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한명석
  • 조회 수 2378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9월 25일 21시 22분 등록

표정훈, 탐서주의자의 책, 마음산책

@ 지은이-표정훈

-초등학교 2학년 때 계몽사에서 펴낸 <컬러학습대백과>를 친구 집에서 보는 순간 반해, 부모님께 무던히도 조른 끝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하다. ‘아홉 살 인생’ 최고의 날.

-중학 1학년 때 신기철, 신용철 편찬 <새 우리말 큰사전>을 탐독하다. 어떤 단어의 뜻풀이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를 찾아보고, 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로 옮겨가는 파도타기를 즐기다.

-대학교 졸업 무렵, 잡지사에 취직해 있던 어느 후배의 원고 청탁으로 플라톤에 관해 짧은 글을 쓰고 난생 처음 원고료를 받다.

-고대 중국의 전략가 吳起의 삶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 문을 두드렸으나, 퇴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엉성하다는 생각이 들어 원고지 1,000매 넘는 분량을 쓰레기통에 버리다.

-서양 철학자의 삶과 생각을 가상 전기 형식으로 쓴 원고를 가지고 두 번 째 출판사 방문, 역시 뼈아픈 지적을 받고 후퇴. 그 원고는 남아 있다.

-이번에는 번역, 두 번 째 접촉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음.

-이후 우연한 기회에 모 신문에 짧은 칼럼을 연재하게 되면서 전방위 매문가의 길로 들어서다. 글을 제조해서 납기일에 납품하고 돈을 받는 일종의 글 제조업자가 되다. 편집자의 기획의도와 독자의 필요에 부응한다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이 글 제조업자의 윤리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후 출판평론가, 도서평론가, 출판칼럼니스트, 번역가, 저술가, 작가 등 때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직함을 사용하다가, 지금은 번역. 저술가 하나로 통폐합 하는 중.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매문가賣文家’로 규정한다.

-저서로 <나의 천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이 있고,
번역서로 <고대 문명의 환경사>,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등 10여 권이 있다.



@ 책을 읽고 난 후

최근에 신문에서 출판칼럼니스트라는 꼬리표를 단 표정훈, 한미화를 볼 수 있었다. 본격적인 출판평론가로 한기호가 있기는 하지만, 내 머리로는 그런 직함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거 참, 완전 독점이구만.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얼마나 더 있겠어, 한 분야를 불과 몇 명이 독식하고 있다니,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 22-24일, 홍대 앞 거리에서 열린 ‘와우 북 페스티벌’에 국내의 기라성같은 출판사가 총 결집해서 도서의 난전을 펴놓았다. 나는 그 곳에서 딱 한 권의 책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바로 표정훈의 ‘탐서주의자의 책’이었다. 개별출판사의 천막마다 쌓인 책의 거리를 지나다 보니, 우리나라의 지적 수준을 한 눈에 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막상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집어드는 순간 손끝으로 땡겨오는 어떤 기운이 있었다. 기꺼이 책값을 지불하고 읽어보고, 내 책을 만들리라는 예감... 그것을 표정훈은 “어떤 책 한 권과 처음 만나는 육감의 순간”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158쪽


이 책은 저자 표정훈의 책에 대한 잡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에 대한 자신의 이력,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회, 책이 있는 영화, 책에 관한 유명 에피소드... 등을 썼는데, 단편적인 잡문이라도 한 권을 읽고 나니, 표정훈이라고 하는 개인의 모습이 진솔하게 드러난다.


이미 중1 때, 큰사전의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즐길 정도로 우리 말에 푹 빠져있던 그, 청소년기에는 야구장이나 동시상영관에 갈 때조차 책을 들고 가 읽을 정도로, 책과 하나였던 그, “해도나 나침반 없이 그저 부지런히 노를 젓다가 우연히 닿은 항구에서 열심히 품을 팔고 식량과 식수를 비축한 뒤 다시 항해하는 삶, 다만 돈과 시간과 열의와 능력이 닿는다면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사는 것을 꿈꾸어왔던 그”는 얼추 그의 꿈을 이룬 것같다. 98쪽


그가 진정 즐기는 것은 이것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빠져들 수 있는 세계, 나도 없고 책도 없고, 다만 한 줄 한 줄마다 나와 책 사이에 이루어지는 어떤 내밀한 묘합妙合의 순간만이 어어지는 충일한 시간.


그렇게 만나는 책들은 때로 푼크툼punctum으로 때로 스투디움studium으로 다가온다. 이 용어는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용한 것인데, 푼크툼은 점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발생한 부상, 상처, 작은 반점 등을 뜻한다. 바르트는 하나의 사진에서 화살처럼 나에게 꽂혀오는 강렬함, 우연성에 바탕을 둔 사진 자체의 이미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 사진 한 장이 화살이 되어 나를 찌르고 상흔을 남기는 것이다. 다분히 축적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스투디움에 비해, 푼크툼은 좀처럼 분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개념화하거나 명확하게 기술하거나 하는 것이 힘들다.


