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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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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1일 14시 11분 등록
완당평전


저자 유홍준은 어떤 사람인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나왔으며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예술철학 전공)을 거쳤다. <공간>과 <계간 미술>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원장을 거쳐 현재 제3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조선시대 화론연구>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 <화인열전 상,하> 등이 있다.
유홍준씨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조금은 당황스럽다. 문화재 청장이라는 공직에 있어서일까? 그에 대한 자료가 의외로 많다. 그러나 나를 당황스럽게 한 것은 그에 대한 안티(Anti)가 꽤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학계내의 인사들로부터 안티(Anti)가 많다는 것이 혼란스럽다.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응모했을 때 한국고고학회는 “박물관장은 대한민국 정부나 문화계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자리가 아니기에 사회적 지명도나 정치력보다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선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펴 사실상 국립중앙박물관 근무경력이 없는 유홍준씨의 선임에 반대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 외에도 그의 역작이라고 할 완당평전은 고서연구가인 박철상씨로부터 200군데가 넘는 오류를 지적당했다. 또 그가 세간의 유명세에 걸 맞는 실력을 갖춘 분이 아니라고 평가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같은 미술사학자며 대학후배인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1>과 <단원 김홍도>의 저자인 오주석씨였다.
현직 문화재청장으로서의 공직수행에 대해서도 유홍준씨는 학계의 잦은 비판과 구설에 오르고 있다.
저자와 일면식도 없는 나로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는 정보들을 접하고 나니 뒷맛이 개운치 않음을 숨길 수가 없다.
그의 제자의 말이 귓가에 들린다.
“샘(선생님), 그렇게 기이한 것만 갖고 가면 오랫동안 즐길 수가 없잖아예.”
“그러면 평범한 것을 가져가란 말이냐?”
“어데예(아니오), 그러니까 곁들여야지예.”


완당의 삶을 바라보며.

밤늦게 완당평전을 읽다가 빗소리의 여흥에 마음을 적었다.

간 밤의 빗방울을 이고 있는 이 누구인가?
남길 것이라곤 풍진(風塵)조차 없는 곳을
무심(無心)히 오고 가지 못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을 좇는 무상한 마음의 조화(造化)인가?

완당의 삶을 보며 인간사의 무상(無常)함과 그 삶을 지탱시켜준 천착에 가까운 학예에 대한 열정을 보았다면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
남부러울 것 없는 귀공자로 태어나서 억울한 세상살이와 병고에 지친 쓸쓸한 노년의 완당을 보며 어찌 꿈밖의 꿈(夢外夢)인 세상에 대한 무상함이 일지 않겠는가?
병들고 지쳐 팔 조차 들기 힘든 속에서도 연경에 책을 부탁하고 손에 붓을 잡아매는 완당선생의 모습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몇 해 전에 퇴계선생의 전기를 읽으며 ‘진정한 학문에의 정진은 도(道)에 이르는 길’임을 문득 깨닫고 한참이나 멍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비로소 옛 선인들에게 학문이 어떤 것이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참으로 놀랐었다.
완당평전을 읽다보니 또 다시 공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에 마음으로 가까운 한 선생님으로부터 공부에 대한 참 옳고 좋은 글을 받았다.
“사는 일이 번잡하여 언제고 조용히 공부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번잡한 일이 일상을 모두 지배하게 놓아두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맞설 것은 맞서고, 잊을 것은 잊어, 가치 있는 일이 일상의 빛이 되게 하세요.
말한 대로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으며 감정이 우리 마음처럼 잘 정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가 좋은 점이 무언지 아세요? 바로 그런 것들을 잊게 하고, 그런 것들에 시달리지 않게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 더 중요한 것을 들여보내고, 물꼬를 터 더 가치 있는 것들을 접하게 하고, 생각을 바꾸게 하고, 다른 세상을 보여주므로 우물을 벗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생각으로는 언제나 그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번민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는 번잡한 일상이 정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끈을 놓지 말고, 책속의 생각 따로 일상 따로 움직여가는 간격을 좁히세요. 그것이 공부를 실용화 시키는 방법입니다.
자기의 현재를 구하지 못하는 공부는 적절한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대하여 연구하라고 한 뜻은 바로 그것입니다. 공부해서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라는 뜻이에요. 공부하는 이유는 지금 안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연구이며 준비입니다.”
아마 완당선생의 삶에서도 공부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끝으로 완당선생 전(前)에 고(告)한다.

