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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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1949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과정,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예술철학 전공)을 졸업하였다. <공간>과 <계간 미술>기자를 거쳐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된 이래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정직한 관객』『조선시대 화론연구』『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화인열전 상,하』, 번역서로 『회화의 역사』 등이 있다.
무엇보다 유홍준 교수는 해방이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살아 숨쉬는 국토박물관' 이라고까지 불리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3권)의 저자이다.''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1권은 100만부 이상을 팔아치우면서 막강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미술평론가가 ‘문화답사가’보다 훨씬 분명하고도 오래 된 그의 직함이지만 많은 대중은 그를 답사가로 인식하고 있다.
베스트셀러를 내놓으며 유홍준이란 인물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화현상이 되고 있다. 그의 글은 80년대의 시대정신과 무엇보다 밀접히 연관돼 있다. 유홍준에게 있어 ‘80년대’로 대표되는 이 그물망은 그의 적극적인 참여를 절실히 요구하는 치열한 갈등과 대립의 장이었다. 그가 전문적인 미술평론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시평까지 다수 쓰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유홍준만큼 운동에 치열하면서 동시에 ‘미학 혹은 학문’으로서 미술비평의 수준에 달하기란, 적어도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힘든 일이다
유홍준의 글쓰기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 있어 리얼리즘의 이상을 주축으로 하는 것으로, 그 이전 문학 쪽의 리얼리즘 운동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민중미술운동은 우리 조형전통상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현대화해 이를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장르적 특성이 있다.
저자 유홍준은 앞으로 전문연구자로서의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읽지 않으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지 않는 한국 미술사를 한 권 써보고 싶어 한다.
[2.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인문학이나 문화적 코드에 대해 매우 약하다. 특히 미술 등 예술분야에서는 매우 문외한 측에 낀다. 그러나 지난날 어린 시절 그림을 무척 좋아했고, 그리기도 자주한 적이 있으며 동네 아이들과 그림그리기 대회도 한 기억이 난다. 그것은 아주 미미하기는 하지만 예술적 재질이 조금은 있었던가 보다.
그리고 지금 내 딸은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림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나보다.
이 유홍준의 화인열전을 읽노라면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라 그런지 모든 대상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인간적 정이 많아서인지 사람 사는 모습이 모두 화폭의 무대 장식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저자 유홍준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다. 우리는 지난날 위인열전이나 미인열전 등 열전하면 통상적으로 정치권력의 중심과 사상의 대가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임을 통념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조선중․후반부의 화가들에 대해 열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발상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씨 조선 5백 년 동안 미술을 업으로 하였던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밝지만 않았던 것 같다. 화인열전에서 나오는 한국미술사의 대표적 화가 여덟 명, 연담 김명국,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에서 연담 김명국은 신필이었음에도 당시의 화가에 대한 천시로 인해 언제 태어났는지 조차 모르는 불우한 삶을 보냈고
공재 윤두서는 평생 경륜을 펴지 못한 불우한 선비였으며, 관아재 조영석은 당대 인물화의 진수를 보여 주였지만 화가에 대한 애착은 없었기에 항상 현실정치와 그림 간에 갈등을 가졌던 인물이었고, 현재 심사정도 명문 가문의 후손임에도 집안의 몰락기에 태어나 불우한 환경속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었으며, 능호관 이인상도 명문가문이지만 서출이라는 한계로 그 뜻을 그림에 풀어야 했으며 호생관 최북은 중인 출신으로 당대 출세는 꿈도 꾸지 못하는 화가였다
다만,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대가로서 수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당대 인정을 받아 다른 화가에 비해 천수를 누리면서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를 갖고 살았던 인물이란 점과 단원 김홍도는 이 모든 화가를 집대성한 그림을 그려 어려운 환경임에도 화가이상의 인간적 면모를 보임으로써 그의 예술은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조선적인 위대한 화인으로 자리매김되었다는 점이 위의 화가들과 달랐을 뿐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화가의 생활상은 그리 평탄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빛날 수 있는 것은 억눌림, 한, 가난 등의 고뇌와 번민속인가 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예술적 가치를 남기지 않았던가.
이러한 예술인을 접할 때면 나의 존재의 미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보수적이고 철저한 성리학의 테두리에 갇혀있는 전형적 제도 속에서 창의와 새로움을 구가하는 신경지를 개척한 것은 그들의 위대한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룩할 수 없는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도 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한 외곬을 전생에 거쳐 전념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저자 유홍준은 이러한 위대한 위인들을 화가가 아닌 화인이라 표현하면서 그동안 우리들은 선현들에 대해 너무 무심했음을 탓하고 더욱이 외국과 달리 미술사에 대한 전기가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이러한 저술을 하였다 한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세계적 조류는 문화적 코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다. 경제적 발전도 중요하고 정치적 안정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의 정체성과 개별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코드의 보존과 발전없이는 세계적 주류에 서지 못하기에 문화보존과 자기 문화의 세계화는 앞으로 자국의 세계화에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선대의 미술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한 화인열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 지식과 문화적 컨셉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인문학의 줄기는 문화사이고,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학이며, 미술사학의 열매는 예술가의 전기"라는 유홍준의 신념에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책이었다.
[3. 책 속에서]
1. 연담 김명국 : 아무도 구속할 수 없던 어느 신필의 이야기
연담 김명국은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신필로 추앙받은 첫 번째 화가이다. p15
치밀한 가운데 분방함이 드러나는 필치의 조화가 바로 김명국의 특징이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개성이다. p23
그러나 김명국의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이러한 찬사나 증언들은 모두 한 두 세대 건너 후대인의 저술들이고,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사실은 없다. p28
인조 연단의 화단이 이처럼 활기찼음에도 김명국 같은 특출한 큰 화가가 빛을 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왕실의 회화 취미로 인한 화단의 경직성 내지 보수화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32
김명국은 기질상 지배층의 절도 있는 규범과 몰개성한 화풍에 자신을 내던질 수 없었다. 그의 호방한 기질은 오히려 더 개성적인 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것을 알아주는 비평적 안목을 갖춘 이가 주위에 없었던 것은 그의 불운이었다. p34
바위와 숲은 들쭉날쭉 산굽이는 구불구불
층층난 흰 구름 어이 그리 황홀한고...
