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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1일 12시 42분 등록
a. 저자소개

*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회원.
주요 논문으로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니체-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 [들뢰즈의 니체-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노동거부의 정치학-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니체}(푸른숲, 2001),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 등이 있다.

*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주요저서로 《반시대적 고찰》(1873~187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1883∼1885) 등이 있다.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a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o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o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o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생의 철학 [生-哲學, philosophy of life]
실증과학(實證科學) 발달에 영향받은 실증주의와 과학비판철학의 성행에 대립하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철학의 총칭.
A.쇼펜하우어, F.W.니체, W.딜타이, G.지멜, H.베르그송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공통 특징은 인간 또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 나아가서는 우주 전체의 ‘생’은, 실증과학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는 파악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은폐되어 버린다고 생각한 점에 있다. ‘생’의 실체를 놓고, ‘생’의 철학의 시조 쇼펜하우어는 ‘생에의 맹목적 의지’,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 딜타이는 ‘정신적 ·역사적 생’, 지멜은 ‘초월의 내재’, 베르그송은 ‘생명의 비약’이라 파악하여 같은 생의 철학이라 해도 각각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그러나 합리적 ·과학적 사고의 그물을 피하는 것, 오히려 어떤 종류의 직관, 또는 직접적 체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비로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일관되고 집요한 주목이라는 점에서는 궤도를 같이하며, 거시적으로 볼 때 하나의 조류를 이룬다.
생의 철학이 지닌 의의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서구문명 전반에 확대되는 생의 모든 영역에서의 합리화 경향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근저에 있는 생의 비합리적 기반에 소행(遡行)하여 그 존재를 적시한 데 있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은 ‘비합리적’인 ‘직관’의 지시로 끝나기 쉽다는 점에, 다시 말해서 철학이 나쁜 의미에서 문학으로 해소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
생의 영역에서 고유한 논리를 찾으려고 한 딜타이의 역사적 ·해석학적 방법은 뒤에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 K.야스퍼스, M.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또 미국에서는 W.제임스나 프래그머티즘의 사상가에게서, 또 에스파냐에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 M.우나무노 등에서 생의 철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실존주의 [實存主義, existentialism]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주지주의 [主知主義, intellectualism]
지성 또는 이성이 의지나 감정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상의 입장.
인간의 마음은 지(知) ·정(情) ·의(意)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이 중에서 지적인 것, 즉 지성 ·이성 ·오성(悟性)이 지니는 기능을 감정이나 의지의 기능보다도 상위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감정을 상위에 두는 주정주의(主情主義:情緖主義)나 의지를 상위에 두는 주의주의(主意主義)와 대립된다. 특히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지성과 의지의 관계가 문제되었고 지성의 우위를 주장한 T.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주지주의자이다. 이 경향은 좀더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철학, 그 후의 B.스피노자나 G.W.F.헤겔의 범논리주의(汎論理主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인식이 감관(感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의해서 생긴다고 보는 합리론(合理論)도 넓은 뜻의 주지주의이며 J.F.헤르바르트처럼 모든 심적 현상(心的現象)을 지적인 표상(表象)으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것은 심리학에서의 주지주의로 생각할 수 있다.
논리학에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한 지성적 통찰과 숙고(熟考)에 입각해서 의지를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주지주의적 입장이며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나 의지의 작용을 중요시하는 비합리주의와 대립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주지주의는 주의주의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문학에서 주지주의는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서 주정주의와 대립되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주지주의 문학론은 T.E.흄의 신고전주의이다. 이는 E.파운드에 의해 이미지즘운동으로 발전되었으며, T.S.엘리엇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의 주지주의는 1930년대에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이양하(李敭河) ·최재서(崔載瑞)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김광균(金珖均) ·김현승(金顯承)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4부로 된 철학적 산문시. 1883~1891년에 발표하였다.
산 속에 숨어 살던 차라투스트라(고대 페르시아의 拜火敎祖 조로아스터의 독일 이름으로, 책 내용은 이 종교와 관계가 없다)가 ‘신은 죽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얻고 산을 내려와 여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이다.
이 가운데서 니체는 초인(超人)·권력에의 의지·영겁회귀(永劫回歸) 등 그의 중심적인 사상을 전개하고, 창조적인 삶의 긍정과 충실을 설명하였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고 아름다운 어구(語句), 시적 표현을 아로새겨서 이러한 사상을 구상화하여 후에 사상가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과 문학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영겁회귀 [永劫回歸, Ewige Wiederkunft]
독일의 철학자 F.W.니체가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내세운 사상. 영원회귀라고도 한다. 영원한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되며,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내용이다.
이 사상은 얼핏 보기에 ‘권력에의 의지’ 사상과 모순되는 결정론(決定論)처럼 생각되지만, 영겁회귀를 자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 똑같은 생(生)이 무한히 되풀이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의지가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운명애(運命愛:아모르 파티), “이것이 생(生)이었더냐,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친 생에 대한 강력한 긍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상은 신(神)이나 도덕, 그 밖의 일체의 피안적(彼岸的) 요소를 부정한 니체에게 있어 ‘아마도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의 공식’이었을 것이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니힐리즘 [nihilism]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그 어원으로,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
엄밀한 의미에서의 니힐리즘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니힐리즘의 의식은 19세기 후반 F.W.니체, M.슈티르너, F.M.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사상에 반영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급속히 퍼진 사상이다. 니힐리즘의 한 극(極)을 이루는 것은 절망적 니힐리즘으로서 일체의 주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생에는 어떠한 의의도 없다고 규정, 찰나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과 모든 것에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쪽이 있다. 다른 또 하나의 극은 무를 무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삶과 자유에의 길을 모색하는 그룹으로서, 실존주의는 원래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입장에서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그리스도교 도덕이나 불교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삶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가치의 전도(顚倒)를 지향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제창하였다. J.P.사르트르나 A.카뮈로 대표되는 프랑스 실존주의도 역시 이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타개하려는 입장에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M.하이데거의 사상이 바로 그 선구(先驅)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 그 자체에의 순종을 강조하는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은 니힐리즘의 초극(超克)을 위한 모색이며, 또한 K.야스퍼스는 S.A.키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세계(世界) 내의 무에서 반전(反轉), 세계를 초월한 초월자(超越者)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 ‘니체’로 시작한 검색이 끝이 나지를 않는다. 아니 끝을 낼 수가 없다. 새로운 단어를 검색해서 읽으면 이전 글이 조금 더 다가와야 하는데 그런 느낌은 전혀 없고, 낮선 단어를 찾아서 읽을 때마다 오히려 ‘니체’라는 사람은 저만치 내달려버리는 현실이라니 자괴지심이 가슴을 후빈다. 읽어도 읽어도 감이 잡히지 않는 글을 보다가 네이버백과사전이 마치 늪과 같다는 엉뚱한 생각에 또 잠시 빠졌다가, 혹여나 나중에 읽으면 조금 다가올까 싶어서 우선 옮겨놓는다.