구름 밖의 구름을 보니 그것도 구름이라,
부질없이 세상살이에 마음만 분주했구려.
꿈속의 꿈을 꿈인지 알면서도 한참을 즐겼으니
이제 초당에 앉아 발품이나 쉬게하구려.
선각(先覺)들의 배움을 얻어 신바람을 내었으니
장하던 몸과 마음도 제 할 일을 다했구려.


내가 저자라면.

완당평전은 고서전문가 박철상씨에 의해 책 전체를 통틀어 오류가 200군데에 이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철상씨에 의해 오류로 지적받고 있는 중요 부분들을 정리해 본다.
박씨에 따르면 저자는 추사 김정희의 호로 널리 알려져 있는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을 구분하지 못했다. 저자는 완당과 추사라는 호를 그의 작품 시대를 구분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추사는 그의 별호(別號)이고 완당은 당호(堂號)다.
저자는 중국 서예가 완원이 김정희에게 완당이란 호를 내려주었다고 주장했으나 박씨는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을 스승으로 받들라며 자기 성을 딴 호를 내려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완당은 추사가 연경에서 완원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 그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추사 자신이 지은 당호"라고 지적했다.
또 저자는 추사 서체의 특징을 오로지 개성으로서의 괴(怪), 즉 '괴기'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나 "괴(怪)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다"는 추사의 언급은 평(平) 즉 '평범함'을 거부한다는 뜻이라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박씨는 기존 연구성과를 왜곡하거나 비판적 검토 없이 인용하는 바람에 유발된 오류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자료해제편'에 실은 박혜백의 「완당인보」라는 자료는 이미 지난 1992년 예술의전당이 발간한 「추사 김정희 명작전」에 공개됐으나 이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저자가 처음 공개하는 양 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또 서예에 대한 지식이 밝지 못한 데서 비롯된 많은 오류도 함께 짚으면서 '효자 김복규비'의 탁본에 대해 저자는 "완당 전서체의 멋이 한껏 구사되었다"고 했으나 "어찌 이것이 전서체란 말인가? 저자는 전서와 예서 등 서체 구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저자는 완당의 글씨가 글자 오른쪽 어깨가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사체의 버릇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이러한 특성은 "소동파의 글씨를 많이 따랐기 때문"이지 완당에게 발견되는 남다른 특성은 아니라고 말했다.
번역상 오류의 예로는 '계림김추사제'(鷄林金秋史題)의 경우 저자는 추사가 경주 김씨이기에 경주의 옛 명칭인 계림을 썼다고 했으나 계림은 경주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뜻이다. 또 추사 시구에 나오는 '일하'(日下)를 저자는 '하늘 아래'라고 했으나 청나라 수도인 연경을 뜻하는 말이라고 반박했다.

