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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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의 사상은 여러면에서 적용된다. 시인과 예술가로서의 니체가 있는가하면, 시대 및 사회사상가로서의 니체의 업적도 중요하다. 그리고 실존철학과 더불어 철학자로서의 니체는 더 큰 후광을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니체의 연구가 간단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를 ‘큰 성곽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는데 그것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쌓아 올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는 것으로 표현한다. 니체의 시인적인 표현, 상징적인 사상들을, 또 순서도 없는 내용들을 어떤 체계적인 것으로 재생시키는 일은 어쩌면 니체 자신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 삼자가 니체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 보는 편이 적합할지 모른다. 또 지금까지 그렇게 취급되어 오기도 했다. 이미 앞에서 ‘짜라트스트라’에의 내용을 중심으로 다른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힘으로의 의지’를 중심으로 철학적 세계관의 개요를 간추리고자 한다.
2.
니체의 전집 속에는 지금까지 소개하지 않은 한 권의 책이 들어있다. 오히려 다른 어떤 책보다도 분량이 많으며 비중이 큰 책일지도 모른다. ‘힘에의 의지’ 또는 ‘권력에의 의지’로 불리워지는 책이다. 이 책은 니체가 말기의 몇 해에 걸쳐 써 놓았던 글들이다. 시간만 허락되고 건강이 지장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하나의 체계적인 저서고 남기고 싶었던 대작을 산출할 예비적인 저본이 되는 책이다. 이미 그의 생애와 저서 면에서 얘기했던대로 유럽의 허무주의, 재래 가치의 비판과 새 가치관의 확립, 참 인간 육성의 철학이 그 내용이었다. 1887년 3월 17일 초안이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이다. 여기에 해석을 내린다면 ‘힘에의 읮’는 그대로 세계의 근거이며 생존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힘이란 ‘전재의 자기긍정’ 이다. 힘에의 의지는 살려는 힘을 긍정하려는 의지이다.
니체는 ‘의지’라는 말보다는 ‘삶’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삶이란 본질적으로는 의지이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힘에의 의지는 개인적으로는 사회적인 힘에의 의지가 된다. 이 힘은 히틀러의 힘, 즉 그 합리적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니체에게 있어 그 힘은 최선의 힘인 것이다. 자기를 통제하는 힘 만이 그 사람에게 사회적인 힘이 된다. 만일 귀족주의적인 자기억제를 할 수 없다면, 그의 힘은 쇠퇴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나치에 의한 힘의 남용은 힘에의 의지에 대한 니체의 통찰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니체가 만들어 낸 이 위대한 상징이 잘못 입에 오르내려 마성적인 것이 되는데는 순전히 그의 이론을 오해한 결과이다.
3.
헤겔은 ‘정신’을 생각했고,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철학의 근거로 삼았다. 여기에 니체의 힘, 권력에의 의지를 자신의 철학의 핵심으로 보고 있었다. 헤겔은 정신을 개념적이며 논리적인 이념세계에 안주시켜 관념철학을 남겨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맹목적과 비참에서 오는 염세주의를 제창하여 결국은 의지의 부정을 철학의 근본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니체는 이 의지를 내적 체험을 통한 창조적인 삶의 철학으로 집중시켰고, 끝까지 허무를 극복, 긍정의 의지로 살아가려 했다. 유럽 정신사 속에 깃들여 온 회의와 허무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은 초극 긍정하려는 뜻이 니체의 철학이었고 그 근본적인 내용이 ‘짜라투스트라’의 설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철학적 주제는 ‘삶’이다. 그는 ‘삶’에서 시작하여 ‘삶’으로 돌아간다. 니체는 모든 삶의 애매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온갖 삶의 과정에 언제나 현존하는 창조적 요소와 파괴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삶을 그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긍정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여기에서 ‘신은 죽었다’는 그의 주장의 오해가 풀린다. 물론 신의 죽음이란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인간의 신에 대한 의식이 관계하는 한에서만 신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 자체가 죽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신이 죽었다는 사상은 오히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의미의 궁극적인 것의 의식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그 전통적인 가치체계의 담지자로서의 신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것아 다름아닌 ‘인간’이다. 어쩌면 이것이 또 하나의 신으로서 다른 면을 보이는 마성적인 심연,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인지도 모른다.