b. 독후감
학교 소풍날, 짝꿍이 건네주었던 요거트의 기억이 생생하다. 소풍장소가 어디였는지, 그날 날씨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학교에서 무슨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모든 기억을 날려버린 상태에서도 그 친구가 신주단지 모시듯 조막만한 두 손으로 곱게 전해주던 그 살구맛 요거트통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건데 나를 준다고 했다. 어찌나 고마운지 몇 시간을 끼고 다니다가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기분 좋게 꺼내어 한 숟갈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전율했다. 요거트는 내가 생각했던 맛과 전혀 달랐다. 미지근하고 시큼털털한 것이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이나 괴상했다.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서 쓰레기통에 슬그머니 그 요거트를 버렸다. 그러나 이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뒷골이 저리도록 끔찍한 그 맛은 전혀 가시지 않았고 덕분에 비위가 상해서 김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요거트를 버렸다’는 사실도 친구에게 들통이 났다. 참으로 우울한 소풍이었다.
소풍은 끝났지만 나는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매일 한 개씩 요거트 먹기.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용돈을 쪼개어 요거트를 사먹었다. 여전히 끔찍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살구보다는 복숭아가 낫고 복숭아보다는 딸기가 훨씬 먹기 편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해서 먹는 것이 뜨드미지근한 것 보다 맛이 훨씬 좋았다. 그렇게 요거트란 놈을 섭렵하다보니 어느 정도 익숙함을 넘어 즐기게 되었다. 이 놈, 참 맛있다. 그리고 즐기고 나자 들척한 딸기보다는 복숭아가, 복숭아보다는 살짝 새콤한 살구가 훨씬 맛이 있었다. 그 친구가 아끼면서 나에게 건네주었던 그 살구맛 요거트는 정말로 제일 맛있는 것이 맞았다. 다만 나에게는 시기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니체의 책. 머리에서 쥐가 난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데 나는 늘 항상 1차원적인 생각만 했었는지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것이 이내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어차피 처음 접하는 철학책이니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먹다보면 입에 감기는 것처럼 읽다보면 익숙해지겠지. 또 그러다보면 이 글들이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눈이 아닌 마음에 들어오는 ‘때’가 오지 않겠는가. 니체가 그 자신을 시간과 동시대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독자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을 먹으니 이리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묵직한 돌덩이를 가슴에 얹고 보낸 일주일이 드디어 막을 내린다. 정말, 야호다.



