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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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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9일 23시 25분 등록
1.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에 탄생하여 1900년 8월25일에 사망했다.
니체는 이 세상에서 56년을 산 셈이지만 실제로는 더 짧은 생애로 간주된다. 그는 1888년 12월 27일부터는 정신병이 발병되어 1889년 1월8일부터는 완전한 자기 정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신병자로 살았다. 그러기에 실질적 생애는 44년이 되는 셈이다. 이는 실존주의의 거두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유사한 점을 말해준다. 키에르케고르가 42세로 세상을 떠났고 둘다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은 점이 그러하다.


2.

니체는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아버지도 목사였다. 그의 할머니도 목사의 딸이었고, 어머니도 또한 목사의 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反 그리스도의 제1인자가 된 것이다. 자신의 말대로 자기자신은 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에게 프리드리히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출생하는 날과 관련된다. 출생시의 날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탄신일이어서 전국에 축하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아침이었다한다. 그래서 그 통치자의 이름을 땄던 것이다. 니체가 탄생하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31세, 어머니는 19세의 젊은 나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2살 차이였다.


3.

니체는 반 그리스도적 무신론적 입장에서 초인철학을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삶의 본질은 힘에의 의지, 즉 권력에의 의지이다. 그는 일체의 과거의 전환을 시도하여 ‘신은 죽었다’고 단언하고 과거의 기독교적 윤리사상을 노예도덕이라고 비난한다. 신에대한 충실보다도 현실에 대한 긍정적 운명애를 역설한다. 기독교적 신대신 초인을 대치하는 것이다. 이런 니체의 사상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 그가 쓴 주요한 작품은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4.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28세의 첫 저서로서 고전학 수업기를 완결짓는 걸작이다. 이 저서는 니체가 신봉한 학문의 진정한 활용을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저서는 ‘무사공평’ 혹은 순수학문’으로 통칭되는 당신의 학문적 연구 태도와는 사뭇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책은 초판 간행 이후 길고 지루한 경멸조의 논쟁이 계속되는 바람에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니체의 대학교수로서의 앞날을 절단내고 말았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책은 ‘인상적이기는 하나 건전하진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고전학 학문의 엉뚱한 성과물로 치부되고 있다. 이 책속에는 바그너의 음악적 정신이 싶이 자리잡고있다. 니체의 증정을 받은 바그너는
“아직껏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의 책을 읽은 일이 없었네.”
라며 격찬했다 한다. 그리스의 비극, 쇼펜하우어의 철학, 바그너의 음악정신에서 얻은 내용들이다. 이 책은 음악의 형이상학적 내용을 비극적인 세계관으로 이끌어 갔고, 비극을 초극함으로 얻을 수 있는 등정의 과제와 자세를 다룬 책이다.


5. 비시대적 고찰

이 책은 새로운 시대적 자세를 탐구해 본 내용의 연속작이다. 그 당시 문체와 관심의 대상으로 되어있던 인물들과 사상을 철저히 비판한다. 당시 문면에 대한 불만스러운 비판은 물론, 타락된 정신적 상황기에서 스스로 문명을 구출하려는 줄기찬 노력의 유산이다. 1부네서는 슈트라우스를 취급하여 학자적인 문명을 비판, 속된 정신의 상징 같은 인물로 공격을 가한다. 2부에서는 당시 많이 논급되고 있던 역사문제를 다루었다. 역사란 논리성, 개념의 축적, 과거의 지식을 위한 노력에 그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생명적 발전에 도움을 주며 미래 지향적인 힘의 가치관에서 문제시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면 이 시대적 상황속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대두된다. 그래서 3부에서는 슈트라우스에 대비시켜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등단시킨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높이 평가한다. 인생의 가치를 높이고 개인의 뜻을 발견해 주는 인물, 퇴락한 시대를 구출해 줄수 있는 사상가로 추대한다. 4부에서는 니체의 존경을 받은 바그너를 문제삼는다. 바그너를 모든 새로운 뜻을 채워주는 이상인으로 높이는가 하면 몰락된 생의 현실속에서 위대한 결단과 긍정의 용기를 주는 인물로 숭앙한다.

