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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0일 08시 33분 등록
1.

'신동엽'이란 시인을 4․19 라는 역사적 상황과 결부시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작품자체를 분리시켜 신동엽의 시세계를 포괄하는 지향점을 ‘원수성 세계로의 환원’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그는 우주의 생성 변화를 순환적으로 파악하여 ‘순환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세계가 인류의 고향인 대지의 세계, 즉 원수성의 세계로부터 현대 문명의 세계인 차수성 세계로 이행되었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귀수성 세계로 순환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 때 차수성 세계란 현대 문명에 의해서 파괴되고 혼돈으로 팽배해 있는 모순의 단계이다. 이 때 그 매개 과정이 귀수성 세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알맹이의 정신 구현’, ‘대지와 인간 회복’, ‘문명의 거부와 생명 지향’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이로써 신동엽의 시는 현실의 적나라한 모순을 극복하고 이의의 완전한 대지의 세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시 일반에 대한 태도에서 간과되어는 안 되며, 그 동안 신동엽 시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시가 지니는 시적 가치의 핵심은 ‘알맹이 정신’으로 파악될 수 있다.

2.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 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아사달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아사녀」 부분 발췌

대지의 시대를 일구어 오던 주체인 아사달과 아사녀는 이 시에서 ‘사월십구일’로 ‘오늘’로 다시 그 역사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들의 몸부림은 ‘빛나는 앙가슴과 물구비의 찬란한 반항’인 것이다. ‘앙가슴’은 인간의 의지와 중심을 의미하며 이것은 ‘빛’으로 그 의미를 얻는다. 인가의 의지는 이 ‘빛’의 실체로서 불꽃으로서의 의지와 정열을 가지게 되며 이 또한 ‘찬란한’ 이라는 빛나는 형상으로 저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사녀, 아사달의 아우성은 대지적 속성, ‘노동’으로서의 저항의 표현이다.

‘노동’은 ‘대지’라는 인간의 저항의지를 구체화하며 그 저항의 역동성을 보여줌으로서 동시에 ‘불’의 물질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불꽃’은 생명을 가지며 모든 인간의 내적인 힘을 상징하며 인간을 숭고하게 만들고 질료의 소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숭고한 행위 중 하나이다. 불의 질료적 특성을 가진 ‘노동’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정열이며 세계 개조의 적극적인 의지의 발현이다.

이 빛의 저항의 힘은 언제나 수직적 상승의 욕구를 포함하는데 수직성에 대한 상승의 지향은 높이 더 높이 몸을 펴 뻩치도록 밀어올린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상승’은 차원의 단절, 피안으로의 이행, 인간적 조건의 초월이다. 그리고 ‘높이’라는 위치에서 절대성과 신성성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상승을 통한 높이의 신성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신성성에 가치가 부여된다.

줄줄이 살뼈도 흘러나려 내를 이루고 원한은 물레밭을 이랑 이뤄 만사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진주(眞珠)배기 치마폭 화사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황토벌, 전쟁을 불지르고 간 원생림(原生林)에 한가닥 노래 길이 열려 한가한 마차처럼 대륙이 기어오고 있었다.

……

6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푸른 가슴 턱 차도록 머리칼 날리며 늘메기 꿀 익는
유월의 산으로 올라 보아라.

-「아사녀에게 올리는 축고」중

6월의 산으로 오르는 것을 통해 우리는 ‘눈매 고흔 백제 미인들’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아우성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지금의 상태가 ‘살뼈도 흘러내려 내를 이루고’, ‘원한을 물레밭을 이’룬 상태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것이며 이러한 ‘상승’은 시에서 초월의 의지와 저항의 의지를 나타낸다. 현실이 온통 껍데기로, 가난으로 뒤덥히여 있을 때 시인이 찾은 극복의 방법은 올라감의 행위 즉 ‘상승’에의 행위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승의 최고점은 바로 하늘이다. 여기서 하늘은 단순한 우주질서뿐 아니라 사람의 근본질서 까지 표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동엽에게 있어 ‘하늘’은 최고선(最高善)이며 그것을 본 경험은 매우 숭고하고 소중하며 비장하기까지 한 것이다.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금강」 중

그러나 이 상승의 최고선인 하늘은 수많은 껍데기로 씌워져 있으며 이를 벗겨내기 위한 시인의 수고는 ‘하늘’을 획득하기 위한 이다. 그러나 신동엽의 하늘을 단순히 하나의 최고선의 지향이 아니라 인간의 저항의 의지, 끊임없는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의 껍데기에 대한 투쟁은 하나의 불순하고 부정적인 세력을 향한 정의로움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이상과 초월의 세계를 행한 저항이기도 하다.