c. 내가 저자라면
니체를 처음 만났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독자들을 찾은 사람이었다는데, 나처럼 눈치 없는 사람이 이런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참으로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니체를 보여주는 저자로 인해서 한결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로서의 나는 편했지만 저자는 어떠했을까. 저자도 니체를 보여주는데 한없이 편안했을까. 니체의 다양한 저서들에서 필요한 인용구를 종횡무진 인용하는 저자의 모습은 참으로 당차다. 그 문장들을 조합하여 해석의 폭을 넓히는 저자의 모습은 경이롭기가 그지없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고병권씨는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 이 아니라 스스로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독자였을 것 같다. 저자가 니체의 말을 자유자재로 꺼내 쓰면서 글을 전개했기 때문에서였을까. 저자소개 자료를 찾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고병권’이 아닌, ‘니체’를 검색하였다. 저자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나 분명 이런 나의 행동에 고병권씨의 니체에 대한 이해의 폭이 한 몫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에 비해 2부는 힘들었다. 나에게 2부는 “이해가능성을 부정하는 개념이다.......이 이론은 설명한다는 것은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으면서 인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절절히 느끼게끔 해주었다.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2부에서 한없이 떨어지는 집중력과 싸웠다.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줄 긋고 탐색하던 1부에서와는 달리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의 모습을 2부 내내 목격했다. 2부는 니체를 즐기기 위한 애피타이져로서였을까, 아니면 마무리를 짓는 디저트로서였을까? 2부가 왜 있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2부는 어렸을 적 처음 먹었던 그 살구맛 요거트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d. 책속에서

서장 천개의 눈. 천개의 길 ...17
1. 천 개의 눈 ...17
2. 천 개의 길 ...18
3. 천개의 기원 ...18
4. 천 개의 젖가슴 ...19
5. 천 개의 주사위 ...19
6. 천 개의 화살 ...20
7. 천 개의 가면 ...20
8. 천 개의 이야기 ...21

1부
제1장 아모르 파타 : 삶을 사랑하는 철학 ...25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功過) ...25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2
3. 세 개의 죽음-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 소크라테스의 경우 ...39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43
5. 미래의 철학자 ...49
6. ‘사랑’의 의미 ...56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60
: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 1 - 비판 ...60
2. 계보학 2 - 탐사 ...탐사
3. 도덕의 자연사(natural history) ...68
4. 강한 자와 선한 자 ...73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73
6. 도덕이라는 동물원 ...85
7. 선악을 넘어서 ...88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92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92
2. 진리의 해석학 ...95
3. 스핑크스의 눈 ...103
4. 가치의 발명 ...109
5. 니체에 대한 해석학-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115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119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121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121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1 - 근대 국가와 전쟁 ...125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2 -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132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139
5. 아곤의 정치 ...145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153
: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154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158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161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169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175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180
: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180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 익숙한 오해 ...186
3. 반복의 경우 -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한 차라투스트라 ...193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200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206