연담의 붓끝이 이처럼 신묘하여
한번 펴서 보고 십년토록 탄복했네..... p38
숙종 연간을 지나 영조시대에 오면서 김명국에 대한 평가가 드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개성적인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전체의 변화속에서 나타난 평가의 전환이었다. p39
김명국 그림의 본령은 산수화 중에서도 산수인물에 있었다. 그이 유작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중귀려도〉와 이병직 구장의 〈심산행려도〉인데, 두 작품 모두 강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p43
연담이 누구보다도 개성적이고, 누구보다도 파격적이었고 누구보다도 신필의 경지를 지녔음을 남김없이 말해주는 〈죽음의 자화상〉이라는 명작이 존재하는 한 그의 화명은 한국회화사에서 영원할 것이다. p49
연담 김명국, 그는 죽음 앞에서 〈죽음의 자화상〉을 그린 인생의 달인이었고 그림의 신필이었던 것이다. p51
김명국은 확실히 인조시대 화가로서 당대의 이단이었고, 기인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취흥에 따라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p51
그는 시류 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p51
결국 그의 삶과 예술은 시절을 잘못 만나 기인이 되고 만 한 신필의 자랑스런 반항의 이야기인 것이다. p51
2. 공재 윤두서 :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내력
시대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대담한 자기 결단과 자기 갱신으로 종래의 화가들은 생각지도 못한 ‘속화(俗畵)’까지 그리면서 18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길을 열었다. p57
윤두서는 당당한 한 선비로서 정확하게 시대정신의 추이를 인식하고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실천한 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p58
그의 〈자화상〉에 서린 저 꿋꿋한 기상과 처연한 고독의 그늘, 그것이 이제부터 알아볼 공재 윤두서의 인생과 예술이다. p60
공재로서는 여느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문(文), 사(史), 철(哲)을 공부하여 학식을 쌓고, 시(詩), 서(書), 화(畵)로 교양을 높이는 일이 곧 그의 일생이었다. p67
몸으로 체득하고 일로 증명하는 ‘실득(實得)’이 있었다는 것은 곧 실학정신의 요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68
〈심득경초상〉은 훗날 관아재 조영석이 그린 그의 형〈조영복 초상〉과 표암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과 더불어 사대부화가 초상화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것이니 공재는 이 분야에서도 당대의 선구자였다. p74
공재는 학문과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기존의 틀과 관행을 뛰어넘어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의 회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남종문인화의 적극적인 도입이고, 또 하나는 ‘속화’라는 리얼리즘적 장르의 개척이다. p77
공재는 이처럼 기존 화단과 어떤 사승 관계도 맺지 않고 홀로 화본을 보면서 그림에 입문했다. 그러나 공재의 뛰어남은 그런 화본을 받아들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자신의 회화 영역을 넓혀나간 데에 있다. p79
공재는 일찍부터 말 그림과 인물화 두 부분에서 높은 화명을 얻었다. 그것은 남태응의 증언대로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하는 정확한 데생력 때문에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박진감이 있었을 것이다. p82
필법의 공교함과 묵법의 정묘함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신격(神格)에 이르고, 만물에 물상(物象)을 부여함은 그림의 도(道)이다. 그러므로 그림에도 화도(畵道)가 있고, 화학(畵學)이 있고, 화공(畵工)이 있고, 화재(畵才)가 있다. P89
공재 그림 중에서 우리가 회화사적으로 크게 주목하고 실학자로서 그의 면모를 드높여주는 것은 단연코 속화이다. P95
나물캐는 아낙네와 짚신삼는 농부가 선비의 자리, 신선의 자리를 밀어내 당당히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것은 회화적 혁명이다. P96
나는 공재의 속화는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현실을 집어넣은 것으로 생각한다. P98
현재 전해지는 공재의 속화 중 대표작은 아마도 〈돌 깨는 석공〉이 아닐까 한다. P99
공재의 작품 중 최고의 명작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노승도〉라 할 것이다. 〈노승도〉는 그 소재가 처음부터 감상화라는 예술적 목표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자화상〉보다 더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다. P102
공재는 그림에 뛰어나 그 학문이 덮인 바 되었음을 성호 이익은 한탄했지만 미술사학도로서 갖는 또 다른 아쉬움은 그의 그림으로 인해 글씨에서 이룬 공이 가려진 것이다. 공재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P107
공재 윤두서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예라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시운을 얻지 못하여 평생 경륜을 펴보지 못한 불우한 선비였다. 그러나 공재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 힘써 숙종 연간의 문화 기류 속에서 명백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며 ‘실득(實得)’있는 학문을 추구하고, 민족주의적인 ‘동국진체’를 개발하고, 현실주의 입장을 띤 ‘속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P111
3. 관아재 조영석 :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그가 이룩한 이런 예술 세계는 한마디로 사실정신과 선비정신의 만남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P119
관아재는 자신의 인생 목표를 화가에 두고 살지는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사대부로서 체통을 유지하며 품위 있게, 바르게 살기를 원했다. 그가 스스로 호를 ‘나 자신을 살피는 집’이라는 뜻으로 관아재(觀我齋)라 지은 것부터 이런 면모를 보여준다. P122
그러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다른 장르도 아니고 속화라는 장르까지 완성시켰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남의 눈을 피해서라도 자신의 화흥을 발현한 어쩔 수 없는 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23
조영석의 초상화에는 인물의 기품이 넘쳐흐른다. 기존의 초상화에서도 신중하게 추구했던 전신의 가치가 여기서 더욱 역력히 살아나고 있다. 둘째는 형식에서의 자유로움이다. P134
그림은 시로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아내는 독자적 기능이 있으며, 또 산수화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거기에 화가의 마음이 더해지기 때문에 그림이 더 위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P140
우리는 민중예술이란 민중적 삶의 표현뿐만 아니라 민중에 대한 애정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P152
그는 스스로에게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지수재 유척기가 그의 묘지명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그의 ‘4욕론(四慾論)’이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욕망이 있으니 생욕(生慾), 색욕(色慾), 관욕(官慾), 재욕(財慾)이다. 이 4욕은 사람마다 모두 마땅히 힘써 경계해야 할 바이며 특히나 관직에 있는 사람은 더욱 빠지기 쉬운 것이다. P162
관아재 조영석은 타고난 인물화가였다. 그 스스로 겸재에게 말하기를 “산수의 웅혼함을 표현함은 그대가 낫겠지만 머리카락 하나 틀림없는 인물 그림에는 그대가 나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p180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p180
관아재는 겸재의 진경산수를 평하여 “조선 3백년 역사속에 조선적인 산수는 겸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관아재에게 그대로 돌려 “조선적인 인물화는 조선 3백년 역사 속에 관아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p180
4. 겸재 정선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겸재 정선의 예술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p186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p192
겸재 그림을 기년작 중심으로 볼 때 겸재다운 필치가 구사되는 것은 59세에 그린 〈금강전도〉이다. p208
겸재는 앞시대의 미미한 사경산수의 전통, 그리고 회화식 지도의 전통에 근거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해나갔던 것이다. p209
진경산수의 미학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형상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p223
역사적 평가에만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한 인간이, 한 화가가 어떤 노력 속에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낳게 되었는가라는 그 과정과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 성실성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너무 잔인하고 때론 경박한 면도 없지 않다. p230
우리는 기록화의 제약 조건은 회화미를 감소시키기 십상이고, 진경산수의 묘미란 실경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회화미로 재해석해내는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p247
겸재는 성품 탓인지 아니면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주위에서 그림을 요구해올 때 거의 거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고, 역대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유작을 남기게 되었다. p250
