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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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미학, 권택영 , 경희대 출판국, 2004
교보문고에서 놀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칸트, 니체, 프로이트, 라캉과 지젝같은 철학자의 이론으로 우리 주변의 책과 영화를 분석하고 있었다. 두꺼운 이론서와 강의실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과 쇼핑몰의 일상에 살아있는 철학을 찾는 내가 읽어보아야 할 책이었다.
대체 철학이 무엇이랴. 난해한 개념에 갇혀 저희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지식놀음이 철학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안경이 되어주고, 판단의 근거가 되어주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요즈음 내 인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 철학이 필요하다. 단지 젊음의 무모한 용기로 살던 때가 지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변에 대한 의무와 순응만을 강요받는 ‘쯩 나이’를 거부하고, 의연한 단독자로 살아남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경희대 영문과 교수이자 라캉전문가인 권택영이며, 저자의 다른 저서로는 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 감각의 제국:라캉으로 영화읽기, 잉여쾌락의 시대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위 저서들의 내용이 조금씩 다루어진다. 저자의 연구내용을 총망라해서 소개하는 저서인가? 그러고보니 291쪽 안에 너무 많은 거물 철학자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단적이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게는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지나친 단순화에서 오는 오류는 없었을까? 읽다보니, 과연 위에 거론된 철학자들에 대해 얼추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특정한 개념이 일반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워, 어렵게 읽었다.
이 책에서는 쟁쟁한 철학자들의 ‘미학’에 대한 이론이 소개되었다. 플라톤은 유명한 “공화국Republic"에서 시인은 이성의 힘으로 억압해야 할 감흥을 부추기어 공화국의 건설에 방해가 되므로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은 바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반박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미학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다. 무엇보다 그는 몸을 알았다. 쾌락과 고통을 먹고 사는 괴물인 몸은, 스승이 원하듯이 그렇게 추방한다고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문명과 이성을 찬양한다는 의미에서 계몽주의에 속하는 칸트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의 파괴력을 영혼의 고양됨으로 바꿀 수 있는 이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칸트는 개인의 취향taste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보편적인 감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칸트가 놓친 이성의 이면 - 억압된 몸의 소망은 니체에 와서 디오니소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디오니소스는 상징질서에 저항하는 원초적 쾌락이다. 해체적 힘이다. 니체는 예술이 역설과 모순을 드러내기에 과학이나 진리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고 보았다. 특히 언어를 초월한 음악이 조금 더 디오니소스적 진실에 가깝다고 했다. 우리는 언어의 세계에 살기에 늘 춥다. 언어는 우리의 몸을 충분히 가리지 못한다. 몸은 디오니소스의 의지에 봉사하고 언어는 아폴로의 의지에 봉사한다. 따라서 니체와 라캉은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이 되기에는 동물이고 동물이 되기에는 사회적이다.”
저자 권택영은 몸의 미학인 프로이트와 라캉의 사상에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소설과 영화읽기를 택한다. 동서양의 많은 소설과 영화가 동원되었는데, 그 중 가장 섬찟한 것은 미국의 포스트모던 작가 돈 데릴로이다.
돈 데릴로는 기표가 떠도는 사회, 매개에 의하지 않고는 의사전달이 불가능해진 미디어사회의 징후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듯한 소비사회가 어떻게 개인의 자율성을 통제하는지 보여준다. 마치 다국적기업, 다문화주의를 연상시키듯 그들의 가정도 몇 번의 이혼에서 얻은 아이들 넷을 키우는 ‘다부모가정’이다. 그런데 그들을 공동으로 묶어주는 것은 정다운 대화가 아니라, TV와 쇼핑이다.
TV는 같은 이미지를 반복함으로써 우연을 진리라고 믿게 만든다. TV를 보는 한 우리는 한 가족이 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것은 하나의 원 안에서 춤을 추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아우라이고 인간의 내부에 잠재한 삶본능이다. TV는 히틀러를 닮았다. 데릴로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미디어사회가 부추긴 소외된 인간, 오스왈드의 죽음충동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자아를 얻는 길은 케네디를 죽이고 그만큼 중요한 인물로 보도되는 길이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거전에 나선 유명 정치인에게 테러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의를 알리고자 하는 소외된 인간의 행태가 점차 확대될 것같은 섬찟한 예감이 든다.