제7장 인간 ...210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1. ‘과( · · · und · · · )' ...210
2. 진화와 변신 ...216
3.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221
4. 보다 높은 인간들 ...226
5.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231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235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235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240
3. 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245
4. 모든 가치의 전환 ...247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250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257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57
2. 근대인의 탄생 ...260
3. 관료제 기계 ...264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269
5. 베버의 정치학 ...276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280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288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1. 문제제기 ...288
2. 근대 국가의 두 얼굴 - 리바이어던과 인륜적 실체 ...294
3. 자유주의자와 차이의 문제 - 아나키에 대한 공포 ...304
4. 공동체주의와 차이의 문제 - 강한 국가를 향한 유기적 결합 ...309
5. 차이의 아상블라주를 향한 전망 - 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316


p.3 [책머리에]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p.4~5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이 사람들의 두뇌를 훈련시키기 위해 국가의 시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대,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광기로 표한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 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미친 것’과 ‘아픈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그와 그의 사상을 정신병원으로 보냈지만, 그는 자신의 광기가 건강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두뇌훈련과 싸우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가 ‘미쳤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보편적 신념이나 시대정신의 구속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니체는 “모든 개인은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는 헤겔의 고상한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예외자’, ‘탈주자’, ‘위험인물’, 무엇보다 ‘미래의 아들’로 간주한다. 모든 철학자들이 ‘시대의 아들’로 규정된다면 그 어떤 사상도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라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p.6 창조와 생성, 그리고 변신이 그를 오해하게 만든다. 니체를 하나의 체계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은 항상 체계 바깥에서 웃고 있는 또 다른 니체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니체의 허물이나 가면들뿐이다. 문장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것은 모호함 때문도 아니고 진정성의 ‘결핍’때문도 아니다. 그것도 오로지 ‘과잉’과 ‘넘침’ 때문이다. 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천 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 아래, 그 천 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 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메말라 있는가? 진리의 식물은 토양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그 토양이 희소성과 결핍, 적대와 착취를 생산하고 있다면 철학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부정하며 서로를 절멸시키려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이나 본성과 대결하는 곳이라면 그 “세계는 빈곤화되고 그들은 더 이상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병든 토양에서 자라는 진리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상처 입히는 데 사용될 것이다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대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은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 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p.7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도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사피엔스(sapiens)'라는 말의 어원 그대로 ’맛을 보는 삶‘에게는 “진리가 얼마나 맛없는 음식인지”를 별도로 강의할 필요가 없다. 진리란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잇다. 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p.17 [1.천 개의 눈] 광학의지.....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p.18 [3.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p.18 [3. 천 개의 기원]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p.19 [4. 천 개의 젖가슴]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p.19 [천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p.20 [천 개의 화살] 아포리즘들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있다! 저기 니체라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

p.20 [천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 또 하나의 가면! 제 2의 가면을 주시오.” 허락하신다면 제3의 가면도........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p.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p.26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신이 도달하지 못할 세계가 없는 것처럼 철학은 자신이 사유하지 못할 영토를 남겨두지 않는다. 플라톤의 저 유명한 언급처럼 “철학은 전체를 본다.” 알튀세(Althusser)는 이 말을 “철학에는 외부가 없다”는 선언으로 이해한다. 진청한 철학이라면 자신의 체계를 벗어나는 사물이나 사건을 존재하게 놔두지 않는다. 헤겔 역시 자연으로 도피하는 루소(Rousseau)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곅 정신의 훈풍이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다."

p.27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항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철학자들도 하나의 질서,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삼는다.

p.28 니체가 보기에 잘못된 사상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다...........철학에 대한 진단. 니체는 철학자로 살기보다는 철학을 진단하는 의사로 살고 싶어한다.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p.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

p.32 이로써 극단적인 두 세계가 생겨난다. 초라함과 부족함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세계. “존재의 피안에 하나의 세계가 날조되었고 그것이 참된 세계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참된 세계는 마침내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이제 상상된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평가한다.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너 자신의 초라함을 알라!’

