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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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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일 17시 40분 등록
아름답게 보는 법도 배워야 한다. - 미학 오디세이 1,2

진중권 (지은이) | 휴머니스트

진중권-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석사 학위 취득.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에 있을 때에는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였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간부로 활동. 현재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

<미학 오딧세이>, <춤추는 죽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2>, <천천히 그림읽기>, <시칠리아의 암소>, <페니스 파시즘>(2001), <폭력과 상스러움>(2002), <앙겔루스 노부스>, <레퀴엠>, <빨간 바이러스> 등이 있다.


1.
고대 예술은 크게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누어서 생각할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구석기시대의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벽화등이 신석기시대의 그것보다 섬세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예술이 발전하기 보다 쇠퇴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개념적 사유’와 ‘시지각’ 에 대해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곰브리치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지의 도식’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시지각 자체가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개념적 사유가 시지각을 지배할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념적 사유의 개념없이 자연을 보이는 그대로 그렸던 것이다. 이는 구석기인들의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자연주의가 그들의 낮은 지적능력때문이라는 설명을 할수있게 된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정착생활과 농경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 농경의 시작으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추상적 사유에 의존하게 되는데 적절한 예로 계절의 변화를 들수있다. 농경의 시작으로 사계절이 변화하는 개념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더 개념적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럴수록 보이는데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알도있는 그대로 묘사하게 된 것이다. 이 대립되는 재현양식은 오랫동안 미술사를 지배한다. 이에 예술을 시작한 동기는 다음 세가지로 생각할수있다. 첫째로 남아도는 에너지의 방출통로의 개념을 가진 유희 기원설과 두 번째로 힘이 남아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필요에서 예술이 시작되었다는 노동기원설, 마지막으로 가상을 통해 현실의 소망을 이루려는 주술적 신앙때문이라는 주술기원설이 그것이다. 이 세가지 기원설중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주술기원설로 동굴에 아주 생생하게 동물들의 벽화를 그리고 그 앞에서 주술적 행위를 통해 사냥의 절차와 테크닉등을 배울수 있었으며 자신감을 키우고 신체를 단련할수 있었다. 주술적 이유로 인해 예술활동이 지속된것이다. 그 시기에 사람들은 예술을 곧 주술로 생각하였고 그들의 소망을 이루는 방식은 주술이었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가상은 곧 현실이었다. 그러면서 주술로 소망을 이룰수 없음을 깨달은 인간은 ‘신’의 존재를 만들고 이 ‘신’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종교가 발생한다. 반면에 이와 다른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주술이나 신화가 사물들 사이의 비유적 연관을 설정하는데 반해 비유를 벗겨내고 사물들의 진짜 연관을 알고자 했다. 이렇게 철학이 발생한다. 또한 예술은 주술적 기능에서 풀려나 예술과 주술이 동일시 되지 않게 된다. 현실과 가상이 분리되며 예술이 발생한다. 주술은 예술과 종교, 철학이라는 세가지로 나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배적 상징형식도 달라지게 된다.