돈 데릴로의 “백색 소음”이나 “아메리카나”같은 소설을 보면 기호학과 해체론의 많은 이론가를 떠올리지만 누구보다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된다고 권택영은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집단 심리 - 개인은 혼자서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만 집단이 되면 익명성으로 억압된 무의식을 발산한다. 에로스는 개인이 추구하면 사랑이지만 집단이 추구하면 파시즘이 된다는 것, 이 점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분명 인간에게 있다.
“백색 소음”의 주인공 잭은 히틀러학 교수이며, 미디어의 이미지 만들기와 집단심리에 편승하여 성공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맡길 수 있는 대상이라면, 대중은 히틀러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 데릴로는 일사불란한 행진이 우리의 불안을 다스리는 면에서 히틀러, 쇼핑몰, TV가 같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외모지상주의- 성형수술의 대행진-와 3S산업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 자본력의 파워를 보라.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폭력적인 위태로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프로이트가 말한, 리비도의 두 축인 죽음충동과 삶충동이 피부로 느껴진다. 작가 돈 데릴로는 이 거대한 소비사회와 하이테크의 거대서사에 섣부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이라고 했다니, 철학자에 버금가는 소설가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그래도 니체의 용어들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하나의 수확이다. 라캉의 용어들이 낯설어서 건너뛰고 읽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절반의 뿌듯함이다. 한 번에 한 권의 책을 읽는 편이라, 다음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리뷰를 해야하는데, 참 막막했다.
미학의 계보 약간에 대한 지식이 생긴 정도. 어떤 지식이 필요할 때 누구를 찾아보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 약간.
하루를 살면서 수시로 꺼내보고 의지할 수 있는 철학을 찾는 것은 내 순진함인가. 그 철학을 못 찾은 빈 자리에 종교나 파시즘같은 집단심리가 자리잡는 것은 시간문제인가?
마침 다단계 회사 제이유에 대한 피해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기사로 보기에도 얼토당토않은 제이유의 감언이설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 피해를 본 사람들, 그들역시 집단심리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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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에서 놀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칸트, 니체, 프로이트, 라캉과 지젝같은 철학자의 이론으로 우리 주변의 책과 영화를 분석하고 있었다. 두꺼운 이론서와 강의실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과 쇼핑몰의 일상에 살아있는 철학을 찾는 내가 읽어보아야 할 책이었다.
대체 철학이 무엇이랴. 난해한 개념에 갇혀 저희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지식놀음이 철학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안경이 되어주고, 판단의 근거가 되어주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요즈음 내 인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 철학이 필요하다. 단지 젊음의 무모한 용기로 살던 때가 지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변에 대한 의무와 순응만을 강요받는 ‘쯩 나이’를 거부하고, 의연한 단독자로 살아남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경희대 영문과 교수이자 라캉전문가인 권택영이며, 저자의 다른 저서로는 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 감각의 제국:라캉으로 영화읽기, 잉여쾌락의 시대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위 저서들의 내용이 조금씩 다루어진다. 저자의 연구내용을 총망라해서 소개하는 저서인가? 그러고보니 291쪽 안에 너무 많은 거물 철학자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단적이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게는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지나친 단순화에서 오는 오류는 없었을까? 읽다보니, 과연 위에 거론된 철학자들에 대해 얼추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특정한 개념이 일반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워, 어렵게 읽었다.
이 책에서는 쟁쟁한 철학자들의 ‘미학’에 대한 이론이 소개되었다. 플라톤은 유명한 “공화국Republic"에서 시인은 이성의 힘으로 억압해야 할 감흥을 부추기어 공화국의 건설에 방해가 되므로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은 바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반박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미학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다. 무엇보다 그는 몸을 알았다. 쾌락과 고통을 먹고 사는 괴물인 몸은, 스승이 원하듯이 그렇게 추방한다고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문명과 이성을 찬양한다는 의미에서 계몽주의에 속하는 칸트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의 파괴력을 영혼의 고양됨으로 바꿀 수 있는 이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칸트는 개인의 취향taste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보편적인 감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칸트가 놓친 이성의 이면 - 억압된 몸의 소망은 니체에 와서 디오니소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디오니소스는 상징질서에 저항하는 원초적 쾌락이다. 해체적 힘이다. 니체는 예술이 역설과 모순을 드러내기에 과학이나 진리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고 보았다. 특히 언어를 초월한 음악이 조금 더 디오니소스적 진실에 가깝다고 했다. 우리는 언어의 세계에 살기에 늘 춥다. 언어는 우리의 몸을 충분히 가리지 못한다. 몸은 디오니소스의 의지에 봉사하고 언어는 아폴로의 의지에 봉사한다. 따라서 니체와 라캉은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이 되기에는 동물이고 동물이 되기에는 사회적이다.”