p.33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p.37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p.39 그리스 비극은 삶의 비극성을 극복하려는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을 드러낸다. 삶의 비극성은 삶에서 오지 않고 죽음에서 온다. 삶의 비극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죽음이 주는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관계한다. ‘죽음을 위한 준비’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죽음은 철학과 종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지도 모른다.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그러나 이 세 죽음이 대등하게 나열되는 것은 아니다. 선명한 대비는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다른 두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받는다.

p.40 개별적인 것들은 자신들의 한계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상위의 통일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해소한다. 이 운동을 이끄는 대립적 항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다.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p.41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거쳐 니체가 디오니소싀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변증법적 운동을 빌지 않아도 디오니소스는 개별성의 한계를 쉽게 넘어설 수 있었다......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 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p.42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찣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디오니소스적 죽음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죽임이 갖는 염세성을 그의 유언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독배를 들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 크리스토! 나는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를 주어야 하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으 ldnleo함을 조금이라도 지키려 했다면 침묵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삶에 대한 자신의 복수심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유언의 키워드는 아스클레피우스이다. 아스클레피우스는 의술의 신이다 .그에게 닭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생이라는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런 것이다. “오, 크리스토! 인생은 질병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바로 죽음을 의사로 받아들였으므로.

p.45 철학자들이 삶을 개념으로 포착할 때 그것 역시 일종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사유 공간은 극장이며 그들이 세운 체계는 무대이고 개념들은 장치들이다. 니체가 쳬계를 세우려는 자들의 연극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이론적 인간, 즉 철학자들이다.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 관객은 쇠사슬에 묶여 스크린만을 보도록 강제된다. 벽은 어둡고 사람들은 뒤에서 날아온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의 운동을 보게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p.47 극장이야말로 객관적 표상들을 되찾고 해석하는 데 편리한 모델인 것이다. 관객들은 연출자나 감독들이 적당히 숨겨놓은 구조를 발견하고는 마치 제 것이나 되는 양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더구나 극장 사람들의 감각을 평등화하고 보편화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 속에서 철학은 자신들의 체계와 구조를 확인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극장에 있어선 안된다. 극장에서 사람은 집단으로만 정직하다...........극장에 갈 때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집에 놓고 간다. 스스로의 발언권과 선택권을 방기한다. 자기의 취미도 버린다........... 가장 개별적인 양심도 최대다수로 평등화하는 마력에 굴복한다.”

p.48 심판은 삶을 완전히 암울한 것으로 만들었다.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으 leo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p.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p.52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그러한 구속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장소”, ‘탈주자’의 장소다.

p.53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들, 그것이 비록 완성된 것일지라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만적이 ‘미친놈’이었던 것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그의 시간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웠던 1789년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니체 역시 자신의 시간을 미래에 두었다. “미래라는 나무에 우리의 둥지를 튼다.” “나의 출현도 그 시기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 바늘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한다.

p.54 니체가 철학을 위대한 용법으로 사용할 대는 미래의 철학자와 관련해서일 뿐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자이며 입법자이다.”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고작이다.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들, 진정한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뿐 철학적 노동자들은 창조를 할 줄 모른다........“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한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p.55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p.57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폭군적 본능 대문이다. 그는 “아곤(agon)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에 칼을 들고 나타난 검술 선생”이었다.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식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아테네에서 그의 변증법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죄다 까발리는 점잖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이런 식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추하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p.58 '삶‘을 ’사랑‘ 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활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p.62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의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p.63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도으이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무렇게나 임의로 추출해서 제멋대로 정리한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결론들은 도덕의 굳건한 기초가 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 이라고 불렀다.
p.63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 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p.64 니체는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Genealogie)이라고 불렀다.

p.65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p.67 중요한 것은 심층은 표면이 됨으로써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p.74 삶이 강화되는가, 빈혈을 겪는가, 부정되는가 등에 따라 그 토양에서 자라는 ‘도덕적 식물’의 종류는 완전히 달라진다.

p.77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니체는 이상한 추장 한 명을 내세워 자신의 속내를 표현한다. “라투카족의 추장 코모로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p.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p.79 세계를 비난하는 약자들은 어떻게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는가? 니체는 그것이 독특한 해석학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본다. 강자들, 귀족들의 행복한 미소를 비난하고 자신들의 고통을 정당화해 줄 독특한 해석학.

