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도명수
  • 조회 수 272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7월 5일 10시 38분 등록
[1. 저자와 니체에 대하여]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한 권으로 읽는 니체』『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등이 있다.

저자는 또한 사회운동가이다. 최근 그는 한미FTA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미FTA반대에 대해 “이는 일단 세계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저물기 시작하는 제국의 경제에 편승하기 위해 ‘막차를 타는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한미FTA를 “한쪽 끝이 이미 침몰하기 시작한 항공모함에 거대한 승선료를 내고 올라타는 것이다”라고 빗대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서울 종로구 원남동에 연구 공간을 마련하여 활동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이곳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옛 서당에서 쓰던 앉은뱅이책상에 둘러앉은 20명의 늙은‘학동’들이 니체의 철학을 논하는 것을 젊은 ‘훈장’이 열심히 듣고 있단다.

훈장은 저자가 맡고 있다. 저자는 ‘수유+너머’의 창립멤버로 2001년 바로 이 서적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등의 저서를 발표하며 니체에 관한 해석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단다.

이 곳의 학동들은 대학 1학년생부터 대학원 철학과 국문학과 석·박사 과정 학생, 교수, 출판사 편집장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매주 두꺼운 원전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며 6개월 과정의 마지막에는 논문 형식의 글을 제출해서 통과해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 까다로운 입학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단다. 우리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들도 대부분 사회인으로 깊은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되지는 않지만 동일한 과제를 같고 동고동락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유사해 보인다.

또한 그는 한겨레가 추진하고 있는 선진대안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한겨레〉선진대안포럼은 ‘참 선진사회로 가는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약속하는 미래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평범한 시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더 많이 누리는 세상이 참 선진사회라고 밝히면서 진보개혁세력은 그 곳으로 가는 구체적인 대안을 밝히는 일에 소홀하였기에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짚고 무엇이 갈 길인지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다고 한다. 여기에 저자는 국내 유수의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다분히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회운동가임이 분명해 보인다.

니체,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 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ä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ö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ö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ö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2. 책을 읽고 나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정말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우선 내가 철학에 대한 사유에서 무지한 존재이다. 사유는 단순한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깊은 생각이다. 무엇인가 무형적인 것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그러기에 시간을 요하고 강도를 요한다. 그런 일을 해본 적이 그리 많지 않다.

둘째는 철학자에 대한 식견의 결핍이다. 니체는 말만 들었던 철학자지 그의 저서나 사상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이 책을 읽고 놀라운 것은 니체의 삶이 그리 평탄치 못했고 오랜 삶을 이어오진 못했으면서도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필치가 아니라 남들이 읽기조차 어려운 내용으로 말이다.

셋째는 비교되는 철학자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헤겔, 맑스, 스피노자, 막스 베버 등 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자가 표현한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토록 한 권의 책이 수많은 생각의 연결고리로 이어온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니체라는 독특한 철학자의 사유여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를 저자 고병권은 자신의 철학적 식견으로 매우 정치하게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인 점에 공감한다. 그도 니체에 대해 상당한 노력과 투자를 통해 이해했던 것 같다.

저자는 니체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고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했다. 아마 이러한 표현은 니체의 수많은 저술을 평가하는 데서 얻은 힌트인 것 같다. 이것은 니체가 다른 수많은 사상가나 철학자의 위치에서 철학을 논하고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니체의 사상은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상반기는 비극과 냉소로 대변되는 시기이며 삶을 부정하는 도덕이나 철학을 이야기했고, 니힐리즘이 태동한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삶의 하반기에서 일대 전환을 시도한다. 저자는 이것을 ‘화약냄새가 사라진 전투’로 비유하는 데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주류를 이룬다.

니체 하면 우리가 떠오르는 것이 허무주의다. 허무주의는 현세의 이탈이요, 염세적 사고의 극치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거부한다.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무를 의지함은 향후 창조성과 생성의 기반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신의 가운데에 놓는다.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성의 대변적 신의 실체가 아닌가.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한 신은 다른 신으로 잉태함을 잊지 않는다. 그 신은 죽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신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니체가 보이는 독자들에 대한 비판적, 비극적 현실을 저자는 다른 가치를 부여하면 반전시킨다. 니체는 긍정에서 얻는 긍정을 강조하고 즐거움을 가지는 놀이를 이야기하며 웃음의 가치를 던지고 초인을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메말라 있는가?

여기서 답해야 할 것은 긍정으로의 가치전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니체의 철학은 다양성의 철학이며 차이의 철학이다. 이것을 저자는 막스 베버를 끌어들여 근대정치와 현실정치까지 비화한다. 그러면서 궁극적 아상블라주는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라고 매듭짓는다.

