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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19일 00시 20분 등록
a. 저자소개

유홍준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 철학박사.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민족미술인 협의회 공동대표 역임.
현재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 고간찰연독회 공동대표.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역임.
현재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겸 명지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저서:『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열화당, 1986),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3(창작과비평사, 1993∼97),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상·하(중앙 M&B, 1998∼2000),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창작과비평사, 1996), 『정직한 관객』(학고재, 1996), 『조선시대 화론 연구』(학고재, 1998), 『화인열전』 상·하(역사비평사, 2001)

영남대 교수 재직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펴내 (상당히) 유명해진 미술사학자 겸 미술평론가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으며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으로 등단했다. 2003년 국립박물관장 선임문제와 관련하여 이른바 ‘박물관 파동’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으나 스스로 공모신청을 철회하였다. 2004년 9월에 제3대 문화재청장으로 임명되어 활동 중이다.

* 국립박물관장 선임문제와 관련 당시 반대기사자료
국립박물관장에 '유홍준씨 내정설' 파다하지만 이에 따른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 오마이뉴스 2003. 3. 8 (토) 15:42

국립박물관장... 유홍준씨 내정설에 찬반양론 분분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지건길)의 신임 관장 선임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일고 있다. 정무직 차관급으로 그 지위가 격상된 국립중앙박물관장(이하 박물관장)으로 현재 거론되고 있는 사람은 이건무(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 강우방(이화여대 초빙교수) 김홍남(이화여대 교수) 유홍준(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씨 등 4명.

오는 3월19일로 임기가 만료되는 현 지건길 박물관장의 후임에 '유홍준(54)씨 내정설'이 최근 공공연하게 떠돌면서 박물관 안팎에서는 이에 대한 찬반양론의 논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대한매일은 '유물보다 역사정신이다' 국립중앙박물관도 변신이라는 제목의 3월4일자 기사를 통해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을 기존의 고고학·미술사 박물관에서 역사박물관으로 성격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자문하면서 중앙박물관의 변화 필요성을 강조하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내정됐다는 설이 있다"는 말로 유홍준씨의 박물관장 내정설을 기정사실화 했다.

반면, 한국고고학회(회장 이백규)는 3월 4일 "새 국립박물관장의 올바른 선임을 기대하며"라는 성명서 형태의 글을 홈페이지(www.kras.or.kr)에 띄워 "박물관장의 직급을 차관급으로 격상시킨 것은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사회 각 분야에서 묵은 때를 벗기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환영할만한 일이다"면서 "박물관장은 대한민국 정부나 문화계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자리가 아니기에 사회적 지명도나 정치력보다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선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펴 사실상 국립중앙박물관 근무경력이 없는 유홍준씨의 선임에 반대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런 민감한 시점에 유홍준씨와 같은 미술사학자이자, 대학후배이며,<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과 <단원 김홍도>의 저자이기도 한 오주석(47)씨가 유홍준씨의 박물관장 선임을 반대하는 공식적인 의견을 내놓아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오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박물관 운영의 관건은 정치가 아닌 경험의 문제...
-당신과 유홍준씨는 같은 미술사학자이고, 학교 후배인데 유 교수의 선임을 반대하는 이유는? : "박물관 업무는 박물관을 잘 아는 사람들이 꾸려가야 한다. 박물관은 이념에 의해 끌려가는 조직이 아니다. 박물관을 오래 경험한 사람만이 업무처리의 특성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물을 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물관 운영의 관건은 정치가 아닌 경험의 문제다. 박물관장은 한 나라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그 나라의 중요한 이미지다. 유홍준 교수의 저작 <완당평전>은 박철상(고서연구가)씨에 의해 200군데가 넘는 오류를 지적당한 바 있다. 결례가 되는 말일수도 있지만 유 교수는 세간의 유명세에 걸 맞는 실력을 갖춘 분이 아니다. 박철상씨의 지적처럼 전서와 예서(한자의 글씨체)도 구별하지 못한다. 나 역시 유홍준씨의 저작인 <화인열전>과 <완당평전>의 서평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틀린 곳이 너무 많아서 서평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박물관장은 한 나라 문화의 얼굴이다. 유홍준씨의 경우는 연륜도 부족하지만, 내 생각엔 학자로서의 품격도 없어 보인다. 얼마 전 그가 신문에 쓴 백고불여일블(백 번의 고고가 한 번의 블루스만 못하다)이란 말과 <세마도(洗馬圖)>를 두고 '애마부인도'라고 표현한 것, 추사의 글씨를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 운운한 말은 예술인이 아닌 일반인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 아닌가. 국립박물관은 박물관의 논리에 의해 관리돼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논리로 관장을 정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업무상으로도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국립박물관장은 어떤 사람이 맡아야 하는가? : "무엇보다 학문적 업적을 남긴 큰 학자라야 한다. 인격적으로도 한 나라의 사표가 될만한 품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함도 물론이다. 과거에는 문광부 장관이 박물관장을 흔든 적이 많았다. 이로 인해 박물관장은 물론 박물관의 위상이 동시에 낮아졌다. 새 박물관장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부당한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의 문화적 소신을 펼쳐서 박물관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돼야 한다."

-대한매일 3월4일자 기사를 봤는가? : "문맥으로 볼 때 유력하게 박물관장으로 거론되는 사람 중에 한 분이 관여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역사박물관으로 바꾸는 것은 새로이 역사박물관을 세우면 모를까, 현재 있는 박물관의 고고미술사적 성격을 역사박물관으로 바꿔야한다는 생각은 상식 이하다. 현재 있는 것은 그대로 잘 보존하고, 역사박물관 설립의 필요성이 있다면 새로 검토하면 된다. 외국의 경우도 그런 것으로 안다."

