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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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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5일 13시 57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저자 소개
i) 고병권(高秉權)
서울대 화학과 졸업. 동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석ㆍ박사.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공동대표로 활동중임. 회원들은 그를 '추장'이라 부르며, 고 대표는 이 같은 별명에 대해 "권력관계에 대한 유머이자 희화화"라고 설명
도정일 교수와 최재천 교수의 ‘대담’ 진행과 책 구성을 도움.

* 저서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화폐, 마법의 사중주(박사학위 논문 개정)」,「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고미숙 등 4인 공저)」 등
* 주요 논문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석사)」, 「서유럽에서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성립에 관한 연구(박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투시주의와 차이의 정치」 등
* 번역서
「한 권으로 읽는 니체」,「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등

※ '연구공간 수유+너머'
1999년 교수의 꿈을 접은 한 '박사 실업자'(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아이디어로 출발한 조그만 공부 모임이 불과 8년 만에 인문학의 활로를 개척할 대안으로 떠오름. 8년전 5~6명 회원으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정회원만 60명. 이 밖에 3~4개월 단위로 개설되는 각종 강좌와 세미나에 평균 100여명의 비정규 회원이 참여 중임. 최근에는 중국 베이징(北京), 일본 도쿄(東京), 미국 뉴욕주 코넬大 부근에 지부가 생김.

이들은 출판계에서 기획자 필자 번역자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 이렇게 탄생한 책이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노마디즘’ ‘현대사상총서’ 등 50권이 넘음.

이들 속에 관류하는 담론은 현재까지는 ‘MN(마르크스+니체)주의’와 동아시아 근대성 연구로 요약됨. 서울대 사회학과 선후배인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와 고병권 대표는 마르크스레닌(ML)주의 대신에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니체의 철학비판을 접목한 MN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적 삶을 꿈꾸고 있음.

연구는 크게 '한국 근대성', '동아시아 근대성', '서양 탈근대 철학', '문학 비평', '고전 다시쓰기' 등 5가지 주제로 진행되고 있음.

* 고병권 대표 인터뷰 기사 중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개념의 뿌리를 고전 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캐내는 계보학적 연구와 자신의 전공을 갖고 다른 전공 분야에 뛰어드는 ‘트랜스 연구(transdisciplinary)’를 통해 제도권 학문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적 담론을 구축하는 일”
“수유+너머의 철학은 코뮌주의다. 공동체로 번역할 수 있지만, 코뮤니즘(공산주의)과는 다르다. 코뮤니즘이 국가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라면, 코뮌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며 문제를 풀어간다."

ii)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니체 사상의 발전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1869-1876)는 소위 '미학적(美學的) 페시미즘'의 단계이다. 이 시기의 젊은 니체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후기 낭만주의자의 대표격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였다. 니체는 자기 시대의 주지적(主知的) 문명에 저항감을 느껴, 희랍의 미적(美的) 예술적 정신을 옹호하면서 그것을 독일 문화와 결합시켜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을 창조하고자 하는 낭만적 열정에 차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 그의 처녀작『음악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1872)과 『반시대적 고찰』(1873-1876)이다.

제2기(1876-1882)에서는 니체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바그너에게서, 현세의 삶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적 구원의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고서 바그너적 낭만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며, 제1기에 자신이 이상화했던 모든 것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며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노골적인 저항을 시도한다. 그는 예술의 낭만적 환상들을 단죄하면서, 예술에 대한 열광 대신에 냉철한 실증주의적 과학 정신을, 그리고 천재 대신에 자유 정신을 내세우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와 권위와 이상을 파괴하고 자유 정신으로써 새로운 가치들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세울 것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나온 그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제1부 1878, 제2부 1879)은 그 부제를 '자유 정신을 위한 책'으로 달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책 자체를 합리주의자 볼테르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나온 또 다른 저술로는, 어떤 새로운 정신의 새벽을 예고하는 『여명』(1881)과 '신은 죽었다'고 처음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는『즐거운 지식』(1881-1882)이 있다.

제3기는 1882년부터 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의 6,7년간이다. 제1기에서는 예술적 미학적 낭만적 관점에서 삶을 보면서 삶의 모든 실체들을 직접적으로 긍정했고, 제2기에서는 삶의 모든 기존 가치와 권위와 이상을 철저히 부정했지만, 그러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 제3기에 이르러 다시 삶을 용감하게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예술이나 학문에 의존하는 외재적 긍정이 아니라, 이 지상, 이 현세의 삶에 굳게 뿌리를 둔 내재적 긍정이 아니라, 이 지상, 이 현세의 삶에 굳게 뿌리를 둔 내재적 긍정이며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며 운명애이다. 이러한 제3기의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것이 그가 주장했던 영겁 회귀 사상, 힘에의 의지, 초인 등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시기의 그의 저술들로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을 넘어서』,『도덕의 계보학』,『우상(偶像)의 황혼』,『반(反) 그리스도』,『니체 대 바그너』, 『바그너의 경우』, 『이 사람을 보라』가 있고, 그 밖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단편들로 남겨져 있다가 그의 사후에 누이 엘리자베드에 의해 정리 출판된 『힘에의 의지』가 있다.
- 동아大 이영수 교수 홈페이지(http://web.donga.ac.kr/ysllee) 참고


2.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고
책이 너무 어려웠다. 오직 어려운 텍스트들을 붙들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사유를 단련시킬 때에만 그 내용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정우, 탐독)이라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니체의 어느 책을 읽으면 좋을까 싶어서 인터넷 서점 사이트를 뒤져 보기도 하고, 신문 독서면에 소개된 니체의 책에 대한 글들을 읽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어려웠다. 이건 나쁜 버릇인데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읽지 않고 자꾸 다른 책을 뒤적이게 된다. 그래도 소득이라면 집에 있는 철학책 중에서 니체 부분을 찾아 읽어본 것이다.