그러나 이 네가지 과제는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사실에 있어 네 가지를 계기로 삼은 자기자신의 정신적 발전, 자신의 희망과 뜻을 밝혀 준 데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이 책에서 일생을 통해 얻고 싶은 긍정의 의지, 이상적인 인물의 모습을 찾아보고 싶었고 그 비전을 쇼펭하우어와 바그너에 투영시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4부의 바그너가 끝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바그너를 떠나고 있었고 바그너의 세속화를 분개한다. 그러나 신제에 있어서는 현상은 그대로인데 시각의 전환이 온 것일지 모른다. 즉 그 자신의 발전이 바그너를 예전과 같이 볼 수는 없게 만든 것이다. 바그너를 노무 높이 보았기 때문에 지금은 바그너에 환멸을 느낀것인지 모른다. 이때 니체는 그 당시 친교를 맺었던 P. 레에의 심리적인 도덕학의 저서에 접하게 된다. 레에의 저서는 니체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주었다. 이때 니체는 비로소 자신에게 깊은 비판을 가해보았다. 그 결과 자신에게는 객관적 관찰과 과학정신의 빈곤이 자신의 약점일 뿐 아니라 그대로는 아무것도 안되리라는 생각을 가진다. 실로 그에게는 학문 특히 과학적인 사색과 체계적인 고찰이 요망되었던 것이다.


6.

대학을 퇴직한 니체는 두 가지 엇갈린 노력에 휘말려 들어야 했다. 하나는 짙어져 가는 병고와의 투쟁이며, 다른 하나는 계속적으로 떠오르는 좋은 생각을 묶어 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첫번째 문제인 니체의 병고와의 투쟁은 처참한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나 니체와 같은 사상가에 있어서는 그들의 생활이 사상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에는 그의 일기가 항상 문제가 되지만 니체의 경우에는 그의 병이 상당히 중요시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여동생도 그 점을 자조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병리학자이기도 한 야스퍼스는 깊은 관심을 그의 정신적 질환에 집중하고 있다.
니체의 병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니체는 말련에 뇌마비증으로 폐인이 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병이 언제 발단되었는지는 모른다. 또 그런 증세가 왜 10여년이나 계속되었는지 누구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위생병으로 지원해 나갔을 때, (24세 때였다!)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고 심한 이질로 고생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이 정신병의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점이 있을 것이다. 근시안이었던 그는 시력의 감퇴를 걱정해야했고, 가눌 수 없는 두통으로 정신적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심할 때는 발작과 같은 흥분으로 혼수상태에 떨어진 것 간다고 한다. 말련에 이르면서는 그 빈도와 고통이 더욱심해졌고, 마침내는 완전히 정신력을 파괴, 마비시키는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그 후 정신병으로 확인되었다.


7.

그러나 니체의 질병은 단순한 사고에만 원인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고에 의해서만 아니라 그의 정신생활에도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의 병이 정신적 활동과 저작 내용에 적지않은 내적 관련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긴장, 심한 정신적 충격, 번뇌와 희열을 그 극한 상태에 있어 한몸에 지녀야 하는 정도라면 그 극심한 활동대무에 겪어야 하는 육체적 부단과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는 필경 육체적 질환을 정신적인 데까지 끌고 갔으리라는 짐작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바로 그러한 생활과 종말을 겪은 것 처럼 말이다. 그는 대학을 떠난 뒤부터 정신병자가 되기까지는 병과 싸우기 위해 유럽 여러지역을 돌며 요양과 안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에 사색과 저작에 몰두했다. 짧은 기간동안에 막대한 양의 원고를 쓰기도 했으나, 병고 때문에 긴세월을 허송하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정신과 의사인 친구들의 진단을 받았으나 소생의 희망이 없어 어머니의 간호를 받는다. 그후 어머니가 작고한 후에는 바이마르에서 여동생의 간호를 받다가 세상을 떠난다. 11년간이나 폐인 생활을 한 것이다.


8.

여기서 그의 작품중에서 몇 개를 들기로 하자.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을 끝낸 니체는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진다. 그것은 새로운 사상의 발견과 학문에의 가능성에서 오는 비약적인 긍정의 암시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곧 집필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서광’과 ‘즐거운 지식’이 2년만에 탄생한다. 그 내용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음침하고 밝혀지지 못했던 면들을 극복하고 긍정과 희망에 찬 사상적 출발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니체의 제 2의 전성기라고 불리운다. 지금까지의 것에 대하여 새로운 대안제시를 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권위에 속하였던 것, 전통에 매어있던 것, 신념으로 주어져 있던 것을 버리고 생명과 힘의 철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감정에서 비판정신을 택했던 그가 의지를 찾게 되었고, 예술에서 과학을 사모했던 입장에서 철학에의 발돋움을 한 것이었다. 의지의 철학이 이미 자리를 잡고 나타난 것이었다. 이른바 힘에의 의지 또는 권력에의 의지가 등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이 문제를 깊이 도덕적인 면과 삶의 위치에서 취급한다.