아울러 박철상씨의 완당평전에 대한 평가를 정리해 본다.
박씨는 “‘완당평전’의 문제는 단지 지엽말단적인 오류라기보다는 전반적인 추사 이해의 틀이 부실하다는데 있다”며 “기존 연구의 이해나 새로운 해석의 제시 등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어느 면에서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저작”이라고 말했다.
미술계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추사 작품의 진위논란도 단지 감식안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우리 학문적 연구수준의 일천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완당평전’이 추사연구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학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뼈아픈 일침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경학 서예 전각 고증학 감상 장서 어느 것 하나 해당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문화사의 중추였던 한 추사 는 당대 지식사회의 ‘저수지’역할을 하는 동시에 근대성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인물”이라며 “조선후기 사대부뿐만 아니라 중인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까지 후학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추사 연구에 있어 활발한 논쟁과 참여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완당평전’의 오류를 지적했다”고 밝혔다.
완당평전이 이러한 논란의 와중에 있고 저자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임을 감안하면 대중적인 학술서이며 학자에 의해 쓰여진 완당평전을 어떠한 관점에서 재구성해야 할지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완당평전에서 - 완당선생의 삶을 중심으로.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는 요즘의 천류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 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다. 추사는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조선 서화계에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같은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고차원의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며 예단(藝壇)을 이끌었다. 이리하여 조선 지식인사회 한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 사조가 생겨났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완당바람이라 불렀으며 이렇게 일어난 완당바람은 날로 그 세를 더하여 가히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104)
완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서출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 것, 중인 출신 화가와 도화서 화원들과 어울린 것, 당시로서는 천민이었던 스님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했던 것 등 그의 삶과 행동에서 그런 신분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완당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신념이기도 했다. 그는 인재설이라는 글을 지어 이렇게 강하게 주장했다.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는 애당초 남북(南北)이나 귀천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누구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전집 권1 인재설)(170)
완당이 연경에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하게 되는 34세까지를 그의 장년이라고 부를 때 추사체의 시작은 바로 이 장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186)
완당은 나이 오십에 이미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당대의 대가 위치에 올라있었다. 그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크게 이름을 떨치는 빛나는 학예의 성취였다. 그 업적을 우리는 완당의 해외묵연, 원교필결후, 예림갑을록을 통하여 남김없이 엿볼 수 있다.(265)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완당이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는 칭송이 빈말이 아니며 그가 단지 국제적인 사조에 휩싸여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여 체화, 육화, 토착화 시킨 진실한 의미의 국제파 학자였다는 사실이다.(269)
1840년 55세 되던 해 6월, 병조참판을 지내고 있던 완당은 동지부사로 임명되는 감격을 맞았다. 그러나 이런 감격도 잠시뿐 완당은 10년 전 윤상도 사건에 연루되어 우의정인 벗 조인영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해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328)
귀양살이 동안 완당은 몸이 계속 편치 않았고 잦은 질병에 고생을 무척 하였다.(361)
완당은 경주 김씨 월성위의 후손이라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것은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완당의 귀족주의, 선민의식의 뿌리였으며 한편으로는 명문가의 종손이라는 부담과 굴레를 안고 사는 생의 조건이기도 했다.(369)
귀양살이 나날 속에서 완당은 참으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학예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완당이 책읽기를 얼마나 좋아했는가는 우선 그의 장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완당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던 것으로 전한다.(379)
완당의 서화 소장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완당이 제주 유배시절에 작성한 것으로 생각되는 서화목록을 보면 중국의 명적들이 너무도 많아 과연 이것이 모두 진품이고 사실이었는가, 의아심이 일어날 정도이다. 완당의 지적 욕구는 이처럼 엄청스러웠다.(382)
1844년 완당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 온지 벌써 5년이 되었을 때 완당은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를 제작했다.(393)