4.
그 당시 철학의 주제는 독일에서 주도하였다. 세계와 존재를 취급하는 것이 독일의 전통적 철학이었고, 인식과 진리를 논하는 것이 철학의 중심과제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들의 현실, 현실의 중심인 삶을 문제의 발단으로 삼았다. 거기에서 세계를 해명하려고 했고, 진리를 논하려 했다. 확실히 니체야말로 삶의 철학의 창시자임이 틀림 없다. 그러면 과제는 뚜렷해진다. 어떻게 삶이 고조된 것, 즉 환희와 희열로 충만한 상태로 끌어올리는가 이다. 통일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용이 충만한, 항상 진취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이 될 수 있는가 이다. 이러한 삶의 충실과 창조적인 활동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본래 인가, 주어진 인간성을 구속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영혼을 위한다고 해서 육체를 거부한 중세기적 교훈은 배제되어야 한다. 또한 내세를 약속한다는 구실 아래 현실세계를 회피하는 태도는 규탄 받아야 한다. 특히 철학에서 합리와 논리의 노예가 되어 창조적인 정열과 의지를 약화시키는 행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수정되어야 한다. 더 이상 삶 그 자체를 어떤 주위 사상의 예속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제 삶 그 자체를 긍정 발전시킴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다. 그 긍정과 완성의 실은 무엇인가? 삶의 근거를 제시해 주어 그 바탕을 찾아주는 일이며, 삶의 내용을 충실하여 그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이때 삶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힘 즉, 권력에의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힘의 의지는 삶에서 세계 및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긍정과 창조의 원천이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영원히 회귀하면서 전진하는 무구에의 의지이기도 하다. 세계가 이 힘의 의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힘의 의지로 만물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5.
존재와 의지를 힘으로 보는 것은 일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지가 가장 구체적으로 그리고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이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힘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본능과 욕망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육체를 경시하고 욕망을 죄악시했으나 육체와 욕망을 제거하고는 삶의 존재성 자체가 부정당한다고 한다. 이 욕망이 삶의 힘을 받아 감동으로 채워지는 것이 사람의 희열이며 환희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감동은 지성이나 사고가 갖다 줄 수 없는 근원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즉 직접적 감각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직접적 감각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 직접적 감각, 즉 직각이야말로 인식중의 인식, 힘과 능력을 갖춘 원초적인 인식인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뒷받침을 하는데 지나지 못한다. 니체가 아폴로적인 것보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 로고스보다는 파토스, 관념보다는 실재, 지식보다는 의지를 존중이 여기며 근원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에의 의지’야말로 이것들의 내용이며 인간의 주체인 것이다. 의욕은 모든 것을 생산해 내는 주된 동력이며 창조의 힘인 것이다. 그리고 이 파토스의 의지는 항상 유동적이면서도 통일하는 힘이다. 그것은 실로 정지가 없고 분열과 분해를 묶어 하나로 전진시키는 힘인 것이다.
6.