9.

이때 니체에게 압박하는 신체적 질병이 가중되고 있었다. 따라서 ‘서광’과 ‘즐거운 지식’을 정오의 사상으로 바꾸며 즐거움의 열매를 걷어야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짜라투스트라..’에 나타났다. 이 작품은 더 심해지는 폐병을 무릎쓰고 씌여졌다. 특히 이 작품은 83년에서 85년에 걸친 그의 필생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다. 이 작품을 쓰기 직전인 82년, 37세의 니체는 레에를 포함한 벗들의 초청을 받아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러시아 장군의 딸을 만난다. 21세의 루우 살로메라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저서에 따르면 루우는 니체를 한 우연의 인물로 호기심과 관심을 모았을 뿌이었는데 니체의 입장에서는 그만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루우를 사랑하고 있는 친구인 레에를 통해 청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ㅏ 니체는 실연의 고통을 안고 심연으로 더 깊이 떨어져 간다. 그리고선 세 차례에 걸쳐 자살시도를 하게 된다.

불과 수개월 동안에 일어난 이 상처는 새로운 출현을 산출한다. 자고로 예술가든 철학자든 실연의 고통 이후에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짜라투스트라’의 출현은 마치 계시나 영감을 통해 얻어진 것 같이 쓰여졌다. 그 심정의 일단을 자서전 ‘ 이 사람을 보라’ 는 책에도 기술하였다. ‘짜라투스트라’는 영감의 체험에서 들려오는 것 같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83년 2월 3일부터 10일간에 걸쳐 1부를 끝냈을 정도라면, 그의 흥분과 열광적인 상태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짜라투스트라’ 가 진행되는 동안 니체는 줄곧 철학적인 시인으로 머물렀다. 그 착상과 수려한 문체, 그리고 화려한 문장은 당시에 놀랄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확실히 독일 뿐 아니라 세계 문단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짜라투스트라’ 에는 그의 전 사상과 철학이 상징적으로 유감없이 나타나있다. 니체의 생애 중 정오를 나타내는 완숙된 정신의 소산이다.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사상은 그대로 니체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두 초인, 운명, 사랑, 영구회귀의 우주관, 새로운 가치표준, 삶에의 의지 등이 큰 조화속에 뚜렷이 나타나있다.

10.

짜라투스투라의 입을 빌어 시도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개인의 생명을 우주적인 삶과 통일 시키고 있는가 하면, 자유로히 의욕하는 자아를 초인의 이상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위대한 개인을 부각시켜 창조적 천재, 긍정하는 영웅으로 나타내 준다. 모든 기성사상과 가치를 인정치 않으며 온갖 권위로부터 인간의 능력을 무한까지 해방시킨다. 강자의 삶은 끝까지 찬양하며 의지의 승리자가 지배자임을 서슴지 않고 강조한다. 그 당시의 사람드에게는 바위와 같이 튼튼했던 기독교의 전통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는다. 국가가 끝나는 곳에 인간이 시작된다고 하여 온갖 제도와 질서에도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다. 또 하나의 구원의 사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있는 자신의 사상을 짜라투스투라를 통하여 대언시켜 본 시도였을 것이다.


11.