역동적 상상력은 가동성(可動性)을 지닌다. 신동엽 시에 나타난 상승의 수직적 움직임은 하늘과 대지라는 물질을 중심으로 큰 움직임을 만들어내며 이것은 빛나는 눈동자라는 사람의 저항과 의지로 매개되는 것이다.

3.

신동엽은 대지를 인류의 고향이자 귀의처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대지는 생산력과 생명을 충만되어 있는 세계, 무한한 가능성과 포용력이 내재하는 세계로서 인간이 맨발을 딛고 노동하는 삶의 현장이다. 대지는 물과 밀착됨으로서 ‘싹’을 틔워내는 모성의 이미지를 갖는다. 물이란 씨, 모든 씨의 운반자이다. 그리고 대지의 강인함은 물에 의해 부드러운 물, 즉 연성(軟性)의 물질로 전환됨으로써 모성성을 획득하고, 그 속에서 싹을 키워낸다. 대지를 환원하는 세계는 바로 인간의지의 저항성과 관련이 되어있으며 대지를 일구고 가꾸어 그속에 씨앗을 뿌리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이 대지와 노동의 의지가 결합하여 만든 것이 바로 ‘알맹이’의 세계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싱싱한 瞳子를 위하여

-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시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시어들에는 ‘껍데기’, ‘알맹이’, ‘4월’, ‘동학년’, ‘곰나루’, ‘아사달 아사녀’, ‘중립’, ‘흙가슴’, ‘쇠붙이’ 등이 있는데 「껍데기는 가라」는 이러한 시어들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껍데기’와 ‘알맹이’는 단순한 반복적인 공통이지로서 뿐만 아니라 신동엽 시 전반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세계 인식의 표현이다. 즉, ‘쇠붙이’로 상징되는 껍데기 계열과 ‘4월’, ‘동학년’, ‘아사달 아사녀’, ‘중립’, ‘흙가슴’ 등으로 상징되는 알맹이 계열은 여러 작품 속에서 일련의 명백한 대립적 이미지로서 껍데기와 알맹이의 상관관계와 본질로서의 알맹이의 승리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껍데기란 이미지가 단순히 어떤 역사적인 부적정적 상징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껍데기와 알맹이는 사물의 양가성이다. 이 반의어는 서로의 존재 없이는 인식될 수 없다. 알맹이는 이미 그 자체로만은 알맹이가 아니다. 껍데기라는 외피가 있어야만 알맹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껍데기는 알맹이의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저항의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단어이다.

‘알맹이’ 사상의 핵심은 민족이란 테두리 안에 소속되어 있는 개개인의 삶의 모습에서 잘못된 삶의 원인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러므로 ‘알맹이’의 상상력은 곧 역동적 저항의 원동력이 된다. 즉, 이 ‘알맹이’ 사상은 민족적 순수성의 회복과 민족적 동질성의 확인으로 볼 수 있다. 동학과 4․19는 모두 이 모성(母性)으로서의 대지의 의미를 찾고 노동의 땀으로 신성시하려는 궁극 목적으로부터 일어난 일이다. 이는 ‘껍데기’를 부정하고 진정한 ‘알맹이’를 찾는 행위이며 그것을 위한 저항의 힘이다.

‘알맹이’의 이미지는 ‘대지’에 묻힘으로서 ‘씨앗’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씨앗’은 생명의 탄생과 번창함 그리고 다시 밀알로 돌아오는 흐름을 내재하는 매우 역동적이고 가변적인 이미지이다.