-한국 고고학회가 낸 의견서를 봤는지? : "정확하게 이름을 적시하진 않았지만 내정설이 유력하게 거론되는 유홍준 교수에 대한 반대입장 이라는 내용에는 동감한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적어도 박물관장은 박물관 경력이 30년은 되어야 원활한 업무처리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고고학회가 내놓은 의견은 외부인이 관장에 선임된다는 것에 우려를 표한 것이 아니겠는가."

-덧붙일 말은 : "유씨에 대한 내 비판은 향후 국립중앙박물관의 위상정립과 원활한 업무수행을 위하는 것이지 유씨 개인에 대한 감정이 아니다. 남을 욕하고 싶지 않아 2번의 서평제의를 거부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유홍준씨 저서에 대한 서평과 국립박물관장 선임 문제와는 그 사안이 다르다."

박물관 학예직 A씨와 B씨 "정치적 배려나 낙하산식 인사 지양해야"
3월7일 오후 기자와 만난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관 A씨와 학예사 B씨(학예관과 학예사는 미술관의 큐레이터 격)의 의견도 오주석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박물관 실무경험이 있는 사람이 (박물관장으로) 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하며, "2005년까지 진행될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 건도 있기 때문에 현안파악과 박물관 실정을 잘 아는 사람이 더 절실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들은 "박물관장은 단순한 정무 차관직이 아니다. 문화계의 존경받는 어른이 수행해야할 직무다"라고 말하며, "유홍준씨의 경우는 학문적 소양과 학자적 양심, 덕망, 박물관 용산 이전을 위한 실무능력 등 어느 것도 검증된 바가 없다"는 말로 유씨의 박물관장 선임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두 사람은 "정치적 배려나 낙하산식 인사가 아닌 문화계의 덕망 있는 어른이 박물관장이 돼야한다"는 것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직(학예관+학예사) 60여명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것을 전하면서도 "우리의 의견이 대놓고 특정인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로 자신들의 견해가 부처이기주의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와 관련, 유홍준씨의 의견을 듣기 위해 7일 밤과 8일 아침 명지대 연구실로 수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유홍준씨는 어떤 사람인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나왔으며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예술철학 전공)을 거쳤다. <공간>과 <계간 미술>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및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문화재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조선시대 화론연구>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 <화인열전 상,하> 등이 있다.

오주석씨는 어떤 사람인가? 195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동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로 생활한 바 있고, 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및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저서로는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단원 김홍도> 공저로 <우리 문화의 황금기-진경시대> <단원절세보> 등이 있다.

* 국립박물관장 선임문제와 관련 반대기사에 대한 시론

[시론] 유홍준 죽이기 [조선일보]2003-03-17 40판 31면
“문화관광부 장관보다는 중앙박물관장을 하고 싶다”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가 공모신청을 냈다. 나는 ‘신선한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공모신청을 한 다른 세 사람도 괜찮아 보여 ‘고민해볼 만한 인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에 접속해 떠돌아다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유 교수에 대한 인신공격이 한창이었다. 한 인터넷매체는 그가 관장이 되기에는 연륜도 부족하고 학자로서 품격도 없는 ‘완전 부적격자’라는 반대 주장을 크게 실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유홍준은 우리 문화계의 ‘얼굴마담’에 불과하고 상부의 지시에 맹종하는 ‘정치가’형으로 박물관 관장은 꿈도 꾸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익명인 얼굴 없는 반대의견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기사의 신뢰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넷언론은 이를 개의치 않는가? 네 사람 가운데 왜 유독 ‘유홍준’만이 도마에 올랐을까?

물론 기사뿐 아니다. 수없는 익명의 네티즌 의견은 유홍준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도배돼 있었다.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인간적인 예의는 완전 실종되었다. 익명의 힘을 빌려 유홍준을 마녀사냥하며 자신의 분풀이를 마음껏 하고 있었다. 유홍준의 조촐한 집 ‘수졸당(守拙堂)’은 진시황의 ‘아방궁’으로 변해 있었고,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그가 쓴 모든 저서와 논문은 ‘걸레’가 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다. 대중적인 강연에서 그가 인용한 유머는 ‘만담꾼의 저질농담’으로 치부되었다.

결국 유홍준 교수는 후보신청을 거둬들임으로써 ‘자폭선언’을 해버렸다. 상상할 수도 없는 정신적 테러를 당하고 일종의 ‘타의적 자살’을 해버린 셈이다. 그는 끝까지 싸워 ‘진실’을 밝혀야 했을까? 자폭은 그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 아니냐고 그를 떠밀어야 했을까?

쉽사리 휴대전화로 연결이 된 유 교수는 말했다. “참, 제가 이렇게 덕이 부족한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헛헛해 했다. 도저히 더불어 싸울 상대가 되지 못하고, ‘유홍준 죽이기’라는 일정한 목적을 지니고 행동하는 그들을 하나하나 상대할 수도 없다고 했다. 싸우기엔 한 인간으로서 그가 입은 상처가 너무도 따갑고 사정없이 쓰라린 듯했다.

나는 한 잡지사 인터뷰로 유 교수를 사흘 동안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이 있다. 그 결과 나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싸구려 단란주점 맨 꼭대기 옥탑방에서 찌는 더위와 매서운 추위를 10여년 벗 삼으며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수많은 책과 논문을 내놓은 지독한 사람이라는 것,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강의라면 강의료를 묻지 않고 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는 학자로서 열심히 공부했고 치열하게 써댔고, 보통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뛰고 있었다.