저자 권택영은 몸의 미학인 프로이트와 라캉의 사상에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소설과 영화읽기를 택한다. 동서양의 많은 소설과 영화가 동원되었는데, 그 중 가장 섬찟한 것은 미국의 포스트모던 작가 돈 데릴로이다.
돈 데릴로는 기표가 떠도는 사회, 매개에 의하지 않고는 의사전달이 불가능해진 미디어사회의 징후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듯한 소비사회가 어떻게 개인의 자율성을 통제하는지 보여준다. 마치 다국적기업, 다문화주의를 연상시키듯 그들의 가정도 몇 번의 이혼에서 얻은 아이들 넷을 키우는 ‘다부모가정’이다. 그런데 그들을 공동으로 묶어주는 것은 정다운 대화가 아니라, TV와 쇼핑이다.
TV는 같은 이미지를 반복함으로써 우연을 진리라고 믿게 만든다. TV를 보는 한 우리는 한 가족이 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것은 하나의 원 안에서 춤을 추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아우라이고 인간의 내부에 잠재한 삶본능이다. TV는 히틀러를 닮았다. 데릴로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미디어사회가 부추긴 소외된 인간, 오스왈드의 죽음충동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자아를 얻는 길은 케네디를 죽이고 그만큼 중요한 인물로 보도되는 길이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거전에 나선 유명 정치인에게 테러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의를 알리고자 하는 소외된 인간의 행태가 점차 확대될 것같은 섬찟한 예감이 든다.
돈 데릴로의 “백색 소음”이나 “아메리카나”같은 소설을 보면 기호학과 해체론의 많은 이론가를 떠올리지만 누구보다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된다고 권택영은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집단 심리 - 개인은 혼자서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만 집단이 되면 익명성으로 억압된 무의식을 발산한다. 에로스는 개인이 추구하면 사랑이지만 집단이 추구하면 파시즘이 된다는 것, 이 점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분명 인간에게 있다.
“백색 소음”의 주인공 잭은 히틀러학 교수이며, 미디어의 이미지 만들기와 집단심리에 편승하여 성공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맡길 수 있는 대상이라면, 대중은 히틀러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 데릴로는 일사불란한 행진이 우리의 불안을 다스리는 면에서 히틀러, 쇼핑몰, TV가 같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외모지상주의- 성형수술의 대행진-와 3S산업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 자본력의 파워를 보라.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폭력적인 위태로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프로이트가 말한, 리비도의 두 축인 죽음충동과 삶충동이 피부로 느껴진다. 작가 돈 데릴로는 이 거대한 소비사회와 하이테크의 거대서사에 섣부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이라고 했다니, 철학자에 버금가는 소설가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그래도 니체의 용어들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하나의 수확이다. 라캉의 용어들이 낯설어서 건너뛰고 읽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절반의 뿌듯함이다. 한 번에 한 권의 책을 읽는 편이라, 다음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리뷰를 해야하는데, 참 막막했다.
미학의 계보 약간에 대한 지식이 생긴 정도. 어떤 지식이 필요할 때 누구를 찾아보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 약간.
하루를 살면서 수시로 꺼내보고 의지할 수 있는 철학을 찾는 것은 내 순진함인가. 그 철학을 못 찾은 빈 자리에 종교나 파시즘같은 집단심리가 자리잡는 것은 시간문제인가?
마침 다단계 회사 제이유에 대한 피해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기사로 보기에도 얼토당토않은 제이유의 감언이설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 피해를 본 사람들, 그들역시 집단심리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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