책을 통해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푼크툼으로 다가오는 책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투디움만 되어도 소중한 만남이다. 그러나 이도저도 못되는 책들이 태반인 베스트셀러 목록 앞에서는 어리둥절하다. 누구 말마따나 베스트셀러는, 평소에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까지 집어들게 만드는 책이라서 그런가?


운명의 책 한 권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연적 계기의 연속이 필연의 느낌으로까지 다가온다고 했다. 오늘 내가 이 책 한 권과 만나기 위해 빅뱅 이후 억겁의 세월에 걸쳐 우주가 쉼없이 운행되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우주적 착각.


책과 마주치는 기쁨은 사람과 마주칠 때의 기쁨과 똑같다. 독서의 기쁨은 해후의 기쁨이다. 그것은 단순한 외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필연성이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해후했고, 괴테와 실러도 해후했다. 일생 이런 해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국 아무것도 안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그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스스로 구해야 한다. 구하는 것이 없는 자는 마주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령 마주친다 해도 그것임을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미키 기요시 ‘독서론’- 표정훈 책 122쪽


나는 솔직하고 수선스럽지 않은 표정훈의 문체와 관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기질과 강점대로 밀고 나가되 결국 자기 분야에서 자리를 굳힌 그의 라이프스타일도 부러웠다. 모든 ‘앞서 걸어간 자’들이 얘기하듯 표정훈역시, “쓰는 놈한테는 못 당한다.”고 하는 원칙을 상기시켜 주었다.


“뮤즈를 기다리지 말라.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날마다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또는 일곱 시부터 세 시까지 반드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뮤즈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뮤즈는 조만간 우리 앞에 나타나 시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마술을 펼치기 시작할 것이다.”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표정훈 책 236쪽


글이나 책에 대해 엄숙주의가 아닌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나는 지금 매문을 하고 있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어 역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결과를 돈을 주고 구입하여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에 매문을 한다는 건, 부끄러울 것도 없으며 그렇다고 자랑할 것도 없는 노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글 시장에서 팔릴 만한 상품을 내놓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내맡기는 일은 신성할 것까지야 없지만 천하지도 않다. 글 시장에서도 ‘파느냐 굶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39쪽


이 부분에서는 김 훈을 떠올리게 한다. 김 훈의 산문집을 다시 훑어보면, 한 꼭지 쓸만한 재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같은 예감이 든다. 또한 이 책에 인용된 부분 중에 모네의 <수련>을 주제로 하는 바슐라르의 미술론이 너무 아름다워서 모네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이처럼 내게 좋은 책이란, 내 상상력과 탐구심을 촉발시켜주는 책이다. 그래서 표정훈의 이 책은 내게 좋은 책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 중에 모네에 관한 글로 마무리하자.


“수련은 여름꽃이다. 그것은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이 깊은 정원사는 그 꽃이 연못에 피는 것을 보고서 오렌지나무를 온실에서 내놓는다. 그리고 9월이 되어 수련이 지면, 그것은 춥고 긴 겨울을 알리는 전조가 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IP *.81.24.5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432 성공으로 가는 의식ritual [1] 한명석 2006.09.11 2115
4431 '아내가 결혼했다' - 축구 vs 중혼 file [3] 원아이드잭 2006.09.11 2891
4430 나는 이론에서 배우지 못한다 [5] 한명석 2006.09.12 2358
4429 삶에 지친 그대에게 [3] 한명석 2006.09.12 3015
4428 걷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3] 김귀자 2006.09.15 5050
4427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1] 한명석 2006.09.16 2641
4426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7] 박소정 2006.09.18 2619
4425 목민심서 [1] 정경빈 2006.09.19 3624
4424 두 글자의 철학-나의 글자여행2 [2] 도명수 2006.09.19 3411
4423 대지, 빛, 강 그리고 껍데기 - 신동엽의 시선집 정재엽 2006.09.20 2810
4422 Leader 는 Reader이다.-워렌 베니스 [1] 도명수 2006.09.20 2753
» 그 책과 처음 만나는 肉感의 순간 한명석 2006.09.25 2378
4420 시집 2권 -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1] 경빈 2006.09.29 2564
4419 미래를 읽는 힘-메가트렌드2010 도명수 2006.09.29 2644
4418 톰피터스의 -디자인 에센셜 [1] [2] 꿈꾸는간디 2006.09.29 3060
4417 눈물나게 좋은 책 [4] 한명석 2006.10.01 3964
4416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VINCENT VAN GOGH 지음, 신성림 옮김 [2] 다뎀뵤 2006.10.03 3047
4415 산 자와 죽은 자들 가리지 않고 [1] 한명석 2006.10.04 2213
4414 부동산투자는 과학이다-24 [2] 도명수 2006.10.05 3013
4413 B급 좌파 [1] 한명석 2006.10.07 2286