중앙박물관장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 모르나 유홍준은 후보의 자격조차 없다는 말인가?
이 정도의 사람이 그렇게 무참하게 매도되고 ‘자폭선언’을 하는 사회라면 무슨 희망이 있을까?

지금 우리는 심각한 ‘인재난’을 겪고 있다. 사람밖에 자랑할 게 없는 한국사회에서 ‘떨거지 인재’ ‘3류 인재’들만을 고르는 ‘잘못된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 잘나고 뛰어난 사람들이 나서기를 꺼려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고통과 역경을 이겨낸 강인하고 뛰어난 인간들이 이끌어가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어떤 수모도 감내하는 ‘시시한 인간, 나보다 못한 인간’―그러나 ‘무서운 인간’들이 이끌어가고 있다. 이보다 더 확실한 한국사회 자멸의 시나리오는 없을 것이다. / 전여옥 방송인

* 민청학련사건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사건. 중앙정보부는 구속 및 기소시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했다'는 혐의를 두었다.

1973년 8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에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유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 9월 개학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시위사태는 점차 반독재·반체제 움직임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파급 ·확대되었으며, 일부 야당인사·지식인과 종교인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공화당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본격적인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였으며, 위반자를 심판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학생들의 운동은 교내에서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계속되었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일부 지식인과 교회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비밀 개헌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4월 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하였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후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하였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180명을 구속·기소하였다. 기소장에 의하면, 이들은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였다.

구속된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그러나 1975년 2월 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하여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b. 독후감

‘쥐어 줘도 모른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

멀리 찾을 것 없다. 내가 그렇다. 나는 한자 까막눈이다. 도대체 한자와는 친하지가 않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어 버리는 장난 같은 인생사'라는 유행가 가사말이 있다. '님'과 '남'은 어감차이로 인해 가사로 선택된 단어이겠지만 사실, 점 하나 떼고 붙여서 달라지기로 따진다면 한자도 만만치 않다. 이런 나의 수준에서 시작하자니 시,서,화를 구분하고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무리다. 나에게는 한자 자체가 아주 훌륭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애들 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나를 보게 되면 위창어른은 뭐라고 하실까. 과연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서 큰일"이라는 걱정스런 말을 꺼내실까, 아니면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책 속 사진 표정 그대로 그냥 바라보실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임에도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추사 김정희. 교과서 인물인 그에 대해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간 느낌이다. 백범일지에서 보았던 인간 김구의 모습처럼, 완당평전에서도 인간 김정희를 본다. 완당이 좀 더 옛시대를 살다간 사람으로 백범보다 물리적인 거리감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희의 삶 속에도 역시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 사람냄새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가는 중년까지의 삶에서보다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유배시절에서 보다 진득하게 묻어나온다. 그래서인지 나는 1권보다는 2권이 쉽다. 유배생활중에도 본가에 이것저것을 보내달라 청하는 모습이나, 꼭 필요한 추신처럼 편지글 한켠을 늘상 장식하고 있는 병마에 대한 이런저런 하소연과, 초의에게 보내는 절절한 글을 비롯하여 그의 감정이 살아 숨쉬듯 전해지는 솔직한 편지글들에서, 그리고 아름다운 문체도 멋진 운율도 없이 오직 도와달라는 애원밖에 없는 제문에서 한없이 나약한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한 인간을 보기 때문이다.

완당 김정희.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 그리고 죽어서도 후세에 위풍당당하게 이름을 남기고 있는 사람. 그의 이러한 영향력이 천부적인 천재성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다양한 예화에서 나타나는 그의 언행 때문이다. 한나라 때 예서를 집대성한 ‘한예자원(漢隸字源)’에 수록된 309개의 비문 글씨를 임모하고 또 임모하고 해서 팔뚝 아래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던 점이나(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腕下三百九碑),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 점, 석파에게 난을 가르치면서 꾸준히 정진할 것을 언급한 점(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등에서는 천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듯도 하다. 요즘 표현으로는 '까칠하기가 그지 없었던' 그의 취향이 질리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그의 노력 때문이다.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p.584' 에서 처럼, 그의 까다로움 역시 그 나름의 노력이요, 최선을 위한 열정이었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혼자만의 재미에 빠져 읽어 내려간 부분부분들을 제외하자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매력은 참으로 '글쎄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는 예술적인 심미안의 발견과는 거리가 먼 독서를 해야 했다. 내 보기엔 다 그 작품이 그 작품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예술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훌륭해 보이는 작품에는 '작품으로서의 멋이 없다'고 하고 별로 훌륭해보이지 않는 작품에는 감탄해 마지 않는 평가가 붙어있으니 머쓱해지기를 몇 번 하다가 흥미를 잃어버렸다. 글자에서 흐르는 금석기는 무엇이고 또 골기는 무엇인가. 글을 읽는데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공감이 생기지 않으니 감동할 리가 만무다. 저자가 하도 반복적으로 말해놓아서 이론적으로는 완당의 글씨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더듬더듬 흉내내서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2권을 덮고 난 지금에서도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는 글씨체가 실제로 바뀌었는지, 어떻게 깊어졌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문외한이다.