2.
고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예술은 크게 이집트예술과 그리스예술로 나뉘게 된다. 이 두 예술양식은 아주 상반적이다. 그리스처럼 축복받은 땅에선 인간과 자연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때 감정이입 충동을 갖게되며 이로 인해 유기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발달하게 되며 반면 이집트처럼 자연환경이 척박한 곳에선 광막한 의부세계가 인간에게 끊임없는 내적 불안감을 일으킨다. 이때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충동을 갖게 되고 그결과 추상적 기하학적 양식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이집트예술은 이미 여러각도에서 보았던 시각적 정보를 분석하여 그 사물의 본질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시각적 종합을 제시한다. 반면 그리스예술은 시작은 이집트예술과 비슷하였으나 주요 관심을 신으로 삼으면서 정확한 인체비례나 감정표현이 자제된 완벽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스 예술을 설명한 두사람을 살펴보면 우선 빙켈만은 고양식은 엄격하고 딱딱하며 숭고양식은 숭고하고 딱딱하다고 설명하였다. 아름다움의 조건은 우미이며 그리스 예술을 모방한 로마 예술은 ‘모방자의 예술’이라며 비하하였다. 빙켈만은 그리스예술은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특정지었다. 조형예술의 깨끗한 정신인 아폴론과 깊고 어두운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정신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그리스 예술속에 조화롭게 공존하며 비극은 세계의 근원적인 일자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의 개체화의 비극을 아름다운 가상세계에 대한 매혹과 통합함으로서 가혹한 삶의 진리가 주는 깨닮음을 준다.니체는 그리스예술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두신으로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아폴론은 낮과 명료성을 상징하는 태양의 신으로 그리스 예술중에서도 조형예술을 이에 비유하였다. 디오니소스는 밤과 혼돈을 상징하는 술의 신으로 그리스 비극이 이 디오니소스에 비유된다고 말하였다. 그리스예술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으로 발전하였으며 인류의 모든 예술이 서로 대립되는 두가지 충동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고대 철학에 대한 내용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알수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플라톤이 이데아는 완전한 것이고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며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라 함으로서 예술이 모방의 모방이므로 정확한 척도와 비례만이 가치를 가질수 있다고 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현실과 합처져 있는 것으로 현실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엄격함에서의 일탈을 통해 미의 양식을 낳는다고 하고 있다.

3.
중세 예술의 특징은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하고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중세시대의 예술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라톤주의가 몇 백년동안 중세 미학의 골격이 된다. 해석된 플라톤주의는 플라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 사상이라 할수 있다. 플라티노스의 사상은 일자라는 선이자 미 제체로 근원적인 것을 내세워 이 일자에서 빛이 정신 즉 이데아와 비슷한 것이 되며 이 정신에서 영혼이, 영혼에서 자연이, 자연에서 물질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인간을 이 모든 것을 가진 완전한 존재로 아름다움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질세계의 재현대신 인간의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함을 표현하려 했던 비잔틴예술의 정신은 바로 기독교식으로 해석된 플로티노스의 정신이었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에서의 신에 일자를 대입시킨다. 기독교 중심의 중세시대에서는 기독교적인 영적세계를 표현하게 된다. 이것은 중세예술이 화려한 색체와 밝은빛, 기하학적 요소들을 가지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추함도 아름다움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효과로 추함은 비록 그 자체론 아름답지 않아도 전체적으론 미를 한층 복잡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중세예술의 임무는 감각적인 것으로 ‘초월의 진리’를 표현하는데 있었다. 물론 감각적 매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선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알레고리다. 알레고리에서는 눈에 보이는 형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중요한건 이 가시적인 형체가 말하는 ‘다른것’,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의 신성함이다.

중세시대에 주목할 만한 것중 한가지는 건축양식이다. 크게 두가지의 건축양식이 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다. 로마네스트 양식의 성당은 육중하고 견고한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악의 세력과 싸우는 전투적 교회를 연상시키는 ‘신의 성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로마네스크성당이 악의 무리로부터 보호받는 안전한 피난처 였다면 고딕양식은 사람들에게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딕이란 변화의 토대는 늑재궁륭이란 기술이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아치와 두껍고 육중한 벽은 첨두형 아치와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바뀐다. 한편 중세의 조형예술은 독자적인 의의를 갖지 못하고 성당 건물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는데 주 목적이 있었고 조형예술은 글을 모르는 민중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중세예술의 미학은 플로티노스에게 유래한 빛의 상징주의 였다. 화려한 색체의 효과는 중세회화의 아주 중요한 특징이다. 색체란 빛이 어둠을 극복하고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회화는 눈에 뵈는 외부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했다. 자연 모방이란 관념에서 해방된 탓으로 형태와 색체의 자유로운 구성에 도달할수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형체로 ‘정신’의 계기를 강조하고 밝은 빛과 화려한 색체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스런 ‘관조’를 표현하는게 바로 중세회화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반면 이런 추상적 경향만을 띠는 것은 아니었는데 13세기부터 발달한 고딕예술이 그것이다. 묘사는 과감하고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기 시작하는데 이 새로운 경향이 ‘고딕 자연주의’이다. 이는 사회적, 철학적 분위기에서 나왔다. 중세사상이 스콜라 철학에서 완성되듯 중세예술은 고딕으로 완성된다. 중세의 미는 대상의 객관적 속성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를 ‘보아서 즐거운 것’ 즉 바라보는 사람의 즐거운 감정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미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예술을 모방으로 본다. 플라톤적으로 해석된 기독교는 신을 세계밖에 서있는 존재로 이해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초월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감각적 자연의 묘사가 곧 신성의 묘사가 되며 이는 고딕 자연주의를 낳는 힘이었다.

