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이미경
  • 조회 수 3095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6년 6월 6일 23시 19분 등록
a. 저자소개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네이버백과사전 출처-



b. 독후감

그는 위인전의 단골메뉴인 장군도, 왕도, 발명가도 예술가도 아니다. 그래도 위인전 어디엔가 그의 이야기가 있을 텐데 나는 어렸을 적 책꽂이에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던 위인전집에서 그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개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가 국권상실기에 구국운동을 펼친 인물 중의 한 명으로서 활동했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 하나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각인되어 있는 흰 한복에 동그란 검은색 안경을 쓴 광대뼈 불거진 얼굴이다. 그리고 그 외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야 안 사실이 꽤 된다. 우선은 그의 백범일지가 日誌 즉 매일매일을 기록한 일기나 일지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의미의 逸志라는 사실과, 그의 호 백범이 하층민인 백정과 평민인 범부도 자신만큼의 애국심을 바라는 마음에서 따왔다는 점, 그가 다른 무엇보다 사상과 정신의 독립 및 국권의 자주독립을 주창하였다는 점(p.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완전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길이 보전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등을 말이다. 그리고 더불어 느낀 점 한 가지는 그가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그냥 한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책 간간히 표현된다.

.......나는 다시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빼앗겼다. 집에 돌아와서는 칼을 잃어버린 탓에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내내 시치미를 떼었다..... p.22

또 하루는 집에서 혼자 입이 궁금하던 차에 집 아픙로 엿장수가 지나가며 ‘헌 그릇이나 부러진 숟갈로 엿 사시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엿은 먹고 싶었으나 ‘엿장수가 아이들 자지 베어 간다’는 어른들 말씀을 들어온 터라 겁이 나서 방문을 걸어 놓고 엿장수를 불렀다. 주먹으로 문구멍을 뚫고 아버님이 쓰시던 좋은 숟갈을 분질러 절반만 구멍으로 내밀었다. 엿장수도 엿을 한 주먹 뭉쳐서 들이밀어 주었다......p.23

나는 할아버님이 무척 고마웠고 아버님께서 매 맞으시는 것도 퍽 고소하였다.....p.23

선생님이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 옷 입고 마중 나갔다.....p.25

나무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동네 서당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들을 때는 말 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p.27

그런데 내 얼굴에는 어느 한 군데도 귀하고 부유하고 좋은 상은 없고 천하고 가난하고 흉한 상 밖에 없었다.....p.31
겉으로는 태연자약한 척 하였으나 속으로는 매우 조급하였다....p.72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살을 베어 내려 했으나, 살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처음보다 천백 배 용기를 내어 다리 살을 베었지만 두 번째는 결국 베어 놓기만 하고 손톱 만큼도 떼어 내지 못했다.....p.128

칼로 베어낸 상처가 무척 아팠지만 어머님께 알릴 수도 없었다. 너무 괴로워서 허벅지 살 베어 낸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p.129

매일 아침저녁 음식냄새를 맡을 대면,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해서 밥을 받아먹을 가, 또 아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을 해다 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도 들었다.......p.163

허기진 알몸으로 고문을 받으면서 ‘몸은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정신은 뺏을 수 없다’고 소리쳤던 전날의 기개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다가 내게서 인간의 성정은 사라지고 짐승 같은 본능만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였다.....p.163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p.169