c. 내가 저자라면

그리하여 '완당평전'1,2,3 세 권을 세상에 내놓게 되니 말할 수 없는 감회가 일어난다. 10년 전만 해도 엄두도 못 낸 이작업을 마침내 마무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두렵기만 하다.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고 내가 미처 섭렵하지 못한 숨은 자료는 또 얼마나 될까. 이미 펴낸 '화인열전'만 해도 책을 펴내고 나서 무려 100군데를 고쳤는데 '완당평전'은 또 얼마나 고쳐야 할까? 더욱이 세상에는 완당에 대해 일가견을 갖고 있는 숨은 실력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들이 마치 무림계의 고수들처럼 혜성같이 등장하여 나의 허를 찌르면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 모든 비판과 가르침과 꾸짖음을 남김없이 수용하여 판을 바꿀 때마다 고쳐나가기로 마음먹고 있다. 그로 인하여 '완당평전'이 누더기가 되고 나 자신은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완당의 삶과 예술과 학문이 좀더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그런 계기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나는 이제 수능시험을 마친 학생처럼 독자들의 엄정한 심판을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완당평전'이 보다 완벽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면, 이 책의 출간을 보고 싶어하시다 연전에 돌아가신 아버님과 완당 김정희 선생의 영전에 바칠 것이다.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p.783~784-

저자 관련 자료를 찾다보니 우연치 않게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가 나온 주 흐름이 책 자체가 아니라 유홍준이라는 사람의 자질을 논하는 자리라는 점이 미덥지 않지만 어쨌든 이 책은 많은 오류 범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그런 사실을 미리 가정한 것이었을까. 저자후기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오류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심정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책을 낸 그의 용기에 갈채를 보낸다.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그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하고 연구하여 엮어 낸 그의 노력과 의지에 대해 찬사를 금할 수 없다. 그의 노력으로 추사를 모르지 않지만 또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같은 문외한이 그나마 한 걸음 더 큰 산에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내기 전 좀 더 세심하게 준비할 수 없었을까 하는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완당에 대한 그의 남다른 열정이 좀 더 넓게 다각적으로 표현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전문서의 성격을 띤 교양서라는 점에서 같은 공부를 하고 있는 학자나 학계의 도움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역시 독자의 몫이면서도, 나같은 문외한에게 있어서 이런 류의 책이 갖는 저자의 영향력은 무시할만한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그릇된 정보가 미치는 파급 또한 작지 않다. 이 어찌 나에게만 한정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틀린 곳이 너무 많아서 서평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평을 받기 전에 좀 더 깊은 검토와 감수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 여담
시간에 쫓기며 책을 읽다보니 자연히 책의 페이지 수에 눈이 갔다. 완당평전 1권을 마치고 2권을 펼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펼쳐본 것은 첫장이 아닌, 뒷장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800페이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대담’보다 한 술 더 뜬다. 400쪽 남짓이던 1권은 그러고 보면 아주 양반이었던 것이다. 지루하게 1권을 읽었던 것을 생각하면 2권은 더욱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마음이 급해서 부랴부랴 2권을 읽어내려 갔다. 1시간쯤 지났을까? 잠시 페이지를 살피던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의 눈부신 집중력이 1시간동안 400페이지가 넘는 성과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책을 매우 늦게 읽는 내가 이럴 수도 있단 말인가. 뭔가 의심쩍어 책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페이지수는 책의 1권부터 연결되어 표기되어 있었다.-_-;; 책의 두께가 비슷한데 왜 미리 그 생각을 못했을까.

보통 책을 나누면 2권에서는 새로이 1페이지로 시작하는 책과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1,2권으로 나누어 완당을 소개하고 있지만 책의 페이지는 꾸준히 이어진다. 덕분에 2권에 몰아서 정리되어 있는 '찾아보기'가 훨씬 단정한 느낌이다. 게다가 글 읽는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주를 없애고 그 대신 자료해제편을 따로 펴냈다는 점도 저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 보기엔 이 저자도 일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아니면 완당평전을 쓸 때에 만큼이었는지 모르나) 상당히 철두철미한 성격인 듯 하다.



d. 책속에서

서장 저 높고 아득한 산 ...11
제1장 출생과 가문 (1∼24세:1786∼1809년) ...27
제2장 영광의 북경 (60일 24∼25세:1809∼1810년) ...57
제3장 학예의 연찬 (25∼34세:1810∼1819년) ...103
제4장 출세와 가화 (34∼50세:1819∼1835년) ...199
제5장 완당바람 (50∼55세:1835∼1840년) ...265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55∼59세;1840∼1844년) ...331
제7장 제주도 유배시절(하) (59∼63세:1844∼1848년) ...417
제8장 강상(江上)시절 (64∼66세:1849∼1851년) ...527
제9장 북청 유배시절 (66∼67세:1851∼1852년) ...607
제10장 과천시절 (67∼71세:1852∼1856년) ...649
종장 완당의 서거와 사후의 평가 ...767

p.11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p.16 정옥자 교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적 활동을 오늘날의 대학문화에 비교하여 문사철(文史哲)을 전공필수로 하고 시서화(詩書畵)를 교양필수로 삼았다고 했는데 추사는 이 모든 분야에서 올 에이를 받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었다. (정옥자, ‘조선 후기의 문풍과 진경시’, ‘진경시대’, 돌베개, 1998)

p.20 누군가가 러시아 문학을 말하면서 러시아 문학사는 톨스토이라는 거대한 봉우리를 정상으로 삼고 거기에 올라 산마루에 다다르면, 그 순간 저 멀리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거봉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고 했는데 추사 김정희는 정녕 그런 모습이다. 모르긴 몰라도 조선시대 사상과 학문의 세계에서 다산 정약용이라는 실학의 정상에 올라서면 저 멀리 추사 김정희라는 거대한 산이 또다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추사는 모든 면에서 오르기 힘든 높고 아득한 산이다.