나는 겸재의 〈금강전도〉를 볼 때마다 위인의 크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금강전도〉의 세부 묘사는 대단히 치밀하다. 흔히 선이 굵고 스케일이 큰 화가는 디테일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상례인 줄 알고 있지만, 대가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p257
위대한 장편소설은 어느 쪽을 펼쳐 읽어보아도 재미있고, 위대한 건축은 외형 못지않게 내부가 아름다우며, 위인의 삶은 선이 굵은 만큼 작은 일에도 따뜻한 마음씀이 있다는 것을 이 〈금강전도〉에서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p259
고사도는 옛 성현의 고사를 형상화시킨 그림인데, 특히 주자학(朱子學)을 주도적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던 시대에 주자의 고사에서 나온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p283
겸재의 만년 삶이란 여유로움 속에 가족과 함께 지내며, 벗들과 어울리고, 어쩌다 제자를 만나면 그를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그가 열중해온 『주역』을 공부하며 평생의 업으로 삼은 그림에 생의 마지막 열정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겸재는 만년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p293
겸재 만년의 명예는 무엇보다도 노익장을 자랑하며 84세까지 천수를 다하도록 건필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도 그림을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손떨림이 없는 건강에 있었다. p296
그의 70대 만년작을 보면 여느 화가의 중년보다도 더욱 힘차고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은 타고난 건강의 밑받침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사실은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장인적 성실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었다. p296
겸재의 만년복이란 이런 건강과 노력 속에 남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만년의 명작들을 무수히 쏟아놓았으니, 이는 그의 가장 큰 복이자 우리 민족의 큰 복이었다. p297
70대 작품은 60대 노년기의 작품에 비하면 정밀성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화면 자체의 울림은 물론이고 실경의 박진감은 오히려 더 살아난다. 과연 신들린 작품만 같다. 겸재는 그것을 천취(天就)라고 했다. p299
겸재의 만년 작품 세계에서 우리가 그의 명작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은 대개 진경산수다. p308
겸재의 대표작을 꼽자면 누구든 〈인왕제색도〉와 〈박연폭도〉를 빼놓지 못한다. 사실상 겸재 예술의 최고봉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p313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대상에 충실하면서 박진감을 잡아낸 작품이라면, 〈박연폭도〉는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사실성을 뛰어 넘어 곧바로 회화미로 나아간 명작이다. p313
인생과 예술에는 준엄함이 있어 만년의 원숙한 경지란 반드시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함을 경험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316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 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위업은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p320
한국미술사상 이런 위대한 화가는 겸재 이전에는 없었고 겸재 이후에도 그와 짝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단원 김홍도가 있을 뿐이다. p321
우리의 강산을 자랑과 사람의 마음으로 화폭에 담아낸 겸재의 진경산수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감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던가. 모름지기 그것을 그의 비문의 머리글로 삼을 일일진대 나에게 그 비문을 쓰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 아름다워라, 조국 강산이여!” p323
5. 현재 심사정 :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3원3재’여섯 분을 꼽고 있다. 3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3재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을 일컫는다. p15
겸재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국진경산수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시켰고, 관아재는 그의 뛰어난 인물 묘사력과 관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속화의 틀을 갖추어냈으며, 현재는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 분으로 관념적 화풍의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의 국제적 조응력을 한층 끌어 올렸다. p15
이들 3재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진경산수, 속화, 문인화라는 세 장르는 이후 조선 후기 화단의 일반적 경향으로 공인되어 훗날 3원의 화원들이 추구한 예술 세계는 모두 3재의 화풍에 근거해 있다. p15
애처로운 「현재거산 묘지명」을 읽노라면 그의 예술은 궁핍과 고독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야생화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p22
현재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쓰라림과 고독의 감정을 붓끝에 실어 동시대 누구보다도 화가의 감정이 깊이 개입된 명상적이며 때로는 애수의 시정이 들어 있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p25
현재는 겸재와 더불어 당대의 제일 가는 자리를 다툴 만한 솜씨가 세상에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인정이 야박했으니 그이 묘지명에 실린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받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는 표현이 어떤 내용인가를 알 만하다. p29
그의 묘지명에서 말하는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표현은 다작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실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p32
화폭에 화가의 감정이 적극 개입하여 산수화에 깊고 그윽한 맛을 더해주는 그의 필치는 중국 남종화를 자기화하여 조선적으로 토착화한 것을 의미한다. p36
그의 그림에 서려 있는 관념성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심화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현재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p50
현실 속에서 그림의 대상을 찾을 수 없고 관념 속에서 그림의 대상을 추출해내려 할 때 화가는 그 예술적 이상과 목표를 다른 곳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다. p51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p54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畵尙精神]”한 화가였다. p54
6. 능호관 이인상 :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이인상은 이처럼 높은 예술적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겸재나 단원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의 옛 그림이 일반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이룩한 문인화의 높은 격조라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게 이해하거나 감동을 받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p60
능호관은 또 동시대 화가의 그림 또는 소장가의 중국 그림을 통해 자기의 그림 세계를 넓혀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문집상에는 그런 교류가 감지되는 구절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p69
오늘날 능호관은 당대의 최고 가는 문인화가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일생 동안 단 한번도 화가로서의 작가의식을 보여준 바가 없다. p80
능호관은 삶 자체가 문인화의 길이었다. 그가 여타의 화가와 다른 별격의 예술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p82
능호관은 겉으로 드러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 내지는 진실에 그 근거를 둔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p89
40대 능호관의 모루도는 짙은 고독과 명상적 분위기, 그리고 처연한 기상으로 앞시대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회화 세계로 나아간다. 인생에서 아프게 느낀 것이 그대로 그림 속에 배어들면서 그의 그림은 더욱 고담한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p101
이인상의 작품에는 이처럼 은일자의 처연한 모습과 종강모루의 좌우명 같은 굳센 의지가 나타난다. p113
능호관의 그림은 은일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p114
능호관의 낙은 언제나 벗에 있었다. 능호관은 때때로 서울의 벗을 방문하기도 하고 때로는 설성에서 벗들의 방문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p119
능호관 이인상은 이처럼 고고하게 살고 은일자로서 청절을 지키면서 그것을 화폭에 담아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 문인화가로서 적극적인 작가의식을 갖고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설송도〉,〈송하관폭도〉, 〈장백산도〉같은 조선시대 회화사의 불멸의 명작을 남겼다. p121
능호관에게 있어 삶과 예술이 결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일체를 이루었다는 점일 것이다. p123
능호관의 그림은 그의 문인적 삶의 표현이자 인격의 드러냄이었다. 그림이 인격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은 문인화라는 독특한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다. p124