4.
중세의 예술은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했지만 새로운 시대는 ‘가상’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 그네상스의 대표적 예술가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들수있다. 다빈치는 엄격한 자연모방을 주장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내면의 현상에 따른 창조를 주장한다. 다빈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성격을 가진다. 그는 예술엔 반드시 따라야할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적 성격을 가지며 예술가의 내면에서 미의 가치판단과 예술성이 우러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크예술이란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와 사뭇 다른 성격을 지닌다. 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묘사는 격정적이며 구도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뵐플린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의 변화를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변화로 설명한다. 그는 다섯 개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1.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2. 평면에서 깊이로
3. 닫힌 형식에서 열린 형식으로
4.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5.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

17세기 유럽엔 서로 다른 두 흐름이 있었는데 고전주의 예술이 데카르트적 ‘이성’의 예술이라면 바로크는 무엇보다도 ‘감정’의 예술이었다.
칸트는 진리나 도덕적 교훈을 주지 않는 예술은 타락한 것으로 여기는 생각에서 예술을 해방하였고 미는 개념이 아니므로 어떤게 아름다운 건지 판정할 보편적 규칙이 없는데 우리가 만족하는 것은 타인도 만족을 주리라는 공통감을 가짐으로 칸트는 이 공동감을 이념으로 요청하였다. 유리알 유희를 통해 예술가들은 건축과 음악, 건축과 영화, 음악과 철학, 음악과 회화, 시와 음악등 다른 장르의 예술을 같은 내용성 안에서 융합하여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한다. 예술은 절대적 진리를 들어내는 매체다. 헤겔은 이렇게 이념이 예술 속에서 감각적 형태로 드러난게 곧 미라고 보았다. 진정한 미란 곧 예술이다.
헤겔은 이념이 감각적 형상과 관련을 맺는 양상에 따라 예술의 발전을 상징예술, 고전예술, 낭만예술로 분류하였다.