p.24 ...... 완옹(阮翁,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基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을 따르고 이북해(李北海, 唐의 李邕)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에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박규수전집’,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

p.104 그뿐만 아니라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구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淺流)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다.

p.104 추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조선 서화계에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같은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고차원의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며 예단을 이끌었다. 이리하여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미술사조가 생겨났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완당바람’이라 불렀으며 이렇게 일어난 완당바람은 날로 그 세를 더하여 가히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p.139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漢) · 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p.140 성현의 도는 비유하자면 큰 저택과 같아서 주인은 항상 안방에 거처하는데 그 안방은 문간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훈고란 이 문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생 동안 문간 마당만 왔다갔다하고 안방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는 끝내 하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데서 반드시 훈고를 정밀히 탐구하는 것은 안방에 들어가는 데 그릇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훈고만 하면 일이 다 끝난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나라 유학자들이 안방에 대하여 그리 논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의 문간이 그릇되지 않았고 안방도 본디 그릇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143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의 벗을 보고도 알 수 있다는 옛말이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하는 데서 교우관계는 그의 인생관은 물론 그의 정서, 나아가서는 학문과 미술에 대한 성향까지 엿보게 한다. 완당 역시 그가 교류한 인사들을 보면 세상사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 단호하면서도 결단성 있는 행동, 잔정이 많은 섬세한 성격까지 두루 살필 수 있다. 혹자는 완당의 파란 많은 인생 역정을 염두에 두고 그가 교류한 인사들이 편벽하다고도 하고, 혹자는 그를 따른 호가들이 대부분 중인임을 생각하면서 사대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완당의 교우관계는 오히려 누구보다 폭넓고 긴밀하고 다양하였다. 그가 청나라 연경의 학예인들과 교류한 것은 예외로 치더라도 최소한 세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으니 하나는 정통 사대부 문인들이고, 둘째는 완당 일파라 불러도 좋을 학예의 문인(門人) 제자들이며 셋째는 스님들이다.

p.155 안내인이 권하는 말을 잘못 듣고 저 큰길을 버리고 이 첩경을 걷게 되었으니 천하의 모든 일이 이와 같은 것이다.

p.170 완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서출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 것, 추재 조수삼,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 등 역관 출신의 중인들과 깊이 교류한 것,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희원 이한철 등 중인 출신 화가와 도화서 화원들과 어울린 것, 당시로서는 천민이었던 스님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했던 것 등, 그의 삶과 행동에서 그런 신분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완당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신념이기도 했다. 그는 ‘인재설(人才設)’이라는 글을 지어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였다.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는 애당초 남북(南北)이나 귀천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누구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전집 권1, 인재설)

완당은 이 말을 중인 신분의 제자들에게 자주 하며 열심히 노력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인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세 가지 꼽고 있는데 이것은 꼭 오늘의 우리 현실에도 맞는 얘기였다.
첫째는 주석(注釋)이나 외우는 폐쇄적인 교육방식, 둘째는 과거시험이라는 입시교육, 셋째는 견문의 부족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아이 적에는 대개는 총명한데, 겨우 제 이름을 기록할 줄 알 만하면 아비와 스승이 전주(傳注)와 첩괄(帖括)로 그를 미혹시키어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전적인 글을 보지 못하고, 한번 혼탁한 먼지를 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리고 다행히 제생(諸生)이 되었더라도 머리가 둔하여 민첩하고 통달하지 못함으로써 아무런 보람도 없이 어렵사리 과거시험에 출몰하다가 오랜 뒤에는 기색조차 쇠락해져버리니, 어느 겨를에 제한된 테두리 밖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둘째이다. 사람이 비록 재주는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의 생장한 곳을 보아야 한다. 궁벽하고 적막한 곳에서 생장하여 산천, 인물, 거실, 유어 등에서 크고 드러나고 높고 웅장함과 그윽하고 특이하고 괴상하고 호협한 일들을 직접 목격해보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세련된 바가 없고 흉금이 풍만해지지 못하여 이목이 이미 협소함에 따라 수족 또한 반드시 굼뜨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셋째이다. 이상의 세 가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재능(才力)이 꺾여버려서 비통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이 왕왕 이와 같다.

p.171 완당은 이처럼 당시 사람들이 어격하게 따졌던 제도적 질서, 불교의 천시와 배척 같은 사회적 통념을 훌쩍 뛰어넘어 행동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완당의 강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당시 보수적인 양반들은 완당의 이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완당은 남이 꺼리는 바를 스스럼없이 했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잘 했다"고 비방하기도 했던 것이다.

p.179 완당은 <시경>이라는 글씨를 새긴 병풍바위 오른편에 <천축고선생댁>이라는 각자도 생겼다. 천축고선생댁이란 “천축나라(인도)의 옛 선생댁”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집’ 다시 말해서 ‘절집’이라는 말이다.