능호관의 시는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다. p124
능호관 이인상의 예술 세계는 이처럼 “오직 아는 자만은 알고 있는”높고 진실된 예술 세계였던 것이다. p126
7. 호생관 최북 :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최북은 스스로 호를 지어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다. 즉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했으니 이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p129
최북은 비록 여항인이었지만 시․서․화에 모두 능한 풍류객이기도 했다. p151
그는 여러 분야에 손을 댔는데 그 중 산수화에서 특기를 발휘했으며,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류의 남종문인화풍을 보여주었고 때로는 필법과 구도가 기이한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p153
최북은 성실한 예술가는 아니었다.그는 문인화가로서의 기품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런 분위기가 있는 위인도 아니었다. p157
최북은 화가로서 성공과 실패 두 면을 갖춘 기이한 화가인 셈이다. p162
최북은 스스로 ‘호생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결국 호생관으로 일생을 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서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현하면서 그림으로 세상과 얘기할 때는 명작을 낳았다. 그러나 그저 ‘호생관’이라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그릴 때는 호생관이라는 것이 한낱 노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p163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p164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 더욱 몰랐다. p164
8. 단원 김홍도 :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의 예술적 성취 속에는 그 자신의 예술의지가 작용했든 시대적 요청에 의해 촉발된 것이든, 어느 것이나 인문정신의 표상이었다. 정조시대 문예 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p169
김홍도의 화풍을 보면 대상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형상의 특징을 요약해내는 솜씨는 과연 ‘파천황’적 신기를 갖고 있었지만 세필과 정밀묘사는 본시 그의 장처가 아니었다. p181
단원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그림을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한 30대의 단원 작품 중 미술사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역시 그 유명한 『속화첩』이다. p193
단원의 속화는 서민의 심성으로 파고들어 거기서 나온 그림이니, 단원은 그 말뜻의 참된 의미에서 진실로 민중화가라 할 수 있다. p194
단원의 풍모는 그의 그림 못지않게 뭇 사람들이 칭송하는 바였다. 단원에게 시를 지어준 백화자 홍신유는 말하기를 “단원은 그 외모가 빼어나게 깔끔하고 풍채가 뛰어나게 점잖으니, 속계의 사람 같지가 않았다”고 했다. p213
단원의 그림은 그런 환경 속에서 그려졌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이처럼 명사들 사이의 훌륭한 선물이 되니, 이를 받은 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단원의 화명은 그렇게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p221
담락재(湛樂齋)는 ‘담담하게 즐기는 서재’라는 뜻으로 단원이 안기찰방 시절 이곳 체화정에 들러 즐거운 한 때를 가졌던 것을 기념하여 이별의 징표로 써준 현판이다. 이것이 현재 단원의 유묵으로는 가장 큰 대자현판이다. p223
30대의 단원이 신선도와 속화로 유명했다면 40대 초 단원의 장기는 화조화에 있었다. p228
단원은 금강산 사생을 계기로 하여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혼신의 힘으로 탐구하고 시험하는 치열한 장인적 수련과 연찬의 과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p243
훌륭한 화가의 상이란 행정에 유능했다는 것보다 인간적 현감이었다는 것이 더 어울린다. p266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우리나라 기록화의 금자탑이라 할 명작이다. p270
그림들 전체에서 풍기는 서정과 아취는 실경과 관념을 뛰어넘어 조선 산수와 화조의 한 정형을 창출해낸 것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p275
40대의 작품은 꼼꼼하고 정직한 묘사로 일관하고 있지만 50대의 노필은 변형과 과장이 많고 붓의 놀림이 대단히 빠르며 스스럼없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곧 단원의 화풍인 것이다. p282
단원이 그린 남종문인화, 관념산수화의 많은 것들이 이런 시의(詩意)와 철학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288
권농 김 단원의 삶은 비록 가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었지만 마음의 여유로움은 처사다운 데가 있다. p290
50대 후반 단구 시절 단원 화풍의 특색은 50대 전반기부터 보여준 압축된 묘사, 빠른 필선, 유연한 번지기가 더욱 스스럼없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작품의 소재보다도 필법 그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p296
60세의 단원은 힘차면서 마치 붓 가는 대로 그린 것만 같은 농익은 필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엷게 물들인 담채와 번지기로 필세들이 더욱 살아나고 있다. p303
환쟁이 신분으로 찰방과 현감을 지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때로는 명사들과 교류하여 아취 있는 삶을 영위하기도 하고, 말년엔 가난과 고독속에서 넉 달을 보냈으나 어떤 처지에서도 그는 진실로 인간적인 분이었다. p314
화가로서 그의 회화적 역량은 어느 한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르에 따라, 관객의 신분적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함으로써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예술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 만하다. p316
김홍도의 예술은 조선 4백년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모든 예술적 업적을 한 몸으로 끌어안아 하나의 전형을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316
단원 김홍도는 보통 예술적 천재들이 지닌 부정적 측면, 괴팍하고 고집세고 이기적이고 방자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는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을 남들과 분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양식을 창출하는 데 발휘했던 것이다. p318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았다.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상이다. p318
[4. 내가 저자라면]
유홍준의 저서를 읽노라면 우선 글이 무척 편안하다. 스스럼없이 적어 내려가는 방법이 독자로 하여금 멈춤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선택에 있다. 나는 언어의 힘과 매력 그리고 거부감 등을 익히 알고 있다.
저자는 거부감을 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정겨움과 붙임성을 갖고 있는 단어들로 글을 표현하고 있다. 비록 그 사람의 나쁜 감정이나 현실 그리고 환경조차 역겨움을 주는 단어 선택을 회피하면서도 그 사실을 잘 알려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편안함을 갖게 한다.
이것은 이 분야의 비전문가들에게도 이러한 저서를 쉽게 접속하게 하는 비결임을 알면서 저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여덟 명의 화인들을 배치함에 있어 그 기준이 애매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태어난 연대를 보더라도 순차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저자가 좋아하는 순서도 아닐 것 같고 무슨 기준에서 이렇게 배치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화의 대가, 진경산수의 대가, 남종문인화의 대가 등 부분별 대가로 분류하던지 조선 중기서부터 후기까지 연도별로 배열하던지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함에도 이러한 기준이 없었던지라 그 배열에 의문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이 두 권의 책자만을 보고 조선의 모든 화인을 읽을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저자가 표현한 조선의 대표적 화가를 3원 3재(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라 일컬었는데 이중 혜원 신윤복과 오원 장승업이 빠졌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다음에 나올 책에 나머지 분들이 있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화인열전이 아직 2권으로 끝났기에 왜 빠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조선 중기 이전의 화가들도 꽤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화인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앞으로 저자의 숙제가 될 듯하다.
어쨌든 화가를 화가라 부르지 않고 화인이라 칭한 것부터 진일보 하였다는 생각이고 부드러운 필치로 일반 독자가 접하기 어려운 그림소재의 책을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저자의 노력에 정말 존경을 표하며
향후 이 조그만 책자에 담긴 우리의 문화적 소산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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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과정,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예술철학 전공)을 졸업하였다. <공간>과 <계간 미술>기자를 거쳐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된 이래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정직한 관객』『조선시대 화론연구』『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화인열전 상,하』, 번역서로 『회화의 역사』 등이 있다.