5.
현대 예술은 세잔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세잔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작은 빛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바로 ‘그 대상 자체’를 그리려 했다. 인간은 지각이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믿고있었으며 여러개의 시각적 단편들을 쌓아 올리면서 화면전체를 모자이크처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방법은 입체주의자 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입체주의자들은 여러시점에서 본 사물의 시각적 단편들을 모아 하나의 평면에 재조립하려 했다. 입체주의자 피카소가 세잔에게서 평면을 기하학적 단편들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면 마티스는 세잔에게서 또 다른 측면, 즉 풍부한 색체와 빛나는 표면을 발견했다. 마티스는 현대의 추상예술에 또 하나의 특징을 보탠다. 이제 색은 대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배열의 유희를 즐기게 된다. 피카소와 마티스.. 결국 현대 예술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미 물질세계를 넘어서려 했던 중세 예술은 자연의 대상이 가진 형태나 색체에서 벗어나 형태와 색체의 자유로운 배열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대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오면 예술은 더 이상 무언가의 가상이기를 그친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회화에선 형태나 색체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것은 무엇을 그린 것이냐’고 물으면 실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6.
예술은 정보소통의 과정이다. 아마 다른 매체론 전달할수 없고 오직 예술로만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정보일 것이다. 예술가는 발신자다. 그는 먼저 머릿속으로 작품을 구상한다. 이 구상을 디자인이라 부르면 이어서 그는 이 디자인을 물감, 음향, 신체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물질적 형태로 구현한다. 이를 퍼포먼스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이는 일종의 ‘약호화’로 볼수 있다. 작품이 완성되면, 작가는 이를 청중, 관객, 독자에게 발송한다. 이때 작품은 예술가가 전달하려는 예술적 정보의 담지체, 즉 전언인 셈이다.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은 관조활동, 일종의 인식이다. 경제활동이나 도덕적 행위같은 실천활동이 아니다. 따라서 예술적 구상을 물질로 구현하는 건 예술과는 무관하다. 감각은 감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뿐 이미지를 산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직관은 능동적으로 이미지를 산출한다. 직관은 이렇게 위로는 개념과, 아래로는 감각과 구별된다.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형식이다. 현대 예술은 더 이상 외부세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의 출발점은 예술가의 내면이다. 현대 예술은 내면의 직관을 밖으로 표현하는데서 성립한다.

예술의 본질은 효과를 내도록 꾸며진 물리체에 지탱하여, 감각적 질의 조화로운 놀이라는 유일한 수단으로 예술이 보여주는 사물과 존재의 세계를 지시하면서 초월에 대한 인상을 향해 우리를 끌어올리는 데 있다. 예술작품은 한갓 사물이다. 고흐의 그림은 한 조각의 아마포에 화학물질을 발라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것은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알레고리 즉 비유라는 것이다. 작품은 사물적인 것을 넘어서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고, 다른 세계를 열어 준다.
문학작품에선 4계층으로 이루어진다. ‘언어적 음성현상의 층’ , ‘의미내용의 미’ , ‘도식화한 시점의 층’ , ‘묘사된 대상의 층’ 등이 그것인데 각 계층마다 미적 성질들을 지니고 이 것들은 다른 하나의 등장으로 곧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 계층의 미적 성질은 각자 어느것도 대신할 수 없는 제 목소리를 가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매 순간 이 4개의 목소리는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낸다.

예술을 진리와 연결하는 것은 곧 예술을 인식으로 보는 것이다. 가다머는 예술적 인식을 플라톤을 따라 ‘상기’로 설명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재인식’으로 규정한다. 어떤식으로 보면 예술은 ‘재인식’에 포함되며 알고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상을 아는 것이다.
고전주의적 예술관은 수용자에게서 작품을 주체적으로 해석할 권리를 빼앗는다. 수용자는 주어진 의미를 그냥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독자다. 오늘날엔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수 있는 작품이야 말로 ‘예술적’ 이라고 여겨진다. 수용미학은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독자의 적극적인 ‘수용’의 측면을 결합하여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수용자 중심의 예술론을 만들어 냈다.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하면 ‘본질주의의 오류’를 범한다. 예술에는 본질이 없다. 다만 예술작품들 사이에 가족유사성만이 있을 뿐이다. 본질이 없는데 본질을 찾고자 하는것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예술에 본질이 없다면 예술을 정의할 수도 없다. 예술의 개념을 정의함으로써 개념을 닫아버리는 것 보다는 오히려 개념을 열어 두는 편이 예술의 창조력을 위해 더 낫다.