p.255 황초령비를 그 고장 사람들이 계곡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파묻었다는 얘기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로, 이를 간혹 시골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무지의 상징으로 말하곤 한다. 그러나 옛날 양반관료들은 못된 데가 있어서 유명한 금석문이 있는 동네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나무하러 가는 사람을 붙잡아 탁본해 오라니 힘없고 죄없는 백성이 어찌할 것인가.
외금강 삼일포에는 단서암이라고 해서 인라 화랑들이 이름을 새겨 놓고 주사를 먹여 붉은 색이 나는 글씨가 있었다. 그래서 금강산 유람온 선비들이 그 탁본을 갖고 싶어하여 걸핏하면 밭일 하는 백성을 붙잡아다 탁본을 시키니 이 역시 삼일포 동네사람들이 박살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함관령고개 사람들이 가마 메기 힘겨워했고 금강산 사람들이 나리 행차 괴로워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것은 나무꾼, 노사꾼의 무지의 소치가 아니었다.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원망케 만든 사회제도가 악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깨진 황초령비에는 봉건사회 신분제도의 모순이 역사적 상처러 그와 같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17세기의 낭선군, 18세기의 홍양호, 19세기의 김정희 같은 선비들이 있어 그 파묻힌 비편을 다시 찾아내어 이렇게 오늘날까지 전한 것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p.275 그러면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분명한 개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청나라 사람들은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고 했다.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입고출신! 사실 이것은 고증학의 기본정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같은 맥락이었다.

p.284 완당이 이와 같이 동시대 중국의 예술사조와 그 대표적 예술가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학문적 · 예술적 정보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는 도록이 있는 것도 전시회가 열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알 수 있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이 점을 혹자는 완당이 중국을 사모함이 커서 그랬다며 완당을 사대주의 · 모화주의(慕華主義)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사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국제적 시각의 확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사실 정보력은 그 자체가 힘이다. 완당의 정보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한 채널을 통해 얻은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완당이 그런 정통한 정보력으로 청나라 학예계를 파악하고 그들과 동시대적 지평에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펴나갔다는 것은 바람직한 국제성 · 세계성의 확보였다.
더욱이 완당이 그들을 열심히 좇아 모방하면서 그 현대적 흐름에 동참하는 한편,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성과를 동시에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모방느 그 자체로는 흉이지만 창조의 기본이기도 하다. 모방이 있은 다음에야 그 극복이 있는 것이다.

p.315 난초를 치는 법은 또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항과 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식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약 그리는 법식을 쓰려면 일필(一筆)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전집 권2, 상우에게)

p.316 난초그림의 뛰어난 화품(畵品)이란 형사(形似)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화법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다.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p.336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p.348 문화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충실할 때 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전시관을 생각했으면서 전시내용과 운영방법을 갖추지 못했음은 결국 겉껍질만 흉내내고 속알갱이가 없는 허망뿐이다.

p.379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18년의 유배생활이 낳은 결과였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도 22년 유배의 산물이었듯이, 완당은 제주도 유배생활 9년간 자신의 학문과 예술 모두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p.395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p.422 이 지도 한 폭만으로도 제국주으자들이 얼마나 무섭고 지독했는가를 알 수 있고, 그들의 제국주의 정책이 단순히 대포와 총이라는 무력만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p.422 중국이 안심이니 우리도 안심이다는 식이었다. 그것이 완당 인식의 한계였다.

p.431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富)티와 자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다. 이에 반하여 귀양 와서 쓴 화암사의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p.434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제하다.

p.438 완당은 이처럼 지,필,묵(紙筆墨)에 대하여 무척 까다로웠다. 그는 특히 붓의 종류와 성질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쓰고자 하는 글씨의 성격에 따라 붓을 골라 쓰는 섬세함이 있었다. 그래서 완당은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옳은 얘기가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라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양순이 <구성궁 예천명>이나 <화도사비> 같은 글을 쓸 때 정호(精豪)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전집 권8, 잡지)

p.439 서수필은 쥐털로 만든 붓으로 그 중에서도 쉬수염으로 만든 붓을 제일로 친다. 그 이유는 붓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쥐수염은 바로 그 조건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쥐수염은 길고 빳빳하지만 쥐가 노랄 때마다 움직이기 때문에 또한 사뭇 부드럽기도 하다. 특히 큰배 갑판 밑에서 사는 쥐는 항시 갑판 마루의 삐꺽 소리마다 수염이 쭈뼛쭈뼛 움직이기 때문에 부드러움과 강함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그런 배에서 잡은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이 일품 서수필이다.

p.441 완당은 조건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

p.443 완당은 자신이 쓸 글씨에 어울리는 좋은 시전지(詩箋紙), 색지(色紙), 냉금지(冷金紙)를 욕심 사나울 정도로 구했다.

p.443 완당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사람을 질리게 한다. 지 · 필 · 묵 · 벼루를 이렇게 따지고 고르다가 어떻게 완당이 붓 한 번 대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완당 자신은 글씨를 쓰는 데서 이 모든 것이 생활화 · 체질화되어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징그럽고, 어찌 생각하면 그랬기 때문에 남이 하지 못한 무언가를 이룩했고, 당대의 최고, 나아가 국제무대에서도 최고, 역사 속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 최고를 이룩한 몸동작 하나라도 무언가 달랐던 것이다.
완당이 이렇게 지 · 필 · 묵에 까다로웠던 데는 확고한 예술철학이 있었다. 그는 생동하는 글씨를 위한 아홉 가지 조건을 하나의 계율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첫째는 생필(生筆)이니, 토호(兎毫)가 둥글고 건강해야 하며, 반드시 쓰고 나면 거두어 넣어두고 쓸 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생지(生紙)이니, 새로 협사에서 꺼내야 펴지고 윤기가 나서 먹을 잘 받는다.
셋째는 생연(生硯)이니, 벼루의 먹을 다 쓰고 나면 씻어 말려 젖거나 붇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는 생수(生水)이니, 새로 맑은 샘물을 길어와야 한다.
다섯째는 생묵(生墨)이니, 쓸 때마다 갈아 써야 한다.
여섯째는 생수(生手)이니, 공부를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항상 근맥(筋脈)을 놀려 움직여야 한다.
일곱째는 생신(生神)이니, 마음이 화평하고 거슬림이 없어야 하며 신(神)은 편안하고 일은 한가해야 한다.
여덟째는 생목(生目)이니, 자고 쉬고 각 일어나서 눈은 밝고 몸은 고요해야 한다.
아홉째는 생경(生景)이니, 때는 화창하고 기운은 윤택하며 궤는 조촐하고 창은 밝아야 한다.(전집 권7, 잡저, 김석준에게 써서 보여주다)

