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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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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6일 00시 20분 등록
백수생활백서, 박주영


이 여자 박주영, 현실보다도 책을 더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권태와 허무를 알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그녀, 책을 빼고서는 단 한 마디도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듣도보도 못한 작가들의 책에서 입맛에 맞는 귀절을 찾아서는 적재적소에 써 먹는다. 책을 읽듯 사람을 읽으며, 누군가 예수와 부처를 믿듯 책을 믿는다.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언제나 책에서 찾는다. 작가가 숨겨 놓은 것 혹은 작가가 그러기를 바라며 써놓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른 것을 찾는다. 오직 나만이 찾을 수 있는 그 무엇 ” 199


나도 그랬다. 언제나 나의 준거의 틀은 책이었다. 결혼초 남편과 모종의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 풀어놓은 선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점을 뒤진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보다, 책이 더 현실인 것이다. 사흘의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4권의 책을 집으며 나는 실로 행복했다. 도로가 워낙 복잡해서 주차때문에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 전경린의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류시화엮음 “인생수업”, 김윤덕지음 “산수재 가는 길”. 다른 책들이 신문광고에서 보던 책이었다면, “산수재 가는 길”은 순전히 출판사 이름 때문에 선택한 책이다. -주변인의 길-. 바삐 들춰보니 짧은 산문 형식이다. 구소장님께서 둔내에서, 시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산문 형식도 고려해 보라고 던져주신 말씀이 순간적으로 지나쳐갔다.



아마 작가자신인 것이 틀림없는 화자 서연은, 인생에서 딱히 이루고 싶은 꿈이 없는 사람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사는 건 너무 지독하다고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기대도 갖지 않은 채로 살면서 점점 더 남들과 비슷한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짓을 하면서 산다는 건 어딘가 비정상적이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갖고 그렇고 그런 인생 말이다. 점점 더 당연한 것들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171


하기싫은 일을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서, 오로지 책을 탐닉하며 사는 서연과 그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책에는 구석구석, 다른 책에서 읽은 귀절이 인용된다. 가장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책 속의 한마디가 상황을 정리하고 정체된 길을 뚫어준다. 모든 비유에도 책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낯설지 않으면, 마치 이미 읽은 책을 나도 모르게 또 읽고 있는 것같다고 한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있다는 사실은 숨겨둔 연인처럼 흥분을 안겨준다고 묘사된다.

이 책은 작가 박주영의 책에 대한 헌사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책에 대한 러브레터이다. 박주영 자신이 책이다. 장정일이나 장석주처럼 소문난 북멘토의 명단에 박주영을 올려도 좋으리라. 그 방대한 독서량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와 글이 되었고,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으로 당선된 이 후 첫 장편으로 무게있는 상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산천의 구름과 안개, 초목의 꽃과 열매도 충만하고 울창하게 되어야 밖으로 드러나듯이, 마음속 생각이 충만하면 글은 저절로 써진다” 273


“독서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의 책을 모두 읽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느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느냐.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레이먼드 카버를 읽는다. 레이먼드 카버를 읽고 또 그가 마음에 든다. 그 다음은 하루키가 카버를 극찬하듯 카버가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말한 체호프로 넘어간다. 책 읽기의 그물은 그렇게 이어지다가 끊어진다. 레이먼드 카버도 체호프도 죽은 작가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기다려서 나올 책이 없다. 죽은 자를 읽는 일은 너무 빨리 끝이 보인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 있는 작가인 하루키로 돌아간다.” 287


“박상우와 구효서가 나란히 서 있고 윤대녕이 옆으로 누워서 층층이 쌓여 있고, 그 곁에는 신경숙과 공지영이 있다. 맞은편에는 장 에슈노즈, 르 클레지오, 파트리크 모디아노가 섞여 있고, 미셸 누르니에와 레몽 장이 다른 방향을 보고 누워 있는” 서가는 너무 유혹적이어서 숨이 막힐 정도이다. 206


책읽는 행위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은 젊은이 한 사람이, 책을 읽는다는 집중적인 행위 덕분에 작가가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표현들이 눈에 띈다. 그니의 무궁무진한 독서량에 비추어 볼 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만만치 않으리라. 무엇이 되고자 전전긍긍한다거나, 먹고살기 위해 부심하기 보다, 자신의 기질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표를 이루는 지름길인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된다.


애초에 근검절약이나 루틴한 일을 성실하게 하는 기질같은 것은 내게 없었다. 담대하게 마음을 따라가고, 집중과 이완의 낙차가 큰 만큼 발전량이 엄청나며, 평범하지만 진솔하게 살고자 하는 한 개인이 어디까지 실험할 수 있는지 끝까지 가는 것에 관심이 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떤가. 소유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산만하고 싫증을 잘 내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길고, 한 두번의 혁명적 변화가 필요한 라이프 싸이클의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 생긴대로 사는 것 - 그것이 행복이요 성공이라는 것을, 책 매니아 박주영이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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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즐짱
2006.07.16 07:05:51 *.47.85.166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고 싶어서 시를 쓴다'란 말이 떠오르네요. 이 글에 비유해보면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저 책을 읽고 싶어서 책을 읽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작가가 되어 있었다'가 되는 거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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