구국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강건함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나보다. 일지 면면에서 보여지는 그의 솔직함에서 나는 오히려 위대한 김구선생이 아닌, 인간 김구를 보았다. 나면서부터 위대한 사람이라는 식의 위인전에서 벗어나 개인 스스로가 돌아보는 자기이야기에서 나는 치장 없는 그를 볼 수 있었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가 더욱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그의 죽음이 궁금해졌다. 저격은 아무나 당하는 일이 아닐 진데, ‘육군 포병 안두희에게 경교장에서 암살당하였다’라는 구절로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백범일지가 본인이 기술한 내용으로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서술된 것이 없어 글 중에 나오는 암살범을 찾아보았다. 검색이 되는데 내용이 참으로 의외다(별첨참고). 한 국가의 지도급 인사를 암살한 범인 치고는 형 집행이 지나치게 축소(감형)되더니 결국 완전하게 복권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법이 안두희를 놓아주었다고는 해도 사회적으로는 복권이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던 듯하다. 그는 복권 후에도 끊임없이 응징을 당했고 결국 피살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암살범의 처리과정은 개운치 않은 면이 있어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www.kimkoo.or.kr)라는 사이트가 있어 당시의 분분한 내용을 전하고 있었는데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미루어 짐작컨대 백범이 누구보다 신탁통치를 반대하였고 자주독립을 꿈꾸었다는 점은 미국의 환심을 살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결과적으로는 사회 주축에서 배제 당하게 되는 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글이 있었다. 다시금 백범의 출간사 구절이 생각났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남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만약 암살당하지 않고 민족정신을 잇는 활동을 계속하였다면 어찌 되었을지 매우 궁금해진다.
별첨=========================================================
안두희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범.
평북 용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939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편입했다. 그뒤 중국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다가, 1947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활발한 우익 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활동으로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가 되고,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백범과 인연을 맺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가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백범은 순국하고, 이 사건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의혹을 낳았으나 그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되었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그는 곧바로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달 후 15년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하였다가, 1951년에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예편되었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그뒤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4·19혁명 이후 김구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1961년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응징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



c. 내가 저자라면

이미 이 글은 백범일지 원문이 아니다. 이 책의 역자인 도진순씨는 책의 서두에서 ‘쉽게읽는 백범일지’의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주해본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거나 수정하지 못한 백범일지 원문의 착오들을 바로잡았다. 특히 시기가 혼선되어 있는 내용의 선후 관계를 바로잡았으며 그 결과 드러나는 착오들, 예컨대 그간 잘못 알려져 있던 결혼 연도의 착오 등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또한 각주들을 생략하고 그 내용을 본문에 반영하였다. 다음, 백범일지는 세 번에 걸쳐 기록되었고 그 후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권과 하권, 하권과 해방 이후의 추가본에서 상당 부분 중복된다. 이 책에서는 집필 시기를 기준으로 중복 부분을 통합하고 일목요연하게 다시 배치하였다. 또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번잡하게 퍼지는 부분도 백범의 동선이 잘 드러나게 정비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원본이나 주해본의 단순한 축약이 아니다. 문장을 거듭 교열하고 중복 부분을 통합하고, 번잡한 부분을 정비하여 정연한 체계를 잡으니 비로소 백범의 내면세계, 그 정신적 번뇌와 성장 및 전환의 과정이 훨씬 명료하게 드러났다. 이를 적극 반영하여 차례를 전면적으로 다시 조정하였다...............아울러 이 책에는 본문의 내용과 관련되는 사진과 자료, 그리고 백범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도 등을 100컷 이상 첨부하였다. 이것으로써 시각적 효과도 높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범마저 기억하지 못했던 관련 인물, 유적 ,자료들을 찾아내어 백범일지 본문에 다양한 역동성을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독자들은 우선 이러한 사진, 자료, 지도만 일별해 보아도 개항기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격동기에 한반도와 중국 대륙 곳곳에 남겨진 백범의 자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9~10