p.445 그러나 이 밖에 또 초미필, 낭호필보다 더 나은 것들을 등수로 다 헤아릴 수도 없으니 중국 호남에서 생산되는 여러 품종의 붓을 두루 보아 그의 안목을 넓히게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네.(전집 권2, 막내아우 상희에게, 제7신)

p.454 이런 자세로 고전 중의 고전을 무수히 임모하면서 완당은 마침내 추사체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한나라 때 예서를 집대성한 ‘한예자원(漢隸字源)’에 수록된 309개의 비문 글씨를 임모하고 또 임모하고 해서 팔뚝 아래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 꾸준한 노력과 참을성을 완당은 이렇게 이렇게 말했다.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
腕下三百九碑

완당은 그런 정신과 그런 자세로 고전을 익혔다. 그래서 훗날 완당은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p.465 청조의 학문이 수입된 이후 박제가 · 신위 같은 사람이 일으키지 못한 서법의 혁신을 완당은 어떻게 대담한 시도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앞 사람들에 비하여 완당은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에서 배태된 것이나 곧 서학(書學)의 길을 터득해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 창의력이 합해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험준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그의 서체는 험난했던 그의 생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조정에 들어가서 높은 지위를 지키며 부귀와 안일 속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냈다면 글씨의 변화가 생겼다 할지라도 꼭 이런 형태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청명 선생 추사체론의 핵심내용이다.

p.466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완당이 제주 유배지에서만 그렇게 썼냐 하면 그렇지가 않았죠. 아시다시피 평소에도 좀 많이 썼습니까. 또 글씨 주문은 좀 많았습니까.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왕이건 친구건 제자건 관리건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로 문제 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거 아니겠어요.
- 동주 이용희

p.473 완당의 인생과 예술은 이렇게 농익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관조하면서 사물의 존재방식을 관찰함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것은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자기를 찾아내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분명 제주의 유배생활이 안겨준 완당의 변화였다. 아픔과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며 구도자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p.475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글씨 없는 작은 비석(높이45cm) 다섯 개가 한 자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 비석의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은 더욱 유배객들의 처지를 느끼게 해준다.

p.482 완당은 이렇게 제주의 자연에 익숙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귀양살이에 길들여져 그 예나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p.485 이 난초그림을 보면 완당의 난초르김도 제주도 유배시절 그것도 막바지에 이르면서 <난맹첩>과는 다른 경지를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야취(野趣)가 강하고 농담의 변화가 크며 부드러움보다는 굳셈이 더 강조되고 있다.

p.490 이 고장의 큰 병폐는 안일한 데만 주저앉고 태산이 정상을 향하여 다시금 한 걸음 더 내딛고자 아니하니 매양 탄식하여 마지않사외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적에 자못 구경(九經)의 빛을 보여주고 '문선(文選)'(중국 역대 명문선)의 이치를 설명해 주었는데 모두가 당황만 하고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마치 모기 부리가 철벽을 만난 것과 같았으며, 혹 와서 묻는 것은 '사요취선(史要聚選)'(史記 요약본) 정도였고 아니면 무슨 글제의 서두와 목을 어떻게 지어야 하느냐는 것뿐이었소. 대개 그들의 평소 견문이 옛 시골 구석 서당 선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니 그럴 수 밖에 더 있겠소.(전집 권4,장인식에게, 제13신)

그러나 완당은 집에 연락해서 이들에게 필요한 책까지 구입해주면서 성심으로 가르쳤다.

p.493 완당은 이렇게 제자들을 항시 챙겨주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p.496 신세지는데 이력이 붙으면서 이제 월례를 받으면서 유머까지 넣어 말했다.

p.513 완당의 이 제문은 아주 평범한 글로 완당의 그 긴밀하고 아름다운 문체의 맛이 전혀 없다. 예산 <화암사 상량문>을 지으면서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져라"라고 외치던 그런 운율도 멋도 없다. 오직 신령님이시여 도와달라는 애원 밖에 없다.

p.517 제주라는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되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볼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일세.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열심히 좇다 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는 법이라네. 제주도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으니 그게 작은 것이며, 어디 그게 연경이 가르쳐줄 것인가.

p.522 이런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분에게 내가 왜 그랬던가? 그때 왜 나는 창암은 창암대로, 원교는 원교대로 그들 나름의 한 생(生)이 있고, 그들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한 글씨를 썻을 것이며, 창암 같은 처지에서 밖으로의 견문이 막혀 있는 사정이었다면 창암 이상의 글씨를 썼겠는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는 왕희지를 어떻게 원교만이 평지돌출로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창암의 글씨에 배어 있는 향색(鄕色, 향토색)은 그 나름의 미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p.527 완당의 일생은 보통 다섯 단계로 나뉘어 이야기되고 있다.
1.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2.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관직에 나아가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4. 55세부터 63세부터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5.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晩年期)

p.573 이렇게 자기 멋대로 글씨를 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강상시절의 완당이었다. 청명 선생의 지적대로 완당의 이런 글씨에는 세상의 이치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허망 속에서 나오는 조롱 같은 것이 서려 있다. 인생을 순탄하게 걸어온 선비나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는 모범생은 절대로 쓸수 없는 글씨들이다.