철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니체의 이 책을 읽으면서 한사람의 철학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운 영향의 대단함을 읽을 수 있다.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도 철학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란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라고 외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언제쯤 떠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3. 책 속에서]

책머리에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p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p3

니체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p5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메말라 있는가? p6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p7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p7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어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p8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아포리즘들은 모두 화살이다. 그것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p20
*아포리즘 :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다.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표현도 대표적 아포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p20


제1부 제1장 아모르 파타 : 삶을 사랑하는 철학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功過)]

철학이라는 영토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니체의 철학’을 만나는 것은 가능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니체의 철학은 철학의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철학, 혹은 철학 외부에 위치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p25

진정한 철학이라면 자신의 체계를 벗어나는 사물이나 사건을 존재하게 놔두지 않는다. p26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p29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p31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p31

[세 개의 죽음]-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써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p41

디오니소스의 죽음이 보여주는 긍정성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보여주는 염세성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p43

니체는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그리스 비극과 디오니소스의 죽음에 들어 있는 긍정성이 쇼펜하우어식의 염세주의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p43

[미래의 철학자]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자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p49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사상가여서는 안 된다. 항상 사상가를 뒤쫓는 사상가, 다른 사람에 관한 사상가, 그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다. p51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그러나 역사는 매번 습속이 지배하는 것을 깨뜨려왔다. p51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p52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p53

니체가 철학을 위대한 용법으로 사용할 때는 미래의 철학자와 관련해서일 뿐이다.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미래의 철학자들만이 철학적 노동자들의 성과물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고 말한다. p54

[사랑의 의미]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56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p59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계보학1]-비판

도덕은 사물과 행동에 대한 인간의 가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p60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p61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p64

[계보학2]-탐사

니체가 도덕을 연구하려는 사람에게 강조하는 용기와 박식함은 도덕학자들의 소심함과 어리석음에 선명하게 대비된다. p64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p65

계보학자에게는 “땅 밑이나 하늘 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p67

[도덕의 자연사(自然史)]

니체가 ‘도덕의 자연사’를 이야기할 때 그는 ‘자연의 도덕사’가 꿈꾸는 선한 자연을 인정하지 않는다. p70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의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p72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는 ‘좋음’의 판단은 ‘좋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고귀한 사람들은 비속한 자들과 달리 자신이 창조한 가치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가진다. p75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p77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이다. p84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p84

[도덕이라는 동물원]

어떤 야성도 잃어버리고 오로지 창살에 몸을 비비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도덕의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동물원이다. p86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p87

[선악을 넘어서]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p90

니체는 『에티카(윤리학)』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약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진리의 해석학]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P95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P96

[스핑크스의 눈]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P103

니체의 해석학은 해석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P105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P107

[가치의 발명]

니체의 투시주의는 독단론에 반대해서 독자들의 생각도 인정하고 있으므로 참여하려는 모든 사람들은 니체의 투시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P111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P112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P113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P115

[니체에 대한 해석학]-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P115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1]-근대국가와 전쟁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P129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 P131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 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p132

니체는 현대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p137

유럽의 민주주의는 허무주의의 변증법이 도달한 필연적 현상이다. p138

니체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였다. p138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p141

길들이기는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의 정비”를 말한다. 길러내기는 길들이기가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p142

이러한 길들임과 길러냄의 작업은 형이상학적 가치의 변증법적 운동과 함께 허무주의 운동의 지배사를 이룬 양 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p144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원자론의 경우

니체 역시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는 점에서는 원자론들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는 원자론자들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자론자들은 여전히 “세계를 산정할 수 있는 고정불변의 원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p155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p159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p159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p161

[힘의 질]-능동과 반동

힘 안에 있는 ‘내적 의지’는 힘의 질을 규정한다. 이 ‘내적 의지’의 본질은 ‘지배와 명령’에 있다. p164

힘들의 싸움은 항상 승패가 가려진다.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면 힘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긴 힘이 명령한다. 힘들의 양적 차이로부터 지배와 피지배가 생겨난다. p165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p166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p167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에 드러난 의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박탈하는 것이다. 능동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 의지이다. 우리는 힘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의 의지, 즉 권력의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167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p169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p173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든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p174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p176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p177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p179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익숙한 오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동일한 결합관계의 반복’을 주장했던 동일한 소절에서조차 니체가 강조했던 것은 ‘동일한 결합관계’가 아니라 ‘자주 반복되는 놀이’였다. p188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p189

영원회귀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학자들이 영원회귀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영원회귀를 ‘동일한 것의 돌아옴’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p190

영원회귀가 의지의 문제,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문제라는 점이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p191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 p191

[반복의 두 경우]-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p197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p200

