보면서, 따라다니면서 내 삶을 끌고 갈 뿐이다. 이미지를 보는 일, 마음에 드는 색상으로 뒤덮인 사물들의 목록과 그 육체를 보듬는 일, 감각이 말려드는 공간에서 게으르게 책을 보는 일이 생의 유일한 관심이다.” 47쪽
나도 블루를 좋아한다. 해가 지고 차츰 어두워지기 전까지의 하늘색깔, 정확한 이름을 무어라 할 지 몰라 때로 암청빛이라 하고, 때로 코발트블루라 칭했던 그 색깔.
나도 박영택의 라이프스타일을 지지한다. 일 주일에 4일은 조금은 역동적으로 변화와 관계에 몰입하되, 나머지 3일을 그처럼 지내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4대 3의 황금의 비율을 구현하기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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