매일매일 조금씩 기록한 것도 아니고, 특정한 기간 동안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유서저럼 작성한 글이 다양한 볼거리를 제시할 리 만무하다. 꼭 도진순씨의 서문이 아니더라도 미루어 짐작하건데 백범이 경험한 생생한 사건들은 백범의 머리와 마음에서 아련하게 기억되어 그의 손에 의해 기록되고 재창조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시대적 착오가 왜 없었겠는가. 유치하게도 초등학교 시절 개학이 다 되어 밀린 방학일기를 모두 써야 할 때의 답답했던 마음이 생각났다. 유서를 쓰는 듯한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엄숙함과 절절함을 감히 비교하기야 어려울지 몰라도 한꺼번에 몰아 써야 하는 일기에는 분명 표현할 수 없는 난감함이 있었다. 아랫집 철수와 놀았던 것도 사실이고 뒷집 영희와의 탐구학습도 정말인데 이게 언제인지 그리고 또 그날 어떻게 지냈는지 세세히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답답함과 꼬박꼬박 쓰지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 그리고 밀려드는 부담스러움. 아주 미약하게나마 백범이 얼마나 힘들게 기록을 했었을 지 짐작을 해 보았다. 항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은거와 피신을 반복해야 했던,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과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내지 못했었던 백범에게 모든 행적을 기록하는 일은 무리였을 듯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지를 남긴 백범이 대단해 보인다. 더불어 보다 편안한 방법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준 역자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d. 책 속에서
<상권>
인, 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에서의 어린 시절
1. 상놈이 된 집안 내력과 양반에 대한 울분 / 2. 난산으로 태어난 개구쟁이 / 3. 양반의 꿈, 궁핍한 배움길

2. 파란만장한 실패와 단련의 성장기
1. 과거 낙방, 양반의 꿈은 무너지고 / 2. 동학 입문으로 다시 태어나다 / 3. 동학군이 동학군에 패하다 / 4. 적장의 집에서 만난 스승 고능선 / 5. 의병의 국제연대를 찾아 청나라로 / 6. 김이언 의병도 실패하고 / 7. 인연 없는 스승의 손녀사위

3. 질풍노도의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1. 치하포 단독 의거 / 2. 첫번째 투옥, 인천으로 이감 / 3. 신문장에서 영웅이 되고, 옥중에서 왕이 되다 / 4. 신지식을 접하고 교수형을 면하다 / 5. 탈옥, 조롱을 박차고 나가다

4. 5년간의 방랑과 모색
1. 동지를 찾아서 / 2. 고기 먹고 시를 짓는 장발의 걸시승/ 3. 뜻이 있으면 어디선들 만나지 못하리 / 4. 스승, 아버님, 미혼처와 영원히 이별하다

5.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교육
1. 근대적 교육사업에 투신하다 / 2. 을사늑약 반대 투쟁과 결혼 /3.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 4. 황해도 순회 교육운동과 두번째 투옥 / 5. 이재명 의사에 대한 회한

6. 일제의 모진 감옥에서 백범白凡이 되다
1. 세번째 투옥, 고문에서 얻은 교훈 / 2. 기약 없는 15년형, 교육 건국의 꿈은 무너지고 / 3. 마음가짐의 대변동, 계몽운동을 넘어서 / 4. 도적에게 결사의 비법을 배우다 / 5. 이름을 구로, 호를 백범으로

7. 전격적인 망명과 상해 임시정부
1. 마흔 살에 가출옥하다 / 2. 농장 감독으로 뜻을 숨기고 / 3.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소 / 4. 사상 혼란기의 내무총장 / 5. 무정부 상태의 국무령 / 6. 혈혈단신이 되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8. 대륙을 진동시킨 이봉창과 윤봉길
1. ‘일본영감’ 이봉창의 영원한 즐거움 / 2. 불행히 명중하지 못했으나 / 3. 윤봉길 의사와의 짧은 만남 / 4. 홍구공원의 쾌거

9. 피신과 유랑 속의 민족운동
1. 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 2. 별장 생활과 산수 구경 / 3. 여뱃사공 주애보와 선상 생활 / 4.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 5. 9년 만의 모자 상봉 / 6. 혁명난류의 총탄을 맞다

10. 전시수도 중경의 임시정부와 광복군
1. 광주로, 다시 중경으로 / 2. 공동묘지의 지하회장이 되신 어머님 / 3. 한국광복군과 국내 침공 작전 / 4. 왜적의 항복,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 5. 중경 생활 7년의 회고