[긍정을 부르는 긍정]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p204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p20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니체가 운명애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p208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만을 돌아오게 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선택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p208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p209

제7장 인간

['과(....and.....)]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꼬집는다. p211

인간이 하나의 보편적인 척도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척도가 자연을 잴 수 있는 올바른 척도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215

[진화와 변신]

니체는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진화’해 왔지만 곧이어 자신의 죽음인 초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p216

인간이 진화를 주장한다면 초인은 변신과 변용을 주장한다. 변신이나 변용은 진화가 아니다. p218

니체에게 초인과 동일한 종족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은 거인․강자․귀족․주인․어린아이다. p221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p221

그러나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동굴 벽에는 신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p223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p225

[보다 높은 인간들]

최후의 유혹이란 구원을 요청하는 ‘보다 높은 인간들’의 출현이다. p226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p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p231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p233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그의 춤은 생성과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에 대한 긍정이다. p233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며 영원회귀하는 신이다.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변신하는 장에서 긍정의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초인의 삼위일체를 보게 된다. p234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p234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가면의 철학]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p238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p238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첫 번째 저서인 『비극의 탄생』에서 그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삶을 부정하는 도덕이나 철학이다. p240

비견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생의 즐거움과 명랑성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정신이 숨쉬고 있으며, 공포와 연민을 초월한 생성이라는 테마가 은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p242

『반시대적 고찰』에는 네 개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이 책은 꿈꾸기 위해 쓴 게 아니며, 자신이 칼싸움을 좋아한다는 사실, 위험스러울 만큼 칼을 빨리 뽑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p24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자유 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로 출간된 저서로 거대한 사자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사자는 어디로 갈 줄 몰라하는 고독한 동물이다. p244

[화약냄새가 사라진 전투]

니체는 『서광』,『즐거운 지식』에서 중요한 변신을 경험한다. 니체는 두 저서에 대해 “긍정의 책이며, 심오하면서도 밝고 우아하다”고 평한다. 신의 죽음이 고지되는 것도 『즐거운 지식』을 통해서다. p246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p247

[모든 가치의 전환]

니체의 놀라운 긍정의 정신은 질병 속에서도 활동적인 자극을 발견한다. p247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p248

『선악을 넘어서』의 부제는 “미래 철학을 위한 서곡”이다. 미래의 철학자와 정치가는 하나의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p248

[다시 떠나는 여행자]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p251

확실히 유목민의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p252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253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p253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모호함과 신비함을 통해 힘을 발휘했던 보편적 종교의 주술적 힘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제는 구체적인 계산을 통해서 측정 가능한 힘들만이 적합한 형태로 인정되었다. 이를 베버는 이를 ‘합리화’라 불렀다. p259

제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 해도 합리성을 갖지 못한다면 공공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합리성이라고 불리는 이 탈주술화된 주술은 근대인의 모든 생활 질서 속에서 나타난다. p259

[근대인의 탄생]

근대 서구 사회의 발전-이것은 자본주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데-에 대해서 베버가 갖는 관심은 물질이나 기술문명이 아니라 근대적 인간형의 탄생과 발전이었다. p260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다. p263

[관료제 기계]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꿈꾸던 철저한 자기 관리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시간표였던 것이다. p266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 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 불렀다. p266

소명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서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p267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p270

적어도 신체를 부품화하는 훈육 작업은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신체를 길들이는 작업으로 신체가 이전의 습관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도록 강제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신체를 길러내는 작업으로 신체가 능동적으로 이 과정을 의욕하고 여기에 참여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p272

프로테스탄트들이 감식과 채식, 냉수욕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신체를 다루었다는 것도 사실은 신체로 상징되는 충동과 욕망에 대한 통제를 의미했다. p275

[베버의 정치학]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mf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었다. p276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 거리라는 점을 주장했다. 내적 거리두기를 통해 관료제나 합리적 훈육이 초래한 기계적 과정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p277

베버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냉정한 거리두기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책임 있는 정치지도자들을 원했다. p278

[베버 전략의 딜레마]

베버는 근대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윤리를 갖춘 정치인,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지 않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출현이 낳은 것은 수동적인 대중들뿐이었다. p280

정치인의 카리스마적 성격과 대중들의 자율성 사이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p282

대중들이 카리스마에 의존하면 대중들의 자율성이 박탈되고, 카리스마가 대중들에게 의존하면 카리스마적 성격이 박탈된다. 카리스마적 정치인이 관료제 문제를 돌파할 가능성보다는 관료제가 카리스마적 정치인과 대중들의 자율성을 모두 파괴해 버릴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p282

신체의 욕망과 능력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합리적 훈육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수반되지 않는 한 재정신화의 전략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p285