p.578 미술 작품은 꼭 실물을 보아야 정확히 감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실물 크기가 어떠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p.579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다.

p.584 완당은 이처럼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가 모든 인간에게 최선을 다하라 한 충고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시권 뒤에 제하다(題兒輩時卷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시를 짓는 데서도 전력을 투구하라며 이렇게 말한다.

가장 주의할 것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 하려 해도 안 되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절대로 안 된다. 하품하던 사자는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전집 6권)

p.598 인간사에는 구설수라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이 확대되어 관재수로 이어지는 일이 종종 이쓴데 완다은 꼭 그런 형상으로 정쟁에 휘말리며 흙탕물 바가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p.601 예는 정에서 말미암아 나오고, 정은 예에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p.607 완당은 그때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으며 아슬아슬한 너와집을 보고 세상살이에 잘못 발을 디디면 저런 곳으로 떨어진다고 남의 말 하듯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처지로 돌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p.610 이제 완당에게는 기고만장하게 세상을 휘어잡던 기백 대신 처절하리만큼 처량한 나락의 세계에 떨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는 그런 허허로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p.612 완당은 서민적 삶의 간고함에 대해서는 거의 동정이나 이해가 없다. 아니, 철저한 귀족주의나 개인주의에 젖어 있었음을 부인할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이유로 완당의 인생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완당은 그 대신 한 인간의 피나는 노력과 위대한 창조력과 탁월한 개성이 낳을 수 있는 빼어난 예술작품으로 세상과 대중에게 봉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완당의 귀족주의는 속물 선민의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완당의 예술세계가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그것처럼 남들과 나누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오르기 힘든 높고 가파른 산과 같이 된 까닭이기도 하다.

p.668 난초그림의 뛰어난 화품이란 형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홥버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다.

p.679 얼마전 문상을 가서 밤샘을 하는데 바둑판이 한쪽에 있었다. 자정쯤 되어 빈소가 쓸쓸하고 조용해지니 바둑 둘 줄 아는 사람들이 서로 눈길을 거기게 두었지만 먼저 두자는 사람이 없었다. 상대방의 급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엇다. 그러다 못 참겠는지 갑이 을에게 물었다. "바둑 둘 줄 아십니까?" 그러자 을이 "잘은 못 둡니다."라고 대답했다. 을은 사실 1급이었다. 그럼에도 겸손을 실어 "잘은" 못 둡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을이 갑에게 "그쪽은 바둑을 얼마나 두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갑은 "잘 못 둡니다."라고 대답했다. 갑은 3급이었다. 진짜 3급 두는 사람은 "잘 못 둡니다."라고 말한다.
1급과 3급이 이렇게 선문답으로 바둑 급수를 말하고 있는 것을 곁에서 엿듣고 있던 한 사람이 그 말의 깊은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옳지 됐다 싶었던지 달려와 바둑판을 챙기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저는 9급입니다."

p.681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
첫째는 독서(공부), 둘째는 여자(섹스), 셋째는 술.

p.683 머리가 하얘지도록 머리속에 든 것이 없으니 이를 빙자하여 한번 만나기를 바랄 따름이오. 온갖 생각이 불 꺼진 재와 같은데 어느 겨를에 일에 미치리요마는 아직 공부해서 학덕을 쌓으려는 지극한 소원을 아주 끊어버릴 수는 없어서 이와 같이 중언부언하는 것이외다.(전집 권4, 이상적에게, 제2신)

p.699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역사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 (전집 권3. 권동인에게, 제33신)

p.710 이제 완당은 더 이상 개성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시비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 평범성 · 보편성과 관용의 그릇 속에 그 뜨거웠던 학문적 · 예술적 열정을 원숙하게 익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 10년이 그에게 선물한 더 없이 값진 가르침이었다.

p.711 그러나 완당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열정과 관용은 선택이 아니라 불 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모르고 취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는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이제 과천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p.712 완당은 과천시절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권돈인에게 자신감을 표하였으며, 그 경지를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고 는 불계공졸이라고했다. 이 말이야말로 ‘추사체’의 본령을 말해주는 한마디이다.
강상시절에 완당이 글씨에서 새롭게 발견한 경지는 怪의 가치였다. 즉 개성의 구현이었다. 그런데 과천으로 돌아온 지금 완당은 졸함을 말하고 있다. 기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교를 감추고 졸함을 존중하는 것이니. 이는 곧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즉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의미의 졸이다. 후세 사람들이 완당의 글씨는 꾸밈이 없다고 한 얘기는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p.726 보통 조선 시대의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복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를 꼽는다.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만 남는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나(유홍준)의 소견으로는 완당 김정희이다.

p.780 아! 선비가 예사람을 본받아 외로이 학문을 닦아서 이미 널리 배움으로 말미암아 깊은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묻혀보리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면 응당 한(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무식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참으로 알아주는 것이 기대될 수 없는 경우라면 도리어 영원히 묻혀서 그 깊은 아름다움을 잘 보전하여 무식한 자들의 입에 의해 수다스럽게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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