11. 조국의 산천과 동지를 찾아서
1. 감격의 귀국 / 2. 삼의사 유골 봉안 / 3. 제주도와 삼남 순방 / 4. 서부 지역 순방

<나의 소원>
민족국가 / 정치 이념 /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p.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완전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길이 보전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p.6 나 김구가 평생 생각하고 행한 일이 다 이러한 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사람이지만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층민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의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p.32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이것을 보고 나는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p.68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p.145 환등기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 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절규하였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p.163 몸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나를 달아매고 때릴 때는, 조선시대 박태보가 보습단근질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했다는 일화를 기억했다. 겨울철이나 겉옷만 벗기고 속옷을 입은 채로 때리는데, 나는 ‘속옷을 입어 아프지 않으니 다 벗고 맞겠다’고 자청하여 알몸으로 매를 맞아 살가죽에 온전한 데라곤 없었다. 바로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 음식냄새를 맡을 때면,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해서 밥을 받아먹을까, 또 아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을 해다 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중국 한나라 때 소무가 흉노에게 잡혀 19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굶주리면서도 옷 솜털을 씹어 먹으면서 끝내 절의를 지켰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또한 허기진 알몸으로 고문을 받으면서 ‘몸은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정신은 뺏을 수 없다’고 소리쳤던 전날의 기개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다가 내게서 인간의 성정은 사라지고 짐승 같은 본능만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p.170 나는 왜놈이 나를 뭉우리돌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기뻤다. 죽는 날가지 왜놈의 법률을 하나라도 파괴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왜놈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서는 맛보기 어려운 삶의 진수를 맛보리라 결심하였다.

p.178 목단설, 추설, 북대

p.180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거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p.184 구龜를 九로 고친 것은 왜의 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고친 것은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p.187 나는 서대문감옥에서 중형의 도적이 가벼운 횡령죄로 들어온 동료를 고발하여 종신형을 받게 하고, 자기는 그 공으로 형을 줄이고 후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았다. 만일 문가를 건드려 놓으면 감옥 눈치가 훤한 자이니 어떤 나쁜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안악 사건으로 근거 없이 15년형을 주는 왜놈들인데, 치하포 사건으로 왜놈을 죽이고 탈옥한 사실까지 발각되면 내 처치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제껏 감당하기 어려운 욕과 학대를 다 받고 만기가 1년 남짓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문가가 과거사를 이야기해 버리면 내 하 몸은 고사하고 늙은 어머님과 어린 처자는 어찌 될까?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굴었다. 집에서 부쳐 주는 사식도 틈을 타서 나눠 주고, 감옥 밥이라도 문가가 곁에만 오면 나는 굶으면서도 주었다. 그러다 문가가 먼저 만기 출옥하니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않게 시원하였다.

p.188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여러 번 떨어져 죽을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같이 쇠사슬을 맨 자가 인천항에서 구두 켤fp나 담뱃갑을 도적질한 죄로 두세 달 징역 사는 가벼운 죄수라 그자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아무 잔꾀도 무리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p.210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내게 와서 국무령으로 조각하라고 강권했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굳이 사양하였다. 첫째, 임시정부가 아무리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해주 서촌 미천한 김존위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다. 둘째, 이상룡과 홍진 두 분도 함께 일하려는 인재가 없어 실패하였는데, 내가 나서면 더욱 호응하는 인재가 없을 것이다.

p.255 우리 민족의 비운은 대체로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실질적인 행복은 내 모른다 하고, 창시자 주희 이상으로 성리학만 주창하여 사색당파로 수백 년이나 다투어 왔으니, 민족 원기는 다 닳아 없어지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만 남았다. 이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오. 슬프다. 오늘날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향하여 낡고 봉건적이라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문제 또한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한꺼번에 할 것을 극력 주장하다가도, 레닌이 ‘식민지는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뒤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자,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청년들은 중국 정자와 주자의 방귀조차도 향기롭다다는 옛사람들을 비웃지만, 같은 입과 혀로 러시아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정신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자, 주자 학설의 신봉자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위해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p.305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대답할 것이다.
IP *.62.107.130

프로필 이미지
한명석
2006.06.07 11:30:28 *.85.149.181
나는 고전에 치명적으로 약해서, 늘 하는 척만 하는데 정석대로 풀어나간 미경씨의 글이 참 보기좋네요. 오랫만에 글 보아서 반가웠구요, 토요일 미팅에서 얼굴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번개에 못 간 나만 얼굴 못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