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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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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18일 22시 24분 등록
신동엽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프로스트의 시집을 읽고
신동엽 시선집을 손에 쥐었다
먼저 것은 아름다움이 가슴을 어르더니
이번 것은 슬픔이 마음을 치는구나

위대한 시인들은
마음 속 품었던 형형색색 선명한 그림들을
시 속 활화산으로 터트려 놓았다

싯귀를 따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그가 의도한 것이든
내가 창조한 것이든
전부를 그릴 수는 없지만
시인의 눈빛이 마음을 스쳐간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답답해 하지 않겠다
느낄 수 있는 만큼 느끼고
그릴 수 있는 만큼 그린다

어차피 시란
내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

이것은 마음아픔이다
누군가 절절히 버티며 피 흘리던 이야기는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이의 마음조차 울리는 힘이 있다

학창시절
우연히 그 시대 그들의 책을 접했을 때
글귀에서 뚝뚝 떨어지는 끈끈한 비통함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는 다시 읽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 후로
그들의 이야기를 찾은 적이 없었다

오늘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었던 건
아침 공기가 서늘했기 때문이다

...가을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그저 가라앉는 가을날
서늘한 공기에 모자를 눌러쓰고
따뜻하게 늘어지는 걸칠 것을 찾는 날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담배 물고 싶은 날

우연히 그런 날

그의 시집을 읽으리라 마음 먹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결국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몇 년 만에 피우는 담배는
심장의 박동을 빠르게 하고 손끝이 떨리게 한다
에스프레소 더블, 담배 한 대
한 잔 더 시킨 카페라떼에
혈관의 피가 펄떡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진달래 산천
탄환이 쏟아지던 그 곳에
잔디밭에 장총 버려둔 채
피 흘리던 그를 바라보던
그 때 그 시인의 심장도
지금 나의 것처럼 뛰었을까

종로5가에서 동대문을 묻던
흙고구마를 업은 소년을 만나던 때
속옷차림으로 때묻는 편지를 읽는 창녀
양지에 앉은 소년의 누나를 바라볼 때
그 시인의 혈관에도 피가 펄떡였을까

전쟁통 굶주림에
민물 날 게를 잡아먹고 얻은
간디스토마가 간암이 되어
서른 아홉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시인은 펄떡이는 피를 다 토하고 죽었던가

비통한 시대 날카로운 눈빛의 시인
그의 피가 얼룩진 싯귀를 쓰다듬으며
커피집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나는
문득 서늘한 공기의 감상에 휘둘렸을 뿐

손가락에 밴 담배냄새를 맡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다
아주 잠시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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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산천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밝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놓고 가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뱃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종로 5가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증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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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연혁 (1930~1969)

1930 8월 18일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남.

부여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단국대 사학과 졸업.

1959 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1961 명성여고 국어교사로 취임(작고시까지 재직).

1963 [산에 언덕에], [아니오]등을 담은 시집 '아사녀' 출간.

1966 詩劇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연.

1967 펜클럽 작가기금으로 장편서사시 [錦江] 발표.

1968 오페라타 [석가탑](백병동 작곡)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

1969 4월 7일 간암으로 별세. 경기도 파주군 월롱산 기슭에 안장.

1970 4월 18일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에 詩碑를 세움.

1975 [申東曄 全集]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책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1979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1980 [증보판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1982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을 제정, 첫 지원대상자로 소설가 이문구씨가 선정된 이후 98년 현재 16회에 이름.

1985 5월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申東曄 生家] 복원.

1988 미발표 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진], 미발표 시집 [젊은 시인의 사랑]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됨.

1989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

1993 11월 20일 부여읍 능산리 왕릉 앞 산으로 묘소 이전.


연혁: 김현석님 홈페이지(http://my.dreamwiz.com/garaya/dongyup/) 에서

발췌함.
IP *.141.3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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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2006.09.19 00:42:19 *.147.17.69
담배와 커피와 시는 잘 어울립니다. 담배 물고 커피 마시며 시를 읽는 소정 역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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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2006.09.19 07:25:04 *.116.34.201
박소정은 끓는 기름 같구나. 겉은 김도 나지 않게 차고 속은 펄펄 끓는구나. 담배피지 마라. 불 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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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2006.09.20 09:40:32 *.217.147.199
난 시를 왜 자꾸 분해하려고 했는지...
꿰뚫는 정서를 제대로 보셨군.^^ 니가 쓴 시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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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2006.09.20 19:45:14 *.120.97.46
경빈아...그건 말이지...네가 담배 물고 커피 마시면서 시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야... 아... 경빈아 미안하다.... 내가 실없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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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2006.09.20 22:11:05 *.29.236.30
그런가? 한 5년 전으로만 돌아가면 나도 할꺼 다했는데....
담배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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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2006.09.21 09:13:58 *.244.218.8
소장님 말씀 감사...^^
....두 사람 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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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리
2006.09.30 01:22:15 *.254.118.76
그의 시를 느낀 또다른 풍경
봄날 따스한 볕 내리던 그의 시비에 기대어
나뭇잎 사이로 흘러 내리던 볕 즐기며 그의 시를 읽는다.
4월은 갈아 엎는 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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