7.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성은 쾌락 원리에 따라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키려하는 ‘이드’, 현실을 인식하고 지각,기억,사고를 발전시키는 ‘자아’, 인성의 도덕적 측면인 이상을 대표하는 ‘초자아’라는 세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세 개의 층으로 인성을 이루며 적절한 조화를 이룰때 원만한 인격을 갖게 된다. 이중에서도 이드로 인해 욕망을 충족하고 싶어 하지만 전부 실현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으로 꿈을꾸게 된다. 이루지 못한 욕망을 승화할 때 예술이 탄생한다고 한다.
입체파 화가들이 그리려 했던 것은 3차원의 환영이 아니라 2차원의 화폭에 실제 3차원 공간을 담으려 했다. 방법은 여러 시점을 넣으면 되는데 전부그리기 보다는 제유법으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일종의 환유로 환유적 암시를 이용하여 평면속에 공간을 넣으려 했다. 입체파 화가들이 환유의 축에 서 있다면, 초현실주의자들은 언어의 또 다른 축인 은유에 서 있었다.

아름다움은 질서 또는 예측가능한 네그엔트로피와 예측 불가능한 엔트로피의 함수관계에 있다. 정보이론에선 미를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 관계로 규정한다. 미의 정보는 엔트로피와 일치하고 의미 정보는 네그엔트로피와 일치한다. 이를 통해 고전 예술과 현대 예술의 차이를 알수있다. 의미를 중요시한 고전주의 예술에선 대상의 형태가 가장 중요했고 현대 예술에선 대상성이 파괴됨으로 형태와 색체는 대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구성을 이룬다. 이는 고전주의 예술은 의미정보를 추구한 반면, 현대예술은 의미 정보를 단순화하는 가운데 미적 정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수 있다.

생성미학은 우리가 예술에 대해 얻은 지식의 척도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성해 낸 예술작품이 진짜와 비슷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예술의 비밀에 접근하는 거다. 낭만주의자들의 말대로 라면 생성미학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 예술의 중요한 특징중 한가지는 작품의 완성을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맞기는 경향이다. 실제로는 독자의 적극적 개입이 현대예술에서만 열려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예술사에서 개방성을 추구하는 경향 또한 현대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는 하나의 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아예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8.
고대인들은 미가 대상의 객관적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모양이나 무게처럼 대상이 미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가 황금분할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있었는데 그리스 건축가들은 의도적으로 엄격한 수학적 비례에서 벗어난 일탈을 보인다. 이 고대인들의 객관성외에 미를 결정하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이를 ‘이성’이란 말에 대비해서 ‘취미’라고 그들은 말한다. 현대는 이 취미론이 중심이 되어 미의 판단은 주관적이란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주요한 미적 범주는 시대마다 달라진다. 미적인 것과 예술의 관계는 서로 교차하는 두개의 원으로 표시할수 있는데 동그라미가 완전히 겹치면 유미주의적 예술관,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예술은 오로지 미적인 기능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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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2006.09.03 17:12:16 *.75.166.117
^^
저의 짧은 생각으로
예술은 느끼지만 표현될 수 없는 것과
표현할 수 있지만 완성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존재하는 듯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가교가 되어 지는 것이 아닐까 싶군요...

아무튼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공감이라는 것, 만족이나,즐거움이라는 보다 긍정적인 통합과
그와 정반대의 부정적인 통합도 가능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예술은 그냥 예술이 되는건가요?
그 두글자 속에 모든게 다 있으면서도 두 글자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글자의 기호를 이해하고 글자가 주는 의미를 이해하고
의미너머의 본질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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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6.09.03 23:04:09 *.106.85.232
프랑스의 비평가 앙드레바젱은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술이란 표현할 수 밖에 없는것, 표현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것, 단지 표현의 방식이 달라서이지 그 근본은 같다- 제 생각엔, 누군가 글로 표현해 내지 않으면 미쳐버릴것만 같은것, 음악으로 토해내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은것, 그림으로 빚어내지 않으면 죽어버릴것만 같은 그런 심정으로 만든 모든 것- 작품이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성렬님께서 말씀하신 "예술은 느끼지만 표현될 수 없는 것과
표현할 수 있지만 완성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존재" 하는 듯 한다는 말씀- 정말 재미있고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전 그렇게까지 생각은 못했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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