완당의 세한도는 누구든 완당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다.(396)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완당의 예술세계가 이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있음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398)
완당은 한나라 때 예서를 집대성한 한예자원(漢隸字源)에 수록된 309개의 비문글씨를 임모하고 또 임모하고 해서 팔뚝 아래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완당은 그런 정신과 그런 자세로 고전을 익혔다. 그래서 훗날 완당은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454)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완당은 제주의 귀양살이에 익숙해져 갔다. 천리 밖 큰 바다 너머에서 아내의 부음을 들어야 했던 아픔과 빼어난 집안의 빼어난 자손으로 온갖 부와 영광을 누리던 그가 일생의 가장 큰 잔치라 할 환갑날을 탱자나무 울타리에 갖혀 작은 소반의 조촐한 밥상으로 그냥 넘어가야 했던 것은 아픔을 넘어 차라리 수도자적 삶으로 비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세한도에는 이런 쓸쓸함이 고독의 그늘처럼 서려있기도 했다. 완당은 그런 아픔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제주의 풍토와 자연을 관조하며 나중에는 그것을 노래하는 무심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472)
완당의 인생과 예술은 이렇게 농익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관조하면서 사물의 존재 방식을 관찰함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것은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자기를 찾아내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분명 제주의 유배생활이 안겨준 완당의 변화였다. 아픔과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며 구도자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473)
1848년 겨울 완당은 햇수로 9년 만으로 8년 3개월 만에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완당의 나이 63세 때이다.(509)
제주라는 원악도(遠惡島)에 위리 안치되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볼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일세.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열심히 쫓다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는 법이라네. 제주도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으니 어디 그게 작은 것이며 어디 그게 연경이 가르쳐줄 것인가?(517)
완당의 일생은 보통 다섯 단계로 나뉘어 이야기되고 있다.
①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②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③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 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④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9년간의 유배기
⑤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
이제 우리는 완당의 만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완당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지 3년 만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는 또 한 차례의 고통을 겪는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뒤의 2년 반과 북청 유배 1년간은 완당 일생의 편년중 거의 공백으로 비어 있고 조사된 것도,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북청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만년을 보내는 마지막 4년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흔히 과천 시절이라고 한다.(527)
만년의 완당은 경제적으로 곤궁했다. 그러나 완당에게는 여전히 벗이 있고 책이 있고 시·서·화가 있었으니 그것과 더불어 사는 완당의 마음까지 가난하거나 쓸쓸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글씨의 묘를 진실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579)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 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전집 권6)(584)
1851년(철종2년) 7월 22일 완당 집안은 어이 없이 풍비박산 나고 완당은 또 다시 기약 없는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미 완당의 나이 예순 여섯 제 몸 하나 조섭하기 힘든 병약한 처지인데 이번에는 삭풍이 몰아치는 북녘 땅 찬 하늘 아래로 귀양길을 떠나며 통곡의 오열을 터뜨렸다.
“하늘이여!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604)
하나 완당의 잘못이란 남다른 개성과 자신감이었는데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오늘의 완당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참으로 어려운 것이 빼어난 자, 개성이 강한 자, 능력 있는 자의 처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603)
완당은 북청 시절에 서정시를 적지 않게 지었다. 완당은 이제 더 이상 사리를 따지고 치열하게 대결하던 그 옛날의 완당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출세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자연인으로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인간적 가치인가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늙은 유배객의 이런 처연한 심정은 이제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해야 하는 노년을 달관해서 나온 노래인지도 모른다.(621)
완당은 북청 유배 시절에도 제주도 유배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곳 인사들과 어울려 시회를 갖기도 했다.(630)