도시의 밤은 나리고
벌판과 마을에
피어나는 꽃 봄

1960년대의 의지(意志) 앞에 눈은 나리고
인적(人跡) 없는 토막(土幕)
강이 흐른다.

맨발로 디디고
대지(大地)에 나서라
하품과 질식 탐욕(貪慾)과 횡포

비둘기는 동해(東海) 높이 은가루 흩고
고요한 새벽 구릉(丘陵) 이룬 처녀지(處女地)에
쟁기를 차비하라

문명(文明) 높은 어둠 위에 눈은 나리고
쫓기는 짐승
매어달린 세대

얼음 뚫고 새 흙 깊이 씨 묻어두자
새봄 오면 강산마다 피어날
칠흑 싱싱한 눈동자를 위하여.

-「싱싱한 瞳子를 위하여」

이 시에서 대지와 인간은 ‘칠흑 싱싱한 눈동자’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씨앗이 대지의 생명력에 힘입은 결과이고 그것은 인간이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정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씨앗을 묻는 행위는 대지와 인산을 회복하기 위한 재생과 부활의 원형상징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 시의 ‘밤’과 ‘눈’은 ‘하품과 질식 탐욕으로 가득 찬’ 시대적 암담함의 상징이 되고 그 황폐한 토막 위로 억압과 착취의 역사가 흘러감을 간접적으로 제시해 준다. 그 ‘어둠 위에 눈’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의지는 ‘맨발로 대지를 딛고 나서’는 행위, ‘씨를 묻는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들 행위는 ‘새봄 오면 강산마다 피어날 칠흑 싱싱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눈’과 ‘어둠’ - ‘새 봄’과 ‘꽃 불’ ‘씨앗’의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흙 속 깊이 감추어둔 씨앗의 생명과 칠흑 싱싱한 눈동자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의 만남은 껍데기라는 속성의 다른 물질을 제거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만남의 노력은 씨앗을 일구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저항의 의지와 결부되어 있으며 그 저항은 진정한 대지 속에서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4.

신동엽 시에서 강의 상징성은 대지와 인간의 눈동자와의 끊임없는 역동성의 결합이다. 그래서 신동엽의 시에서 강은 가난하고 헐벗은 우리의 역사이고 필연적인 되돌아옴의 상징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물의 이미지, 그리고 싹을 틔어내는 다산성의 상징인 물은 그 물질적 특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다른 물질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역동성을 창조해낸다. 이 역동서의 대표가 바로 ‘흐르는’ 물이다. ‘흐르는 물’, 즉 일련의 시간성의 상징인 ‘강’을 통해 흐름의 역사적 상상력을 획득한다.

어제
발버둥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금강」 중

시인은 어느 날 금강변에서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흘러가는 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어젠가 또다시 물결 속에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눈동자를 발견하다. 그 빛나는 눈동자는 어제의 역사를 알고 자신의 운명을 안다. 그러므로 ‘강’은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젓가슴의 물결’이기도하고,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가는’ ‘늘메미 같은 아사녀의 봄’이기도 하다.

신동엽은 현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동학’이라는 역사를 차용하고 있다. 그는 ‘금강’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돌아보고 ‘동학’의 온상지를 거기서 발견한다. 이 혁명은 생활의 시대를 침범하는 무리에 대한 눈물겨운 저항이었고 ‘금강’은 그 혁명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그래서 ‘금강’은 하나의 시간적 흐름을 상징한다.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건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을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 「금강」중

신동엽은 1960년 하늘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과거를 차용한다. 시인은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보여지던 ‘영원의 하늘’을 본다. 그리고 시인은 그 하늘에 1919년 의 경험에서도 그리고 동학이 일어난 해인 1894년 당시에서도 하늘을 만나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은 ‘하늘’이라는 지향 아래에서 서로 하나로 일치되고 있는 것이다. 즉, 시인의 역사적인 상상력은 현재에서 1894년까지의 시간을 하나로 인식하게 한다. 이것은 「금강」의 본 이야기 중에서의 과거와 현재의 계속되는 교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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