삶은 생명의 유기체적 특성을 갖는다. 깊이와 근거를 갖는 ‘삶’은 그 스스로가 인식에 의해 어떤 내용을 찾아 만들어 간다. 즉, 유기체처럼 삶의 내용을 만들어 전진한다. 그 처음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의 체험이다. 체험하지 못한 것은 지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관념적이며 논리적인 지식은 결국 이 넓고 깊은 체험의 내용을 논리화, 합리화시켜 본데 지나지 못한다. 삶은 체험을 통해 그 내용을 지니도록 되어있다. 체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주어질 리 만무하다. 이 체험의 내용을 자각하는 것, 그 체험을 자신의 지적 내용으로 만드는 체험의 내면적 요소가 다름아닌 의식작용이다. 인식이란 체험의 자기의식, 의식작용의 내용인 것이다. 감동과 그에 따르는 직접적인 감각도 여기에서는 공통성을 가진다. 감동도 깊고 원초적인 체험이며 그 직접적인 감각이 의식의 바탕인 때문이다. 이 넓은 의미의 의식작용 중에서 비교적 합리적 판단을 내리며, 그러기에 논리적 비판을 가하는 요소를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식은 체험의 상층이라면 지성은 인식의 상층구조로 보아 좋은 것이다. 이는 때로 의지가 요구한 것을 체험하며, 의식하며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순서가 된다. 실로 지금까지의 철학이나 인식론과는 모든 순서가 달라지며 그 비중이 완전히 위치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지성과 합리는 체험과 의식의 방편수단에 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7.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인식작용이란 무엇인가. 많은 철학자들은 인식작용 그 자체를 독립된 내용으로 취급한다. 인식은 마치 심리학이나 논리학의 일부분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삶과 그 입장에서 고찰해 본다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 내려진다. 가장 귀했던 것이 전해지며 진리의 비중과 위치가 달라진다. 여기에 삶은 본래부터 두 가지의 근본적인 작용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삶에 도움이 되고 힘에 플러스가 되어 자아완성에 이바지 되는 것은 동화시켜 받아들이는 작용이다. 다른 하나는 삶의 마이너스가 되거나 힘을 방해하는 것들은 배척하거나 정복하여 스스로를 강화시키려 한다. 이러한 욕구는 의식이전의 작용이며 삶의 본능적인 힘의 속성이다. 힘의 진취적인 능력이며 삶이 지니고 있는 힘의 원근작용인 것이다. 이때 배척작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버림을 받지만 동화작용의 내용이 되는 것은 자연히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동화작용이 요청하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노력을 경제적으로 하여 힘의 낭비를 막으라는 말없는 요청과 명령이다. 그것은 일정한 체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모든 대상과 내용을 도식화하며ㅡ, 범주화하며, 단일화시키며, 명료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일곱 개의 별을 따로 따로 보고 생각하기 보다는 ‘북두칠성’이라는 기호로 바꾸어 다시 그것을 국자와 비슷하다는 도형으로 바꾸는 것이다.
8.
이러한 동화작용의 형식과 규범을 가장 잘 살린 것이 논리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 작용을 합리적 고찰, 지성적 판단이라고 부른다. 논리적 사고와 원리의 제일 원칙으로 삼는 것이 동일률 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성은 의지의 수단이며, 논리는 체험의 방편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진리라고 생각해 오던 모든 내용들은 전체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라는 나무에 핀 꽃, 잎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심화 근원화의 작용과 표면 합리화의 작용 중, 보다 중요한 전자는 버리고 후자를 택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오히려 그 근원에 있으며, 나무로 하여금 나무되게 하는 힘과 원천에 있어야 한다. 니체를 통하여 무엇이 진리인가 함과 동시에, 무엇이 더 참된 것인가를 생각하며, 다시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 즉, 바람직한 것인가를 묻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9.
삶은 창조적인 통일된 힘이며 문화와 다른 모든 것들은 그 유산이다. 긍정하려는 힘, 권력에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주체적 요소인가는 더 물을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논의 되어 온 주객의 대립도 결국은 가상적인 내용일 뿐 주체적인 것이 진리라는 말은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 같이 니체에게서도 적용된다. 니체는 서슴지 않고 논리적 공식이 진리의 표진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진리라고 생각하라. 그리하면 너의 생이 증진될 것이다’ 라는 설명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도 같은 성격의 설명을 부과 한다. 인과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은 생의 충족과 긍정에의 뜻을 두는 것이다. 이로써 니체의 철학적 핵심문제를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실로 초인이란 이러한 긍정의 의지, 권력의 힘을 소유한 사람이다.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이다. 니체가 원하는 새로운 가치의 표준도 결국은 힘과 그 긍정의 가치이다. 이런 점에서 삶을 약화시키며 얽매는 형식적인 도덕, 규율적인 신앙과 종교를 반대했음은 곧 공감이 간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직, 간접적으로 지극히 큰 영향을 니체를 통해서 받았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특히 니체가 헬라적인 것을 받아들였으며, 그 속에는 동양적 철학사상이 그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아마 니체의 동양적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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