니체만큼 극단적인 평가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사람도 드물다. 니체 지지자들은 그의 사상이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적 사고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여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한다. 반면 니체 비판가들은 반동적이고 파쇼적인 사상의 원천이요 집약이라는 극단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 니체는 힘과 권력 의지란 개념을 핵심 개념으로 도입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비판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 청소부)

철학자의 대다수는 늘 ‘멍청이’였다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역설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품위 있는 인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라고 그는 1888년 가을에 멋쩍어하면서 선언했다. “나는 자신이 언젠가 신성한 사람으로 선언될까 몹시 두렵다.” 그리고 그는 그날을 세 번째 밀레니엄이 동틀 무렵으로 못박았다. “2000년경이면 사람들은 (나의 작품들을) 읽고 많은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후세 사람들이 분명히 자기 책을 즐겨 읽으리라고 확신했다. (알랭 드 보통, 삶의 철학 산책)

이제 다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로 돌아와서…… 알 듯 모를 듯한 내용이었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니체는 민주주의와 현대인들의 안이함을 비판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 보다 기존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안주하고자 한다고 지적한다. 덧붙여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변화를 싫어하고, 자신의 위치에 집착하는 현대인들과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 같다.

니체는 또한 도덕에 대해 아주 새롭게 정의한다.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 꿀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라고……

니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을 지적한다. 인간은 자연과 대등한 존재가 아님에도 오만한 욕망 때문에 자연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기독교사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동양적인 느낌을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국가와 폭력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생각나고,‘유목적 사고’가 등장하기도 하고……
이 책은 부족한 나를 깨우치는, 꼭꼭 씹어서 다시금 읽어야 할 책이다.


3. 내 안에 들어온 글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4)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5)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해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7)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7)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8)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 (9)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26)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28)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1)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33)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37)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41)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1)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화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59)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63)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78)

양에게 독수리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똑같이 독수리에게 양처럼 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 양은 독수리보다도 하나의 힘을 더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80)

형벌은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준다. 감옥에 들어온 자가 깨닫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하는 조심성이다. (8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3)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108)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1)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생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의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데 있다. 결정된 형식은 쉼 없이 깨지고 밀려나며 미결정적인 형식의 의미를 갖는다. …… 그의 주제 이탈은 동시에 그 이야기의 연속이고 전개이다.” (114)

시장을 능가할 효과적인 경제 체제나 대의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정치 체제를 꿈꾸는 일이 불가능하게 될 때, 그래서 운동이나 사상의 목표가 좀더 공정한 시장, 좀더 충실한 대의제로 전락하게 될 때, 급진적 운동과 사상은 퇴조한다. ……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2)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3)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초의 권리를 제공한다.” ……
군사적 신을 지혜와 지식의 신으로 은폐하려고 했던 플라톤과 달리 근대 정치 사상가인 홉스(Hobbes)는 국가를 전쟁 해결사 노릇을 하는 괴물로 그렸다. (128)

더구나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133)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38)

니체가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분명하게 말하였듯이, 하나의 제도와 법은 ‘폭력성과 잔인성’을 가지며 주체들은 그 아래서 거기에 맞게 ‘길들여지고’ ‘길러진다’는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니체의 비판은 근대 정치 체제가 주체의 신체(body)를 어떻게 훈육(discipline)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함께 하고 있다. (139)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2)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 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52)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주의’를 “생성 속의 법칙과 필연성 속의 유희”라고 정리한다. (156)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159)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161)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에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6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 꿀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6)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고 큰 자기 가신(Selbst)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 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178~179)

삶과 죽음은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그것은 피로를 조장하는 의지, 무(無)룰 의지하게 하는 의지와 대결한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 권력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 (193)

의지는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다. “의지는 되돌아가 의욕할 수 없다. ……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의지의 통한이다. ‘그러했던 것’, 그것이 의지가 굴릴 수 없는 돌이라는 것이다.” 과거를 대하고 나면 “의지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형벌이다.” 과거는 이미 결정된 시간이고, 하나의 영원한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의 법칙이 영원한 정의하면 구제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나 있겠는가?”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미래를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계보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미래란 지나가 버린 순간들 속에도 들어 있다. …… “사유는 스스로의 역사를 생각하지만(과거), 그것은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현재), 마침내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미래)이다.” (197)

지구는 자신의 나이에 비하면 ‘방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인간이라는 동물의 탄생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준비해 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혹성이다. 그러나 지구는 반문한다. 내가 인간을 위해 준비된 혹성이라고? 하하! 인간이 지구의 대표라고? 그런 건 “숲 속의 개미가 자신이야말로 숲의 존재 목적이라고 단단히 믿는 것”과 같다. 혹시 인간은 “세계의 희극 배우”로 데뷔할 생각은 없는가?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und)’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15)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동굴 벽에는 신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신은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방식이다. 신은 인간 이전에 존재해서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시에 탄생한 것, 혹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인간보다도 늦게 창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이 가진 두 측면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223)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새로운 삶의 생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유의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224)

이름은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고착화시킨다. …… 사실 이름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가장 오해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236)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상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여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39)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47)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아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프리드리히 니체” (250~251)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nomad thought)’이다. ……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252)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53)



※ Tip :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니체 : 잘 지내고 잘 못 지내고를 초월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쇼펜하우어 : 잘 지내려는 의지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카뮈 : 부조리한 질문이군요.
비발디 : 계절에 따라 다르지요.
노벨 : 터져 버릴 것 같아요.
아인슈타인 : 상대적으로 잘 지냅니다.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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