니체는 ‘짜라투스투라’ 이후에 또 다른 시도를 계획하고자 했다. 니체는 인생의 가장 찬란한 고비를 ‘짜라투스투라’를 거쳐 넘긴 것이다. 이제 이러한 뜻을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는 학구적인 내용으로 다시 정리 할 수 있을까를 고심했을 것이다. 니체는 언제나 학문적이며 만인의 공인을 얻을 철학적 내용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그 뜻으로 우선 도덕과 가치의 문제를 취급한 것이 두 개의 알찬 저서로 나타났는데 바로 ‘선과 악의 피안’과 도덕의 계보학’ 이다. 이들은 86년과 87년 사이의 업적이다. 니체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논급되어오던 선과 악의 가치표준을 뒤엎고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가치의 근거와 표준을 수립하여 도덕의 역사적 고찰에서 기독교적인 약자의 윤리를 버리고 강한 내면적 도덕관의 확립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뜻 속에는 보다 체계적이며 대표적인 철학적 저서를 완성시켜 보려는 의욕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짜라투스투라’ 에 해당하는 철학체계가 아쉽게 느껴졌다. 이제 건강의 조건 등으로 미루어 속히 마무리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실에 ‘힘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전환에 대한 고찰’ 이라는 글에 나타나 있다. 힘 또는 권력으로 향하는 의지가 모든 것의 바탕이며 삶의 근원이며 사회적 삶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그 속에서 니체는 유럽 문명의 위기성, 재래의 최고가치에 관한 비판, 새로운 가치 수립의 원리, 참다운 인간단련의 철학 등을 취급하고 싶었다. 만일 그의 이러한 뜻이 성취되었다면 독자들은 ‘짜라투스트라’와 쌍벽을 이룰 또 하나의 ‘짜라투스트라’의 이론적 체계와 결실을 소유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뜻은 실패로 돌아가고만다. 애석하게도 그의 건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정신적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지금까지 겪어 온 학문과 사상의 성격이 그 일을 퍽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정신적 과제들을 짤막한 내용들로 묶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운명 즉 육체적ㅇ니 종말이 그 뜻을 재촉이나 한 것처럼 말이다. 이때 탄생된 것이 모두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반그리스도자’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등이었다. 모두가 88년과 89년을 계기로 쓰여진 것들이다. 이 작품들의 수로 본건데 마치 서둘러 쓰다가 더 정신병을 가중시켰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여러 권의 저서들을 통해 기독교 정신에 대한 철저한 비판, 자유정신에 의하여 철학의 공허성을 메꾸려던 태도, 전통적이며 시대적인데 대한 반도덕적인 평가, 디오니소스에 의한 영구회귀의 철학 등이 엿보여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뜻하지 않은 정신병이 그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갔던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렇게 바쁘게 창작을 하고 일생을 마쳐야 했던 숙명적인 계시의 힘이 지배했는지도 모른다. 실로 니체의 정신과 사상이 20세기에 접어 들면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사상이 그렇게 까지 큰 영향과 힘을 미칠 줄은 누구도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실존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현대를 니체-르네상스의 시대로 보려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2.

니체가 그렇게 빛나게 된데에는 한 사람을 꼽아야 한다. 바로 키에르케고르이다. 키에르케고르는 1855년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이 1900년을 고비로 대부분이 독일 사상계에 소개됨과 때를 같이해서 실존적인 모체의 발단이 일어났던 것이다. 야스퍼스가 그의 ‘이성과 실전’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이 두 사람은 살아있을 때 그리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나 오늘 우리들의 사상과 철학을 지배하는데는 절대적인 영향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19세기는 니체의 육체와 더불어 갔으나 20세기는 니체의 정신의 새 아침을 맞은 것 같은 인상이 들 정도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엽에 걸쳐 가장 큰 철학적 조류를 형성했던 ‘삶의 철학’ 이 그대로 니체의 영향으로 태어난 것이다. 니체의 영향을 계승한 딜타이, 짐멜을 비롯한 삶의 철학자들이 유럽 사상계를 지배했다. 그 뿐 아니라 수십명에 달하는 삶의 철학자들이 오늘의 시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가 니체의 ‘삶의 철학’의 창시자로 간주한다. 딜타이를 통해 주어진 그 유명한 해석학의 방법도 사실상 삶의 철학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3.

오늘날 니체의 철학적 관념은 알게 모르게 활용되고 있다. 가치관, 세계관의 개념이나 사상들도 실제로는 니체로부터 발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철학의 가장 큰 주류인 실존정신이 니체로부터 발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철학의 가장 큰 주류인 실존정신이 니체로부터 흘러나왔음을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니체의 보다 큰 업적은 유럽 정신사에 큰 변화와 혁명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실로 사상사의 하수를 방향의 전환을 이룩했다는 느낌을 줄 정도이다. 이는 그의 뜻과 업적이 지대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정신계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정도로 그의 영향을 컸고, 그가 남겨 준 역사의 전환기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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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7.10 17:48:18 *.145.125.146
니체에 대한 완벽 정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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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6.07.13 17:57:27 *.72.66.253
재엽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한 숨에 읽어 내려가는데 잘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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