베버가 바람직한 정치인의 덕목이라고 내세운 ‘거리두기’능력은 누구보다도 대중들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 기초해야 한다. p285

합리성이란 프로테스탄트로 대표되는 근대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가치들을 위해 제 안에 있는 욕망과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p287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문제제기]

1968이후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파들의 생각을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p289

어떤 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의 대응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p290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자들의 ‘회피의 방법’은 ‘위험스런 결벽성’이며, ‘삶의 기본 원리를 방어할 능력을 소진한 창백한 상대주의’로 보였다. p292

이 글은 차이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이 현재적 상황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안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p294

[근대 국가의 두 얼굴]-리바이어던과 인륜적 실체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국가는 개개인이 정치적 부담을 양도함으로써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국가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p297

인륜적 국가는 원자적 개인들의 전쟁상태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오는 계약과 그 계약의 보증자로서의 국가라는 홉스적 생각에 반대한다. 즉 개인들이 자유롭게 판단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합의에 도달해갈 것이라는 판단이야말로 국가를 설명함에 있어 매우 부적합한 것이다. p300

가족은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인륜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국가에 대한 제1의 윤리적 기초이다. p302

[자유주의와 차이의 문제]-아나키에 대한 공포

“서로 갈등하고 심지어 불가공약적인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에 의해 파편화되어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어떻게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자유주의는 명백히 아나키 상태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다. p304

차이를 회피하고 배제한 정치적 영역은 공허하고 주체들은 허약하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자유주의의 허약한 주체들에 대해서 그토록 비판적인 것은 이 체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아무런 요소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p308

[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강한 국가를 향한 유기적 결합

서구의 자유주의는 가치들의 투쟁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주체들의 무능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p309

목적을 잃은 자유주의적 자아는 “그 주장의 여러 지점들에서 급진적으로 해체된 주체로 용해되거나 해체되거나 급진적으로 위치 지워진 것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다. p310

공동체주의자들은 분명히 부분적이고 지역적인 공동체들을 활성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만이 사회적 응집력을 확보하는 길로 받아들인다. p314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아상블라주 : 폐품이나 일용품을 비롯한 다양한 사물을 끌어모아 조각하거나 삼차원적 입체작품을 만들어내는 방법. <모아 쌓음, 긁어모으다>라는 뜻이다.

차이가 배제된 중첩의 영역으로서 공적 영역을 바라보는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차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시각과도 전혀 다르게 공공 영역은 차이를 생산함으로써 유지되고, 생산된 차이가 만들어 낸 다양성에서 그 힘을 얻는다. p317

공동 세계의 조건에서 실재성을 보증하는 것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본성’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성이 파괴되고 동일성이 드러날 때 이러한 공동체는 파괴되고 만다. p317

차이의 아상블라주에 대해 전망하는 것은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생태학과 미학은 그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p319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징표다. p319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인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어떤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p319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p320


[4. 내가 저자라면]

저자 고병권은 철학자 니체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부터 근대의 벤자민 프랭클린까지 수많은 사상가들을 섭렵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인지 문장에서 오는 중후함과 은유적 표현으로 용어를 이해하기 무척 어려웠다. 어떤 부분에서는 철학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며 굳이 이러한 용어를 원용해야 하는지 탓하고 싶었다.

이 책은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수유+너머의 모임 회원들이나 이해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모름지기 저자의 제1원칙은 독자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니체를 모른다면 어느 정도 니체 저서를 읽고 이 책을 읽으라고 외쳐서는 안 된다. 처음 니체를 접하는 사람들이라는 기초 하에 책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저자의 책무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흔적이 적어 보인다.

마치 니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 분의 철학의 깊이가 심오해 내가 이 정도는 풀어준 것이니 한 번 잘 읽고 좀더 이해하거라는 몸짓인 것 같아 나에게는 무척 버거웠다.

책의 구성 측면에서도 전체가 니체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었으면 좋았지 않았나는 생각이다. 1부가 끝나 나타난 2부의 막스 베버는 왠지 니체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베버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사회학자로서 관료제의 병폐를 날카롭게 파헤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과 니체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가 나의 의문이다.

아마 니체가 이야기한 권력의지라든지 허무주의와 베버의 합리성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독자들은 계속해서 물을 것 같다.

그러면서 니체가 전편에서 이야기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2부에서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로 중복되어 인용된다. 이러한 것이 니체와 베버가 공통분모가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 시대와 베버시대가 영원회귀가 말하듯 동일한 내용이 아닌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철학이 생각을 사랑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지만 평범한 사람이 판단하고 사유하는 데는 많은 시일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이 책이 더욱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쉽고 용이한 철학적 용어의 선택이 필요치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IP *.57.36.3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