p.80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83 자비야말로 법을 넘어서는 강자의 특권이다.

p.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p.84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 active)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 reactive)이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는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당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p.85 첫 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네 번째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p.87 노예적 가치평가의 변증법, 그 귀결점은 허무주의다.

p.88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virtus)”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적 덕(virtue)이란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p.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사실상 니체가 말하는 ‘좋음’과 ‘나쁨’의 의미만을 갖고 있다. 그의 선/악 개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ajrw l말라고 했을 대, 그 과일이 원래 악한 존재라고 말했던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아담의 무능력에서 기인한다. 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인을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선한) 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악한)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애처럼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p.91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p.93 이중의 해석

p.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

p.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한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p.108 논리학처럼 동등화가 선행된다면 그 조건에서 논리학이 요구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범주가 조건으로 돌변할 때 진리가 나온다. 니체는 대표적인 예로 ‘유클리드 공간’을 든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사실이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유클리드적 공간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리만 공간에서는 그러한 공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항변할 수 없다는 식의 주관적 강요’라고 할 수 있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p.109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p.110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대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 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p.111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p.112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 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p.114 니체의 해석학은 가ㅗ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의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데 있다. 결정된 형식은 쉼 없이 깨지고 밀려나며 미결정적인 형식의 의미를 갖는다........그의 주제이탈은 동시에 그 이야기의 연속이고 전개이다.”

p.115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p.116 니체는 자신을 증식시켜줄 독자들을 낚기 위해 다양한 미끼를 던진다. 특히 그의 스타일은 아주 다양하다. 군데군데 시가 등장하기도 하고, 드라마의 형식의 작품도 있으며, 서평이나 에세이, 심지어 논문을 흉내낸 작품들도 있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아포리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구사는 니체가 의도했던 것이다. 카우프만은 니체의 다양한 스타일을 진정한 스타일을 찾기 위한 ‘실험 정신’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진정한 스타일’이라는 말만큼 니체와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을 것이다. 니체는 진정한 스타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카우프만보다는 코프만의 해석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녀는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쫓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 된다. 경구나 은유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쉽게 무너뜨린다. 해석은 항상 무한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p.120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또는 경영)’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p.124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은 ‘표준화’이다.

p.127 기존의 가치를 추구하고 내면화하는 행위는 수동적인 주체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p.138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 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p.142 노동이 칭찬 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p.142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의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p.143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

p.14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니체는 학교보다 군대가 열등한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학교의 도움으로 정부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 이것은 지배적 도덕을 습속화하는 과정이다. 동등하고 규칙적이 되도록 길들여지며 지배적 도덕을 본능화하게 될 대, 니체가 말하는 ‘습속의 도덕’이 완성된다............ 이제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검열하고 통제한다. 베버는 이것을 ‘능동적 자제’라고 불렀으며, ‘일기’를 능동적 자기 검열의 대표적인 기제로 보았다.

p.146 우리에게는 아곤이라는 말보다 ‘적대’를 뜻하는 ‘안타곤’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하지만 ‘아곤’이 ‘안타곤’과 반대의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평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아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의 항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제이다.

p.147 아곤적 문화에서는 자신이 지나치게 성공하는 것을,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자신과 경쟁할 만한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공이 신의 시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회는 지나친 천재의 출현이 경쟁 차제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도편 추방’이라고 하는 제도를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편 추방을 사회의 조절장치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도편 추방은 자극의 수단이고 천재에 대한 보호의 수단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p.148 이 제도의 핵심은 천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천재를 여럿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소크라테스의 변증론을 천한 덕으로 이해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소크라테스의 질문방식과 진리관은 각자의 판단의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 아래 모든 사람들을 가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들이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랐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했다.

p.149 그리스인들이 아곤이라는 경쟁을 벌인 곳을 아레나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덕에 기초하여 이곳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쟁하였다. 폴리스는 이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로 구성됨으로써만 전체일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모임이 폴리스 자체였다.