무엇보다 유홍준 교수는 해방이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살아 숨쉬는 국토박물관' 이라고까지 불리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3권)의 저자이다.''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1권은 100만부 이상을 팔아치우면서 막강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미술평론가가 ‘문화답사가’보다 훨씬 분명하고도 오래 된 그의 직함이지만 많은 대중은 그를 답사가로 인식하고 있다.
베스트셀러를 내놓으며 유홍준이란 인물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화현상이 되고 있다. 그의 글은 80년대의 시대정신과 무엇보다 밀접히 연관돼 있다. 유홍준에게 있어 ‘80년대’로 대표되는 이 그물망은 그의 적극적인 참여를 절실히 요구하는 치열한 갈등과 대립의 장이었다. 그가 전문적인 미술평론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시평까지 다수 쓰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유홍준만큼 운동에 치열하면서 동시에 ‘미학 혹은 학문’으로서 미술비평의 수준에 달하기란, 적어도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힘든 일이다
유홍준의 글쓰기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 있어 리얼리즘의 이상을 주축으로 하는 것으로, 그 이전 문학 쪽의 리얼리즘 운동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민중미술운동은 우리 조형전통상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현대화해 이를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장르적 특성이 있다.
저자 유홍준은 앞으로 전문연구자로서의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읽지 않으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지 않는 한국 미술사를 한 권 써보고 싶어 한다.
[2.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인문학이나 문화적 코드에 대해 매우 약하다. 특히 미술 등 예술분야에서는 매우 문외한 측에 낀다. 그러나 지난날 어린 시절 그림을 무척 좋아했고, 그리기도 자주한 적이 있으며 동네 아이들과 그림그리기 대회도 한 기억이 난다. 그것은 아주 미미하기는 하지만 예술적 재질이 조금은 있었던가 보다.
그리고 지금 내 딸은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림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나보다.
이 유홍준의 화인열전을 읽노라면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라 그런지 모든 대상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인간적 정이 많아서인지 사람 사는 모습이 모두 화폭의 무대 장식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저자 유홍준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다. 우리는 지난날 위인열전이나 미인열전 등 열전하면 통상적으로 정치권력의 중심과 사상의 대가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임을 통념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조선중․후반부의 화가들에 대해 열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발상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씨 조선 5백 년 동안 미술을 업으로 하였던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밝지만 않았던 것 같다. 화인열전에서 나오는 한국미술사의 대표적 화가 여덟 명, 연담 김명국,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에서 연담 김명국은 신필이었음에도 당시의 화가에 대한 천시로 인해 언제 태어났는지 조차 모르는 불우한 삶을 보냈고
공재 윤두서는 평생 경륜을 펴지 못한 불우한 선비였으며, 관아재 조영석은 당대 인물화의 진수를 보여 주였지만 화가에 대한 애착은 없었기에 항상 현실정치와 그림 간에 갈등을 가졌던 인물이었고, 현재 심사정도 명문 가문의 후손임에도 집안의 몰락기에 태어나 불우한 환경속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었으며, 능호관 이인상도 명문가문이지만 서출이라는 한계로 그 뜻을 그림에 풀어야 했으며 호생관 최북은 중인 출신으로 당대 출세는 꿈도 꾸지 못하는 화가였다
다만,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대가로서 수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당대 인정을 받아 다른 화가에 비해 천수를 누리면서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를 갖고 살았던 인물이란 점과 단원 김홍도는 이 모든 화가를 집대성한 그림을 그려 어려운 환경임에도 화가이상의 인간적 면모를 보임으로써 그의 예술은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조선적인 위대한 화인으로 자리매김되었다는 점이 위의 화가들과 달랐을 뿐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화가의 생활상은 그리 평탄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빛날 수 있는 것은 억눌림, 한, 가난 등의 고뇌와 번민속인가 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예술적 가치를 남기지 않았던가.
이러한 예술인을 접할 때면 나의 존재의 미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보수적이고 철저한 성리학의 테두리에 갇혀있는 전형적 제도 속에서 창의와 새로움을 구가하는 신경지를 개척한 것은 그들의 위대한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룩할 수 없는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도 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한 외곬을 전생에 거쳐 전념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저자 유홍준은 이러한 위대한 위인들을 화가가 아닌 화인이라 표현하면서 그동안 우리들은 선현들에 대해 너무 무심했음을 탓하고 더욱이 외국과 달리 미술사에 대한 전기가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이러한 저술을 하였다 한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세계적 조류는 문화적 코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다. 경제적 발전도 중요하고 정치적 안정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의 정체성과 개별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코드의 보존과 발전없이는 세계적 주류에 서지 못하기에 문화보존과 자기 문화의 세계화는 앞으로 자국의 세계화에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선대의 미술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한 화인열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 지식과 문화적 컨셉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인문학의 줄기는 문화사이고,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학이며, 미술사학의 열매는 예술가의 전기"라는 유홍준의 신념에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책이었다.
[3. 책 속에서]
1. 연담 김명국 : 아무도 구속할 수 없던 어느 신필의 이야기
연담 김명국은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신필로 추앙받은 첫 번째 화가이다. p15
치밀한 가운데 분방함이 드러나는 필치의 조화가 바로 김명국의 특징이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개성이다. p23
그러나 김명국의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이러한 찬사나 증언들은 모두 한 두 세대 건너 후대인의 저술들이고,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사실은 없다. p28
인조 연단의 화단이 이처럼 활기찼음에도 김명국 같은 특출한 큰 화가가 빛을 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왕실의 회화 취미로 인한 화단의 경직성 내지 보수화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32
김명국은 기질상 지배층의 절도 있는 규범과 몰개성한 화풍에 자신을 내던질 수 없었다. 그의 호방한 기질은 오히려 더 개성적인 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것을 알아주는 비평적 안목을 갖춘 이가 주위에 없었던 것은 그의 불운이었다. p34
바위와 숲은 들쭉날쭉 산굽이는 구불구불
층층난 흰 구름 어이 그리 황홀한고...