또 완당은 제주 유배 때와 마찬가지로 북청의 숨은 인재를 열심히 서울로 추천해 올렸다.(631)
1852년 8월 13일자로 완당은 해배명을 받았다. 이후 완당에게는 다시는 곤혹의 풍파가 없었다. 완당은 이제 과지초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의 마지막 4년을 조용히 마무리하며 지내게 된다.(645)
북청의 유배객 완당이 귀양생활 살림살이를 거두어 당도한 곳은 과천의 과지초당이었다.(649)
귀양살이에서 과천으로 돌아온 완당의 마음은 처연하고 담담하고 편안해 보였다. 한시절 세상을 울리는 학식과 지의와 가세를 갖고 있던 완당이 남쪽으로 유배가고, 북쪽으로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제는 평범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몰락한 귀족이 갖는 비애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불교적 의미로 마음의 비움 같은 것이었다.(651)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역사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이것이 그 유명한 ‘금강안·혹리수’이다. 미술 감상은 결코 한가한 여흥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가르침은 미술사의 경구로 삼을 만하다.(699)
완당의 과천 생활이란 이처럼 평범한 것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독서하고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씨를 쓰고 벗들을 찾아가고 벗의 방문을 받고······. 그 이상의 일이 있을 게 없는 매우 담담하고 조용한 나날이었다. 귀공자로 태어나 빼어난 기량으로 학문과 예술에서 명성을 날리고 가문의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리며 ‘완당바람’을 일으키던 중년의 완당이나 제주와 북청으로 귀양살이 가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유배시절의 완당과는 또 다른 만년의 고적한 서정이 그렇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평범한 생활 속에서 완당은 오히려 삶의 평범성과 보편적 가치를 몸으로 깨달으며 자신의 인생과 예술 모두를 원숙한 경지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705)
완당은 이런 외로움과 낭만적 자적과 처연한 생의 관조 속에서 인생에서 새로운 가치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평범성, 보편성의 가치와 관용의 미덕이었다. 이제 완당은 더 이상 개성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시비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 평범성, 보편성과 관용의 그릇 속에 그 뜨거웠던 학문적 예술적 열성을 원숙하게 익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 10년이 그에게 선물한 더 없이 값진 가르침이었다. 바로 그것이다.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은 곁들여야 되는 것이다.(712)
과천 시절 완당은 글씨를 무수히 써서 지금 남아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완당은 과천 시절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벗 권돈인에게 자신감을 표하였으며 그 경지를 “잘 되고 못 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고 했다. 이 말이야말로 ‘추사체’의 본령을 말해주는 한마디이다. 이 경지를 위해 그가 얼마나 애써왔던가? 이는 곧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즉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의미의 졸이다. 추사체의 세계 서예사적 위상은 남북조 시대에는 왕희지, 왕헌지가 있고 당나라에는 구양순, 저수량이 있고 송나라에는 소동파, 미불이 있고 원나라에 조맹구가 있고 명나라에 동기창이 있다면 청나라 시대에는 청조학 연구의 제 일인자인 완당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727)
병진년(1856) 10월 10일 71세로 완당은 세상을 떠났다. 완당은 죽는 그해 그날까지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풀기는커녕 여전히 열정적으로 책을 읽고 글씨를 썼다.(739)
봉은사 <판전(板殿)>의 현판 액틀에는 작은 글씨로 누군가가 써놓은 오래 된 글씨가 하나 있었다. 그 내용은 완당이 이 글씨를 쓰고 난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완당의 최후이다. 그날은 병진년 10월 10일이다.(761)
완당이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이 선생을 장사 지낸 곳은 예산 용궁리 지금의 추사고택 옆이다.(767)
완당평전을 쓰면서 나는 줄곧 김정희라는 인간상, 예술가상, 학자상 모두를 상징할 수 있는 문구 하나는 찾아내고 싶었다.

“산숭해심(山嵩海深)-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780)

* 3권 자료 · 해제편은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음.
IP *.44.15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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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6.01 12:30:12 *.85.148.254
자료를 많이 찾아 쓰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와 학계의 알력이 흥미롭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박철상씨나 오주석씨의 비평문을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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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6.01 14:20:14 *.109.152.197
완당평전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찾을 수 있는 대로 오류로 지적된 부분들을 비교해 보니 완당 이해의 근본적인 시각에 관한 부분들이 있어서 완당평전을 어떻게 받아들여할지 난감했습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오주석씨나 박철상씨의 책들을 꼭 읽어볼 요량입니다. 완당평전의 내용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에게 잘못된 정보를 입력하는 일이 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해명을 하던 저자도 결국은 상당부분 인정한 것을 보면 전문 학자의 연구 성과물로서의 가치는 더 공부를 해보아야 조금이라도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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