p.152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p.153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을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면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p.158 원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상이고 스스로와만 관계할 수 있다...........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p.161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

p.167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대를 생각해 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 반동적 lga의 작동방식에 드러난 의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능동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 의지이다. 우리는 힘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의 의지, 즉 권력의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p.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p.170 힘의 내면의지의 본질은 명령에 있으니 권력의지는 모든 힘에 내재한 명령 자체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힘이란 항상 다른 힘에게 명령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p.171 'Macht'가 능력을 의미하고, ‘Wille'가 명령을 의미한다면, 권력의지(Wille zur Macht)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가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는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는 번역어와도 무관치 않다. 영어의 ‘will to power'나 우리말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말은 ’권력을 향한 의지‘로 읽히게 한다. 이러한 오해는 의지를 ’무엇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고, 그 의지를 대상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확인된다.

p.172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정의를 구분했는데 이 구분은 권력의지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첫 번째 정의는 욕망을 ‘획득’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획득하려고 하는 노력이 욕망이라는 것.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 결여되어 있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노력이 욕망이다. 아마도 이 첫 번째 정의가 욕망에 대한 통념일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 다르면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p.174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無)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p.175 우리는 권력의지가 ‘권력’과 ‘의지’의 합성어가 아니며, 그 자체로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했다. 또 그것은 어떤 결핍을 내포하는 ‘권력에 대한 의지’도 아니라는 것을 지적했다. 결국 권력의지는 ‘하나의 명령이며, 그런 점에서 노예의지나 허무주의란 결코 ’아무것도 의지(의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에 대한 의지‘이고, 그러한 의지가 내리고 있는 명령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p.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가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자극하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 준다.

p.178 ‘권력 느낌’이라는 개념은 권력의지보다도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 권력의지가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던 시기의 저서인 ‘서광’에는 권력 느낌에 대한 많은 주장들이 나온다. “행복의 최초 효과는 권력 느낌이다. 이 권력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상에 의해서든, 상상에 의해서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권력 느낌”이 권력의지에 우선한다는 것은, 그것이 권력의지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육체가 권력의지를 경험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행사함을 통해서이다.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육체. 육체는 자신의 감수성, 민감성을 드러내고 행사한다. 우리는 육체가 느끼는 능력을 수동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명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힘센 명령자다.

p.180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이미 우리는 권력의지가 힘들을 감각하고 평가하는 권력 느낌(감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세계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개의 권력의지가 갖는 느낌과 평가도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전자에게는 반복이 기쁨일 테지만 후자에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전자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에 대해 ‘한 번 더!’라고 말하겠지만, 후자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것이다.

p.182 니체는 여전히 ‘불명하른 존재’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원자 개념이 못마땅해서 그것을 힘으로 바꾸었지만,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적 세계관른 확실히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전통들 중 하나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설명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손실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라는 말처럼 원자론자들의 세계관을 압축할 수 있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귀(반복)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p.184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하다!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떤 철학자들의 무리와도 뒤섞을 수 없는 고귀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은 영원회귀 사상 그 자체였다.

p.185 헤라클레이토스는 무규정자이든 이데아든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성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

p.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p.188 세계란 시작도 없고 끝어 없는 거대한 힘이며,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전체로서는 그 크기를 바꾸는 일이 없는 청동처럼 확고한 양이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게 아니라 힘으로서 편재하고, 힘과 힘의 파랑이 벌이는 유희로서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여기서 모이면 저기서 감소하고, 광포하게 밀려들고 넘쳐드는 힘의 대앙이다. 영원히 방황하면서 영원히 달음질쳐 돌아오는 회귀의 세월을 거듭하여,.....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p.192 존재한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그것은 피로를 조장하는 의지, 무(無)를 의지하게 하는 의지와 대결한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

p.197 순간들을 통해 볼 대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미래를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계보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미래란 지나가 버린 순간들 속에도 들어있다. 들뢰즈는 사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유는 스스로의 역사를 생각하지만(과거), 그것은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현재), 마침내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미래)이다.’ 계보학자들이 과거의 지층에 숨겨져 있던 복수의 힘들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힘들이 미래를 건설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건축물로 변형된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이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잇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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