연담의 붓끝이 이처럼 신묘하여
한번 펴서 보고 십년토록 탄복했네..... p38
숙종 연간을 지나 영조시대에 오면서 김명국에 대한 평가가 드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개성적인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전체의 변화속에서 나타난 평가의 전환이었다. p39
김명국 그림의 본령은 산수화 중에서도 산수인물에 있었다. 그이 유작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중귀려도〉와 이병직 구장의 〈심산행려도〉인데, 두 작품 모두 강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p43
연담이 누구보다도 개성적이고, 누구보다도 파격적이었고 누구보다도 신필의 경지를 지녔음을 남김없이 말해주는 〈죽음의 자화상〉이라는 명작이 존재하는 한 그의 화명은 한국회화사에서 영원할 것이다. p49
연담 김명국, 그는 죽음 앞에서 〈죽음의 자화상〉을 그린 인생의 달인이었고 그림의 신필이었던 것이다. p51
김명국은 확실히 인조시대 화가로서 당대의 이단이었고, 기인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취흥에 따라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p51
그는 시류 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p51
결국 그의 삶과 예술은 시절을 잘못 만나 기인이 되고 만 한 신필의 자랑스런 반항의 이야기인 것이다. p51
2. 공재 윤두서 :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내력
시대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대담한 자기 결단과 자기 갱신으로 종래의 화가들은 생각지도 못한 ‘속화(俗畵)’까지 그리면서 18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길을 열었다. p57
윤두서는 당당한 한 선비로서 정확하게 시대정신의 추이를 인식하고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실천한 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p58
그의 〈자화상〉에 서린 저 꿋꿋한 기상과 처연한 고독의 그늘, 그것이 이제부터 알아볼 공재 윤두서의 인생과 예술이다. p60
공재로서는 여느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문(文), 사(史), 철(哲)을 공부하여 학식을 쌓고, 시(詩), 서(書), 화(畵)로 교양을 높이는 일이 곧 그의 일생이었다. p67
몸으로 체득하고 일로 증명하는 ‘실득(實得)’이 있었다는 것은 곧 실학정신의 요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68
〈심득경초상〉은 훗날 관아재 조영석이 그린 그의 형〈조영복 초상〉과 표암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과 더불어 사대부화가 초상화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것이니 공재는 이 분야에서도 당대의 선구자였다. p74
공재는 학문과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기존의 틀과 관행을 뛰어넘어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의 회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남종문인화의 적극적인 도입이고, 또 하나는 ‘속화’라는 리얼리즘적 장르의 개척이다. p77
공재는 이처럼 기존 화단과 어떤 사승 관계도 맺지 않고 홀로 화본을 보면서 그림에 입문했다. 그러나 공재의 뛰어남은 그런 화본을 받아들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자신의 회화 영역을 넓혀나간 데에 있다. p79
공재는 일찍부터 말 그림과 인물화 두 부분에서 높은 화명을 얻었다. 그것은 남태응의 증언대로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하는 정확한 데생력 때문에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박진감이 있었을 것이다. p82
필법의 공교함과 묵법의 정묘함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신격(神格)에 이르고, 만물에 물상(物象)을 부여함은 그림의 도(道)이다. 그러므로 그림에도 화도(畵道)가 있고, 화학(畵學)이 있고, 화공(畵工)이 있고, 화재(畵才)가 있다. P89
공재 그림 중에서 우리가 회화사적으로 크게 주목하고 실학자로서 그의 면모를 드높여주는 것은 단연코 속화이다. P95
나물캐는 아낙네와 짚신삼는 농부가 선비의 자리, 신선의 자리를 밀어내 당당히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것은 회화적 혁명이다. P96
나는 공재의 속화는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현실을 집어넣은 것으로 생각한다. P98
현재 전해지는 공재의 속화 중 대표작은 아마도 〈돌 깨는 석공〉이 아닐까 한다. P99
공재의 작품 중 최고의 명작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노승도〉라 할 것이다. 〈노승도〉는 그 소재가 처음부터 감상화라는 예술적 목표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자화상〉보다 더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다. P102
공재는 그림에 뛰어나 그 학문이 덮인 바 되었음을 성호 이익은 한탄했지만 미술사학도로서 갖는 또 다른 아쉬움은 그의 그림으로 인해 글씨에서 이룬 공이 가려진 것이다. 공재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P107
공재 윤두서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예라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시운을 얻지 못하여 평생 경륜을 펴보지 못한 불우한 선비였다. 그러나 공재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 힘써 숙종 연간의 문화 기류 속에서 명백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며 ‘실득(實得)’있는 학문을 추구하고, 민족주의적인 ‘동국진체’를 개발하고, 현실주의 입장을 띤 ‘속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P111
3. 관아재 조영석 :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그가 이룩한 이런 예술 세계는 한마디로 사실정신과 선비정신의 만남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P119
관아재는 자신의 인생 목표를 화가에 두고 살지는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사대부로서 체통을 유지하며 품위 있게, 바르게 살기를 원했다. 그가 스스로 호를 ‘나 자신을 살피는 집’이라는 뜻으로 관아재(觀我齋)라 지은 것부터 이런 면모를 보여준다. P122
그러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다른 장르도 아니고 속화라는 장르까지 완성시켰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남의 눈을 피해서라도 자신의 화흥을 발현한 어쩔 수 없는 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23
조영석의 초상화에는 인물의 기품이 넘쳐흐른다. 기존의 초상화에서도 신중하게 추구했던 전신의 가치가 여기서 더욱 역력히 살아나고 있다. 둘째는 형식에서의 자유로움이다. P134
그림은 시로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아내는 독자적 기능이 있으며, 또 산수화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거기에 화가의 마음이 더해지기 때문에 그림이 더 위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P140
우리는 민중예술이란 민중적 삶의 표현뿐만 아니라 민중에 대한 애정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P152
그는 스스로에게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지수재 유척기가 그의 묘지명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그의 ‘4욕론(四慾論)’이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욕망이 있으니 생욕(生慾), 색욕(色慾), 관욕(官慾), 재욕(財慾)이다. 이 4욕은 사람마다 모두 마땅히 힘써 경계해야 할 바이며 특히나 관직에 있는 사람은 더욱 빠지기 쉬운 것이다. P162
관아재 조영석은 타고난 인물화가였다. 그 스스로 겸재에게 말하기를 “산수의 웅혼함을 표현함은 그대가 낫겠지만 머리카락 하나 틀림없는 인물 그림에는 그대가 나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p180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p180
관아재는 겸재의 진경산수를 평하여 “조선 3백년 역사속에 조선적인 산수는 겸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관아재에게 그대로 돌려 “조선적인 인물화는 조선 3백년 역사 속에 관아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p180
4. 겸재 정선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겸재 정선의 예술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p186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p192
겸재 그림을 기년작 중심으로 볼 때 겸재다운 필치가 구사되는 것은 59세에 그린 〈금강전도〉이다. p208
겸재는 앞시대의 미미한 사경산수의 전통, 그리고 회화식 지도의 전통에 근거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해나갔던 것이다. p209
진경산수의 미학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형상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p223
역사적 평가에만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한 인간이, 한 화가가 어떤 노력 속에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낳게 되었는가라는 그 과정과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 성실성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너무 잔인하고 때론 경박한 면도 없지 않다. p230
우리는 기록화의 제약 조건은 회화미를 감소시키기 십상이고, 진경산수의 묘미란 실경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회화미로 재해석해내는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p247
겸재는 성품 탓인지 아니면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주위에서 그림을 요구해올 때 거의 거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고, 역대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유작을 남기게 되었다. p250
나는 겸재의 〈금강전도〉를 볼 때마다 위인의 크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금강전도〉의 세부 묘사는 대단히 치밀하다. 흔히 선이 굵고 스케일이 큰 화가는 디테일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상례인 줄 알고 있지만, 대가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p257
위대한 장편소설은 어느 쪽을 펼쳐 읽어보아도 재미있고, 위대한 건축은 외형 못지않게 내부가 아름다우며, 위인의 삶은 선이 굵은 만큼 작은 일에도 따뜻한 마음씀이 있다는 것을 이 〈금강전도〉에서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p259
고사도는 옛 성현의 고사를 형상화시킨 그림인데, 특히 주자학(朱子學)을 주도적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던 시대에 주자의 고사에서 나온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p283
겸재의 만년 삶이란 여유로움 속에 가족과 함께 지내며, 벗들과 어울리고, 어쩌다 제자를 만나면 그를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그가 열중해온 『주역』을 공부하며 평생의 업으로 삼은 그림에 생의 마지막 열정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겸재는 만년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p293
겸재 만년의 명예는 무엇보다도 노익장을 자랑하며 84세까지 천수를 다하도록 건필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도 그림을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손떨림이 없는 건강에 있었다. p296
그의 70대 만년작을 보면 여느 화가의 중년보다도 더욱 힘차고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은 타고난 건강의 밑받침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사실은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장인적 성실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었다. p296
겸재의 만년복이란 이런 건강과 노력 속에 남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만년의 명작들을 무수히 쏟아놓았으니, 이는 그의 가장 큰 복이자 우리 민족의 큰 복이었다. p297
70대 작품은 60대 노년기의 작품에 비하면 정밀성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화면 자체의 울림은 물론이고 실경의 박진감은 오히려 더 살아난다. 과연 신들린 작품만 같다. 겸재는 그것을 천취(天就)라고 했다. p299
겸재의 만년 작품 세계에서 우리가 그의 명작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은 대개 진경산수다. p308
겸재의 대표작을 꼽자면 누구든 〈인왕제색도〉와 〈박연폭도〉를 빼놓지 못한다. 사실상 겸재 예술의 최고봉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p313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대상에 충실하면서 박진감을 잡아낸 작품이라면, 〈박연폭도〉는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사실성을 뛰어 넘어 곧바로 회화미로 나아간 명작이다. p313
인생과 예술에는 준엄함이 있어 만년의 원숙한 경지란 반드시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함을 경험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316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 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위업은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p320
한국미술사상 이런 위대한 화가는 겸재 이전에는 없었고 겸재 이후에도 그와 짝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단원 김홍도가 있을 뿐이다. p321
우리의 강산을 자랑과 사람의 마음으로 화폭에 담아낸 겸재의 진경산수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감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던가. 모름지기 그것을 그의 비문의 머리글로 삼을 일일진대 나에게 그 비문을 쓰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 아름다워라, 조국 강산이여!” p323
5. 현재 심사정 :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3원3재’여섯 분을 꼽고 있다. 3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3재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을 일컫는다. p15
겸재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국진경산수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시켰고, 관아재는 그의 뛰어난 인물 묘사력과 관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속화의 틀을 갖추어냈으며, 현재는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 분으로 관념적 화풍의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의 국제적 조응력을 한층 끌어 올렸다. p15
이들 3재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진경산수, 속화, 문인화라는 세 장르는 이후 조선 후기 화단의 일반적 경향으로 공인되어 훗날 3원의 화원들이 추구한 예술 세계는 모두 3재의 화풍에 근거해 있다. p15
애처로운 「현재거산 묘지명」을 읽노라면 그의 예술은 궁핍과 고독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야생화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p22
현재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쓰라림과 고독의 감정을 붓끝에 실어 동시대 누구보다도 화가의 감정이 깊이 개입된 명상적이며 때로는 애수의 시정이 들어 있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p25
현재는 겸재와 더불어 당대의 제일 가는 자리를 다툴 만한 솜씨가 세상에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인정이 야박했으니 그이 묘지명에 실린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받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는 표현이 어떤 내용인가를 알 만하다. p29
그의 묘지명에서 말하는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표현은 다작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실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p32
화폭에 화가의 감정이 적극 개입하여 산수화에 깊고 그윽한 맛을 더해주는 그의 필치는 중국 남종화를 자기화하여 조선적으로 토착화한 것을 의미한다. p36
그의 그림에 서려 있는 관념성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심화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현재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p50
현실 속에서 그림의 대상을 찾을 수 없고 관념 속에서 그림의 대상을 추출해내려 할 때 화가는 그 예술적 이상과 목표를 다른 곳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다. p51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p54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畵尙精神]”한 화가였다. p54
6. 능호관 이인상 :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이인상은 이처럼 높은 예술적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겸재나 단원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의 옛 그림이 일반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이룩한 문인화의 높은 격조라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게 이해하거나 감동을 받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p60
능호관은 또 동시대 화가의 그림 또는 소장가의 중국 그림을 통해 자기의 그림 세계를 넓혀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문집상에는 그런 교류가 감지되는 구절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p69
오늘날 능호관은 당대의 최고 가는 문인화가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일생 동안 단 한번도 화가로서의 작가의식을 보여준 바가 없다. p80
능호관은 삶 자체가 문인화의 길이었다. 그가 여타의 화가와 다른 별격의 예술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p82
능호관은 겉으로 드러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 내지는 진실에 그 근거를 둔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p89
40대 능호관의 모루도는 짙은 고독과 명상적 분위기, 그리고 처연한 기상으로 앞시대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회화 세계로 나아간다. 인생에서 아프게 느낀 것이 그대로 그림 속에 배어들면서 그의 그림은 더욱 고담한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p101
이인상의 작품에는 이처럼 은일자의 처연한 모습과 종강모루의 좌우명 같은 굳센 의지가 나타난다. p113
능호관의 그림은 은일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p114
능호관의 낙은 언제나 벗에 있었다. 능호관은 때때로 서울의 벗을 방문하기도 하고 때로는 설성에서 벗들의 방문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p119
능호관 이인상은 이처럼 고고하게 살고 은일자로서 청절을 지키면서 그것을 화폭에 담아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 문인화가로서 적극적인 작가의식을 갖고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설송도〉,〈송하관폭도〉, 〈장백산도〉같은 조선시대 회화사의 불멸의 명작을 남겼다. p121
능호관에게 있어 삶과 예술이 결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일체를 이루었다는 점일 것이다. p123
능호관의 그림은 그의 문인적 삶의 표현이자 인격의 드러냄이었다. 그림이 인격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은 문인화라는 독특한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다. p124
능호관의 시는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다. p124
능호관 이인상의 예술 세계는 이처럼 “오직 아는 자만은 알고 있는”높고 진실된 예술 세계였던 것이다. p126
7. 호생관 최북 :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최북은 스스로 호를 지어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다. 즉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했으니 이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p129
최북은 비록 여항인이었지만 시․서․화에 모두 능한 풍류객이기도 했다. p151
그는 여러 분야에 손을 댔는데 그 중 산수화에서 특기를 발휘했으며,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류의 남종문인화풍을 보여주었고 때로는 필법과 구도가 기이한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p153
최북은 성실한 예술가는 아니었다.그는 문인화가로서의 기품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런 분위기가 있는 위인도 아니었다. p157
최북은 화가로서 성공과 실패 두 면을 갖춘 기이한 화가인 셈이다. p162
최북은 스스로 ‘호생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결국 호생관으로 일생을 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서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현하면서 그림으로 세상과 얘기할 때는 명작을 낳았다. 그러나 그저 ‘호생관’이라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그릴 때는 호생관이라는 것이 한낱 노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p163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p164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 더욱 몰랐다. p164
8. 단원 김홍도 :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의 예술적 성취 속에는 그 자신의 예술의지가 작용했든 시대적 요청에 의해 촉발된 것이든, 어느 것이나 인문정신의 표상이었다. 정조시대 문예 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p169
김홍도의 화풍을 보면 대상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형상의 특징을 요약해내는 솜씨는 과연 ‘파천황’적 신기를 갖고 있었지만 세필과 정밀묘사는 본시 그의 장처가 아니었다. p181
단원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그림을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한 30대의 단원 작품 중 미술사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역시 그 유명한 『속화첩』이다. p193
단원의 속화는 서민의 심성으로 파고들어 거기서 나온 그림이니, 단원은 그 말뜻의 참된 의미에서 진실로 민중화가라 할 수 있다. p194
단원의 풍모는 그의 그림 못지않게 뭇 사람들이 칭송하는 바였다. 단원에게 시를 지어준 백화자 홍신유는 말하기를 “단원은 그 외모가 빼어나게 깔끔하고 풍채가 뛰어나게 점잖으니, 속계의 사람 같지가 않았다”고 했다. p213
단원의 그림은 그런 환경 속에서 그려졌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이처럼 명사들 사이의 훌륭한 선물이 되니, 이를 받은 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단원의 화명은 그렇게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p221
담락재(湛樂齋)는 ‘담담하게 즐기는 서재’라는 뜻으로 단원이 안기찰방 시절 이곳 체화정에 들러 즐거운 한 때를 가졌던 것을 기념하여 이별의 징표로 써준 현판이다. 이것이 현재 단원의 유묵으로는 가장 큰 대자현판이다. p223
30대의 단원이 신선도와 속화로 유명했다면 40대 초 단원의 장기는 화조화에 있었다. p228
단원은 금강산 사생을 계기로 하여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혼신의 힘으로 탐구하고 시험하는 치열한 장인적 수련과 연찬의 과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p243
훌륭한 화가의 상이란 행정에 유능했다는 것보다 인간적 현감이었다는 것이 더 어울린다. p266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우리나라 기록화의 금자탑이라 할 명작이다. p270
그림들 전체에서 풍기는 서정과 아취는 실경과 관념을 뛰어넘어 조선 산수와 화조의 한 정형을 창출해낸 것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p275
40대의 작품은 꼼꼼하고 정직한 묘사로 일관하고 있지만 50대의 노필은 변형과 과장이 많고 붓의 놀림이 대단히 빠르며 스스럼없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곧 단원의 화풍인 것이다. p282
단원이 그린 남종문인화, 관념산수화의 많은 것들이 이런 시의(詩意)와 철학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288
권농 김 단원의 삶은 비록 가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었지만 마음의 여유로움은 처사다운 데가 있다. p290
50대 후반 단구 시절 단원 화풍의 특색은 50대 전반기부터 보여준 압축된 묘사, 빠른 필선, 유연한 번지기가 더욱 스스럼없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작품의 소재보다도 필법 그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p296
60세의 단원은 힘차면서 마치 붓 가는 대로 그린 것만 같은 농익은 필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엷게 물들인 담채와 번지기로 필세들이 더욱 살아나고 있다. p303
환쟁이 신분으로 찰방과 현감을 지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때로는 명사들과 교류하여 아취 있는 삶을 영위하기도 하고, 말년엔 가난과 고독속에서 넉 달을 보냈으나 어떤 처지에서도 그는 진실로 인간적인 분이었다. p314
화가로서 그의 회화적 역량은 어느 한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르에 따라, 관객의 신분적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함으로써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예술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 만하다. p316
김홍도의 예술은 조선 4백년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모든 예술적 업적을 한 몸으로 끌어안아 하나의 전형을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316
단원 김홍도는 보통 예술적 천재들이 지닌 부정적 측면, 괴팍하고 고집세고 이기적이고 방자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는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을 남들과 분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양식을 창출하는 데 발휘했던 것이다. p318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았다.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상이다. p318
[4. 내가 저자라면]
유홍준의 저서를 읽노라면 우선 글이 무척 편안하다. 스스럼없이 적어 내려가는 방법이 독자로 하여금 멈춤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선택에 있다. 나는 언어의 힘과 매력 그리고 거부감 등을 익히 알고 있다.
저자는 거부감을 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정겨움과 붙임성을 갖고 있는 단어들로 글을 표현하고 있다. 비록 그 사람의 나쁜 감정이나 현실 그리고 환경조차 역겨움을 주는 단어 선택을 회피하면서도 그 사실을 잘 알려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편안함을 갖게 한다.
이것은 이 분야의 비전문가들에게도 이러한 저서를 쉽게 접속하게 하는 비결임을 알면서 저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여덟 명의 화인들을 배치함에 있어 그 기준이 애매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태어난 연대를 보더라도 순차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저자가 좋아하는 순서도 아닐 것 같고 무슨 기준에서 이렇게 배치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화의 대가, 진경산수의 대가, 남종문인화의 대가 등 부분별 대가로 분류하던지 조선 중기서부터 후기까지 연도별로 배열하던지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함에도 이러한 기준이 없었던지라 그 배열에 의문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이 두 권의 책자만을 보고 조선의 모든 화인을 읽을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저자가 표현한 조선의 대표적 화가를 3원 3재(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라 일컬었는데 이중 혜원 신윤복과 오원 장승업이 빠졌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다음에 나올 책에 나머지 분들이 있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화인열전이 아직 2권으로 끝났기에 왜 빠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조선 중기 이전의 화가들도 꽤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화인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앞으로 저자의 숙제가 될 듯하다.
어쨌든 화가를 화가라 부르지 않고 화인이라 칭한 것부터 진일보 하였다는 생각이고 부드러운 필치로 일반 독자가 접하기 어려운 그림소재의 책을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저자의 노력에 정말 존경을 표하며
향후 이 조그만 책자에 담긴 우리의 문화적 소산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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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 | '금빛 기쁨의 기억' 무엇이란 말인가 | 도명수 | 2006.05.26 | 2700 |
497 | 21세기에 완당을 만나다 [2] | 꿈꾸는간디 | 2006.05.22 | 2806 |
496 | 완당 평전(몇 번째 일까--;) | 박소정 | 2006.05.22 | 3030 |
495 | 강영희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 | 한명석 | 2006.05.22 | 3120 |
494 | 금빛 기쁨의 기억... | 이종승 | 2006.05.21 | 2418 |
493 | 조용헌의 "고수기행" [1] | 한명석 | 2006.05.20 | 41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